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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보라, <벌새> | ARTLECTURE

김보라, <벌새>

-처연한 성장통의 날갯짓-

/Art & Preview/
by 박정수
김보라, <벌새>
-처연한 성장통의 날갯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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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IGHLIGHT


여전히 세계에 대한 아리송한 의문을 가진 표정을 짓고 있지만, 이제는 타인이 아닌 자기 자신을 믿는 듯한 꼿꼿하고도 굳건한 자세로 지상에 두발로 우뚝 서있다. 여전히 가냘프고 처연한 벌새로서 날갯짓을 거두지 못하리라, 허나 이제는 그 날갯짓 비로소 나를 위해서 퍼덕인다, 지금 여기에서 온당 살아있음을 느낄 수 있는 건 나 자신 밖에 없으므로. ...




벌새, 전 세계 조류 중에서 이들보다 더 작은 종을 찾을 수 없다. 세계에서 가장 작은 새, 크기만 본다면 이들은 볼품없고 하잘것없을지 모른다. 하지만 그 어떤 거대한 조류보다도 비행능력이 우수하여, 그들은 결코 지상에 안주하지 않는다. 그들은 생애의 많은 시간을 광대한 창공에 몸 맡긴다. 또한 작은 몸뚱아리에는 찬란한 색채와 깃털을 수놓아 서양에서는 ‘엔젤’과 같은 신성하고도 경건한 이름이 붙여지기도 한다. 작지만 찬란하고 아름다운 새로서 벌새, 하지만 우리는 그들의 생태를 결코 낭만적으로만 볼 수 없다. 그들은 아름다움과 더불어 숭고한 생태를, 생존 그 자체로서 인류에게 보여준다. 끊임없이 비행하기 위해서 엄청난 에너지가 소모되기에, 끊임없이 꿀을 찾아 꽃에서 꽃으로 쉴 새 없이 옮겨 다니는 척박한 생존 그 자체를 벌새들은 보여준다. 또한 결코 대지에 안주하지 않는 애처로운 비행은 지상에 널린 천적들로부터 회피하기 위함이요, 찬란해 보였던 그들의 색채는 오히려 천적으로부터 은폐되기 위한 일련의 보호색에 다름 아니었으니, 벌새의 생태 자체는 무수한 적들로부터 생존하기 위한 애처로운 발전상 그 자체를 보여준다. 멀리서 보기엔 낭만적이고 아름다울지 모르나, 근접해서 본다면 치열하고 숭고한 삶 그 자체를 보여주는 벌새, 한편으로는 우리들도 벌새로서의 삶을 살아가는 것은 아닌가. 과거에도 그랬고 현재에도 그랬고, 아마도 앞으로도 우리는 벌새처럼 먹이를 찾거나, 위협으로부터 회피하기 위해 날개 대신 발을 통해 끊임없이 대지를 질주해야만 할 것이다. 



벌새로서의 치열한 인류의 삶, 김보라 감독은 1994년으로 향해 벌새였고 지금도 벌새일 수밖에 없을 14살 은희라는 소녀의 삶을 담아낸다. 영화의 태도는 리얼리즘을 고수한다. 시각에 있어서 핸드 헬드와 롱테이크를 바탕으로 1994년을 충실하게 구현해낸다. 영화의 오프닝 시퀀스에서부터 주인공 은희를 쫓는 카메라의 태도가 도드라진다. 그녀를 쫓는 리얼한 시선과 발걸음, 허나 영화의 태도는 언제나 은희의 그림자로서 따라다니는 역할만을 고수하지 않는다. 은희가 프레임 모서리 가장자리에 놓여 여백이 강조되고, 쓸쓸함과 고독을 강조하는 구도가 도드라지는 롱숏은 이 같은 그림자로서의 태도와는 거리가 멀다. 그림자로서의 근거리가 친숙함이라면, 공허하고 황량한 원거리의 롱숏은 거대한 세계 속에 내던져진 가냘픈 벌새로서의 은희, 그리고 이 같은 세계 속에 기댈 곳 없는 고독한 벌새로서의 은희의 위치를 강조하는 것이리라. 이 같은 연출을 바탕으로 영화는 오프닝에서처럼 문이 강조된다. 세계가 두려운 듯, 그리고 문 너머 내부의 사람들이 자신의 발화에 응하지 않는 고독이 두려운 듯, 소녀는 문 너머로 나아가기 위해 신경질적으로 몸부림친다. 하지만 이 같은 문 너머로 결코 나아갈 수 없다. 영화 속에서 은희의 가족은 문으로서 단절되어 있고, 문을 넘어서 자리할 그 내면을 마주할 수 도 없다. 부모들은 자식에게서 입시라는 결과만을 바라보기에, 진정으로 염원하는 주체성을 읽어내지 못한다. 이들은 식사자리에서도 대화란 찾아보기 어려우며, 설령 대화가 포착된다 한들 권위적인 가장의 일방적인 요구만이 자리할 뿐이다. 



