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쉘부르의 우산, 자크 드미 감독 특집(1) | ARTLECTURE

쉘부르의 우산, 자크 드미 감독 특집(1)

-황홀한 세계 속의 우리-

/People & Artist/
by 박정수
쉘부르의 우산, 자크 드미 감독 특집(1)
-황홀한 세계 속의 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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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IGHLIGHT


이 비극적인 사랑이야기가 결코 우리와 멀리 있는 것이라 할 수 있을까. 우리가 가상을 통해서 아무리 현실 바깥으로 헤어나가려 발버둥 쳐도, 우리의 운명과 인생으로부터 결코 벗어날 수 없다. 영화는 이 같은 인간의 숙명을 반영한다....



<위플래쉬>를 통해 가학적이고 극단적인 감각성을 표현하고 이를 통해 폭력적인 교육에 대한 경계심을 보여줬던 데미안 차젤은 2016년 하반기에 <라 라 랜드>를 통해서 보다 온건해진 감미로운 감각성을 선보인 바 있다. <위플래쉬>의 감각성이 음악적이라 할 수 있는 운동성과 리듬, 그리고 촉각성을 필두로 전개된 것이라면, <라 라 랜드>의 감각성은 고전 헐리우드 뮤지컬에 영향을 받은 형식미와 색감에 그 뿌리를 두고 있었다. 하지만 <라 라 랜드>를 오롯이 고전 헐리우드 뮤지컬의 동시대화라고 하기에는 석연치 않은 부분들이 존재한다. 고전 헐리우드 뮤지컬에 존재하는 일련의 가상성과 이상성이 <라 라 랜드>에는 부재하기 때문이다. 오히려 <라 라 랜드>의 배경이 미국이기 때문에, 또한 장르가 뮤지컬이기 때문에 우리는 50년대 헐리우드에 본 작품이 뿌리내리고 있다고 섣부르게 판단한 것인지 모른다. 그리고 실제로도 차젤은 <라 라 랜드>가 자크 드미의 <쉘부르의 우산>에 많은 영향을 받고 있다고 말한 바 있고, 자크 드미의 아내인 아녜스 바르다와 존경의 의미로 만나기도 하였다. 그렇다면 <라 라 랜드>에게 직접적인 영향을 준 <쉘부르의 우산>은 과연 어떤 작품인가. 시대상으로는 유사하지만 과연 헐리우드의 뮤지컬과는 어떤 점에서 차이를 갖는가. 또한 작품이 독립적으로 이뤘던 성취는 무엇인가. 차젤은 과연 <쉘부르의 우산>에 어떤 매혹을 느꼈던 것일까.

 

본 작품은 당대 헐리우드 황금기의 뮤지컬 영화들처럼 황홀한 영상미를 자랑한다. 영화의 시작, 마치 비나 구름의 시점처럼 느껴지는 하이 앵글의 구도도 매력적이고, 마치 이들이 굽어보는 듯한 형형색색의 우산들도 대단히 감각적이다. 드미의 다른 작품들에서도 그렇지만 그는 비일상적인 원색을 사용하길 즐겨했으며, 차젤이 그의 작품에서 매혹을 느꼈던 바도 이에 다름 아니었으리라. <라 라 랜드>속 황홀한 색채는 드미가 사용하는 색감과 유사하다. 또한 드미는 이 같은 색채를 단순히 형식미를 고취시키는 것으로만 사용하지 않았다. 그의 색채는 일련의 상징성들이 자리한다. 주느비에브와 기가 향한 무도회장의 채도가 낮은 둔탁한 빨강은 마치 내면으로부터 비롯한 그들의 욕망에 상응하는 반면, 주느비에브의 어머니가 줄곧 입곤 하는 채도가 높은 쨍한 빨강은 그녀가 주느비에브에게 영향 끼치고자 발산하는 에너지에 상응하듯, 색채들은 그가 구축한 공간과 인물들의 성질, 성미들을 드러낸다. 두 연인이 결별하고 찾아오는 겨울의 싸리눈의 차고 흰 색채도 싸늘하게 식어버린 그들의 사랑에 상응할 것이다. 이렇게 색채에 일련의 상징성을 부여하며 구축한 드미 고유의 세계라 할 수 있지만, 한편 그는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을 결코 외면하지 않았다. 그의 세계에는 잿빛과 갈색을 띠고 빛이 바랜 삭막한 인도와 기름때가 자욱한 항구의 배, 사슬들이 포착된다. 추하고 고통으로 가득한 일상을 환기시키는 요소들은 본 극의 황홀하고도 감각적인 미장센으로부터 망각된다. 이 같은 현실유리적인 태도는 기와 주느비에브의 시선에도 상응할지 모른다. 그들이 서로 사랑할 때에는 이 같은 세계의 추가 포착되지 않는다. 하지만 그들이 결별한 이후에 추로 가득한 거리에서 축제와 행렬이 포착되어도, 이를 바라보는 주느비에브는 이 풍경이 결코 아름답지 않다. 사랑의 상실에 모든 풍경들의 아름다움들은 덧없게 변해버린 것이 아닐까.



