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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릿 카라한(Ferit Karahan), <보호자>(Brother's Keeper) | ARTLECTURE

페릿 카라한(Ferit Karahan), <보호자>(Brother's Keeper)

-결속과 책임의 회복 [전주영화제 특집 (7)]-

/Art & Preview/
by 박정수

페릿 카라한(Ferit Karahan), <보호자>(Brother's Keeper)
-결속과 책임의 회복 [전주영화제 특집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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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IGHLIGHT


현재 터키 내 쿠르드족들이 쿠르디스탄으로 독립하고자 하는 열망은 이전처럼 모두가 똘똘 뭉쳐 바라진 않는다. 이에 쿠르드족으로서 민족적, 문화적 정체성은 비교적 단일한 편이지만, 정치적 스탠스는 4국에 흩어져있는 모두가 제각각으로, 결속력이 느슨해져 가고 있다. 어쩌면 그 결과물은 정치적 결속을 막으려는, 쿠르드를 지배하는 국가들의 정책적 결과물일 수 있다. 그리고 터키도 표면적으로는 쿠르드와 화합 노선을 걷는듯해도, 물밑에선 여전히 쿠르드 와해 작업을 펼치고 있는지 모른다. 1983년 터키 내 쿠르두족이 거주하는 무슈 태생의 페릿 카라한 감독은 교육 현장에서 일어나는 쿠르드 차별과 혐오를 담아낸다.

우리에게 권리라는 개념은 난민, 나라 없는 민족, 여러 타국의 시민 등으로 흩어진 집단으로서가 아니라 우리 공동체 모두가 한 민족으로 존재할 권리를 의미합니다.” -에드워드 사이드-

 

 

*쿠르드

국가를 이루지 못한 민족은 아무리 그 규모가 크다 할지라도, 그 민족성을 통일된 형태로 유지하기 어렵다. 쿠르디스탄을 바라지만, 그 지역이 이란, 터키, 시리아, 이라크로 나뉘어 각 지역에 거쳐서 사는 쿠르드족의 현실이 그렇다. 4천 년 이상의 역사를 지닌 것으로 알려진 쿠르드족은 기나긴 역사 속에서 다른 중동계 민족들과 차별화되는 문화적 색채를 구축하였고, 인구도 3천만~45백만 가량으로 추산되는 큰 규모를 지닌 민족이다. 이렇게 적지 않은 규모를 가진 민족임에도 그들은 자신들이 중심이 되는 국가를 건립하지 못했다. 이윽고 20세기, 1차 대전 당시 승전국에 협력했던 그들은 쿠르디스탄 건립 협약을 받아냈지만, 열강들은 계약을 수정하여 이를 이행하지 않았다. 그들이 쿠르디스탄을 바랐던 지역들이 현재에는 터키, 이란, 이라크, 시리아에 거쳐 있기에 그들과 공존하고 살아가며, 특히 터키와 이란, 이라크에 쿠르드 인구 대다수가 거주한다. 결코 적지 않은 규모의 민족이기에 터키나 이란 내에서도 그들은 10% 이상의 인구 비율을 차지하고 있는데, 그렇기에 각국은 쿠르드를 더욱 거세게 탄압하였다. 특히 가장 큰 규모의 쿠르드족이 거주하는 터키의 경우 20세기 초에는 쿠르드 문화를 전면 금지하는 정책을 실시했고, 쿠르드족들을 집단 이주하여 그들의 결속을 약화하고자 했다. 1980년대에는 갈등이 극에 달해 쿠르드 독립주의자들을 대대적으로 소탕하겠다며 잔혹한 민간인 학살, 고문, 성범죄 등을 저질렀다. 작금에는 그나마 교착 상태에 놓여있고, 큰 대립은 이전에 비해선 잦아들었다. 더는 터키 당국이 쿠르드 혐오를 정책으로 내세우진 않는다. 하지만 그런데도 양자 사이의 앙금은 남아있으며, 반군에 의한 작은 규모의 충돌은 여전히 발생한다.




