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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나 바이스(Ina Weisse), <오디션>(The Audition) | ARTLECTURE

이나 바이스(Ina Weisse), <오디션>(The Audition)

-스승의 기권, 그 후의 욕망-

/Art & Preview/
by 박정수

이나 바이스(Ina Weisse), <오디션>(The Audition)
-스승의 기권, 그 후의 욕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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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IGHLIGHT


<피아니스트>에서의 간접성은 포르노그라피에 의해 각인된 거짓 욕망이 주를 이루기에 간접적인 허상의 욕망과 직접적인 몸의 충돌과 관련되고, 본 작품에서의 간접성은 내가 실현하지 못하는 것을 타자에게 주입하는, 기권한 자가 대리인에게 행하는 미온한 강압과 폭력성이라 할 수 있다. 영화는 그것들이 어떻게 증폭되는지를 고찰한다....

2020 전주국제영화제 특집기사: 연재리뷰 3편


기권은 신분상 무능력의 체념적 인정, 즉 타인에의 완전한 위탁인데, 이것은 맹목적 신앙이란 신학적 개념이 탁월하게 보여주는 것처럼 자기를 전면적으로 인도하는 것이고, 자기의 대변자를 선택함으로써 자기의 발언을 선택하는 암묵적 위임이고, 무언의 자기위탁인 것이다.” -피에르 부르디외-


*미카엘 하네케 <피아니스트>, 그리고 니나 호스


스승과 제자의 관계, 거기에는 분명 권력의 차이가 비롯해있고 그 위계에 의해 때때로 사악한 주종관계로 전복되곤 한다. 이 같은 권력의 위계를 보여준 작품들 중 미카엘 하네케의 <피아니스트>를 뛰어넘는 작품이 있을까 싶다. 단순히 사회학적인 작품으로만 국한되지 않는 본 작품은 사회적 권력과 더불어, 대중문화에 의해 환영적으로 만들어지는 성적 취향과 현실의 괴리, 사회적 권력과 성적인 권력을 함께 뒤섞어 건반 위에 펼쳐낸다. 이 같은 미카엘 하네케의 <피아니스트>가 흥미로운 것은 대배우 이자벨 위페르의 전설적인 명연기와, 클레메를 향한 에리카의 기형적 욕망 및 그것의 가혹한 불발, 그리고 에리카와 어머니의 뒤틀린 관계에서 비롯한다 할 수 있다. 하네케는 원전인 엘프리데의 피아노 치는 여자가 집중한 내면묘사 대신, 그 혼란한 내면을 가지고 있는 차갑고도 얼어붙은, 그리고 뛰어넘지 못할 방패와도 같은 얼굴에 집중하였다. 이와 더불어 흥미로운 장면을 하나 더 꼽고 싶은데, 그것은 바로 에리카와 어린 남자 학생의 관계다. 에리카는 피아노를 치는 한 젊은 소년을 학생으로 두고 있다. 어느 날 학교 바깥에서 에리카는 그 소년을 목격한다. 그곳은 포르노그라피 가게이다. 소년은 다른 친구들과 외설잡지를 보며 여성에 대한 음담패설을 한다. 에리카는 이를 확인하고, 다음날 학교에서 아이를 질책한다. 자신의 비밀을 알아버린 에리카 앞에서 위축된 소년, 에리카는 아이에게 무엇을 잘못한 것이냐, 무엇에 수치를 느끼느냐고 질책한다. 하지만 아이는 진정으로 무엇을 잘못한 것인가. 에리카는 아이의 비밀을 확인한 직후에, 그녀의 마조히즘적인 욕망을 충족하기 위해 비디오방으로 향하지 않았던가. 아이와 에리카는 본질적으로 무엇이 다른가?



