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는 여전히 존재자에 가깝다. 나 자신은 어떤 이름을 갖고, 어떤 육신을 가진 존재자로 규정되기 이전부터 존재하지만, 그 순일한 존재를 온당 드러내며 살아가진 않는다. 왜냐하면 우리가 존재자로서 '있음'의 지위를 부여받게 되는 것은 언제나 나 자신에 의한 것이 아니라, 구조나 제도, 타인에 의해 발생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나 자신을 있게 하는 그 존재자로부터 쉬이 나아갈 수 없다. 우리의 존재 그것 자체는 특정한 시간과 공간 속에서 이뤄진다. 존재는 언제나 절대적일 수 없다. 우리가 다른 시대에, 다른 나라에서 태어났다면, 분명 우리의 존재는 달라졌을 것이다. 우리의 존재는 속한 세계와 공명한다. 한편으로 그 다른 시공간이라는 존재를 규정하는 여건들이 존재자를 더욱 강화시키는 명분이 되기도 한다.
동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의 시간을 약 60년가량만 반대로 돌려보자. 2차 대전이 끝났지만 냉전이 시작되어, 자본주의와 사회주의의 대립이 심화되었던 시대의 우리는 과연 존재일 수 있었을까. 소련이나 중국에 살고 있다면 우리는 사회주의를 따르는 존재자여야만 했고, 미국에 살고 있었더라면 자본주의를 따르는 존재자이어야만 했었다. 그 시공간 속에서 능동적으로 자신을 변화시키는 존재의 가능성이란 극히 희박한 것이요, 이를 국가적 차원으로 도모하려했던 미국 이남의 중남미 국가들이 당했던 수모를 생각한다면, 그 끝은 언제나 죽음에 가까웠다. 하지만 민주주의 내에서 우리는 존재의 가능성을 조금이나마 엿본다. 그리고 진정한 민주주의 국가 내에서 그것은 가능해야만 한다.

그래서 <라따뚜이>로 유명한 만화영화 감독 브래드 버드는 가능해야만 하는 것을 다룬다. 그것은 이념을 뛰어넘은 두 존재들의 우정이다. 약 20여년 만에 정식 개봉한 본 작품 덕택에 우리는 오랜만에 정교한 셀 애니메이션의 정수를 느낄 수 있다. 영화가 배경으로 삼는 50년대 냉전이라는 시대상 속에서 구도는 언제나 이분법적으로 나뉜다. 자본주의 진영에서는 사회주의 세력을 악이라고, 또한 사회주의 진영에서는 마찬가지로 자본주의 세력을 악이라 규정한다. 하지만 양자가 크게 다르단 말인가. 본 극의 미장센은 분명 차이가 두드러져야 할 것들의 경계를 불분명하게 흐리며, 또한 양자를 동일시한다. 아이언 자이언트는 우주로부터 날아왔다. 불가해한 어둠으로 뒤덮인 우주, 아이언 자이언트는 칠흑이 내리 앉은 밤에 미국으로 불시착한다. 하지만 어둠으로 가득하고 당시 우주경쟁 속에서 소련이 우위를 택해 더욱 불안으로 가득했던 우주와, 로봇이 불시착한 미국은 과연 크게 다른가. 양자 모두가 어둠에 의한 위협으로 가득하다는 것은 크게 다르지 않다. 또한 호가드는 tv를 보고 있는데, 이내 곧 tv에 송출되는 대중문화의 사운드와 현실의 상황은 동일시된다. tv속에서는 스릴러극이 송출되고 있었는데, 과연 그 위협과 불안은 현실로부터 유리된 것인가. 한편으로 어떤 대중문화는 현실과 마땅히 동화되지 않는다. 그것은 혹여나 발생할지 모를 소련과의 전쟁을 대비하기 위한 방공훈련이다. 이는 tv를 통해 허무맹랑하고도 명랑하게 보도되곤 한다. 머리 위에 보호 장비만 잘 갖추면 살아남을 수 있다는 듯이 말이다. 하지만 우리는 이 같은 낙관주의가 현실에서는 결코 불가능한 것임을, 아무리 평온해 보이는 50년대의 미국이라 할지라도 그 이면에는 불안과 위협이 산재해있다는 것을, 유사한 미장센들을 교차시키는 연출을 통해서 파악할 수 있다.
