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중산책 Walking in the Fog
예고 없이 순간적으로 떠오르는 생각을 붙잡아두기 위해 기둥을 바로 세우고, 틀을 쌓는다. 생각의 공간을 만들고 채우며, 깊이와 색감을 구체화해 나간다. 끊임없이 생성되고 사그라지는 생각의 덩어리들. 의미와 근원을 따질 새도 없이 왔다가 사라지는 생각이 자신의 타당함을 입증 하려는듯 그럴듯한 의도를 덧입히고, 강조하고, 개념을 덧붙인다. 그러나 개별의 생각 덩어리를 근사하게 모아 엮는다고 해서 그 군집을 바르고 명징한 생각, 분별 있는 사고, 합당한 개념이라고 할 수 있을지 의문이 든다.
생각의 시작점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제멋대로 자라난 생각의 덩어리 들은 자발적인 생명력을 얻어 나의 의지와 상관없이 증식한다. 나는 이처럼 생성되고 파괴되는 무용의 생각 덩어리들로 가득 뒤엉킨은 깊은 숲, 안개 속을 헤매인다. 나는 끝없는 생각의 고리를 끊고, 새털처럼 가볍고 이슬처럼 맑은 마음으로 고요해지기를 꿈꾼다.
나의 작업은 무용한 생각의 덩어리들이 생성되고 확장되다가 부서지고, 변형되거나 사그라들어 소멸되는 과정과 닮았다. 인식이 시작된 지점은 중요하지 않다. 펜이나 연필로 가볍게 낙서하듯이 임의의 지점에서 점을 찍어 선을 잇고, 면을 만들어 공간을 형성하고, 확장하거나 뒤틀어서 불규칙한 조형을 그린다. 주변의 흔한 털실과 버려지는 포장지를 잇고, 부수고, 비틀기를 반복 하다가 예고 없이 멈추고 기다린다. 이 과정을 지나다 보면 어느새 소란스럽던 마음이 가라앉고 적당한 리듬을 탄다. 점점 비워지는 마음 속을 산책하듯, 뒤엉켰던 생각이 움직이는 내 손가락을 따라 조금씩 새어 나온다.
- 2020 yiyujuhye <생각의 집을 짓다>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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