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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진 시간, 정진영 | ARTLECTURE

사라진 시간, 정진영

-뫼비우스의 띠, 꿈과 시간 그리고 나-

/Art & Preview/
by 박정수

사라진 시간, 정진영
-뫼비우스의 띠, 꿈과 시간 그리고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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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IGHLIGHT


본 극이 흥미로운 이유는 양자 중 무엇이 실재이고 허구인지 분간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양자의 차원을 쉽게 분간하기 어려운 이유는 앞서 언급한 시간에서 기인한다....


“꿈은 속이고 혼란으로 이끄는 허망한 것이다. 그러나 꿈은 틀린 것이 아니다.” -미셸 푸코-



스웨덴의 위대한 시네아스트, 잉마르 베리만은 자신의 영화 속에서도 줄곧 사용한 시계 초침소리를 선호했다고 밝힌 바 있다. 왜 그는 시계 소리를 좋아라했을까? 초침소리가 들려옴에 우리는 시간이 흘러가고 있음을 자각하고, 또 초 단위로 시간을 분절하여 계획할 수 있다. 시계 초침소리에 의해 우리는 질서정연해지며 무질서와 혼돈을 극복할 수 있기에, 베리만과 우리는 이 단정함을 좋아하는 게 아닐까. 하지만 우리에게 초침 소리가 들려오지 않는다면, 또 시간을 구분할 수 있는 의식이 흐릿해진다면 그것은 하나의 혼란일 것이다. 시간을 합리적으로 사용할 수 없는 고주망태가 된 우리는 현실의 시간을 분간하지 못한 채, 시간이 어떻게, 얼마만큼 흘러가는지 알 수 없게 된다. 만취한 우리에게서 현재와 과거, 현실과 허구는 경계가 희미해진 채로 뒤섞여지고, 이에 시간은 하나의 카오스로 변모한다. 홍상수 감독의 가장 대표적인 걸작 <북촌방향>에서의 시간이 그렇지 않은가. 인물들은 주정뱅이가 되어있는데, 하필 눈이 내리는 날씨와, 술자리, 그리고 밤은 되풀이되고 또 되풀이된다. 또 관객의 입장에서 마주하는 흑백의 풍경은, 외부에서조차 시간을 분간하기 어렵게 된다. 그래서 시간은 과연 얼마나 지난건지, 꿈인지 현실인지, 어제인지 오늘인지 내일인지 알 수 없는 시간들이 그저 구분 없이 흘러가기만 할 뿐이다. 홍감독은 이 같은 시간의 탐구를 <자유의 언덕>에서 한 번 더 수행한 적이 있었다. 과거를 축적해놓은 무수한 편지가 뒤섞여버린다. 거기에는 마치 시계 초침소리나 달력처럼 시간을 나누는 날짜가 부재하고 있어 보인다. 그래서 과거의 편린들이 분명 사실로서 존재하고는 있지만, 한편 그것을 선형적으로 배열할 수 없는 상태가 된다. 이렇듯 시간은 구분할 수 없다면, 그리고 그것을 자각할 수 없는 상태가 된다면 대혼란으로 변신한다. 흘러가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흘러간 것인지 자각할 수 없는 그런 것으로서… 이렇게 본 글의 서두에서 <북촌방향>과 <자유의 언덕>과 같은, 홍상수 감독의 비선형적이고도 기형적인 시간이 펼쳐지는 작품들을 언급한 이유는, 본 글에서 언급할 <사라진 시간>또한 본 작품들과 유사한 우리의 의식에서 비롯한 혼돈의 시간을 펼쳐내기 때문이다.     




 


