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셔널 갤러리의 방들은 어떻게 구성되어 있을까?

내셔널 갤러리에는 미술관측이 제공하는 맵이 있긴 하지만, 언제나 미로같은 곳을 헤매는 느낌이 든다. 때로는 그런 방황 속에서 뜻하지 않은 작품들을 마주치는 즐거움도 있지만, 공간 구성을 잠시 살펴본다.
내셔널 갤러리는 크게 가운데를 중심으로 두개의 윙으로 구성되어 있다. 먼저 왼쪽의 9~29번 방의 구석구석에는 홀바인의 대사들, 아르놀피의 부부, 레오나르도 다빈치, 티치아노, 루벤스, 렘브란트 등 르네상스의 거장들의 작품들이 있다.
오른편, 35~45번 방의 구석구석을 돌아보면, 컨스터블, 피사로, 터너, 쇠라, 반 고흐 등 17~18세기의 작품들과 인상주의 작품들을 만날 수 있다. 그리고 시간상, 여건상 놓치기 쉬운 지하에는 중세와 초기 르네상스시기의 작품들이 걸려 있다.
9~29번 어딘가 사진출처 필자

9~29번 어딘가 홀바인의 대사들, 사진출처 필자

35~45번 어딘가 세잔의 자화상이 보인다. 사람들이 몰려있는 곳에는 대체로 고흐의 그림이 있다. 사진출처 필자
35~45번 어딘가 모네의 그림이 보인다. 사진출처 필자

상대적으로 조용한 지하 C-F 사진출처 필자
필자가 방문했을 당시에는 상설전 외 드가와 카라바지오의 기획전이 열리고 있었다.
Discover Degas & Miss La La
6 June – 1 September 2024
Discovery 기획전 시리즈는 잘 알려지지 않은 걸작을 새로운 시각으로 탐구하는 전시 시리즈라고 한다. 이번에는 드가가 탐구했던 ‘페르난도 서커스의 미스 라라’ 를 중심으로 한 작품들이 있었는데, 드가의 스케치 노트들과 그림들이 정말 인상적이었다.