 

만약 다르지 않다면 에리카는 욕망을 숨긴 자신과, 욕망이 노출되어 버린 아이와의 위계를 정립하기 위함일까, 아니면 아이를 통해서 반추되는 자신의 자화상을 엄한 태도로 부정하는 것인가? 혹은 음악가는 하나의 직업이기도 하지만, 교양이 있는 식자층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그렇다면 식자층이라는 계급은 결코 그래서는 안 된다는, 그 계급으로부터 아이를 박탈하려는 에리카의 추방명령인 것이요, 이를 통해 계급의 고상한 이미지를 더욱 강화하려는 것인가. 물론 이와 더불어 에리카는 답변하지 못하는 소년의 태도를 즐기는 새디스트처럼, 또한 그의 부모에게 이를 알릴 수밖에 없다고 말하는 등, 소년을 궁지에 내몰 수 있는 권력에서 비롯된 쾌감을 느끼는 것처럼도 보인다. 여하튼 <피아니스트>의 본 시퀀스는 음악가가 소속된 식자층이라는 계급이나 이에 따른 행동강령, 권력의 위계를 느낄 수 있기에 흥미로웠다. 그리고 이러한 오스트리아의 음악원과 음악가라는 식자층이 다시금 영화로 펼쳐진다. 1977년생의 배우이자 감독인 이나 바이스의 <오디션>이라는 작품을 통해서, 바이올리니스트인 학생과 선생의 관계를 통해서 말이다. 에리카를 연상케도 하는 스승은 독일의 명배우 니나 호스가 연기한다. 1975년 태생의 그녀는 2000년대부터 2010년대까지 동시대 독일의 영화흐름을 선도하는 베를린파의 가장 선구자적 인물 크리스티안 펫졸드와 주로 협업하였고, 마찬가지로 베를린파의 일원인 토마스 아슬란의 작품에 출연하기도 하는 등, 베를린파의 주요한 얼굴과도 같은 배우였다. 그녀는 내면을 적나라하게 표현하지 않는, 그 외피 너머에 자리한 복합적인 감정을 절묘하게 표현해내는 것으로 유명하다. 또한 그녀는 여러 배역을 소화함에 있어서도 큰 폭의 변화를 주지 않으며 최소한의 절제된 영역 내에서 표현을 펼쳐내지만, 결코 흘러넘치지 않는 그녀의 연기는 사실상 언제나 '정확함이라는 수식이 어울린다.



 

*오스트리아 영화 연출의 경향

이 같은 연기 스타일과 이지적이고도 날카로운 페이스, 그리고 극적인 변화를 추구하지 않는 경향 때문에 니나 호스는 이자벨 위페르와도 많이 닮아있다. 이러한 그녀가 2000년에 이자벨 위페르가 선보인 그 복잡한 내면과 심리를 지닌 음악선생의 계보를 오스트리아에서 이어간다. 이 같은 오스트리아 영화들은 대체로 정적이다. 미카엘 하네케의 롱 테이크와 대상에 집중하는 트래킹, 울리히 사이들이 고정된 카메라 속에서 형성하는 회화적 프레임 등 방법은 다르지만 대체적으로 고요하고 잔잔하며, 기교 없는 연출 속에서 이미지 그 자체에의 몰입을 요구한다. 그들의 이후 세대인 마커스 슐레진저, 예시카 하우스너, 마리 크류처 등도 이 같은 영향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으며 본 극도 마찬가지다. 오프닝 장면에서 입학 예정자들을 선별하는 오디션을 포착하는 정적인 프레임은 고정된 카메라와 평면적인 구도라는 점에서 사이들이 연상된다. 이후에도 필요 이상으로 움직이지 않는 트래킹과 달리 숏은 하네케와 그 이후의 오스트리아 영화의 경향을 이어간다. 영화의 연출에서 가장 주목할 만한 부분은 초반부다. 극의 시작은 롱숏으로부터, 그리고 부동으로부터 이뤄진다. 딱딱하고 삭막하며 학생과 선생 사이는 대단히 멀다. 서로간의 격차와 거리, 이것은 무관심에서 비롯했을 것이다. 이후 아나의 눈에 알렉산더가 밟힌다. 그의 연주가 특별하게 느껴지고, 그래서인지 자꾸 시선이 가는 듯, 대상의 이목구비가 명확하게 포착되지 않던 롱숏으로부터 풀숏, 클로즈업으로 그에게 시선은 서서히 근접해간다. 또한 알렉산더의 등장과 연주에 눈길을 돌리는 듯 트래킹도 활용된다. 이후 영화는 알렉산더에게 관심을 갖는, 아나의 관심이 느껴지는 그 연출을 줄곧 통일해간다.