또한 이들이 하나 되는 것은 단체주문이 들어와 구성원 모두의 손길이 필요할 때만이 한 자리에 모여 합심하게 된다. 자본에 의해서 하나 되고, 이내 곧 다시금 서로는 불필요해지거나 그들이 서로에게 요구하는 표피만을 요구한 채 멀어져만 간다. 그리고 오프닝 시퀀스에서 집 내부를 포착하지 않은 채 바로 학교로 넘어간 편집도 눈여겨 볼 법 하다. 집의 외부로서 현관문만을 줌아웃을 통해 서서히 멀어져가며 포착하다, 이내 곧 학교로 넘어가게 된다. 가정은 물리적으로 가장 가까이 있음에도, 정신적으로 가장 먼 거리에 있는 공간일지 모른다. 하지만 학교도 정신적으로 위안을 얻기는 불가능하다. 영화는 문이라는 상징과 더불어 소리를 통해서 은희를 둘러싼 관계망, 그녀를 규정하는 구조들을 드러낸다. 권위적인 가장과 교실 내의 군주에 다름 아닌 선생님들은 언제나 고성으로 일관한다. 이들만이 오직 온당 그들의 목소리를 낼 수 있고, 이에 굴종하는 구성원들은 이들이 허락한 소리만을 낼 수 있을 뿐이다. 은희는 이에 거역하여 침묵하거나, 은밀히 쑥덕거리거나, 쪽지로 대화할 뿐이다. 위압적인 고성에 가로막혀 아이들은 진정한 자신의 목소리를 상실한다. 여럿이 입을 맞춰 "나는 노래방 대신 서울대 간다."라는 구호로 통일된 목소리 및 발화만이 가능할 뿐이다. 이렇게 아이들은 자유로운 날갯짓을 가로막는 구조로부터 벗어나는 일련의 찰나적인 일탈을 갈구한다. 트램폴린에서 뛰어놀며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는 소녀들, 이들이 진정으로 염원하는 바가 이 같은 구속으로부터의 해방이요, 지상의 구속으로부터의 창공을 향한 비행이리라.



은희가 트램폴린에서 방방 뛰는 것처럼, 그리고 오락실에서 뛰어 노는 것처럼 일련의 하강과 상승의 운동감도 본 극에서는 강조되어 포착된다. 구조에 의해 억압된 초상이 누워있거나 앉아 축 쳐져만 있는 무기력한 하강의 초상으로 포착된다면, 이들이 진정으로 즐거워하는 찰나의 초상들은 언제나 상승하고만 있다. 하지만 세계는 언제나 아래에 있기를, 더욱이 무언가로 그들이 감춰지기를 요구한다. 영화는 당대의 가부장제와 남성우월주의를 고발한다. 은희는 오빠에게, 그리고 친구 지숙은 아빠에게 폭력을 당한다. 그것은 은희에게서처럼 그저 암시적으로만 지칭될 뿐이거나, 지숙에게처럼 마스크로 가려질 것을 요구한다. 이 같은 폭력의 잔상들뿐만이 아니다. 이 같은 폭력에 대한 두려움에 소녀들은 음지로만 향하며 욕망으로부터 떳떳한 존재가 아닌 불온한 존재로 낙인찍힌다. 폭력의 주체들은 두개의 가면을 통해서 자신으로부터 가혹한 존재라는 사실을, 그리고 부정한 존재라는 사실을 지워내려 한다. 이 같은 세계는 대단히 어둡다. 하지만 영화가 상승적인 이미지들을 찰나적으로라도 포착하는 것처럼, 영화는 음지와 어둠을 포착한 이후에는 반드시 양지와 빛을 배치하여, 어떻게든 희망을 포착하는 듯한 편집을 선보인다. 어둠이 자리한 시퀀스로 인해 눈이 침침해져있을 때쯤, 찬란한 자연광으로 가득한 때로는 오락실의 반짝거리는 원색의 조명으로 가득한 시퀀스로 이어지곤 한다. 이렇게 영화는 은희가 바라는 진정한 날갯짓으로서 자유라는 희망을 포기하지 않는다. 



