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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자인이란 무(無)에서 창조하는 것이 아니다. 미국의 창조론자들이 “신, 창조자”라는 개념을 대신하여 “지적 설계”라는 표현을 사용하는 것은 흥미롭다. 이들은 창조와 설계 사이에 존재하는 깊은 간극을 인식하지 못하는 듯하다. 가장 뛰어난 디자이너들조차 백지에서 시작하지 않는다. 디자이너로서의 신은 이미 존재하던 무언가를 재디자인하는 존재에 가깝다. 이는 그의 아들과 성령에게도 더욱 해당된다. 이 둘은 원래부터 잘못된 것을 구속하기 위해 보내진 존재들이기 때문이다. 만약 인류가 “신의 형상대로 만들어졌다”는 표현이 옳다면, 인류 역시 사물들이 창조된 것이 아니라 신중하고 겸손하게 재설계된다는 점을 배워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디자인이라는 개념의 확산은 혁명과 근대화를 대체하는 명확한 신호로 읽힌다. (중략) 디자인이란 기반을 세우거나, 식민지화하거나, 과거와의 단절을 이루는 행위가 아니다. 오만이나 절대적 확실성, 절대적 시작점, 급진적 단절을 추구하는 태도에 대한 해독제이다.“ 3) |
2) 신 역시 이미 망가진 것을 위해 보내졌다: 재-디자인 혹은 재설계라는 해독제
디자인 철학이란 무엇인가? 디자인 철학은 단순히 제작에 있어서만 작동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사용자로서 우리 일상의 주변 물건들을 관찰할 때, 물건을 그저 소비하거나 감상하는 것을 넘어서 디자인의 차원에서 보기 시작하면 물건을 그저 물질인 것으로 넘어서 “things”로서 존재하게 된다. 라투르는 물질이 기호와 의미를 넘어서 서로 간의 연결망, 네트워크에 속하는 하나의 객체로 보는 철학자이다. 이러한 라투르가 생각하는 디자인의 태생적인 겸손함과 신중함은 무(無)에서부터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에서 생겨난다. 디자인이란 처음부터 언제나 이미 주어진 최초의 논쟁으로부터 출발하여, 사물을 생생하고, 사용 가능하고, 사용자 친화적이고, 상업적이고, 접근 가능하고 지속가능한 것으로 개선하는 작업이다. 그러므로 사물은 결코 창조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주어진 문제점으로부터 출발해 조심스럽고 겸손하게 재설계되는 과정에서 구성되는 것이다. 라투르는 신 혹은 그의 이들이나 성령 역시 인류를 재디자인하기 위한 존재였다고 설명하며, 온전한 의미의 창조, 창조자(creator)란 존재하지 않음을 신에 비유해 흥미롭게 설명한다. 이 맥락에 따라서 디자인이란 우리가 근대로부터 계승해 온 절대적이고 급진적으로 단절을 꾀함으로써 빠르게 진보하려는 태도들 해독할 수 있는 “해독제”가 된다. 라투르는 이 해독제로서의 유용함이 자신이 디자인이라는 개념을 지지하는 이유라고 밝힌다.