 

*계급론

영화는 트래킹 숏을 스테디캠을 이용해 촬영하여 대단히 매끄럽게 만들어낸다. 하지만 영화는 때때로 핸드 헬드가 사용되곤 하는데, 그것은 공적 영역과 사적 영역의 충돌, 계급적인 긴장감, 그리고 아나의 추락을 드러내기 위한 연출로 활용된다. 핸드 헬드의 긴장감적인 측면에서, 영화는 오디션이 포착된 이후 집에서 행하는 생일파티 장면으로 넘어간다. 그리고 아나의 아들 요나스에게 할아버지가 연주를 요구한다. 그리고 이를 제지하는 아나와 조부의 충돌이 있다. 이들은 한 쪽은 밀크티를, 다른 한쪽은 녹차를 요구하며, 결코 물러서지 않는 그 취향 속에서도 고집이 드러난다. 이는 요나스를 장악하려는 충돌 속에서 비롯한 긴장감임과 동시에, 사적 영역에서도 공적인 바이올린이 개입해오는 데서 기인한 균열의 핸드 헬드이리라. 사적 영역과 공적 영역의 분리는 학교 내에서도 드러나서, 요나스를 맡은 선생이 아나게게 개입하지 말 것을 요구하는 장면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그리고 영화는 계급성에 대한 탐구가 도드라진다. 오프닝에서부터 스승과 제자, 내지는 음악가와 공인받지 못한 음악가의 위계와 격차가 대두된다. 그들에게 자격을 수여하는 스승들은 연주의 시작과 끝을 결정할 수 있으며, 후자의 운명조차도 그들에 의해서 판가름된다. 이들에게는 재단하는 자라는 위치에 걸맞게 철두철미한 완벽함이 요구되곤 한다. 그리고 음악가들의 욕망은 연습을 통해서 입학한 학생들이 갖는 결함을 극복시키는 것이 아니라, 천부적으로 타고난 아이들에게 그 자격을 수여하고자 하는 마음처럼 보인다. 그래서 스승과 제자 사이보다는 음악가와 비음악가의 관계가 더욱 적절해 보인다. 그들의 판단준거에 따라 음악가라는 지위는 학교 교육 과정에 의해 공인되지 않고, 그 이전부터 결정되어 있는 지위이자 계급인 것인가. 그래서 분명 사적 영역임에도 불구하고 공적 영역에 다름 아닌 바이올린이 지속적으로 요나스에게 개입해오는 것이리라.

 