 

*리얼리즘 연출

현재 터키 내 쿠르드족들이 쿠르디스탄으로 독립하고자 하는 열망은 이전처럼 모두가 똘똘 뭉쳐 바라진 않는다. 이에 쿠르드족으로서 민족적, 문화적 정체성은 비교적 단일한 편이지만, 정치적 스탠스는 4국에 흩어져있는 모두가 제각각으로, 결속력이 느슨해져 가고 있다. 어쩌면 그 결과물은 정치적 결속을 막으려는, 쿠르드를 지배하는 국가들의 정책적 결과물일 수 있다. 그리고 터키도 표면적으로는 쿠르드와 화합 노선을 걷는듯해도, 물밑에선 여전히 쿠르드 와해 작업을 펼치고 있는지 모른다. 1983년 터키 내 쿠르두족이 거주하는 무슈 태생의 페릿 카라한 감독은 교육 현장에서 일어나는 쿠르드 차별과 혐오를 담아낸다. 터키 교사의 부조리함과 이에 대해 쿠르드 학생들이 갖는 불만, 긴장감을 신작 <보호자>에서 포착한다. 페릿 카라한은 본 <보호자>를 차갑고도 건조한 리얼리즘 양식으로 담아낸다. 일단 영화는 핸드헬드로 포착되어, 쿠르드의 어느 고립된 산골 마을에 위치한 기숙학교의 풍랑을 효과적으로 담아낸다. 그것은 천진한 아이들이 뛰어놀며 흔들리는 시선일 수도 있고, 또 메모가 아파서 급박해지는 상황에 상응하는 것일 수 있다. 더욱이 추위만으로도 충분히 가혹한데, 여기에 터키 교사의 부조리한 교육에 의해 불안정하고 위태로운 생활을 지속해야 하는 쿠르드 학생들의 삶에도 상응할 지다. 하지만 극의 전개에 따라서 핸드헬드는 초반에 비한다면 덜 흔들리기 시작한다. 아픈 아이를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를 몰라 전전긍긍하는 관료들에 의해 저물어가는 생명, 또 권위적인 교사들에 의해 아이들의 명랑함은 서서히 멈춰가는 것인지 모른다. 이러한 핸드헬드와 롱테이크를 결합해, 감독은 약 반나절 가량의 시간을 여실히 녹여낸다. 그리고 이러한 연출을 바탕으로 주인공 유수프의 뒷모습을 따라가고, 그의 시점 숏을 구성하며 흡사 <사울의 아들>처럼 체험의 효과를 불러온다. 이러한 영화는 전체적인 색조가 차갑고 어두우며 딱딱하다. 이에 집에 가고 싶다는 아이들이 발생할 정도로 본 공간이 주는 삭막함, 위압감, 우울감을 이미지 자체로 보여준다.

 

*영화의 도입부: 목욕 시퀀스

그리고 아이들이 맞닥뜨리는 본 공간의 위압감을 거대한 풍경이 담기는 롱숏으로 포착하기도 한다. 이에 돌풍이 휘몰아치고 함박눈이 쏟아지며, 알 수 없는 것이 다가오는 듯한 무서운 밤의 풍경, 그리고 3월 개봉한 <아이카>를 연상케 하는 무겁게 내려앉은 눈 더미가 더욱더 매섭고 차갑게 다가온다. 이러한 연출로 이뤄진 본 작품의 시작은 아이들의 목욕 장면을 포착하면서 이뤄진다. 기숙학교에서 아이들은 일주일에 단 한 번 목욕할 수 있다고 극의 중반에 언급된다. 그리고 아이들은 자유로이 시간을 선택하여 목욕하는 것이 아니라, 전 학생이 동일한 시간에 전부 샤워실에 들어가 목욕을 해야 한다. 이에 모든 학생이 샤워실을 향해 일렬로 서있는 장면이 도입부에 펼쳐지며, 촉박한 시간 내에 재빠르게 씻고 나와야 한다. 그리고 교사에 의해 강압적으로 모두가 들어가서 신속하게 씻는 만큼, 아이들끼리 적게 주어진 것을 놓고 다툼이 발생한다. 그리고 교사는 이를 책임감 있게 교화하거나, 환경을 개선하는 방안 대신, 영하 35도의 날씨에 온수를 금지한다. 그리고 서로에게 냉수를 부어주게 하며, 또한 같은 학생인 쿠르드계 감독생이 이를 감시하게 만든다. 처음에는 온수를 끊어버린 교사에 대한 증오가, 이윽고 냉수를 부어주는 각자에게, 이를 감시하는 같은 민족의 시선에 향한다. 영화는 본 목욕 장면을 통해 쿠르드를 향한 터키 당국의 공포정치, 서로를 증오하게 만들어 분열시키는 전략을 고발한다. 터키 당국은 쿠르드족 서로에게 폭력을 사용하게 만들어 책임소재에서 벗어남과 더불어, 개입할 명분을 모색하며, 또한 인프라를 열악하게 제공하여 적은 것을 두고 서로가 분열하고 경쟁하게 만든다. 이에 민족성은 저물어간다. 그리고 샤워실의 삭막하고 갑갑한 풍경, 복도에 일렬로 서서 목욕하러 가는 아이들의 풍경은 흡사 홀로코스트 영화들을 연상케 한다. 카라한의 시선에서 터키 교사들의 강압적 체벌과 교육이 일어나는 기숙학교는 하나의 수용소이며, 존더코만도에 다름 아닌 감독생을 세워 서로를 감시하고 분열하게 만드는 전략도 나치의 유대인 말살정책과 닮아있다.