“과거 네 차례 혹은 다섯 차례의 산업 혁명 동안 설계된 모든 것들이 다시 설계될 수밖에 없었으며, (중략) 같은 물질적 세계이지만, 이제 무언가를 창조한다는 개념이 완전히 달라져야 한다. 사라진 것은 지배의 개념, 즉 의도하지 않은 결과의 신비를 배제하려 했던 그 기이한 지배의 개념이다.” 4) |
해독제로서의 기능 이전에 디자인의 결정적인 장점은 필연적으로 윤리적 차원을 포함한다는 점이다. 우리는 지금 좋은 디자인과 나쁜 디자인을 구분하곤 한다. 우리가 어떤 것을 “디자인 했다”고 말할 때는 그 디자인이 좋은지 나쁜지를 평가하는 것이 불가피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근대주의적인 스타일에서는 좋음과 나쁨의 특성이 물질의 사실 자차원에는 존재하지 않은 것이라 여겨져왔다. 말하자면 “너가 좋아하든 말든, 우리는 여기에 사실(fact)로서 있다”와 같은 태도가 강했던 것이다. 근대주의자들은 어떤 사물이 존재한다면, 이건 좋다/나쁘다의 가치 판단의 필요 없이 그저 기능적으로 존재한다고 보았다. 하지만 디자인의 개념이 확장되면서 사물은 의미와 목적을 담아 설계되기 시작했했고, 나아가 도시나 자연환경, 심지어는 유전자나 뇌와 같이 우리 삶에 단적으로 영향을 미치는 영역까지 설계와 디자인의 영역으로 확장되었다. 이 말은 즉, 디자인이 환경과 사회에 미치는 윤리적인 영향을 생각해야 하는 때가 왔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라투르는 디자인이란 단순히 사물을 (재)설계하는 것을 넘어서서 사물과 사회에 대한 윤리적이고 도덕적인 책임을 따르는 작업이 되었다는 점에서 디자인을 지지할 수 밖에 없다고 주장한다. 더 이상 어떤 디자이너도 디자인의 좋고 나쁨, 디자인에 대한 단순 사실이라는 보호막에 숨을 수 없이 윤리적 고민을 함께 짊어져야 한다.
3) 슬로터다이크의 디자인 ‘구체학’: 존재(Dasein)는 디자인(Design)이다
페터 슬로터다이크의 ‘구체(Spheres)’ 3부작 중 1권의 표지
라투르는 이렇게 제작, 건설, 구축이라는 개념에 비해 얼마나 강력한 개념이며 그것들을 대체하는데 디자인이 어떤 장점을 가졌는지 다섯 가지 이유를 들어 설명한다. 그리고 페터 슬로터다이크(Peter Sloterdijk)의 디자인 철학을 소개하고 적극적으로 인용한다. “존재(Dasein)은 디자인(Design)이다.”는 슬로터다이크를 연구한 철학자 헹크 오스터링(Henk Oosterling)의 문장이다. 독일어에서 존재를 뜻하는 “Dasein(다자인)”은 라투르가 이 글에서 특별히 주의 깊게 소개한 페터 슬로터다이크(Peter Sloterdijk)가 진지하게 탐구해 온 개념이다. 슬로터다이크는 존재가 세계 안에 있다고 할 때, 존재가 무엇 안에(in), 그리고 어디에(where) 있는지를 세부적으로 묻는다. 슬로터다이크는 이런 질문을 발전시켜서 “구체학(spherology)”을 설명한 학자다. 인간이란 세상에 던져진 존재, ‘Dasein‘이다. 그래서 마치 우주복 없이 우주비행사를 우주로 보낼 수 없는 것처럼, 인간 역시 존재하는 모습을 관찰해보면 생명 유지 시스템과 같은 “포장체(envelopes)“, 갖춰진 환경을 갖춰야 만 인간은 숨을 쉬고 살아갈 수 있다. 슬로다이크는 우주복이나 우주 정거장이 인간이 생존할 수 있도록 인공적으로 신중하게 설계되듯이 인간의 생명과 그 삶을 지탱하고 있는 환경, 모든 포장체들은 인공적으로 정교하게 설계된 것이라 본다. 이 포장체는 다소 철학적인 표현일 수 있지만, 예를 들어 예를 들어 출입구, 건축 양식, 음향 환경, 공공 장소, 공기 조절 장치와 에너지원 등 우리 삶을 작동 시켜주는 모든 시설과 환경, 제도와 건축물 등등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므로 라투르는 인간이란 그저 세상에 내던져진 존재, 불안정한 상태임을 동시에 인식하는 동시에 자신을 감싸고 있는 구체, 포장체, 생존에 필요한 인공적인 것들을 섬세하게 설계하고 신중하게 다듬는데 준비한다고 설명한다.