본 작품과 비슷한 시기에 개봉한 <프랑스여자>도 시간에 대한 탐구라는, 유사한 주제의식을 갖고 있으므로 함께 감상해도 분명 흥미로운 경험이 될 것이며, 여러 차원과 의식, 시간이 혼란스레 뒤섞인다는 점에서 미국의 거장 데이빗 린치나 프랑스 누벨바그의 거장인 알랭 레네를 연상케도 한다. 이 같은 본 작품은 배우인 정진영의 감독 데뷔작이다. 그는 배우로 유명하지만 사실 영화계 입문은 배우가 아니었다. 이창동 감독의 데뷔작인 <초록물고기>의 연출부에서 일하며 영화계에 진입하였는데, 배우가 아닌 감독으로서의 꿈을 30여 년 전부터 품어왔던 것이다. 감독으로 변모한 그는 형식에서부터 스스로가 펼치고자 하는 자유분방한 연출을 선보인다. 영화는 일단 흑백으로 시작되었다가 컬러로 뒤바뀌고, 이후 스테디캠을 이용한 매끄러운 트래킹을 선보이다가 간헐적으로 핸드 헬드가 펼쳐진다. 이 같은 핸드 헬드는 수현과 이영이 지키고자 하는 상황, 그리고 드러내고 싶지 않은 비밀들이 드러나며 균열을 일으키는 장면들에 활용되며, 그들의 심리상을 긴장감 서리게 표현한다. 그리고 다시 스테디캠이 펼쳐지고 오프닝 숏에 펼쳐진 장면이 결말에서 수미상관을 이루며, 이것이 컬러로 펼쳐지며, 달라 보이지만 궁극적으로는 같은 것들이 반복되며 원형의 순환을 이루고 있다. 그리고 처음에 포착된 흑백이 세계에 컬러가 상실된, 즉 필수적인 요소가 상실된 텅 비어보이는 주인공 형구의 상황에 상응한다면, 결말에 이르러 일련의 궁금증들이 해소되고, 자신의 상황에 순응하며 컬러는 회복된다. 다만 여전히 형구 자신은 모호하고 인정하기 어려운 구석들이 존재하기에, 그의 표정은 의문에 가득 차 있고 무기력함과 허무를 보이며, 영영 풀 수 없는 불가사의한 삶이라는 주제의식을 강조하지만 말이다. 이러한 흑백과 컬러의 구분처럼 감독은 영화를 무수한 마디마디로 나누어낸다. 낮과 밤, 개인과 공동체, 산자와 망자, 닫힘과 열림 등 무수한 구분을 이루고, 이는 극의 전개에 따라서 현실과 꿈, 허구, 무의식, 상상의 차이에 상응함이 드러난다.      


하지만 본 극이 흥미로운 이유는 양자 중 무엇이 실재이고 허구인지 분간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양자의 차원을 쉽게 분간하기 어려운 이유는 앞서 언급한 시간에서 기인한다. 교사 부부의 집에 방화가 일어나고 이후 형구가 찾아와 수사하는 영화의 중반부까지는 영화는 그저 일반적으로 흘러가는 시간처럼 보인다. 하지만 형구가 술을 먹고 깨어나자 형사였던 그가 교사로 변신하고, 이전에 알고 있던 그의 신분과 정체성을 찾아볼 수 없게 된다. 본인만이 이전의 자신을 주장하며 고래고래 소리 지를 뿐, 타인들은 그를 전혀 다른 사람으로 여긴다. 마치 이상한 나라에 빠진 듯한 형구의 여정에 관객은 당황하고, 형구의 변신 이전과 이후의 시간을 과거와 현재라 명확히 구분할 수 없기 때문에 영화가 더욱 모호하게 느껴진다. 분명 교사의 집이 연소되었는데, 형구가 잠에서 깨어나니 그 집은 멀쩡하게 복원되었다. 집의 기준에서는 오히려 현재가 아니라 과거로 거슬러간 것처럼도 보인다. 이 같은 영화의 시간은 사실 그 이전부터도 과거로 향하고 있음이 암시되었다. 수혁과 이형 일가는 도시에서 시골로, 주체적으로 전근을 와서 새로운 시작을 하고 있다. 친구들은 그것이 세태에 맞지 않는다고 말한다. 모두가 도시로 상경하는데 말이다. 두 부부의 행동은 세태의 흐름에 거스르는, 과거로 향하는 행위와도 일맥상통한다. 그리고 형사로서의 형구는 과거의 비밀들을 발굴하고 맞춰내는 자다. 이 같이 과거에 집중하는 인물들의 태도를 통해서, 영화의 시간이 분명 흐르고 있지만 인물들은 반대로 향하고 있는 듯한 작품의 기묘한 분위기가 형성된다. 이후 교사로 변모한 형구는 여전히 형사의 역할을 겸한다. 자기 자신의 비밀을 찾아 헤매는 형사인 것이다. 그리고 이 같은 교사 형구의 기준에서, 형사 형구의 삶과 수혁과 이영이 중심이 된 초반의 시퀀스는 그의 수사 결과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부부의 삶과 형사 형구는 교사 형구가 품은 자전적 욕망의 투영, 꿈이자, 주변인들이 과거의 형구를 말하는 진술로서 그가 자신의 과거를 찾아낸 것이 종합된 것이랴. 이와 동시에 교사인 그가 현재의 온천에서 들은 타인들의 이야기가 투영된 허구이기도 하다. 그래서 방화라는 사건이나 형사 형구의 삶, 교사 형구로의 변신이 처음에는 기묘하지만 일반적으로 흘러가는 것 같다가, 이후에는 교사 형구가 집대성한 과거와 현재, 실재와 허구가 결합된 픽션처럼 여겨지니, 그 선후관계조차 분간하기 어려운 영화의 시간이 모호하게 느껴지는 것이리라.      


