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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미주의의 중심에서, Jean-Honoré Fragonard | ARTLECTURE

유미주의의 중심에서, Jean-Honoré Fragonard

-고연정의 15분 10화-

/Artlecture/
by 고연정
유미주의의 중심에서, Jean-Honoré Fragonard
-고연정의 15분 10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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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코코 ! 화려함과 경박함에 가까운 가벼움 등의 이미지를 떠올리게 만드는 이 단어는 사실 예술사조를 의미하기 보다는 18세기에 유행한 스타일이라 말하는 것이 더 적합하겠다. 루이 15세 치하의 시절 유행했던, 자연에서 따온 건축 장식 스타일 (조개껍데기, 바위, 나뭇잎 등)을 의미하는 ‘Rocaille’에서 그 어원을 대신하고 있으니 말이다.


이러한 스타일의 선두에는 단연 장 앙투안 바토가 있었다. 적은 작품 수에도 불구하고 그가 18세기 프랑스 예술과 미의 취향에 있어 남긴 업적은 무시하기 어렵다. 바토는 자연풍경 속에서 화려한 옷을 입고 목가적인 전원생활을 즐기는 장면이나, 연극 복장을 한 인물들이 귀족들과 대화를 나누거나 음악을 연주하는 장면 등을 남겼다. 이러한 장면들은 당시 회화 장르의 구분에 있어 어느 장르에도 속하지 못했으니, 그가 1717년 왕립회화조각아카데미에 < 키테라 섬으로의 순례 >로 입성했을 때 아카데미는 바토의 회화 장르를 ‘페트 갈랑트’라 명명하기에 이른다.[1]

 


Jean Antoine Watteau, Pèlerinage à l'île de Cythère, 1717, huile sur toile, 129x194cm, Musée du Louvre, Paris, France.

© 2010 RMN-Grand Palais (musée du Louvre) / Stéphane Maréchalle



바토의 아카데미 입성의 배경에는 프랑스 상류사회 핵심세력의 변화와 그로인한 예술 취향의 역전이 있었다. 태양왕이라 불리울만큼 강력한 왕권을 가졌던 루이 14세, 그는 왕권강화에 필요한 역사화와 종교화를 중요시했다. 교육이 부족한 이들에게 왕이 추구하는 내용을 효과적으로 전달하기에 예술은 얼마나 좋은 소재인가. 내용전달이 목적인 회화였기에 소묘는 아카데미 교육의 핵심과제가 될 수밖에 없었다. 르 브륑은 소묘를 중요시했던 푸생 파였고, 색채를 강조한 루벤스 파에 속한 아카데미 회원들은 그들의 소묘중심주의 이론에 맞설 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 논쟁은 아카데미 고문 로제 드 필의 루벤스 회화를 향한 극찬으로 인해, 승리의 여신이 색채주의의 편에 서는 했다. 이후, 1714년 루이 14세의 서거로 그의 너무 어린 후계자 루이 15세 대신 필리프 2세 오를레앙 공이 섭정을 맡게 된다. 오를레앙 공은 모든 장식 양식을 루이 14세가 추구했던 고전적이고 웅장한 바로크 양식에서 그 의미도 외관도 가벼운 로코코 양식으로 바꾸어 나가기 시작한 것이다.


 


François Boucher, Le Jardin chinois, 1742, Peinture sur toile, H. 40,5 cm ; L. 48 cm ; Besançon, musée des Beaux-Arts et d’Archéologie 

© RMN-Grand Palais / Gérard Blot

 