“ 신중한 프로메테우스의 역할을 발명하기 위한 핵심 개념은 ”명확화(explicitation)“이다. 명확화는 포장체라는 개념에서 비롯된 결과로, 이는 분명히 건축가와 디자이너의 관심을 끌 수 있는 용어다. 우리는 포장되어 있고, 얽혀 있으며, 둘러싸여 있다. 우리는 결코 더 큰 외부로 나아가지 않는다. (중략) 지난 세기의 후반부에 일어난 일은 생명 유지 시스템이 하나씩 더 구체적으로 명확해지면서 근대주의가 사라졌다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생태 위기는 더 이상 “외부”가 없다는 점을 천천히, 그리고 고통스럽게 인식하게 되는 과정이다. 생명을 유지하는 데 필요한 요소 중 그 어떤 것도 당연한 것으로 여겨질 수 없게 된 것이다. 거대한 구체 아래에서 살려면 강력한 에어컨 시스템과 강력한 펌프가 필요하다. 근대주의의 구체는 바람이 빠졌고, 근대주의의 운명은 마치 비행선인 제플린이나 힌덴부르크와 비슷한 길을 걷게 되었다.“5) |
근대주의자들은 공기, 공간, 물, 열과 같은 기본 원소와 자원이 항상 존재하여 원하는 만큼 물질을 새롭게 창조하고, 세상과 세계관을 무한히 발전시킬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슬로다이크의 구체학에 의하면 더 이상 발견 가능한 외부는 없다. 이미 근대주의가 무한히 팽창시킨 구체는 바람이 빠져 쪼그라들고 있고, 우리의 눈앞에 다가온 생태 위기는 이 허항된 구체가 몰락하고 있음을 깨닫는 과정이기에 고통스러운 것이다. 현재 우리는 자연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가? 현대 사회에서 자연이란 오히려 도시에 속한 것들보다 신중하게 관리되고, 기술적으로 연출되고, 공을 들여 인공적으로 유지되며, 정교하게 디자인된 인공물이다. 예를 들어 자연공원은 그 자연적인 경관과 야생 동식물을 보호하고 유지하기 위해 정교한 전략하에 관리 된다. 유기농 식품 역시 마찬가지로 기술적으로 마련된 유기농 농법에 따라 키워지고, 당국은 그를 감시 및 감독하며 유기농 인증제를 운영한다. 이렇게 과학과 기술의 지식 역시 인공적인 물질을 설계하고 디자인하는데 쓰이고 있기에, ”더 나은 디자인이 가능할까?“라는 질문은 오늘날 과학 기술 분야를 포함한 우리 모두가 함께 던져야 하는 질문인 것이다.
라투르는 이 지점에서 오해 하지 않도록 한 가지를 명확하게 정정한다. 우리가 디자인이라는 개념을 구축(construction), 창조(creation), 제작(fabrication) 등의 개념보다 중요하게 다루는 이유는 여기서 우리가 말하는 인공성이 반드시 포스트 휴먼(post-human)적인 요소가 아니라는 점 때문이다. 쉽게 말하자면, DNA를 조작해서 GMO 식품을 만들고, 기후를 조절하고, 최신식 가전제품을 만들고, 자연경관을 새롭게 바꿔놓는 등의 삶의 전반에서 이뤄지는 각종 디자인 및 설계는 굉장히 인공적이지만, 이 인공성이 마치 사이보그가 등장하는 디스토피아적 포스트-휴먼적인 세계를 암시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남성적 오만, 지배, 외부로의 기대, 생명 유지 장치가 필요 없는 외부 공간으로 탈출하는 꿈, 자연으로부터의 근본적인 탈피“6) 등 근대주의자들이 보인 영웅적이고 거대한 몸짓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지만, 여기서 현대의 디자인이 근대주의적인 것과는 거리가 멀다고 하더라도, 과거 근대주의자들이 확보한 방식과 당시의 혁신적인 요소들을 그저 단절하는 것은 ’재‘디자인의 행위와는 어긋난다는 것이다. 재설계는 이미 주어진 문제로부터 출발하는 것이라 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라투르는 보존(conservation)과 혁신(innovation)이 혼합된 낯선 방식으로 이 지구를 재구성해야 함을 주장한다.