그리고 밤의 아이언 자이언트가 눈에 조명을 켰음에도 불구하고 쉽게 눈에 띠지 않는 이유도, 결국에는 그 눈의 불빛이 칠흑을 밝히는 주택가의 불빛이나 등대와 유사하기 때문일 것이다. 아이언 자이언트는 발전소를 망가뜨리긴 했지만, 한편으로 그의 눈은 발전소를 대신하여 불빛이 되어준다. 아이언 자이언트와 동일시되는 불빛이라는 상징은 거친 형상임에도 불구하고 그가 결코 위협적이지 않다는 것을 시각적으로 보여준다. 호가스와 강철로봇의 첫 만남에서 두드러지는 것은 소통이 불가능하다는 것이리라. 이 또한 당대를 드러내는 절묘한 장치에 다름 아닐 것이다. 미국은 소련과 철저히 단교하며, 지금까지도 러시아어를 영어로 치환하거나, 러시아어를 사용한다 한들 정확성은 부재한다. 냉전 구도 속에서도 서로의 언어를 이해하려는 노력은 없었고, 그 여파는 지금도 마찬가지다. 독일의 철학자 위르겐 하버마스는 20세기의 무수한 비극들은 소통을 위해 활용되어야 할 이성이, 그 역할을 저버렸기 때문이라고 진단한다. 2차 대전을 이끈 파시스트들은 그들이 제노사이드한 민족들의 언어 및 문화를 이해하려는데 이성을 사용하지 않았고, 이는 냉전 구도 속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서로의 이념과 얽힌 상황은 이성의 고려 사항이 결코 아니었다. 오직 이성은 자국의 이익과 자신들이 믿는 이념을 신봉하기 위한 도구로만 전락하였다. 그래서 하버마스는 우리는 다시금 이성을 소통의 도구로 활용해야한다고 주장하였는데, 본 극도 이러한 이성의 회복에 주목한다. 강철로봇은 호가드가 하나씩 읊어주는 단어들을 배워가고, 또한 아이가 말하는 영어 문장들을 서서히 익혀간다. 인간이 만들어준 로봇의 이성이라 할 만한 판단능력은 오직 폭력성에만 주목할 것을 요구하였다. 허나 로봇은 이에 반하고 그 능력을 소통과 화해에 사용하기 시작한다. 자신이 망가뜨린 철길을 다시금 봉합하는 것도 이러한 의미의 일환일 것이다.

소련에 의해 만들어진 강철 로봇은 아마도 미국에 대항하여 파괴를 일삼기로 프로그래밍 되어있는 듯 보인다. 호가드는 강철로봇에게 영웅 슈퍼맨과 빌런 아토모를 보여주고, 로봇은 슈퍼맨이 되어야만 한다고 말한다. 아이가 말하는 "네가 무엇이 될지는 네가 선택해."는 본 극을 관통하는 가장 인상적인 대사에 다름 아닐 것이다. 호가드와 강철로봇 양자 모두는 철저히 외부의 눈을 피해 숨어야만 한다. 맨슬리와 대화하는 정치인과 군인들의 말을 보자면, 미국 내에서 모든 것들은 모두 미국에 귀속되어야만 한다. 강철로봇은 이 같은 미국의 시선에서 규정된 것이 아니요, 아이도 이러한 로봇과 자유롭게 우정을 틔워가고 있기에, 이들은 결코 드러나선 안 된다. 강철로봇은 이유는 단정할 수 없으나, 분명 무시무시한 폭력성이 내제되어 있다. 하지만 로봇은 이성을 통해 그것을 제어하고, 자신의 판단력은 선한 방향을 향해 사용해나간다. 로봇의 이성은 이를 아이 및 사슴과 교감하고, 예술품을 창작하는데 활용한다. 영화의 또 다른 동일시는 바로 로봇과 인간에 다름 아닐 것이다. 