 

*학교에서 진행되는 민족말살정책

터키와 쿠르드의 개선된 관계는 하나의 허상이자 터키의 선전일지 모른다. 이후에도 영화는 기숙학교라는 작게 축소된 쿠르드의 소우주를 통해 터키와의 관계와 쿠르드인의 실정을 담아낸다. 극의 주인공 유수프와 아픈 아이 메모는 같은 방을 사용하며 우정이 깊은 친구 사이다. 그리고 메모는 강압적인 선생에 의해 냉수로 샤워하여 심리적으로 불안정 한 듯, 특히 거센 바람이 불고 눈이 몰아닥쳐 괴괴한 밤의 풍경이 두려운 듯 유수프에게 같이 자자고 한다. 하지만 유수프는 이를 거절한다. 둘은 친해서 충분히 같이 잘 수 있지만 소문이, 남의 시선이 두렵다. 특히나 기숙학교는 터키 교사에 의해 좁다랗게 형성된, 사생활이 보장되지 않고 줄곧 침범당하는 소우주이기에 시선을 의식하느라 자유는 불발된다. 이렇게 쿠르드에게 허용되는 세계를 좁게 형성하여 그들의 자유 범위를 축소한다. 이후 밤이 지나고 아침이 밝아온다. 교사에 의해 곧 수업이 시작되니, 이를 준비하고자 아이들은 번잡하게 뛰어다닌다. 시간은 촉박하다. 수업이 시작되기 이전 핸드헬드는 극의 전체 중 가장 격렬하지만, 이내 곧 수그러든다. 아이들은 터키인이 만들어낸 규율인 종소리에 순응하기 때문이다. 이는 비단 가장 기본적인, 마땅히 지켜야 할 학교생활만 해당하지 않는다. 터키는 대외적으로는 쿠르드족 차별 정책을 철회했지만, 카라한은 교육 현장에서는 교칙이라는 미명 하에, 그리고 스스로 말하기 어려운 아이들을 대상으로 쿠르드족 문화 말살 정책이 이어지고 있음을 고발한다. 아침 조례 시간에 교사는 머리가 긴 한 학생을 단상에 불러, 강압적으로 머리의 일부를 밀어버리고 우스꽝스럽게 만든다. 쿠르드족의 전통적 복식 중 하나는 남성이 머리를 길러 땋는 전통이 있다. 현재는 본 헤어스타일은 유행하지 않지만, 이 같은 남성들이 머리를 기르는 쿠르드의 풍습을 막고자 하는 것인지, 머리를 짧게 자르라며 한 아이를 희생양으로 세운다. 그리고 이렇게 쿠르드임을 추구하면 낙인이 찍히게 된다. 그것은 자유로움에 대한 징벌이다.




 

