1. 영화 '곡성'과 '유전'의 한 장면
인간의 행동은 다 이유가 있으며 대단히 복잡하고, 선과 악의 어느 한 편에 머물러 있지 않다. 선한 행동이 악으로부터 무언가를 보상받기 위함일 수도 있고, 때론 악한 행동이 트라우마나 자신의 나약함에 대한 방어일 수도 있다. 그래서 인간이 무력하게 악령의 힘에 사로잡히는 클래식한 플롯을 가진 스토리가 어떻게 대중들에게 공감을 사고, 오컬트(occult)[1] 무비가 마니아들 사이에서 인기를 끌고 있는 이유에 대해 궁금해한 적이 있다. 개인적으로는 지나치게 기계화되어가는 환경과 경제적 격차가 두드러지는 현대 사회에서 그 원인을 살펴볼 수 있었다. 도저히 개인의 힘으로는 바뀔 수 없다는 학습된 무력감에 기인하여, 초자연적인 파워를 기대하는 심리로 이어진 것은 아닐까 추측해 본다.

2. 영화 '비틀쥬스'의 한 장면
필자에게 처음 오컬트에 관심을 가지게 해준 작품은 학생 시절에 본 팀 버튼의 초기작 「비틀쥬스(BeetleJuice, 1988)」다. MZ 세대들이 아날로그LP에 빠지는 청개구리 심보랄까… 필자도 「트랜스포머(Transformers, 2007)」, 「아이언맨(Iron Man, 2008)」, 「아바타(Avatar, 2009)」 등 CG가 발달한 영화가 개봉할수록 한참 뒤에 보곤 했다. (사실 세 영화 다 안 봤다^^) 오히려 수작업으로 가공된 독특한 특수효과들이 등장하는 영화의 시각적 각인에 흥미를 느꼈다. 일명 ‘수제 미장센’ 영화들 중 필자에게는 오컬트 장르가 눈에 띄었다. 잔혹한 동화적 미술로 이뤄진 컬트 영화(cult film)들은 아직 철들지 못한 어른들의 죄책감을 씻길 카타르시스를 위해 존재한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특히 장재현의 「검은 사제들(The Priests, 2015)」, 나홍진의 「곡성(The Wailing, 2016)」이나 Ari Aster의 「유전(Hereditary, 2017)」, 「미드소마(Midsommar, 2019)」의 등장은 잠시 잊고있던 오컬트를 심도 있게 연구하고 싶다는 생각하게 만들었다.
3. CAHIERS DU CINEMA
자, 이제는 당신에게 특별한 기억을 선사했던 어떤 영화를 떠올려 보라. 대사를 읊는 목소리나 스토리가 번뜩 떠올랐는가? 아마도 무의식적으로 스틸(movie stills)을 연상했을 것이다. 영화의 미장셴이 곧 연출과도 직결된다는 의미다. 어찌보면 당연한 이야기 같겠지만, 지금의 영화미술이 영화 연출의 중요한 요소로 구축되기까지는 많은 시간이 걸렸고, 결정적인 서막은 Cahiers Du Cinéma[2]가 열었다.
1950년대 후반 당시 문학작품을 영화화하는 과정에서 한때 영화감독이라는 직업이 창조자, 예술가가 아닌 단순 하청업자 취급을 받을 때가 있었다. 단순히 '서사, 이야기'를 강조하는 풍토에 반발하여 결성된 Cahiers Du Cinéma는 문학과 영화의 차이점을 두기 위하여 미장센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미장센(mise-en-scéne) 개념의 존재론적 특징은 그때부터 "영화를 책임지는 예술가"로 구현되기 시작했다. 1952년 프랑수와 트뤼포는 프랑스 영화의 어떤 경향(’(Une certaine tendance du cinéma français) 이라는 논문을 통해 시나리오에 의해 잘 만들어진 영화는 영화제에 상 받기 위한 것일 뿐이며, 이를 대신해 감독의 창조적 개성을 반영한 영화를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과정에서 미장센은 영화를 단순한 문학이 아닌 감각적 경험을 체험함으로써 영화 자체를 매체로 다루며 의미의 스타일을 고려하도록 이끌게 된 것이다.