이러한 배경이 있었기 때문에 바토는 새로운 회화 장르를 일구어 내면서까지 아카데미에 입성할 수 있었다. 페트 걀랑트는 상류계층의 축제의 의미로 사용되어 왔는데, 것을 회화 장르 중의 하나로 바꾼 것은 그만큼 귀족 취향이 가진 강한 세력과 아카데미 권위의 실추를 의미한다. 이러한 바토의 예술적 명맥을 이은 프랑수아 부셰의 회화에서도 이러한 귀족 취향이 명백하게 드러난다. 쌩 뤽 아카데미에 소속했던 아버지를 도와 그림을 배우고 그의 나이 17세게 프랑수와 르무안의 제자가 된 그는 1723년 아카데미의 로마대상에 수상하며 이탈리아로 유학을 갈 수 있게 된다. 그러나 앞서 말한 정세의 변화로 인해 부셰의 유학은 미뤄진다. 이때 그는 바토의 수많은 드로잉을 판화로 옮기는 작업을 하게 되는데, 이 일로 인해 부셰의 양식이 로코코화 된 것이다. 특히 그가 1742년 살롱전에 선보인 8점의 회화는 당대 귀족들 사이에서 유행이었던 중국 예술품 수집열기를 그대로 드러내고 있는데, 그 중 < 중국(식) 정원 > 은 당시 프랑스 회화가 얼마나 ‘아름다운 것’만을 추구했는지 명백하게 보여준다. 



Jean-Honoré Fragonard, Le grand prêtre Corésus se sacrifie pour sauver Callirhoé (Pausanias, VII, 21), 1765, 3.09mx4m, huile sur toile, Musée du Louvre. 

© 2015 RMN-Grand Palais (musée du Louvre) / Franck Raux

 


이러한 부셰의 제자로 훈련을 받은 것이 바로 장 오노레 프라고나르이다. 프라고나르는 앞선 바토와 부셰와는 달리 너무 늦게 로코코 시대에 입성했는지도 모르겠다. 1765년 < 칼리르오에를 구하기 위해 희생하는 위대한 성직자 코레수스 >로 아카데미에 입회한 그는, 이어 로마대상까지 수상하며 이탈리아 유학길에 오를 수 있었다. 런던 왈라스 컬렉션의 소장품 중 하나인 그네는 프라고나르의 회화적 표현이 얼마나 환상적인 경지에 이르렀는지를 보여주는 회화이다. 



Jean-Honoré Fragonard, Les Hasards heureux de l'escarpolette,

1767-1769, 81x64cm, Huile sur toile, The Wallace Collection, Londres.

© The Wallace Collection




수풀 속에 비스듬히 누은 남자의 묘사는 바토 특유의 인물 포즈이지만, 이 남자인물이 향하는 시선의 끝에 그네를 타고 있는 여자의 드레스 속이 있다는 것을 금방 인지하게 된다. 여자의 신발은 허공을 향해 벗겨져 날아가고 있는데 이 것은 이 여자의 순결에 대한 명백한 은유이다. 이 작은 크기의 회화에 화려함, 경박함, 에로틱함이 모두 담겨 로코코 취향이 무엇인지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루브르에서 만나볼 수 있는 빗장 역시 로코코 양식의 만연함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유혹의 한 장면을 묘사한 이 회화는 Le Marquis de Véri가 주문한 것으로, 목가 시적인 서정적 분위기를 다루던 프라고나르에게 마치 이야기의 한 장면을 보는 듯한 서사적 표현은 어려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남자는 강하게 여자의 허리를 끌어당기는 동시에 빗장을 걸어 잠그고 있으며, 여자가 빗장을 잠그는 남자의 손을 향해 뻗은 손과는 반대 방향으로 얼굴은 떨어지고 있다. 손과 얼굴의 상반된 방향 표현 만으로 체념의 감정을 표현한 것이다. 붉은색의 무거운 천은 이 다음 장면이 이어질 공간, 침대를 강조하듯 암시한다. 이어지는 침대 모서리 위의 흰색 천 위에 놓인 빨간 사고, 은유적으로 원죄를 암시한다. 



Jean-Honoré Fragonard, Le Verrou, vers 1777-1778, Hauteur : 0,74 m ; 

Hauteur avec accessoire : 1,04 m ; Largeur : 0,94 m ; Largeur avec accessoire : 1,22 m, huile sur toile, Musée du Louvre. 