로봇에겐 폭력이 내제되어 있으며, 사냥꾼이나 군인에 다름 아닌 인류도 폭력을 다룰 줄 안다. 하지만 그것을 진정으로 야만적으로 활용하는 것은 과연 누구인가. 또한 군인과 비교한다면 진정으로 자유를 추구하는 것은 누구인가. 냉전구도 속에서 애국심이 프로그래밍된 존재자와, 자신에게 프로그래밍된 것을 거역하고 진정으로 자유롭기를 바라는 존재, 그리고 이와 협력하는 호가드의 여정은 폐쇄적이고 갑갑한 당대에 해방구를 모색하려는 몸부림으로 느껴진다. 이들이 폭압적인 그들의 시선을 피해 하늘로 나아가 진정한 자유를 만끽하는 것도, 결국 지상에서 온당 자유로움이 불가능했기 때문이랴. 물론 그 창공마저 전투기가 가로막음을 통해, 50년대부터 90년대까지 지속되었던 출구 없는 범세계적인 갑갑함을 강조하지만 말이다.
진정으로 자유롭길 바라는 로봇에게 프로그래밍된 폭력성은, 자신을 보호하는 최소한의 저항권으로 축소되고 통제된다. 그 저항권은 생명에도 결부되지만, 자신을 어떻게든 귀속시키려는 미국 내에 투쟁하는 이념에의 저항권으로도 느껴진다. 로봇은 미국이나 소련에서 승인된 존재자가 아닌, 진정으로 자유로운 존재이기를 바라는 것이리라. 오히려 국가에 의해 규정된 존재자들이 원리 원칙적으로 사용하는 폭력과, 국가를 위해 국민의 희생까지도 불사하며 이를 책임지지 않는 태도가 더욱 위협적이다. 후자의 태도는 곧 당대의 선량하고도 무고한 시민들을 옭죄던 매카시즘의 폭력성과도 결부될 것이다. 피해자는 존재하지만 가해자는 자신의 죄를 시대를 빌미삼아 교활하게 회피한다. 또한 당대에 진정한 민주주의를 말하지만, 그저 허울뿐인 그 이면을 들여다보면 전체주의적으로 흘러가던 움직임을 지적하는 것이리라. 그리고 방종하지 않은 진정으로 자유로운 존재는, 자신한테 온당 책임이 없더라도, 일부 그 몫이 존재하는 그 책임을 우직하게 짊어진다. 본 작품이 비추는 20세기 중엽과 제작된 90년대라는 당대, 그리고 본 작품이 리마스터링된 작금에 진정으로 요구되는 삶의 형태는 최소한으로 축소된 존재자의 역할에 다름 아닐 것이다. 우리는 로봇처럼 처음부터 폭력성을 지녔을지도 모르고, 아니면 국가로부터 허용됨으로써 폭력성을 더더욱 체화하였는지 모른다. 허나 로봇에게서 비춰지는 것은 그 폭력성은 제어될 수 있다는 것, 이로써 좋은 영혼에 상응하는 맑은 눈빛을 회복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 눈빛은 쓰레기를 만드는 폭압적인 시선이 아니라, 쓰레기를 예술로 승화시키는 창조력을 가능케 할 것이다. 본 작품 또한 마찬가지리라. 당대를 그저 비춘다면 허름하고도 흉물스런 고물상에 다름 아니었겠지만, 이에 희망과 인간성을 맺히게 만들어 아름다움의 가능성을 엿본다. 무엇보다 그 좋은 영혼들은 마지막까지도 자유로워야만 한다. 파편으로 흩어져있지만 어디에도 귀속되어있지 않은, 오직 귀속된다면 자기 자신의 것일 그 육체는, 아름다운 영혼이 자리한 머리를 향해 자유로운 움직임을 결코 끊이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