4. 영화 '곡성'과 '유전' 포스터
곡성 哭聲 메인 예고편 : https://youtu.be/Ej25zrnaTXk
유전 HEREDITARY 메인 예고편 : https://youtu.be/_tEBdR9CCGE
<곡성>은 나홍진의 동양적 샤머니즘 오컬트 영화고, <유전>은 Ari Aster 의 솔로몬의 72 [3]악마 중 파이몬을 다룬 오컬트 영화다. 이 두 작품은 끊임없는 호기심을 자아내며, 해석하는 재미와 감질나는 비평의 맛이 난다. 아주 오래전부터 지금까지 내려오는 샤머니즘, 악마의 주술적인 부분을 현대식으로 해석하며 새로운 공포를 탄생시켰다. 말로 설명할 수 없는 현상 앞에 놓인 인간들을 억압하는 한계가 주는 무력함, 슬픔을 보여준다. ‘인간 존재의 나약함’을 확인하는 순간, 살기 위해 작동되는 근원적인 공포가 다가오는 것이다. 필름메이커이자 아트디렉터로 활동중인 필자에게 앞으로도 영향을 끼칠 가능성이 다분한 영화 <곡성>과 영화 <유전>의 미술감독(프로덕션 디자이너)[4]들의 인터뷰 중 흥미로웠던 부분들을 옮겨볼 것이다.
#1. 집으로 시작해 집에서 끝맺는 사건

5. 영화 '곡성'과 '유전'의 스틸
두 작품에서 집은 영화의 핵심 공간이다. 영화미술의 대가구 즉, 대형 오브제로서 존재한다. <곡성>에서 등장하는 종구 집은 폐가의 반을 내버려 두고 그 절반을 새로 지은 세트장이다. 씨네21 인터뷰에서 남긴 이후경 미술감독의 말을 빌리면, 집의 원형 자체는 가장 흡족한 로케이션은 아니었지만 대문과 집까지의 거리감까지 고려해 최대한 원하는 모양에 흡사한 곳을 섭외했다고 한다. 그가 종구 집에서 가장 마음에 드는 건 대문이었는데, 전통 가옥처럼 보이면서도 구조가 특이해서 관문을 통과하는, 어떤 경계를 넘어가는 느낌이 들었다고 한다.
Grace Yun(윤경진) 프로덕션 디자이너는 집을 아주 불길한 것으로 만드는 것을 돕는 임무를 맡았다. <유전>의 디오라마 아티스트인 애니가 작업하고 있는 바로 그 메타 미니어처들을 만드는 것이다. Grace Yun 은 처음 시나리오를 읽어봤을 때, 시나리오에 필수적인 미술적 요소가 명료히 언급된 점이 매력으로 다가왔다고 한다. CINE21 인터뷰에서 그녀는 호러 영화는 처음 디자인해 보는 시도였지만, '유전'을 아주 진지한 드라마라는 생각으로 접근했다고 한다. Grace Yun 가 생각하는 호러영화다운 사건들이란 인물들이 겪는 깊은 슬픔과 원치 않는 운명에 시달리는 과정이 어떤 것인지를 보여주는 일종의 징후로 다가왔기 때문이다. The CREDITS의 인터뷰에서도 감독과 미팅할 때 자신이 공포 장르에 조예가 깊지 않다는 것을 솔직하게 인정했다고 밝혔다. Ari Aster 감독은 오히려 무지함에서 시작될 측면을 활용하기를 원했다고 한다. 애니의 집과 트리하우스 등의 평면도를 구상하는 프리 프로덕션의 초반에 그녀는 Ari Aster 감독, 그리고 Pawel Pogorzelski 촬영감독과 매일 만나 장면 회의를 했는데, 카메라 움직임과 셋업을 매우 자세하게 설명해준 덕분에 이후에 공간의 면적과 방의 배치도를 결정할 때 큰 도움이 되었다고 밝혔다. 집 자체가 가족들의 어떤 심리적, 감정적 상태와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지, 그리고 그 집이 애니의 작품 미니어처들과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지를 논의했다고 한다.