*세뇌되는 쿠르드의 행동양식

아이들은 학교에서 쿠르드임을 포기하고 터키인임일 것을 강요받는 교육을 거친다. 쿠르드답고 서로의 우애를 보이면 처벌의 대상이 되며, 이렇게 터키는 유년 시절부터 쿠르드의 자유를 박탈하고 문화를 거세한다. 자유가 없는 학생들은 급식조차도 다 같이 동일한 시간에 획일화된 형태로 먹어야 한다. 이렇게 교사들은 아이들을 이끄는 선생이기보다는, 쿠르드를 감시하고 분열하러 온 터키의 협잡꾼이라는 인상이 강하다. 교사들은 일주일에 단 한 번 샤워를 시키고, 또 찬물로 샤워시키는 것에 어떠한 죄책감도 느끼지 않는다. 어쩌면 아픈 아이들이 발생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이러한 아픈 아이들을 치료할 보건실의 환경은 열악하다. 해열제와 같은 기초적인 약품만 조금 구비되어 있는 수준이며, 그마저도 열악하여 선반은 텅텅 비어있다. 그리고 보건 교사도 존재하지 않아 학생들이 돌아가면서 당번으로 보건실을 지키고 있으며, 아픈 친구를 보필하고자 조퇴를 요구하면 이는 결석으로 처리되기에, 아이들은 쉽게 친구를 위할 수도 없다. 서서히 개인화를 넘어서 이기주의적으로 뒤바뀌고, 또 쿠르드들이 놓인 사회 전반이 열악하여 경쟁이 강제되기에, 부모 세대도 쿠르드 간의 우애보다 이기적으로 경쟁하고 학교에서의 성취를 바란다. 이에 학교에서 아이들은 아파서 뒤처지고, 쿠르드 간의 우정은 불발되며, 오직 나만 생각하는 태도가 제도, 가족에 의해 형성된다. 그리고 아이들에게 샤워실을 감독하고 보건실에 당번을 세우는 것처럼, 마땅히 성인이 일해야 할 곳에 아이들을 대신 투입한다. 그리고 성인들도 하기 어려운 제설작업, 키가 닿지도 않는 고드름 제거작업에 아이들을 동원한다. 이렇게 쿠르드 아이들은 어려서부터 터키 교사들에 의해 피지배 되는 성향을 갖게 된다면, 터키인들은 우월적인 위치에서 그들을 무력으로 다스리는 지배자임을 자청한다. 어려서부터 터키인들에게 위축된 상태로, 쿠르드임이 박탈되고 지배되는 인격이 형성된 아이들이 짊어질 미래는 과연 어떤 형태일까.

 

*쿠르드 착취

이러한 쿠르드 교사들은 20세기에 비한다면 교육 현장의 질이 좋아졌다며, 마땅히 학교와 국가에서 책임져야 할 의··주에 대해 너스레를 떤다. 이를 통해 과거보다 나아진 국가를 위한 애국주의적 선전을 강요한다. 그리고 아이들에게 국가에 봉사하라는 문구를 복창하게 만든다. 이렇게 터키임을 강조하고 쿠르드임을 잊게 하는 정책은 커리큘럼에서도 이어진다. 쿠르드어를 사용할 수 있는 아이들, 하지만 쿠르드어는 교사가 허용한 특정 상황 속에서만 가능하다. 터키어를 사용하는 교사들이기에 아이들과 소통이 어려울 때만, 그들의 의중을 읽고자 다른 학생을 시켜 쿠르드어를 허용한다. 이외에는 터키어로 읽고 쓰는 방법, 터키어 문법으로 옳고 그름을 판별하는 방법을 가르친다. 이에 아이들은 쿠르드어로 생각하고 말하는 그 정체성이 서서히 지워진다. 쿠르드어는 터키가 허용해야지만 가능한 것으로 은폐된다. 지리 또한 마찬가지로 쿠르드 지역은 민족적인 색채가 지워진 동 아나톨리아라는 이름으로 뒤바뀌고, 쿠르드라 불릴 것은 금지된다. 하지만 이러한 규칙은 믿을 수 없는 것으로 여겨진다. 그 이유는 본 커리큘럼과 규칙을 만드는 터키 교사들은 본 책임으로부터 자유롭기 때문이다. 일례로 학교는 금연구역임이 선포되어 있지만, 아이들은 담배를 뇌물 삼아 노동자들과 거래하고, 교사들도 아주 자유로이 담배를 피운다. 교장도 담배 피우는 선생을 제지하지 않고, 오히려 동조한다. 또 성장기의 아이들은 급식으로 나온 빵을 더 먹고 싶다. 선생은 욕심을 부리면 다른 학생들이 못 먹는다며 빵을 더 챙긴 아이를 혼낸다. 하지만 그렇게 남은 빵은 이를 갖지 못한 약자와 소수자에게 돌아가고 있는가? 이미 넘칠 만큼 가진 교장은 학교 예산을 횡령하여 자기의 사사로운 이익에 사용한다. 이에 만인이 사용할 통학 차량은 개선되지 않는다. 그리고 유수프는 선생에게 메모를 위해 빵을 더 챙기겠다고 말하지 못한다. 지금까지의 교육 현장은 선생, 어머니 할 것 없이 그것을 금했기 때문이다. 다른 아이가 빵을 더 가져가지 않아도 메모의 옆에는 급식이 없다. 그래서 유수프는 자신이 빵을 덜 먹고 이를 메모에게 전해준다. 보일러실에 있는 직원도 마찬가지로 선생들보다 적게 가지지만, 그 몫을 강아지에게 나눠준다. 우리가 마땅히 빈자, 약자에게 내가 가진 것을 나눠줄 때, 공동체와 민족은 유지될 수 있다.