*기권한 자와 대리인

천부적으로 완벽해야만 하는 위치, 이에 의해 아나는 줄곧 편집증적인 불안을 겪는다. 그녀가 완벽주의를 추구한다는 것은 사적 영역인 식당에서도 포착된다. 남편과 함께 한 저녁 식사에서 그녀는 와인이나 파스타를 쉽게 고르지 못한다. 어디에 앉아야 가장 적합할지를 선택하는 것조차도 그렇다. 선택을 의심하고 또 의심하며 완벽에 근접하기를 바라고, 여기엔 결국 남편의 도움이 수반된다. 그녀는 음악가로서, 그리고 스승으로서의 계급을 유지하기 위해 완벽함이라는 취향에 집착하는 것인가. 한편 웨이터의 추천, 남편의 제안 등 타자에 의해 완성된 완벽 속에서 아나는 자신은 상실된다. 아나가 완벽에 대해서 강박증을 느끼는 장면은 연주의 포기를 고민하는 장면에서, 그리고 타 연주자들과의 협연과 무대에서의 실연에서 강조된다. 완벽을 평가받는 것에 두려움을 느끼는 그녀는 실수를 하고, 분명 음악에 대한 열정이 있어 보임에도, 완벽하지 못하다는 그 강박에 의해 이를 그만두려 한다. 아나는 완벽하지 못한 자신을 부정함에 현실 속에서도 혼란을 겪는다. 그리고 이 같은 불안 속에서 그녀의 심리와 상황에 상응하는 거칠고 격정적인 핸드 헬드가 사용된다. 이 같은 불안과 강박 속에서 아나가 자신을 되찾는 것은 그 동료와의 키스나 애무, 즉 자신의 육체와 욕망에 대한 솔직한 접근에서 이뤄진다. 이러한 장면들에서만이 아나는 유연해지고 부드러워진다. 그리고 아나와 알렉산더의 관계는 음악가라는 계급의 동질성이 아니라, 아나가 알렉산더를 자신에게 소속시키고 일치시키는 유형의 동질성으로 보인다. 알렉산서가 보이는 목소리랄지 소심한 성격, 태도의 결함, 그리고 아나의 귀를 이끈 (아마도) 연주의 유사성에 의해, 아나는 알렉산더에게서 극복할 수 있는 자화상을 마주한 것인가. 스스로에게 기권한 아나는 대리인으로서, 자신이 투영된 알렉산더를 극복시켜 자신의 결함을 넘어서고 싶은 것인지 모른다. 알렉산더에게 손톱을 깎아주고 그의 자세를 마치 조각처럼 고압적으로 '조율'하는 과정에서, 아나가 항상 엄하게 고정시킨 머리는 흐트러진다. 그녀 스스로에게 행하던 엄격함이 알렉산더로 이행된 것이랴.

 

*공간

이 같은 나와 타인의 관계론이 본 작품에서 공간성으로 상징된다. 공간은 계급을 분리시키기도 한다. 학교의 연습실에 음악가나 학생이 아닌, 비음악가인 어머니는 출입할 수 없다. 가능한 것은 오직 알렉산더를 위시한 공인된 학생들뿐이다. 이는 사적 영역에서도 부모님의 집에서 남과 여가 분리된 창문으로, 계급에 따른 공간의 분리가 상징화되었다. 그리고 이를 넘어서서 집이나 공간은 나의 고유한 영역이자, 스스로가 투영된 일련의 페르소나다. 그래서 학교 내에서 다른 동료들의 강의실에 들어가는 일은 대단히 적으며, 그저 밖에서 지켜보기만 하는 것이 대다수다. 요나스를 맡고 있는 그 선생이 아나의 강의실로 향한 이유는, 아나가 자신의 영역을 침범했기에 맞불을 놓고자 그녀의 강의실에 '침범'한 것이며, 그마저도 재빨리 나갔다. 부부사이에서도 아나는 남편의 공방에 무심코 들어갔다가 손님이 있음에 화들짝 나가려고 했다. 엄연히 서로에게 구별되는 경계로서, 서로의 삶을 침해하고 싶지 않은 것이다. 또한 아나는 자신의 공간인 집에서만큼은 편해야하겠지만 자신에게서 역한 냄새가 난다고 느끼며, 즉 자신이 불완전하다는 강박에 편히 누어야할 집을 불편해하고, 나가서 거리를 떠돈다. 동료 음악가에게 솔직한 욕망을 느끼던 아나는 오히려 그의 집이 편안하다. 이는 아나의 집에 알렉산더가 당도하며, 그는 그녀에게 합일되어가는 과정 속에서 더욱 도드라진다. 알렉산더와 동일시되어가는 한편 아나 스스로는 완벽을 위해서 소외되어가는 것은 아닌가. 또한 그 과정 속에서 요나스 또한 소외되어 간다. 아나는 요나스의 거부에도 불구하고 환기를 시켜야한다며 아들의 방 창문을 열어젖힌다. 이렇게 요나스의 공간은 줄곧 침범당하며, 때론 가시방석과도 같다. 요나스는 심지어 나의 공간이자 아들로서 공간인 집에 알렉산더가 침범해오는 것을 겪는다. 이에 요나스는 소외되고 서서히 불안을 느낀다. 어떠한 기대도 투영되지 않는 공방에서의 요나스가 가장 편해 보이는 것은 왜일까.