#2. 저주와 주술

주술이란 초자연적인 존재나 신비로운 힘을 빌려 여러 가지 현상을 일으키어 인간의 길흉화복을 해결하려고 하는 기술을 말한다. 온갖 요소와 상징성으로 가득한 오컬트 영화 속에서는 특히 악마의 상징성을 드러낼 때 불을 통해서 존재감을 드러내는 경우가 있다. 루시퍼의 상징도 태양, 불이다. 기독교에서 사탄에게 자주 부여하는 이름인 루시퍼는 빛을 가져오는 자, 빛의 전달자라는 뜻을 가진다. <곡성>과 <유전>의 컴컴습습한 환경 속에 휘날리는 크고 작은 불의 화력은 특유의 분위기를 자아낸다. 오컬트적 불티들이 모여 저주와 주술을 품는 법이다. 프로덕션 디자이너는 이런 초자연적인 주술행위를 어떻게 표현하고자 했을까?
이후경 미술감독은 여러 나라의 굿 형태를 참고해 ‘일광’의 굿을 창조했다. 살을 날리는 굿은 실제로 존재한다고는 하지만, 무속인 중에서도 할 수 있는 사람이 거의 없어 창작한 부분이 많다고 말했다. 기본적으론 민속 신앙을 따르지만, 타살을 상징적으로 드러내도록 죽은 동물의 사체, 고깃덩이들, 말뚝을 박는 행위 등을 넣어 주변에 채웠고, 이것저것 뒤섞인 미장센을 구축했다. 필자는 개인적으로 미술감독이 일광의 이면적인 모습을 암시하기 위해 얼핏 마을 입구를 수호하는 장승을 연상시키기도 하는 말뚝을 굿 행위로 넣었다는 언급이 흥미로웠다. 외지인의 굿 중 방 안에 불을 피우는 것은 일본 불교 의식에서 따왔는데, 이것은 액이 될 만한 걸 하나씩 태우는 모양새라고 한다.
<유전>에서 다룬 파이몬[5]은 한국 관객에게 생소할 수 있는 오컬스적 요소였는데, Grace Yun 프로덕션 디자이너는 초자연적 현상의 이론과 실제를 담은 책들을 탐독하고, 특히 파이몬 왕에 관해 자세히 알기 위해서 악마학 서적과 이교도 의식들, 신성 기하학, 약초학, 고대 문자들과 온갖 종교 상징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저술들과 이미지들을 연구했다. 최대한 원재료들을 모은 뒤, 집의 세부 디자인과 사소한 소품에도 파이몬 왕의 상징을 깃들게 하기 위해 가공 과정을 거쳤다고 한다. 그녀가 구축해 나가는 작업에 관심이 있다면 홈페이지를 방문해보는 것도 좋겠다. ▶ http://www.graceyun.com/ [6]
7. '곡성' 이후경 미술감독과 '유전' Grace Yun(윤경진) 프로덕션 디자이너_출처 씨네21
프로덕션 디자이너들은 최대한 자연스러운 미장센과 메타포[7]를 구축하기 위해 많은 관찰력이 필요하다. 심도 높은 영화 일수록 단순히 공간을 채우고 그림을 만들기 위한 세팅보다는 개연성을 많이 고려한 레이어가 요구되는 것이다.
필자는 문득 대중들과 소통하는 영화와 현대미술 비평이 존재하듯, 영화미술만을 전문적으로 다루는 비평가는 찾아보기 어려운 것에 대해 의문이 들었다. 미장센(mise-en-scène)의 개념과 깊이 연결된 Cahiers Du Cinéma의 작가주의[8] 정책이 영화와 비평의 상호발전을 불러일으키는 역할을 한 것처럼, 영화의 서사나 스토리만큼 미장센의 시각적·감각적 경험을 즐기기 위한 통로로 영화미술을 평론하는 환경이 생기면 어떨까? 그런 자리가 마련된다면 새로운 차원의 담론이 나올 수도 있지 않을까? 필자는 이제 글을 마무리하면서 이 새로운 망상의 유령들이 넘실거리도록 내버려 두려 한다.