즉 여기엔 그의 욕망과 타인들의 이야기가 뒤섞였으며, 이렇게 해석한다면 본 작품은 자신의 부재하는 과거를 거슬러 내려가며 이에 대한 사실과 허구가 뒤섞인 자신에 대한 픽션을 쓰는 작업이자 하나의 회고이다. 이렇게 현재에서 부재하는 과거를 거슬러 찾아 헤매며 나름의 답을 제시하지만, 한편 거기에도 해소되지 않는 의문과 무지가 존재하기에, 형사 형구의 삶과 교사 형구의 삶은 온당 과거와 현재, 가상과 현실이 구분되지 않으며 양자가 순환성을 보인다. 교사 형구의 삶에서도 비닐하우스 방화는 그것이 현실인지 꿈인지 상상인지 판단이 서지 않는다. 여러 차원의 진위, 하나의 차원 내에서의 진위조차 쉬이 판단할 수 없는 작품, 어쩌면 영화 전체도 어떤 구분을, 특히 시작과 끝을 구분할 수 없는 것일지 모른다. 온당 흑백에서 컬러로 나아간 것이 아니라, 형구는 다시 컬러에서 흑백으로, 또 다시 교사에서 형사가 될지 모른다. 여전히 그 생에 모호함이 남아있어 형사로서의 탐색이 현재에서 과거로, 또 과거에서 현재로 되풀이되는 것이리라. 이렇게 과거는 오롯이 써낼 수 없다. 망자는 자신들의 죽음에 대한 진위를 말해주지 않으며, 형사의 지위는 자신의 주관성으로 소설을 쓰고 그것을 증거라 말할 수 있는 위치며, 세 번씩 반복되는 방화는 증거의 상실을 보여준다. 이러한 과거는 간헐적으로만 재현될 수 있을 뿐이다. 초희와 함께 석탑을 보러간 장면, 보수되고 복원되는 석탑은 결코 완전한 과거의 모습을 보여주지 못하리라. 복원에 따라 오히려 과거로부터 잃어버린 것이 생길 것이다. 즉 과거를 거슬러가고 있지만 방화에 의해 모조리 연소되어 온당 재현될 수 없는, 그래서 자신의 무지를 타인들의 진술로 채워야만 하는 형구의 상황 때문에, 결말에 컬러로 회복되어도 그의 표정은 텅 비어보이고 의구심으로 가득 차 보인다. 구성된 픽션을 과연 전적으로 믿을 수 있는가. 나의 기억이 부재하기에 타인의 진술에 의존해야만 하는 상황, 허나 타인의 진술을 과연 전적으로 신뢰할 수 있는가. 본 작품은 거짓말을 강조한다. 신 내림을 받는 이영의 진실을 말할 수 없어서 친구들에게 거짓말을 둘러대는 수혁, 이영의 질환 때문에 부부를 감금하여 참사를 일으킨 마을 주민들의 은폐와 거짓말, 그리고 형구 또한 접촉사고의 진상을 아침이 되자 은폐했기에 진실은 온당 드러날 수 없는 것이다. 또한 이영에 대한 소문은 억측이 늘어가 진실과는 무관해지고, 개인들의 이기주의는 남 탓을 하며 책임을 회피하는데, 이 같은 장면들을 통해 믿을 수 없는 과거를 강조한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에서 하트 여왕의 지하 세계로 뚝 떨어진 앨리스는 깨어있는 상황에서 본 차원으로 이행된 것이 아니라 잠들어서, 즉 무의식과 환상의 세계라는 다른 차원으로 이행된 것이다. 그리고 마찬가지로 이상한 나라로 이행된 형구도 마찬가지다. 그는 술에 잔뜩 취해 잠들고 깨어나니 교사가 되어있었다. 하지만 그가 꿈꾸고 있는 차원은 형사의 삶인가 교사의 삶인가. 교사인 그는 수혁 및 형사 형구와 달리 결혼하지 않았다. 이영에게 지병이 있어 단지 아이계획을 포기하던, 또 그것마저도 극복하던 수혁과 달리, 또 형사 형구가 일군 안락한 가정과 달리, 교사 형구는 자신에게 지병이 있어 결혼 자체를 하지 못한다. 그리고 앞서 언급한데로 본 작품은 과거를 거슬러가는 장면이다. 그리고 수현은 대단히 이상적인 인물로 그려진다. 아내를 위해서 도시생활을 포기하고 전원으로 전근해오는 인물이며, 마을로부터 신임을 받는다. 그리고 형사 형구의 세계에서도 그는 비교적 이상적이다. 잘 안 풀리는 일들이 있긴 하지만 그럼에도 형사라는 위치는 주체적으로 결과를 도출해내는 위치에 놓인다. 또한 아내의 이름은 전지현이고 두 아들의 이름은 박지성과 박주영인데 이 같은 구성은 현실 속의 이상적인 하나의 우상들에 다름 아니다. 하지만 교사 형구의 삶은 비루하다. 현실에 적응하지 못하며 교장으로부터는 골칫거리이고, 또 시골로 원해서 온 것이 아니라 불운에 의해 전근된 것인지 모른다. 그렇다면 수혁과 형사 형구의 시퀀스는 더 정확히 말하자면 단순한 과거가 아니라, 과거에 자신이 바라던 욕망들이 구성된 픽션일 것이다. 교사 형구가 초희를 쫓아다녔다면, 그의 이상이 투영된 수혁과 형사는 결혼했고 대단히 인자하며 신임도 높다. 또한 못된 질병이라고 여겨지는 신 내림 내지는 형구가 겪는 정신 질환이 초반부의 시퀀스에서는 형구가 아니라 이영이 겪고 있는 것으로 뒤바뀐다. 즉 자신의 병을 부정하고 분리시키며, 오히려 자신은 그 병마와 싸우는 구원자로 탈바꿈시킨다. 이렇게 픽션의 일부가 형구의 실제 꿈이라면 경찰이 되고자 했으나 좌절한 그의 욕망, 완벽한 가정을 이루는 그의 꿈이 무의식에서 해소된 것이랴.       