존재들이 진실하지 못함에, 또한 권위적인 가장들이 자식들을 향해 특정 기대감에 찬 눈빛과 시선으로만 바라봄에, 그들의 진솔한 내면, 감정은 둘 데가 없다. 문구점에서 절도가 적발된 이후 은희는 아버지가 두려우면서도, 한편으로는 그에게 관심을 갈구했을 것이다. 하지만 무심하게 경찰서에 보내버리라는 아버지의 무심하고도 가혹한 태도는 은희에게 큰 냉대로 다가왔을 것이다. 또한 친구라 여겨왔던 지숙은 은희를 배신하고 이에 사과하지 않는다. 서로가 같이 선택한 일에 같이 책임져야 할 일임에도 말이다. 진심이라 믿었던 후배는 한 학기가 지나자 맘이 달라져 자신을 향한 마음이 싸늘하게 식어버렸고, 지완은 자신에 대한 믿음을 저버리고 바람을 피운다. 알고 있다는 사람은 400명일 거라 말하지만, 마음을 터놓을 수 있는 사람은 몇 명이냐는 물음에 은희는 결코 대답하지 못한다. 이에 처음으로 마음을 터놓을 수 있는 존재로 한문학원의 선생님 영지가 부각된다. 은희라는 존재가 과연 누구요 또한 그녀의 진정한 목소리는 과연 어떠한지를 영지가 요구한 자기소개를 통해서 처음으로 들을 수 있었다. 은희는 처음으로 의존할 수 있는 존재가 된 영지에게 모든 마음을 터놓고, 또한 영지는 은희에게 수동적으로 맞고만 있지 말고 자기 자신을 위해 저항하라고 말한다. 영지는 은희가 타인을 위해 사는 게 아니라, 진정으로 자기 자신을 위해 살아가야한다는 것을 생애 처음으로 일깨워준 존재에 다름 아니다. 이 같은 존재는 낡은 이데올로기의 존속이 아닌 새로운 이데올로기가 도래해야한다는 상징으로서 읽혀진다. 당대 운동권들이 부르던 노래와 격언을 남기고, 그들이 투쟁하던 공간을 거니는 행동을 통해서 운동권 학생이라는 그녀의 정체성을 부각시키고, 이 같은 진취적인 인사로부터 삶의 방향성을 일깨우고 성장을 도모하며 구시대의 그늘로부터 벗어나는 은희의 삶이 그려짐에 말이다. 