 

*쿠르드의 단절

그리고 터키인들은 바로 쿠르드인들이 서로 나눌 수 있는 일말의 여유도 허락하지 않는다. 아이들에게 일주일에 단 한 번 씻게 만들어, 새벽에 몰래 보일러실에 가게 만든다. 급식도 마찬가지로 모자라 보이며, 보일러실에서 수건을 가져가는 아이를 보건대 그들에게 주어지는 생필품도 마찬가지로 열악해 보인다. 그나마 기숙학교에 다니는 학생들은 여유로운 편이다. 보일러실 노동자의 자식으로 추정되는 그들 또래의 아이는, 학교에 다니기는커녕 아버지를 보필한다. 배움의 나이에 노동에 참여할 정도로 쿠르드 지역은 열악한 것이랴. 하지만 학교가 익숙하게 만드는 것은 사회화가 아니라 고난이다. 아이들은 서로에 대한 힐난과 학교가 제공한 열악한 인프라를 일상화한다. 고난에 익숙해진 것을 두고 교장과 교사들은 학교와 국가가 마땅한 의식주를 해결했다며 너스레를 떤 것이다. 이에 아이들은 열악한 환경을 기본권이라며 착각하게 되리. 이러한 교사들은 과거에는 이보다 더 열악했다며 학생들에게 호기로운 자긍심을 설파한다. 하지만 지나치게 미끄러운 보건실 바닥에서 미끄러지는 것은 교사들이지, 학생들이 아니다. 바닥이 닦이지 않아도 학생들은 본 열악함에 적응이 되어 버린 듯, 미끄러지지 않는다. 터키인들은 쿠르드에 할당된 예산을 횡령하고 착취하여 열악하지 않았음에도, 그런 척 너스레를 떠는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실상은 외부로 전해지지 않는다. 고립된 산골 지역이기 때문에 핸드폰 전파가 잡히지 않아 통화는 어렵다. 메모를 치료하기 위한 외부와의 통화도 겨우 이뤄진다. 즉 아이들은, 그리고 쿠르드족은 외부에 자신들의 실상과 터키와의 관계를 스스로 말하기가 어렵다. 그래서 지금까지 국제적으로 전파된 쿠르드의 이야기는 터키가 전하고 있는 것은 아니었나. 또 학교의 TV에는 철창이 씌워져 있어 쿠르드 학생들은 이를 조작할 수 없다. 조작의 몫은 터키인들이 쥐고 있다. 이에 쿠르드는 터키가 송출하는 것만을 보고, 또 자신들이 주체적으로 TV에 프로그램을 송출할 수 없으리라.

 