이러한 꿈으로 향해서 그가 다시 형사 형구가 되기 위해 술을 마시는 장면을 길게 집중하는데, 술을 마시고 속세를 잊는 행위는 곧 현실을 외면하는 것이다. 그리고 꿈에서 깨어나기 위해서 가해져야할 고통은 해균이 아니라 형구가 겪어야 하는 것이다. 허나 형구는 자기 자신의 충격이 아니라 형구를 죽이고 방화함으로써 꿈에서 깨어나고자 하진 않던가. 만약 교사 형구를 꿈의 영역이라 여기더라도, 그는 결코 깨어날 수 없는 것이리라. 자신이 충격을 받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렇게 고주망태가 되어 술을 마셔도 형구는 다시 형사 형구로는 깨어날 수 없다. 두 번째로 깨어나도 다시 교사 형구다. 허나 그 두 번째 깨어남에 이제 그는 체념하고 순응한다. 아이들에게 교사로서 국어를 가르치고, 더 이상 타인들에게 허무맹랑한 소리를 하지도 않는다. 형사 형구로서 그리고 교사로서 자신의 이상이 투영될 수 있는 완벽한 이전의 세계에서, 다시금 불안정한 세계로 향한 것은 하나의 추락이다. 교사 형구가 된 직후에 그가 보이는 발악은 흡사 어머니의 자궁에서 갓 대지로 떨어진 신생아의 울음을 연상케 하기도 한다. 실재로 아이들은 양수가 가득 찬 자궁과 다른 이질적인 환경에 놓이는 고통에 울음을 터뜨린다고 한다. 교사 형구로서 이전의 기억이 없는, 오직 안락한 형사 형구로서의 상황에서 내던져진 그는 하나의 탄생을 경험한 것이리라. 하지만 아기들이 이제는 바깥에서 숨쉬어가는 과정을 배워가듯, 더 이상 그는 이 새로운 깨어남을 거부하지 않고 적응해가는 것이다. 이전의 그는 프라이버시에 관심이 많았다. 남의 비밀을 열어보기 좋아하였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사생활을 마주하던 인물인가? 이제야 그는 아이의 사생활을 통해 자신의 결함도 인정해간다. 또한 초희에게 정신질환에 대한 조언을 건네는 장면에서, 자신도 이 같은 질환을 겪고 있음을 인정한다. 자신이 투영된 수혁으로부터 병마가 분리된 이영이 아니라, 자신도 일련의 정신착란을 겪고 있음을 감내한 것이리라. 그리고 교사 형구에서 형사 형구로 되어가는 상황을 탄생에 비유한다면, 이는 마치 환생이 연상되기도 한다. 환생을 믿는다면 전생은 있겠지만 그 기억은 부재하며 전생의 흔적만이 어렴풋이 있을 뿐이리라. 세 번의 방화처럼, 전화번호처럼, 이전의 흔적이 새로운 나에게 남아있다. 허나 이전의 내가 누구였든지 간에 우리는 현재를 향해 나아가지 않던가. 형사 형구에서 교사 형구로 순응해가는 그의 여정이 담긴 본 작품을, 환생하여 태어나고 과거와의 결별에 울음을 터뜨리다 이제는 그 삶에 적응하고 체념하며 살아가는 우리네 삶에 대한 알레고리로도 볼 수 있다.      