 

*시선

또한 영화는 시선이 강조되는 작품이다. 아나가 알렉산더를 바라보던 그 시선, 동료 음악가가 아나를 바라보는 연모의 시선 등 시선이 서로를 옭아맨다. 아나의 불안은 다른 음악가들의 시선이 함께하는 협연에서, 그리고 무수한 관객들의 시선을 받아야만 하는 콘서트장에서 극대화된다. 아나는 기대에 차서 판단하는 타인의 시선을 두려워하지만, 마찬가지로 그녀도 알렉산더에게 기대의 눈초리를 보낸다. 이 같은 알렉산더를 바라보는 아나의 시선은 자화상과 같은 알렉산더에게 보내는 욕망인 건지, 아니면 자신과 분리되어 있는 타자를 향한 것인지 오묘하다. 또한 요나스를 바라보는 그녀의 시선이 어머니의 시선인지 스승의 시선인지 그 경계는 혼재되어 있다. 이렇게 욕망이 스민 시선들에, 아나는 타인들의 무수한 기대를 충족시키지 못했음에 좌절을 겪고, 또한 아나의 시선에 의해 알렉산더나 요나스도 절망을 느낀다. 또한 이 같은 시선은 타인의 지배에도 다름 아니니, 할아버지나 아나가 요나스를 바라보는 시선이 바로 그것이며, 이와 닮아가는 요나스는 적의에 찬 시선을 알렉산더에게 보내며 그의 상실을 기대한다. 이 같은 시선, 특히 아나로부터 달아나려는 마지막 순간의 알렉산더를, 그녀는 다시금 죄책감과 소유가 교차된 듯한 눈빛으로 쫓아간다. 마치 아폴론과 다프네처럼, 판과 시링크스처럼 쫓고 쫓기다가, 적의의 시선을 행동에 옮긴 요나스에 의해 중태에 빠지게 되며, 소유와 지배를 거부한 자의 비극으로 영화는 향한다. 이 같은 시선의 불발을 경험하며, 또한 부모세대로부터 전승되어 오는 가혹한 공간성과 시선들을 자각하며, 아나는 분명 유연해지는 것이 사실이다. 비극 이전에 자신의 강의실 창문을 닫아 알렉산더를 가두지 않고, 오히려 그가 드나들 수 있게끔 개방해두는 듯하다. 하지만 영화 속 3세대에 거친 그 시선들이란, 또한 그 이전부터 전해 내려져왔을지 모르는 '타고난' 것으로 표현되는 계급의 시선을 넘어서는 것이란 가능할까. 아버지가 딸에게 투영하던 그 욕망은 결국 끊지 못하고 다시금 반복된다. 손자의 손을 지배하고자 하던 할아버지의 욕망은 온전히 계승되어, 아이는 알렉산더를 지배하고 처분함에 그 자리를 꿰찼으며, 아나가 알렉산더를 바라보던 그 시선을 자신의 것으로 돌려받는다. 그리고 아나 또한 자신의 페르소나로서 복권된 요나스의 태도와 연주를 보며, 자신의 것을 놓치지 않으려는 듯한 그 불길하고도 흡족한 시선을 내비친다.

 