© 2010 RMN-Grand Palais (musée du Louvre) / Stéphane Maréchalle

 


사과는 인간, 그리고 남녀의 성적 행위의 도덕적 교훈을 주기위한 회화적 장치로 사용되곤 하는데, 빗장에서도 그런 요소로 쓰였을까 ? 하는 의문이 든다. 빗장은 목자들의 경배에 한 쌍을 이루고 있는 작품이다. 그렇기 때문에 종교적 사랑과 세속적 사랑이라는 상반된 주제의 짝을 이루어 서로의 주제를 강조하려는 의도가 있다. 그러나, 이러한 해석은 다소 표면적 해석이라는 인상을 주는데, 프라고나르의 자유분방한 묘사가 세속적 사랑을 향한 도덕적 경계보다는 빗장을 걸어 잠그는 남자와 그의 팔에 안겨 있는 여자를 더 강조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점 때문에 혹자는 빗장에 드러난 도덕적 요소는 주문자의 요구에 맞추었을 뿐이며 사실 화가의 의도는 회화의 장면 묘사에 그 중점을 두고 있어 이것이 세속적 사랑과 윤리적 경고라 보는 것은 어렵다 말하기도 한다.




Jean-Honoré Fragonard, L'Adoration des bergers, vers 1775-1776, Hauteur : 0,73 m ; Hauteur avec accessoire : 0,98 m ; 

Largeur : 0,93 m ; Largeur avec accessoire : 1,17 m, huile sur toile, Musée du Louvre. 

© 2010 RMN-Grand Palais (musée du Louvre)

 


이러한 프라고나르의 자유분방함이 문제였는지, 아니면 1765년에서야 아카데미에 입회하였으니 그 시기가 늦은 것인지 모르겠다. 1770년 루이 15세의 마지막 정부가 된 뒤 바리 부인은 이를 기념하는 루브시엔의 건물 살롱의 장식을 위해 프라고나르에게 그림을 주문한다. 이때 프라고나르가 완성한 사랑의 과정을 의미한 네 개의 그림은 명백하게 바토의 영향을 나타내고 있었고 이는, 뒤 바리 부인에 의해 거절당하고 만다. 뒤 바리 부인의 건물은 새로운 유행 양식을 따르고 있었고, 로코코의 정수였던 프라고나르의 그림은 모순적이게도 과도하게 로코코 적이라 거부당한 것이었다. 이 후 그는 1773년 이탈리아로 떠나게 되었으나, 유행의 흐름에 다라 신고전주의 양식을 시도하게 된다. 그러나, 그의 회화와 귀족사회와의 관계나 너무나 명백했기 때문에 외면 받을 수밖에 었으며, 1791년 신고전주의의 정수에 있었던 자크 루이 다비드의 도움으로 얻은 박물관 관리직도 6년 후인 1797년 직위해제 당한다. 너무나 짧았던 그의 화려하고 성공적인 예술 경력이 마치 로코코 양식의 흐름과 닮아 있는 것은 우연일까 ? 프라고나르의 작품을 다시 한 번 들여다본다. 바토의 작품에서 느껴지던 멜랑꼴리함 조차 희미한, 로코코가 흠뻑 담겨져 있는 듯한 작품이라 그가 느꼈을 좌절감이 역설적으로 다가온다.

 

참고문헌

DUPUY-VACHEY Marie-Anne, Fragonard, Paris, Terrail, coll. « Sm’art », 2006.

FAROULT Guillaume, Jean-Honoré Fragonard : Le Verrou, Paris, Réunion des musées nationaux / musée du Louvre, coll. « Solo » (no 37), 2007.

FAROULT Guillaume, Fragonard amoureux : galant et libertin, cat. exp. (Paris, 2015-2016), Paris, Réunion des musées nationaux – Grand Palais / Gallimard, coll. « Découvertes Gallimard », 2015.


[1] <키테라 섬의 순례>에 대해서는 ‘15분 5서정으로의 도피, Antoine Watteau’편: 참고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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