*유수프의 눈빛

이러한 학교의 실정은 유수프의 눈을 통해 포착된다. 본 기숙학교에는 교사들이 아무리 훈계해도 문제를 끊이지 않는, 천방지축 아이들이 많다. 하지만 이에 비한다면 유수프는 조숙하고 성실하며, 카메라가 그의 그림자가 되어 뒤를 쫓지 않았다면 눈에 띄지도 않았으랴. 그는 터키 교사들이 바라는 데로, 그리고 무수한 아이를 낳은 어머니가 유수프에게 거는 기대에 부응하는, 이런 현실에 순응한 아이라 할 수 있으랴. 터키의 입장에서는 더 문제를 일으키지 않는 쿠르드인, 다산을 추구하지만 지역 발전의 열악함으로 인해 민족성이 와해되어가고, 개인적으로 잘 살길 바라는 쿠르드인에 대한 하나의 상인 것이다. 하지만 피상적으로는 동거인들의 규칙에 일련 순응하면서도, 최후의 주체성, 자유, 양심, 책임은 잃어선 안 됨을 유수프를 통해 천명된다. 교사들은 제 일에 사명을 다하지 않는다. 메모가 아픈 이유는 찬물 샤워, 일주일에 단 한 번 목욕하는 규칙, 자유를 보장하지 않고 집단으로 행동하는 등, 교사의 정책이 뒤엉켜서 나타난 결과물이다. 그리고 교사 모두가 이에 책임이 있고 이를 감당해야 할 테지만, 각자의 책임을 회피하고 남의 책임만을 들춰본다. 이에 교사들 사이에서 책임지는 이가 아무도 없고, 교사의 정책으로 인해 그 몫을 떠안은 쿠르드계 노동자, 학생들이 책임을 대신 지게 된다. 이를 바라보는 유수프의 날카로운 시선은 그들의 부조리함에 대한 참을 수 없는 경멸이자, 유수프가 숨기고 있지만 간직하고 있는 최후의 정의이랴. 이에 유수프는 조용하지만 웅대하게, 메모를 둘러싼 모든 사실을 밝힌다. 아이들에게 협박당하고, 교사의 눈 밖에 나더라도 말이다. 최후에는 메모의 아픔에 자신도 책임이 있다며, 유수프 자신도 고백한다. 하지만 사고가 나게 된 연쇄의 시초는 교사가 아니던가. 감히 누가 유수프를 탓할 수 있으리. 그리고 여전히 교사들은 유수프의 머리를 밀며 징벌하지만, 여전히 날카로운 유수프의 시선은 여전하니, 아무리 억압당해도 정의와 책임을 응시하는 시선은 고개 숙여선 안 된다. 무엇보다 그 시선은 픽션으로서 영화 내에서만 머물지 아니하고, 스크린 바깥을 응시하며 거세게 뚫고 나와, 마땅히 현실에도 이어져야 할 것이다.

 

*정리

민족의 자결권은 민족의 정치적 결정은 그들 자신이 선택해야 하고, 타민족과 국가는 거기에 간섭 및 개입해선 안 된다는 권리를 의미한다. 이를 위해서 민족은 국가가 필요하다. 타민족이 중심이 된 국가에 셋방살이하는 실정이라면, 그 국가는 소수 민족의 자결권을 말살시키려 하리라. 그들의 민족적 권리를 존중하지 않는 방향의 정책을 마구잡이로 만들어 내리라. 감독은 쿠르드와 터키의 관계가 학교로 축소된 본 작품을 통하여 자결권을 줄곧 침해받는 쿠르드의 현실을 담아낸다. 민족은 인종, 문화, 역사, 종교 등의 요소를 공통으로 공유하는 '집단'이다. 이 집단을 유지하기 위해서 민족의 구성원들은 우애를 잃지 말아야 한다. 단순히 공통성만을 되뇌는 것이 아니라, 그 공통성을 갖춘 사람들이 생존할 수 있는 권리를 보장해야지만 민족은 유지된다. 하지만 학교라는 음습한 장소에서, 또 주체적으로 목소리를 낼 수 없는 아이들을 대상으로 터키는 이러한 민족 말살과 자결권 박탈을 은밀하게 진행한다. 그러나 카라한의 의지는 굳건하다. 권위자 앞에서도 당당하게 말하고, 징벌에 처해도 날카로운 시선을 굴하지 않는, 부드럽지만 담대한 유수프의 의지를 포착하며, 우리는 민족 구성원들에게 서로가 보호자여야 함을 천명한다. 이러한 사회의 실상을 감독은 다르덴의 양식을 빌려 말한다. 연출에 있어서도 그렇고, 지극히 이상적인 형태로 투쟁하는 모습이 아닌, 인간적으로 결함이 있고 구조에 일련 순응하는 인물임에도 불구하고, 그 인간성을 조금씩 회복하거나 잃지 않는다는 서사의 구조도 유사하다. 이러한 본 작품은 누리 빌게 제일란의 형이상학, 존재론적이고 대화가 중심이 되는 영화, 예민 엘퍼의 액션, 하드 보일드한 색채와 다른, 사회파 적인 터키 영화의 결을 보여준다. 하지만 이를 단순히 '터키 영화'라 칭할 수 있을까. 영화에 묘사된 것처럼 스스로 말하기 어려운 쿠르드 감독이 치열하게 현실을 포착하고 게릴라로 송출하는, 쿠르드 영화임이 더 적합하게 여겨진다. 이러한 쿠르드 영화란 열악한 전파와 송출, 분열과 공포정치, 선전을 뚫고 자신의 입으로 말하는 것 자체가 유의미한 그들의 현실을 반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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