프로메테우스는 과연 신중하게 지구를 재설계할 수 있을까?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 디자인 철학을 세워야 할까? 특히 생태적 고려가 요구되는 동시에 필연적으로 인공성에 기반한 여건에 놓인 디자인의 철학은 어떤 방향을 가져야 하는가? 라투르는 생태적 질문이 모든 종류의 직관에 반하면서 확산하는 특성을 가진다고 본다. 생태에 대한 고려와 이해는 정치적 논쟁과 상황과 함께 대두되겡, 생태에 대한 질문은 정치적 난제까지 내포하기 때문이다. 생태를 인지하고 생태적 문제를 고민하는 것은 단순히 자연과 생태계에 대한 질문을 넘어서서, 그 과정에서 우리가 지금까지 물질적 존재를 보아 온 세부적인 방식과 사항을 변경하기를 요구하기 때문에 끊임없이 우리 사회에서 논쟁의 대상이 되는 것이다. 이런 논쟁적 상황에서 라투르가 제안하는 디자인의 과제는 다음과 같다.
CAD 뷰어 화면
디자인 혹은 건축 설계를 경험해 본 이들이라면 모두 어도비 일러스트레이터, CAD 등과 같은 프로그램을 사용해보았을 것이다. 디자인은 오랜 과거부터 가상의 세계에 디자이너가 생각하고 있는 개체를 그리기 위한 실용적인 기술을 발명해왔다. 과거에는 원근법, 투영기하학, 이제는 건축 도면, 청사진, 프로토타입과 같은 실용 기술들을 활용해 디자이너 및 건축가들은 객체를 그리고, 시뮬레이션을 만들고, 손쉽게 확대 및 축소하며 객체를 조작한다. 3D 공간 안에서 움직이는 객체들은 일종의 컴퓨터화 된 ”확장된 실체(res extensa)“에서 부유하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그 누구보다 객체들이 간편하게 움직이는 이 가상의 공간이야말로 가장 비현실적인 공간임을 알고 있다. 라투르는 이에 대하여 그 가상의 비현실적인 3D 공간에서 객체(Gegenstand)를 그릴 수 있어도, 이 글에서 계속 말해온 존재를 갖는 사물(Ding)을 그리지는 못한다고 지적한다. CAD를 통해 우리는 ”객체를 그리는 방법은 알고 있지만, 사물을 그리는 방법은 모른다.“7) 기술을 활용해 머릿속으로만 상상하는 오브제를 그려내는 과학적 시각화는 발전해왔지만, 그 물질을 둘러싼 이슈가 가진 모순적이고 논쟁적인 본질을 시각적으로 표현하는 도구와 기술은 발전해오지 못한 것이다. 그러므로 라투르는 생태 활동가들이 예상하는 만큼의 파급력을 가진 변화가 이뤄지려면, 당면한 문제들이 가진 모순과 논란의 본성을 ”재현(represent)”해줄 시각화 도구, 혁신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모순과 논란을 보여줄 수 있는 시각화 도구는 어디에 있는가? 이 도구가 마련되기 위해선 단순히 근대주의적 관점이 저지른 횡포를 비판하거나 타파하기만 해선 안된다. 여기서 라투르의 입장이 상당히 흥미롭다. 그동안 우리가 접해온 대안적 디자인, 대안적 건축 설계는 주로 기성의 스타일과 근대주의적 태도에 대한 비판, 해체, 우상파괴적인 방식을 취해왔다. 하지만 라투르는 이런 방식으로라면 대체 가능한 디자인을 찾을 수 없을 것이라고 분명히 말한다. 필요한 것은 근대주의적인 혁신에 숨겨져 있는 실천을 포착하는 도구이며, 그것을 보존하여 지금의 혁신과 재조합하는 것이다. 혁신은 단절이 아닌 보존으로, 먼 포스트 휴먼적 미래가 아닌 과거로부터 발견될 수 있다.