 

또한 이 같은 현실유리적인 태도는 극의 내부의 시선이 아니라, 드미의 태도와도 연관될 것이다. 극의 시작에서는 분명 고통으로 가득한 우리의 일상적인 추한 풍경을 비춰내지만, 이내 곧 극이 전개됨에 따라서 이 같은 추를 소거하는 작업을 황홀한 영상미로 수행한다. 단순한 뮤지컬 영화가 아니라 필름 오페라와 같은 고유의 장르로 분류되는, 모든 대사들조차 음악화하는 본 극의 청각성에서도 우리가 현실에서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발화를 찾아볼 수 없다. 본 극의 시각과 청각 양자 모두에서는 일상성이 배제되고 있는데, 과연 그는 왜 일상성을 극도로 배격하는 것일까. 이는 극중 인물들의 태도에서 드러난다. 극의 초반, 퇴근을 앞둔 기를 두고 사장은 야근할 수 없느냐고 묻는다. 기는 주느비에브와 연극을 보러 가야하기 때문에 이를 거부하고 다른 직원들도 심드렁하다. 그들은 모두 제각각 예술을 유희하러 간다고 말한다. 누군가는 노래만 주구장창 나오는 오페라 대신 영화를 보러간다고 하고, 누군가는 춤을 추러 간다고 말한다. 이 같은 직원들이 예술을 대하는 태도는 곧 노동, 일상의 망각에 다름 아닐 것이다. 야근을 거부하는 그들은 노동을 연장하고 싶지 않으며, 노동에서 해방된 이후에는 자신의 척박한 현실을 잊게끔 만들어주는 가상으로서의 영화, 몸의 본능을 일깨우는 노래, 춤 같은 예술들에 도취되고 싶은 것이리라. 자크 드미는 그러한 일상에서 벗어나고 이를 잠시나마 망각하고 싶은 영화를 만들고자 하는 것이리라.

 

하지만 그 황홀한 형식의 달큰함과는 달리, 본 극의 서사는 쓰디쓰다. 고전 헐리우드의 뮤지컬들이 내용 자체도 일상의 인물들이 다가갈 수 없는 이상향과 낭만을 제시했다면, 자크 드미의 필름 오페라에는 현실 속 인물들의 사랑과 인생이 담긴다. 차젤이 드미의 세계에서 형식성보다도 가장 큰 영향을 받은 것은 이 같은 정신성에 다름 아니다. 그는 황홀한 가상을 구축하고자 하지만, 그 속을 살아가는 것은 결국 인간이기 때문에, 인간의 불완전하고도 비극적인 속성까지도 외면할 수 는 없었던 것이 아닐까. 그러한 인간들에게 구원으로 다가오는 것은 퇴근시간에 기와 동료들이 언급하는 예술, 그리고 다른 하나는 사랑에 다름 아니다. 그는 사랑을 위해 그 고된 노동을 견뎌낸 것이리라. 사랑이 아니라면 그는 노동을 더 이상 지속하고 싶지도 않다. 그가 제대 이후 주느비에브가 떠나가자, 더 이상 노동을 행하지 않는 태도를 통해서 드러난다. 노동의 중지는 곧 생의 영위 또한 위협받지만, 사랑이 없는 기는 더 이상 자신의 삶에 의미를 못 느끼는 것처럼 보인다. 영화 속 인물들이 노동을 통해 삶을 지속하고자 하는 것은 사랑과 예술을 맛보기 위함에 다름 아닐 것이다. 하지만 예술과 사랑에 의해 도구화 되는 노동과의 관계가 전복되는 것을 영화는 포착한다. 빚더미에 앉게 된 주느비에브의 어머니는 궁핍하고 경제적으로 불완전한 기가 아니라, 경제적으로 부유한 까사르에게 딸을 시집보내려 한다. 사랑에 의한 신성한 결합에 분명 경제적인 요소가 수반되지만, 본 극에서는 오직 경제적인 요소만이 남게 된다. 주느비에브는 일련의 재화에 다름 아닌 보석으로 비유되고, 또한 팔리기를 기다리는 듯한 마네킹들과 동화된다. 그녀의 임신이 까사르와의 혼인을 기다리는 어머니에게 결코 축복이 아닌 것은 당연하다. 기 또한 주느비에브가 떠나감에 따라 자신의 대모를 간병하던 마들렌과 결합한다. 그들의 결합에서 사랑은 찾아볼 수 없다,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판단만이 남게 되었다.