*동물 상징, <피아니스트>와의 유사성과 차이, 정리

이러한 아나의 주체성은 육체를 통해서 그저 하나의 일탈로만 가능할 뿐, 이외에는 계급이나 지위에서 비롯된 완벽의 강박이 지배적이다. 또한 요나스의 운명은 학교에 가기 전부터, 바이올리니스트로 결정되어 있는 것이리라. 이 같은 아이의 운명이 동물이라는 상징으로 제시되곤 한다. 아이는 도축되는 소와 잡아먹힐 물고기에 대한 연민을 보인다. 그들의 처지가 곧 자신과도 같았으리라. 하지만 물고기를 풀어주면서 소년은 낚시꾼들을 본다. 물고기는 풀어놔도 그들에게 붙잡힐 것이랴. 이를 통해서 소년과 어머니, 할아버지와의 관계, 의존적 존재가 아닌, 주종관계임을 확인했으리라. 그들을 태어나게 해준 존재로부터 규정되고 벗어날 수 없다는 것 또한 느끼게 되었으리라. 아이는 털이 뽀송뽀송한 따스한 강아지를 바라지만, 이는 차가운 바이올린으로 대체되니, 그 차가운 즉물성에서 보호자가 아닌 마치 주인이 종에게 바라는 삭막한 욕망과 관계가 드러난다. 이렇게 지배받는 아이는 할아버지 집에서 개미집을 괴롭히곤 하였는데, 몇 세대를 거친 그 강압, 완벽한 음악가가 되어서 하위계급을 공인하길 바라는 그 욕망이 체화된 것이리라. 이 같은 괴롭힘이 곧 알렉산더를 내치고 그 자리를 꿰차는 것으로 귀결되어 확실하게 체화된다. 이 같은 부모와 자식의 관계나, 연주가로서 자신의 이상과 욕망을 간접 투영하는 선생님이라는 위치 등이 미카엘 하네케의 <피아니스트>와 많이 닮아있다. 특히 쇠락해가는 노부부임에도 그들을 떼어내지 못하는 아나의 관계랄지, 아이스 하키장에 가는 요나스, 아나의 묶은 머리를 뒤에서 포착하는 구도 등은 더더욱 <피아니스트>의 오마쥬로 느껴진다. 이렇게 <피아니스트>의 영향력이 지대해 보이는 본 작품은 세대 간의 관계망을 한 단계 더 확대하여, 자식이 주체적인 자리를 되찾지 못하는 관계가 계급처럼 교육되고 계승됨을 보여준다. 또한 <피아니스트>에서의 음악가라는 계급론을 이어감과 동시에, 여기에 나와 타자의 동질화라는 고찰을 시도한다.

 

무엇보다 선생으로서 서로가 간접적으로 욕망을 투영하려는 것은 같지만, <피아니스트>에서의 간접성은 포르노그라피에 의해 각인된 거짓 욕망이 주를 이루기에 간접적인 허상의 욕망과 직접적인 몸의 충돌과 관련되고, 본 작품에서의 간접성은 내가 실현하지 못하는 것을 타자에게 주입하는, 기권한 자가 대리인에게 행하는 미온한 강압과 폭력성이라 할 수 있다. 영화는 그것들이 어떻게 증폭되는지를 고찰한다. 이는 학교라는 작은 사회 및 교육체계, 그리고 더 널따란 사회로 진입하기 이전부터 태어나면서부터 소속된 가족 공동체와 계급에 의해서, 즉 세상에 던져지면서부터 사실상 내정되어 있음을 밝혀낸다. 이를 보여주기 위해 영화는 시선을 활용하며, 그것 또한 <피아니스트>와의 차별성이리라. <피아니스트>의 시선이 서로가 서로를 이해할 수 없는, 그 갑옷과도 같은 미스터리한 표피를 뛰어넘을 수 없는 무력한 의문의 시선이었다면, 본 작품에서의 시선은 상대방을 내가 속한 계급, 지위, 궁극적으론 나와 동일시하려는 시선으로 거기엔 힘이 가득하다. 이를 <피아니스트>와 유사한 풍경과 그것처럼 우아하고도 절제된 감각성으로 담아내지만 그럼에도 분명히 다르다. 영화가 주목하고 탐구하는 요소, 소재가 다르며, 이를 위해 공간성을 활용한 것도 <피아니스트>와의 차별성을 두기 위한 전략으로 느껴진다. 물론 오리지널리티는 덜하다. 많은 부분에서 <피아니스트>의 요소와 분위기가 짙게 느껴지지만, 그 독창성을 제외한다면 비교적 충실한 편이다. 무엇보다 <피아니스트>의 감상이 독보적인 연기를 행하는 이자벨 위페르의 얼굴과 표정, 그리고 발걸음을 따라가는 것 자체만으로 유의미한 것처럼, 마찬가지로 내면과 심리묘사에 있어 압도적인 연기를 선보이는 니나 호스의 표현에 집중하는 것만으로도 본 작품은 가치가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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