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의 미학, 앵티미즘: "우유를 따르는 여인"
HIGHLIGHT 앵티미즘(intimisme)은 ‘친밀한’이라는 뜻을 가진 ‘앵팀 intime’에서 따온 말로, 소소한 일상과 가정생활의 정경을 그린 회화를 말한다. 얀 스테인과 요하네스 베르메르의 풍속화는 서민의 삶 가운데 반복적으로 맞이하는 장면과, 매일매일 수행하는 하찮은 일과를 더없이 귀중하게 그려내고 있다. 그런 면에서 보자면 얀 스테인과 요하네스 베르메르의 풍속화를 모든 삶의 영역이 예배가 되는 '일상예찬'이라 봐도 무리는 아닐 것이다... |
일상의 미학, 앵티미즘: "우유를 따르는 여인"
-(1) 17세기 네덜란드 풍속화와 칼뱅주의-
평범한 사람들의 일상에 대한 관심과 칼뱅주의
앵티미즘(intimisme)은 ‘친밀한’이라는 뜻을 가진 ‘앵팀 intime’에서 따온 말로, 소소한 일상과 가정생활의 정경을 그린 회화를 말한다.
종교적이거나 도덕적인 교훈도 없고 하물며 역사적이지도 않은 소시민들의 삶을 담아낸 앵티미즘은 흔히 20세기 초반 피에르 보나르(Pierre Bonnard)와 에드워드 뷔야르(Edward Vuillard)를 중심으로 전개된 나비파의 양식으로 언급되곤 하지만, 친숙한 일상과 가정적인 실내 장면이라는 주제적인 측면에서 보자면 앵티미즘의 시작은 17세기 네덜란드 풍속화로 거슬러 올라간다.*

요하네스 베르메르, <델프트 풍경>, 1660-1661
17세기 네덜란드 풍속화는 당대의 외교 정치 사회 경제 문화적 배경과 밀접한 상관관계가 있다. 스페인의 지배로부터 완전한 독립을 이룬 후 성취한 사회적 안정, 동인도회사의 활발한 국제무역과 대규모의 남부 벨기에 이민자의 수용에 따라 누리게 된 경제적 번영, 다양한 문화적인 배경을 갖은 사람들이 모여 형성한 자율적인 시민사회는 네덜란드 역사상 가장 유래 없는 황금기를 불러왔다.**
또한 스페인과의 80년간의 투쟁 끝에 종지부를 찍은 네덜란드는 개혁주의의 신앙의 자유를 인정받아 가톨릭이 아닌 칼뱅교(프로테스탄트 종파)를 네덜란드의 국교로 공인하였다. 칼뱅주의에 따라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가시화하는 성상의 사용은 일체 배격되었고 이에 종래의 도상적 종교화는 쇠퇴하고 대신에 풍경화 풍속화 정물화와 같은 세속 미술이 발전하는 계기가 마련되었다.
이들 세속화 중에서도 17세기 네덜란드 시민 사회의 모습을 가장 잘 반영한 회화 장르는 단연 풍속화였다.

얀 스테인, 식전의 기도, 1660
얀 스테인
얀 스테인의 <식전의 기도>를 보자. 교회 예배당의 이콘화나 모자이크, 성모자상에서 경험한 성스러움과 미적 고상함이 어느 평범한 서민 가정의 조촐한 저녁 식탁 위로 옮겨왔다.
하얀 식탁보위에 올려진 빵과 치즈 조각, 투박한 식기에 담긴 두툼한 햄과 고기 조각. 이 일용할 양식을 먹기 전 두 손을 모으고 기도를 올리는 사람들의 모습에는 경건한 신앙심과 진실된 삶의 생기가 있다. 특별할 것이 전혀 없는 매일의 일과 속에서, 그 낯익음 탓에 간과했던 일상의 고유한 아름다움과 향기가 조용히 환기되는 순간이다.
스테인의 또 다른 그림 <성 니콜라스 축제>를 보고 있노라면 절로 미소짓게 된다.
이 그림은 성탄절 전야, 네덜란드에서 가장 중요한 축제의 날인 니콜라스 날을 즐기는 어느 서민 가정의 모습을 담았다.