배우에서 감독으로 전향한 케이스는 많다. 그것을 함께 겸하는 케이스도 많으며 결과물도 가지각색이다. 누군가는 지지부진한 반면, 누군가는 감독출신보다도 더욱 걸출한 결과물을 내놓곤 한다. 프랑스의 마티유 카소비츠도 <증오>라는 뛰어난 작품을 남긴 바 있고, 미국의 감초 배우인 존 캐럴 린치의 <럭키>도 배우 해리 딘 스탠튼의 헌정영화로만 국한시킬 수 없는 걸출한 작품이었다. 하지만 이 같은 사례들이 희박한 편이기에 정진영 배우의 감독 전환도 크게 기대되지 않았었다. 허나 이 같은 우려를 뛰어넘고 그는 흥미로운 작품을 만들어냈다. 배우의 디렉팅이나 매끈한 촬영, 유머코드 등은 상업성과 일련의 절충을 보이기도 한다. 그것이 아쉽기도 하지만, 한편 리얼리틱하지 않은 장르적인 디렉팅이 오히려 본 극의 초현실적인 상황에 더욱 어울리기도 한다. 이탈리아의 거장 페데리코 펠리니의 뮤즈 줄리에타 마시나의 과장된 표현이 초현실적인 작품들에서는 좋은 결과를 냈듯이 말이다. 이러한 상업적 절충만을 제외하면, 그는 작가주의적인 태도로 자신이 표현하고자 하는 것을 우직하게 펼쳐낸다. 온당 명확히 재현할 수 없는 과거에 대한 탐구, 불만족스러운 현실의 반향에 따른 꿈에 대한 탐구와 나약한 의식 속에서 양자의 뒤섞임, 그리고 하나의 삶에 대한 알레고리로 볼 수 있는 이야기를 펼쳐내며, 답을 내릴 수 없는 아득한 우리네 삶을 바라본다. 무엇보다 본 작품은 하나의 미학적 탐구로도 볼 수 있을 것이다. 분명 현실에서 자양분을 얻지만 어디까지가 실재이고 어디까지가 허구인지 알 수 없는, 또한 너무도 많은 것들이 뒤섞여서 하나로의 의도로도 귀결시킬 수 없고, 단 하나의 해석으로도 국한될 수 없는 열려있는 무한한 예술의 역량이 말이다. 그래서 어떤 정답이나 명확함을 찾으려는 노력 대신 자유롭게 유희해볼 수 있다면, 본 작품은 분명 흥미로운 경험을 안겨다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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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박정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