영화는 당대의 부조리한 이데올로기라는 시대적인 특수성과 더불어 모든 인류가 경험할, 보다 보편적인 고뇌라 할 수 있는 고독을 담아낸다. 그리고 이러한 고독에 영화는 죽음에 대한 공포를 섞어낸다. 은희는 자기를 폭행하는 오빠에게 복수를 행하고자 자살을 행하고 그에게 죄책감을 일깨우고자하지만, 소녀는 그 모습이 꼭 보고만 싶다. 죄책감을 느끼는 그 모습을 보고 싶다는 것은 결국 은희의 삶을 향한 의지에 다름 아닐 것이다. 1994년의 은희는 처음으로 죽음에 대한 공포를 경험한다. 귀밑에 난 혹으로 인해 조직검사를 받고 수술을 함에, 죽음과 폭력이 몸에 새겨져 혹시나 자신의 염원하는 삶의 영위가 불가능할까, 죽음에 근접하지는 않을까 염려한다. 또한 처음으로 외삼촌의 부고라는 친지의 죽음을 경험하고, 어머니가 자신으로부터 떠나갈 것만 같은 두려움의 꿈을 꾸기도 한다. 또한 은희의 괴로움은 나로부터 상대방이 사라져감에, 즉 사멸한 것에 다름 아니게 됨에서 기인한다. 자신의 죽음보다도 타인의 죽음으로 인한 고독, 변덕스러운 타인은 언제나 자신으로부터 떠나가기에 필연적인 고독을 배우게 된다. 이러한 죽음은 살아 숨 쉬는 생명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당대 김일성의 죽음은 교착상태로 유지되던 남북관계를 불안하게 요동치게 만들어, 이전 시대의 이데올로기가 어떻게든 변화할 것을 예고하였다. 그리고 본 극의 말미에서 주요하게 다뤄지는 성수대교 붕괴는 기성 이데올로기의 실패를 드러낸다. 소녀가 느끼기에는 너무도 거대하여 실감이 느껴지지 않는 사건들이지만, 이 사건들에 언니 수희나 선생님 영지가 엮임에 소녀는 슬픔을 느끼게 된다. 또한 성수대교 붕괴는 자신의 세계에서 가장 거대했던 존재인 영지를 사멸케 만들어, 자신을 둘러싼 가장 지배적인 이데올로기의 허무하고도 애달픈 죽음처럼도 느껴졌을 것이다. 한편으로 성수대교 붕괴로 인해 사망한 운동권 영지, 그리고 그녀가 거닐던 투쟁현장의 굳게 닫힌 문은 이 같은 기성으로 인해 좌절해버린 진취적인 군상의 비극을 가리키는 것이리라. 



허나 그러한 이데올로기의 붕괴에도, 그리고 나의 세계에서 가장 중요한 존재의 사멸에도 나는 살아있다. 소녀의 눈물과 날갯짓의 끝에는 결국 나 자신이 놓여있었다. 그렇게 나 자신에게로 향한 채로 1994년의 가을은 지나간다. 오직 결과만으로 모든 것이 재단되는 당대의 이데올로기는 폭력까지 비호할 정도로 가혹했으며, 권위와 굴종 하에서 모든 이들은 여러 개의 가면을 갖추고 살았다. 진실한 삶은 지속되지 못했고, 거짓된 삶만이 난립하였다. 그렇게 남루한 삶만이 이어가는 1994년임에도 불구하고 그날의 감독은 빛을 향한 날갯짓을 꿈꾸었고, 또한 절망의 건너편에서 희망을 엿보았다. 누군가가 진심으로 자신의 총체를 이해해줌에 느꼈던 안도감, 누군가의 상실, 거대한 위협과 죽음의 불안 속에서 느끼게 된 삶 그 자체의 소중함에, 폭력과 거짓으로 붕괴되어가던 가정은 다시금 봉합되고 은희라는 벌새는 자기 자신으로부터 삶의 의미를 모색했다. 거대한 비극이 자아낸 잔혹한 소용돌이 아래로 집어삼켜져 영영 들을 수 없게 된 영지 선생님의 이야기, 허나 타인으로부터 언제나 들을 수 있다고 믿는 것이 곧 우리들이 가진 크나큰 착각일지 모른다. 타인으로 향하는 집에 입성하지 못한다는 불안감에 휩싸여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이던 그 나약한 벌새는 결말에 이르러 성장을 도모한다. 여전히 세계에 대한 아리송한 의문을 가진 표정을 짓고 있지만, 이제는 타인이 아닌 자기 자신을 믿는 듯한 꼿꼿하고도 굳건한 자세로 지상에 두발로 우뚝 서있다. 여전히 가냘프고 처연한 벌새로서 날갯짓을 거두지 못하리라, 허나 이제는 그 날갯짓 비로소 나를 위해서 퍼덕인다, 지금 여기에서 온당 살아있음을 느낄 수 있는 건 나 자신 밖에 없으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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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수_영화, 미술, 전시와 같은 시각문화 분야를 향유하고 비평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