얀 스테인, 성 니콜라스 축제, 1660-1665
성 니콜라스에게 선물을 받은 아이들은 모두 즐겁고 행복한 표정을 하고 있다. 화면 맨 앞, 한쪽 팔에 사탕이 가득 담긴 양동이를 걸고 인형을 꼭 안고 있는 여자아이의 모습은 너무나 사랑스럽다. 여자아이의 뒤에는 이 집안의 맏이로 보이는 사내아이가 어찌 된 영문인지 서럽게 울고 있다. 사내아이의 우편에 서서 손가락으로 형을 가리키며 키득키득 웃고 있는 남동생의 다른 손에는 너도밤나무 가지로 만든 회초리가 쥐어있다. 보아하니 이 집의 맏형은 올 한 해 착한 일을 하지 않아 성 니콜라스에게 선물 대신 회초리를 받은 모양이다.
요하네스 베르메르(얀 베르메르)
익숙한 일상의 장면에 놀랍도록 아름다운 시정을 담는 것은 베르메르의 예술세계에 강하게 흐르는 정념이다. 렘브란트 다음 세대의 거장들 가운데 가장 위대한 화가로 손꼽히는 베르메르의 그림에는 소재들의 일상적인 성격에도 불구하고 특별한 매혹과 감미로움이 깃들어 있다.

요하네스 베르메르, <우유를 따르는 여인>, 1660
베르메르의 유명한 그림 <우유를 따르는 여인>을 보자. 왼쪽 측면에 난 창문을 통해 따스한 햇빛이 실내로 들어온다. 햇살은 창가 밑 작은 탁자 위에 놓인 정물에 스미고 표면을 반짝반짝 빛내며 그 색을 더하고 실내의 공기를 따스하게 감싼다.
식탁 옆에는 파란 치마에 노란 윗도리를 입은 수수한 모습의 여인이 침착하고 신중한 자세로 질그릇에 우유를 따르고 있다. 모름지기 수만 번은 해 온 일일 텐데도 여인은 단 한 방울의 우유도 흘리지 않으려는 듯 온 정성과 노력을 기울여 자신의 일에 집중하고 있다.
우유를 따르는 사소한 행위, 이 일상성에 아름다움을 부여한 베르메르의 예술관은 <레이스를 뜨는 여인>에서도 고스란히 드러난다.

요하네스 베르메르, <레이스를 뜨는 여인>, 1669-1670
양 갈래로 머리를 따고 노란 옷을 입은 젊은 여인이 고개를 숙이고 무언가에 집중하고 있다. 바늘에 색실을 꾀어 방석이라도 수놓고 있는 걸까? 한편에 밀려난 술이 달린 방석과 양탄자의 무늬들이 햇살을 받아 뚜렷한 색감을 자아낸다. 무엇을 하는지 정확히 알 수는 없으나 하여튼 여인은 온통 일에 빠져든 모습이다. 아주 조용한 가운데 여인이 기울이는 강렬한 주의력만이 방안을 꽉 채우고 있지 않은가.
베르메르의 작품은 우리로 하여금 일상의 단순한 정경을 새롭고 순수한 눈으로 바라보게 만든다.
사소한 일에 열중한 여인들의 모습은 어찌나 엄숙하고 성스러운지 '작은 일에 최선을 다하고 하나님의 일반 은총에 더 주목하라'라고 외친 칼뱅주의의 정신이 가시화된다면 꼭 베르메르의 여인의 모습과 같지 않을까 싶을 정도다.
17세기 네덜란드의 정신을 지배한 칼뱅주의가 모든 직업이 -설사 그것이 아무리 사소한 일일지라도- 하나님이 주신 은사라고 인식하였듯이, 앞에서 살펴본 얀 스테인과 요하네스 베르메르의 풍속화는 서민의 삶 가운데 반복적으로 맞이하는 장면과, 매일매일 수행하는 하찮은 일과를 더없이 귀중하게 그려내고 있다. 그런 면에서 보자면 얀 스테인과 요하네스 베르메르의 풍속화를 모든 삶의 영역이 예배가 되는 '일상예찬'이라 봐도 무리는 아닐 것이다.
*베르메르의 대부분의 작품이(36점 중에서 27점) 실내 정경을 묘사한 점에서 그의 작품이 앵티미즘 경향을 띠고 있다는 사실을 증명한다. 카스그랭, 기욤외(2001), 베르메르, 이승신 옮김, 서울: 창해, p.77.
** 네덜란드의 번영은 많은 부분이 스페인의 압제를 피해 북부 네덜란드 지역으로 이주해 온 남부 벨기에인 들의 덕택으로 이루어졌다. 15만 명에 달했던 이주민들은 학문과 기술, 그리고 자본을 가지고 왔다. 이를 바탕으로 네덜란드 지역의 경제는 활기를 띠게되었다.
[참고문헌]
김리윤, 「노스텔지어의 편린(片鱗)들을 활용한 앵티미스트 회화의 구축: 연구작<Reminiscent> 연작을 중심으로」, 홍익대학교 대학원 미술학과 박사학위 청구논문, 2018
지병림, 「칼빈주의 관점으로 본 요하네스 베르메르 작품 연구」, 경희대학교 교육대학원 미술교육 석사학위 청구논문, 2015
파스칼 보나푸, 최민 옮김, 『요하네스 베르메르』, 열화당, 19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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