The Last Caravaggio
18 April - 21 July 2024
카라바조의 나폴리에서의 마지막 몇 년을 이야기 하며 성 우르술라의 순교, 1610, Gallerie d'Italia, Naples 와 세례 요한의 머리를 든 살로메'(1609~10년경) 와 제작설명을 담은 편지 이렇게 심플하게 전시 되어 있었다. 어두운 방 안에 작품 두 점이 갖는 아우라가 사실 어마어마했다.
Salome receives the Head of John the Baptist, Michelangelo Merisi da Caravaggio 1609-10 ⓒthenationalgallery 사진출처 필자
잘 알려지지 않은 작품들 중
내셔널 갤러리에 갈 때 마다 나의 눈을 사로잡는 것은, 사실 고흐의 그림도 그 유명한 아르놀피니의 부부의 초상화도 보티첼리의 작품도, 홀바인의 대사들도 아니다. 별다른 내용 없이 홀로 서 있는 이 거대한 말은 언제봐도 반갑고 경이롭다는 생각이 든다. 어쩐지 슬픈 눈빛을 하고 있지만 사람들로 가득한 그림과 사람들로 가득한 전시장 안에 홀로 우뚝 서 있는 아름다운 말 한 마리. 대부분의 말 그림들은 타고 있는 사람이 주인공이 되는 그림이라면, 조지 스터브스의 이 그림은 한마리 말 자체가 주인공이다. 그를 바라보게 된다.
Whistlejacket, George Stubbs(1762) 사진출처 필자
이번에 돌아봤을 때 성 미카엘이 악마를 때려눕히는 그림이 참 재미있다고 생각했다. 진지한 분위기의 그림 속 악마의 모습이 너무 모던하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마치 요즘의 그림처럼 익살스럽게 그려진 악마가 미안하게도 귀엽다는 생각이 들어 한참을 바라보았다. 이 그림은 15세기 스페인의 작품으로, 여러 패널로 된 제단화 중 중앙 부분이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선이 악을 정복하는 미카엘 천사와 악마 이야기는 중세 후기 미술가들에게 인기 있는 주제였다. 그림은 금빛 배경에 미카엘을 중심으로 그려져 있으며, 그는 금속성의 금빛 갑옷과 붉은 망토를 두르고 있다. 갑옷에는 반짝이는 보석들이 장식되어 있어 상당히 화려하다. 그의 아래에는 회색 옷을 입은 기도하는 사람과 검은 악마가 삼각형 구도로 안정감 있게 배치되어 있다.
색감이 강렬하고 독특하며, 악마의 익살스러운 표현이 돋보인다. 악마의 표정과 자세는 전통적인 악의 이미지를 떠올리기보다는 어딘가 친근하고 귀엽게 느껴졌다. 옛날에 그린 그림인데도 이렇게 현대적이고 익살스러운 표현이 가능했다는 점이 놀라워 한참 동안 감탄하며 바라보았다.
Saint Michael Triumphs over the Devil, Bartolomé Bermejo, 사진출처 필자
9일 동안 영국의 여왕이었던 레이디 제인 그레이. 그녀는 1553년 7월, 에드워드 6세가 죽은 뒤 여왕으로 즉위했지만, 가톨릭 메리 튜더를 지지하는 세력에 의해 폐위되었다. 개신교 신앙을 이유로 반역죄로 재판받은 그녀는 불과 17세의 나이에 1554년 2월 12일, 타워 힐에서 참수당했다.
우연히 지나가다가 그 크기에 압도당해 한참을 바라보던 제인 그레이의 죽음, 지금도 생각하면 가슴이 아득해진다. 사실 제인 그레이의 처형은 실외에서 이루어졌다고 한다. 그렇든 아니든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했을까 싶지만, 권력과 종교에 대해 인간의 존엄성을 짓밟는 인간의 잔인함이란 정말 당시에는 아무렇지도 않은 일이었다.
그저 준비가 되기를 기다리는 사형집행인, 손 쓸 수 없는 무력감에 무너져 내린 시녀들, 그리고 친절한 척 사형대로 그녀를 안내하는 탑의 부관 존 브리지스 경, 유난히 하얀 옷을 입고 하얀 천으로 눈을 가린 레이디 제인 그레이.
그 모습을 보고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The Execution of Lady Jane Grey, Paul Delaroche, 사진출처 필자
사실 내가 내셔널 갤러리에서 이전부터 참 좋아했던 그림은 간달프의 흔적이 있는(?!) 악셀리 갈렌 칼레라의 호수 그림이다.
Akseli Gallen-Kallela, Lake Keitele,1905 사진출처 필자
은빛느낌의 회색 선은 호수 표면을 시원하게 가로지른다. 고요함이 느껴지는 호수. 회색과 푸른색, 흰색이 주제색인 그림 속 왼쪽 위로 단정하게 떠있는 작은 나무섬이 지루함을 덜한다. 호수는 캔버스를 넘어 넓게 펼쳐져질 것만 같다. 면적을 상대적으로 넓게 둔 하단에는 상단의 산과 구름, 하늘, 나무가 반영되어 은은하게 투명하다. 자세히 보다 보면 캔버스 천 질감이 살아있다. 자칫 진지해질 뻔한 회색 톤이, 파란 하늘과 자유로운 형태의 하얀 구름으로 균형을 잡았다.
Akseli Gallen-Kallela 악셀리 갈렌 칼렐라(1865-1931), 핀란드의 화가다. 사실주의 화풍으로 경력을 시작했지만, 이후 칼레발라의 신화적 주제로 관심사를 옮겨갔다. 1890년대에 상징주의와 사실주의 양면에서 모두 상당한 작품을 남겼다.
이 그림은 핀란드 중부 지역의 케이텔레 호(Lake Keitele)에 대해 그 시기 제작한 관련된 네 개의 그림 중 하나다. 19세기 후반 핀란드는 민족주의가 성장하고 있었는데, 러시아 대국의 자치 대공국이었다가 볼셰비치 혁명 이후인 1917년에 독립국가가 되었기 때문이다. 고대 핀란드 민족 시와 신화 Kalevala라는 서사시와도 관련된 풍경이 자주 나타나는데 이는 핀란드 자주주의에 대한 중요한 표현이었다고 한다. 갈렌칼라도 이를 그림의 소스로 사용했다. 하지만, 위의 그림에서는 인물이 나타나지 않는다. 인간 존재의 유일한 흔적은 호수 표면의 지그재그 패턴이다. 이 패턴은 물론 바람과 호수의 흐름에 의해서 나타날 수 있는 자연현상일 수 있지만, 갈렌칼라 자신은 'Väinämöinen배이내뵈이넨*의 발자취'라고 언급했다고 한다. Kalevala의 시인이자 주인공인 그가 호수를 노닐 때 만들어진 풍경이라고.
*Väinämöinen은 J. R. R. 톨킨의 간달프가 된 모델이기도 함
마무리 하며, 사실 내셔널 갤러리는 너댓 번밖에 가보지 않았지만, 갈 때마다 늘 새롭고 약간 당황스럽다. 미술사에 해박한 지식이 없어 스쳐 지나가는 그림들도 많았고, 미술사를 조금 공부하고 나서야 알아차리게 되는 그림들을 발견할 때는 반가운 마음이 들기도 했다. 갈 때 마다 새로운 그림들과의 예상치 못한 만남은 늘 즐겁다. 한국에서는 유물 중심의 박물관인 국립중앙박물관 외에 상설 전시가 지속되는 회화 중심의 미술관이 없다는 사실이 아쉽다. 그래서 내셔널 갤러리처럼 국가에서 설립해 200년 동안 똑같은 그림들을 꾸준히 전시하는 미술관이 서울에도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한 곳에 앉아 그림을 그리고, 사람들을 구경하고, 다시 그림을 보고 또다시 볼 수 있는, 오랜 친구 같은 미술관. 그런 공간이 그립다. 이전 편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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