[1] 오컬트의 원뜻은 '덮어 감추다.'로 오컬티즘은 '감추어진 것', '비밀' 등을 뜻하는 라틴어 'occultus'에서 유래한 말이다. 이는 보통의 경험이나 사고로는 파악할 수 없는 신비적ㆍ초자연적 현상을 믿고 존중하는 것을 말한다. 마술과 마법, 연금술, 점성학 등의 분야를 포괄하는 것으로 초자연적이고 신비스러운 현상을 탐구한다. 이러한 오컬트적 요소를 영화에 대입한 장르를 오컬트무비(occult movie)라고 하는데, 이는 실제로 일어났던 초자연적인 사건이나 악령, 악마를 소재로 다루는 영화다.
[2] 1951년 앙드레 바쟁(André Bazin), 자크 도니올 발크로즈(Jacques Doniol-Valcroze), 로 뒤카(Lo Duca) 등이 창간한 프랑스 영화 비평지. 프랑스의 가장 중요한 영화 저널로 나중에 영화감독이 된 프랑수아 트뤼포(François Truffaut), 장 뤽 고다르(Jean-Luc Godard), 에릭 로메르(Eric Rohmer), 클로드 샤브롤(Claude Chabrol), 자크 리베트(Jacques Rivette) 같은 젊은 비평가들의 비평 작업을 통해 1950년대 중반 작가주의 비평을 발전시켰으며 세르주 다네(Serge Daney), 파스칼 보니체(Pascal Bonitzer) 등의 평론가를 배출하면서 당대 영화의 경향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3] 성서에 등장하는 솔로몬 왕이 썼다고 알려진 마법서 『레메게톤』에 나오는 72명의 악마들. 솔로몬 왕에게는, 신에게 대항한 72명의 악마를 놋쇠 항아리에 가둬서 호수에 가라앉혔다는 전설이 있다. 그러나 이 악마들은 후에 보물을 찾고 있던 자의 손에 발견되어 풀려나고 말았다. 악마들은 모두 보통 지옥에 살고 있으며 각자에게는 이름과 징표가 있는데 이를 알고 있는 마술사는 악마를 불러내서 일을 시킬 수 있었다고 한다.
[4] 한국에선 미술감독이라는 호칭이 더 익숙하지만, 미국에서 프로덕션 디자이너는 그보다 넓은 범주에서 세트, 소품, 분장, 조명에 이르기까지 영화의 시각 요소를 예술성에 맞게 감독하는 직책을 의미한다. (씨네21, Grace Yun 인터뷰에서 발췌)
[5] 솔로몬의 72 악마 중 하나로서, 중세 악마학에서 거론되는 악마 중 하나. 표기는 Paimon 또는 Paymon. 솔로몬의 72 악마 중 9위로, 계급은 왕(king)이다. 루시퍼의 충실한 부하이며, 관장 영역은 분쇄, 폭주, 파멸.
2018년 개봉 영화 유전에서 주된 소재로 등장한다. 단, 등장인물이라기보다는 어떤 초자연적 '현상'에 가까운 존재로 묘사되어, 하얀 빛이 떠다니는 모습으로만 나오고 본래 모습은 나오지 않으며, 감정 표현이나 대사도 없다. 영화 자체도 악마와 대면하여 퇴마하는 구도가 아니라 악마를 숭배하는 사람들의 계획과 그 계획에서 벗어나려는 사람들이 대립하는 구도이다. 불을 주관한다는 설대로 등장인물로 하여금 몸에 불이 붙는 환영을 보게 하기도 하고, 잘 알려진 파이몬의 문장과 외형 그림 역시 그대로 나온다.
[6] 아쉽게도 이후경 미술감독님의 홈페이지는 찾지 못했다.
[7] 행동, 개념, 물체 등이 지닌 특성을 그것과는 다르거나 상관없는 말로 대체하여, 간접적이며 암시적으로 나타내는 일. (metapho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