“나는 프로메테우스를 위한 또 다른 CAD 디자인을 제안하는 것이 아니다. 내가 요구하는 것은 신, 비인간, 인간을 포함한 사물들을 함께 그리는 방법이다. 왜 이게 불가능한 작업이어야만 하는가? 왜 수 세대에 걸쳐 예술가, 엔지니어, 디자이너, 철학자, 장인, 활동가들이 사실의 문제(matters of fact)를 위해 만들어낸 강력한 시각적 어휘가 당면한 우려되는 문제(matters of concern)를 위해서도 고안될 수 없는 것일까?”8) |
우리 모두 어떤 의미에서 이 세계 만들기에 참여하고 있는 디자이너다. 미적 판단을 수행하는 일상의 모든 순간에서 우리는 사물과 자연, 환경과 세계 안에서 디자인이라는 행위를 무의식적으로 수행하고 있다. 여러 오해를 다잡고, 적극적으로 설득하는 태도의 라투트의 이 글이 결정적으로 제안하는 바는 “신중한 프로메테우스”로서 디자인을 인지하고, 수행해보자는 것이다. 이 신중한 프로메테우스가 됨으로써 우리는 동시대의 제작자, 관람자, 소비자, 혹은 한 인간으로서 생태와 디자인, 미학을 진정으로 화해시킬 수 있을까? 동물들에게 영웅처럼 모든 선물을 써버린 충동적이고 즉흥적인 에피테메우스가 사후에 결과를 깨달았다면, 그 이름에 ‘pro-’라는 접두어가 붙은 프로메테우스는 미리 미래를 예지하였다. 하지만 예지가 가능함에도 신의 권능에 도전할만큼 인류 문명이 발전하는데 핵심적인 선물을 준 죄로 프로메테우스는 끔찍한 형벌을 선고 당했다. 결국 서로 다른 성향의 두 형제가 결국 서로의 단점인 동시에 장점이 되어준 것처럼, 디자인은 이미 벌어진 결과에 천착하지도, 앞으로 벌어질 미래를 그저 예언하기만 해선 안되는 현재의 작업이라고 말해야 할 것이다. 디자인은 과거의 해독제이자 미래의 설계도. 이 해독제와 설계도를 적극적으로 삶에 들일 때, 지속적이고 적응 가능한 환경이 비로소 어떻게 마련될까? 이 글의 던진 여러 물음표 중 하나라도 궁금한 “디자이너”가 있다면, 꼭 라투르의 이 글을 읽어보길 추천한다.
각주 1) Yuriko Saito, 「Everday Aesthetics and world-making」, 2011. 참고. 2) 브뤼노 라투르는 자신의 개인 웹페이지를 통해 자신의 대부분의 작업물을 공개해두었다. 웹 페이지에서 누구나 공개된 브뤼노 라투르의 글을 다운로드 할 수 있다. 이 글은 2008년 영국의 ‘Design History Society’가 매년 주관하는 연례 국제 컨퍼런스에서 라투르가 키노트 렉쳐로 발표한 내용의 발표문에 해당한다. http://www.bruno-latour.fr/node/69 3) Bruno Latour, 「A Cautious Prometheus? A Few Steps Toward a Philosophy of Design(with Special Attention to Peter Sloterdijk)」, 2008, p. 5. 4) Ibid, p. 6. 5) Ibid, p. 9. 6) Ibid, p. 11. 7) Ibid, p. 12. 8) Ibid, p. 13. |
이미지 및 웹사이트 출처 잔디 이미지: https://www.gettyimages.com/photos/lawn-mowing-dad Jan Cossiers, <Prometheus Carrying Fire> 작품 이미지: https://www.greekmythologyinart.com/prometheus-carrying-fire-cossiers.html 페터 슬로터다이크의 ‘구체(Spheres)’ 3부작 중 1권의 표지 이미지: https://www.suhrkamp.de/rights/book/peter-sloterdijk-spheres-iii-fr-9783518414651 CAD 뷰어 화면: https://kr.dwgfastview.com/cloud/windows/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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