 

앞서 언급한 색채는 진정한 욕망의 대상과 타율적으로 선택하게 된 결합의 대상을 구분하기 위해서도 사용된다. 기와 주느비에브의 결합이 황홀해보였던 이유는 양자가 입은 원색 의상의 찬란함도 한 몫 할 것이다. 하지만 주느비에브가 결코 욕망하지 않는 까사르의 의상이 어떠한 활기, 생기도 찾아보기 어려운 검정이라는 것, 마들렌이 입은 의상 또한 채도가 낮음에 감각성과는 거리가 멀다는 것에서 욕망의 대상으로서 거리가 멀다는 바가 상징된다. 이러한 욕망의 대상은 언제나 자신으로부터 떠나간다. 주느비에브에게서 기는 군복무로 인해서 떠나간다, 그녀의 욕망은 여전히 건재함에도 말이다. 그리고 군 복무 도중 기에게서 주느비에브 또한 떠나간다. 마들렌은 기를, 까사르는 주느비에브를 바라보지만 그들 욕망의 대상 역시 언제나 자신으로부터 떠나간다. 기의 입대 이후 주느비에브가 까사르와 함께 식사하는 자리에서, 한 여인이 편지로 추정되는 종이가 놓인 책상 앞에 고뇌하는 포즈로 앉아있는 회화가 포착된다. 이는 이 같은 욕망의 대상이 떠나감에 막연히 이를 기다리는 수동적일 수밖에 없는 그녀의 심리를 드러낸다. 영화는 자신과 타인과의 관계에 있어서의 거대한 간극을 그려내고, 결국 이 같은 타인의 간극을 뛰어넘지 못함에 무너지는 사랑을 포착한다. 극 속에서 결별은 결국 자신으로부터 떠나가며 이뤄진다. 이 같은 사랑의 무너짐에 두 연인이 띠었던 의상의 감각성 또한 무뎌져 간다는 것도 인상적이다. 갈색과 파랑의 조화가 두드러지던 의상을 즐겨 입던 기와 휘황찬란한 원색의상들의 아름다움을 보여준 주느비에브가 결말에서의 재회에서, 검정 옷과 상복을 입었다는 바는 더 이상 회복될 수 없을 사랑에 대한 추도식처럼 느껴진다. 그리고 이들에게 남은 것은 오직 옛사랑을 그리워하듯 자식들에게 붙인 프랑수아라는 이름, 그리고 감각성을 포기한 채 자본을 선택한 결합뿐이다.

 

허나 이 비극적인 사랑이야기가 결코 우리와 멀리 있는 것이라 할 수 있을까. 우리가 가상을 통해서 아무리 현실 바깥으로 헤어나가려 발버둥 쳐도, 우리의 운명과 인생으로부터 결코 벗어날 수 없다. 영화는 이 같은 인간의 숙명을 반영한다. 드미는 영화 속 노동자들이 퇴근 후에 유희하고자하는 황홀한 가상을 만들어내지만, 알제리 전투나 화폐화되는 당대 여성들의 실상 등을 반영하며 온당 현실로부터 도피하지 않는다. 우리는 결국 현실 속에서 살아야하므로, 한편으로 이 같은 감각적인 원색이 가득한 세계로의 도피가 극 중 내부 인물들의 시선에 상응하는 것이라면, 우리가 나아가야할 방향을 가리키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것이 곧 사랑일 것이다. 어떤 경제적인 굴레에도 얽매이지 않는 순일한 사랑, 고된 노동을 마치고 맛볼 수 없는 감각적인 일탈로서의 사랑에 우리의 세계는 밝고 찬란하게 빛날지 모른다. 영화 속 가장 쓸쓸하게 느껴지는 씬도 기의 입대로 인해 두 연인이 멀리 떨어져, 텅 비게 된 세계를 포착하는 롱숏들이었다. 현실의 추를 소거해내어 아름답고 이상적 요소들로 가득한 세계라 한들 사람이 부재한다면, 그리고 사랑이 부재한다면 그것이 과연 무슨 소용인가. 예술을 유희해야 하는 것도, 사랑에 흠뻑 도취되는 것도 결국 현실의 영역이며, 감각의 세계는 우리의 육체로서 쟁취해야만 한다. 황홀하고도 가슴 아려오는 뮤지컬 영화의 고전, 한편으로 본 극에서 줄곧 어긋나는 사랑은 곧 드미가 투영된 것이 아닐까도 조심스레 추측해본다. 그의 사랑과 성적 지향도 언제나 장벽에 가로막혀 있었고, 어긋남의 연속이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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