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lecture Facebook

Artlecture Facebook

Artlecture Twitter

Artlecture Blog

Artlecture Post

Artlecture Band

Artlecture Main

밀로라드 크르스틱(Milorad Krstic), <미션 임파서블: 루벤>(Ruben Brandt, Collector) | ARTLECTURE

밀로라드 크르스틱(Milorad Krstic), <미션 임파서블: 루벤>(Ruben Brandt, Collector)

-수동적 감상자에서 능동적 큐레이터로 거듭나기-

/Art & Preview/
by 박정수

밀로라드 크르스틱(Milorad Krstic), <미션 임파서블: 루벤>(Ruben Brandt, Collector)
-수동적 감상자에서 능동적 큐레이터로 거듭나기-
VIEW 1207

HIGHLIGHT


이러한 억압은 꿈에서 나타난다. 의식적으론 기억나지 않는 억압의 기원이 꿈에서 현시된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루벤이 의식이요 코왈스키가 무의식이라면 양자, 코왈스키가 루벤을 인지하면서부터 억압이 해소되는 이유가 여기서 기인하리라.

“우리는 항상 진실을 찾아 헤매야 하지만 이미 근원적 진실을 상실해버린 우리에게 그 진실은 괴로움만을 준다. 현실에 안주해 있는 우리는 그 진실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오히려 그 진실을 억압해버린다.” 

-자크 라캉-


한 인간의 삶과 끝, 유년기부터 노년에 이르기까지, 하나의 인생에는 억겁의 억압이 탑처럼 쌓여 있다. 한 개인에게 잠재된 무수한 억압을 전부 파악하기 어렵다. 일부는 의식적으로 신경 쓰며 행동에 반영될지라도, 이에 가려진 무수한 억압들은 기억조차 하지 못한다. 하지만 억압은 마냥 묻혀있지 않다. 꿈은 그날의 일, 걱정, 망상 등을 반영하기도 하지만, 우리가 신경 쓰고 있지도 않은 먼 과거의 억압을 우리에게 현시하기도 한다. 또 우리가 때때로 행하는 실수들이 억압의 발현이라 정신분석학자 프로이트는 주장하며, 억압과 좌절이 극심해지면 자신을 보존하고자 특정 요인에 집착하는 고착적인 신경증으로 발전되기도 한다. 그래서 우리는 억압을 말하는 무의식의 언어를 의식의 언어로 번역하고, 언어에 수반된 억압의 증상과 행동이 어떤 시공간에서 발생했음을 밝혀내고, 이와 유사한 상황을 형성하여 본 행동이 해소될 수 있게끔 유도해야 한다. 어쩌면 특정한 시공간에서 살아가는 인류를 지배하는 소수의 이데올로기가 허용하고 금하는 제도에 의해, 사람들은 공통된 억압과 이에 따른 신경증을 겪을지도 모른다. 하나의 패러다임이 비교적 오랜 세월을 지배했던 미술사도 그렇다. 중세시기에 미술은 기독교에 종속되어 있었다. 종교지도자, 귀족, 왕, 이들을 뛰어넘는 창작 열망은 좌절되었으랴. 이후 르네상스부터 바로크, 신고전주의까지 이르는 시조에 휴머니즘이 해방되었으나, 여전히 하나의 주요한 가치는 미메시스, 바로 재현이었다. 엄격한 재현에서 벗어나는, 또 고대에 길어낸 원칙들에서 벗어난 표현법은 모두 좌절되었으랴. 그리고 인상주의부터 추상표현주의까지 이르는 모더니즘의 시기의 패러다임은 회화의 본질로 연구된 물질성, 2차원성의 추구였다. 그래서 다른 걸 표현하고 싶은 손과 작품을 다르게 바라보고자 하는 눈은 억압의 대상이 되었다. 이러한 정신분석학과 미술사의 명화들을 인용하며, 이를 하이스트 무비로 버무려내는 아트메이션, <미션 임파서블: 루벤>에서 추구하는 해방도 이러한 억압과 연관될지 모른다.     





이를 연출하는 밀로라드 크르스틱은 1952년 슬로베니아 태생으로, 동유럽에서 활동하는 화가이자 애니메이션 감독이다. 화가로서 크르스틱과 애니메이션 감독으로서 크르스틱은 서로 유사한 색채를 보인다. 화가로서 그는 초현실주의, 표현주의, 신즉물주의 중 오토 딕스의 화풍에 영향을 받아, 자연적 대상의 왜곡, 무의식과 꿈, 과감하고 거친 표현을 일삼곤 한다. 이 같은 화개로서의 색채가 그의 단편 만화영화 <마이 베이비 레프트 미>까지 이어지고 있다. 크르스틱은 흡사 누군가의 '꿈'을 훔쳐보는 듯한, 비이성적으로 대상이 변이되고 숏이 연결되는 단편을 선보였다. 탱크, 전투기, 기차 등 직선, 딱딱한 조형성이 강조되는 사물들과 풍만한 곡선으로 변형된 인간의 조형성이 병치 된다. 양자는 엄격하게 나뉘어있지 않고, 서로가 서로에게로 자유로이 연상되고 변이된다. 이 같은 기계와 인간의 병치를 토대로 크르스틱은 흡사 뒤샹의 <그녀의 독신자들에 의해 벌거벗겨진 신부>를 연상케 하는 작업을 수행한다. 뒤샹이 인간이 거부하지 못하는 성욕을 맹목적인 기계장치의 반복적인 움직임에 비유했던 것처럼, 크르스틱도 기계 장치의 수축과 이완을 인간의 성에 빗댄다. 영화의 움직임은 수축과 이완이 주를 이루며, 인류의 호흡과 성행위를 반복적으로 표현한다. 이를 통해 호흡만큼 인간에게 필수 불가결한 요소가 성임을 강조한다. 호흡뿐만 아니라 성교를 나누는 인간이 필름화되어 영사기에 빨려 들어가 다시 상영되는 것처럼, 인류에게 성애는 언제나 보존되고 반복될 수 있는 것이다. 그 결과물이 영화의 결말에 이어지는 꽃, 나뭇잎, 아이의 울음소리에 다름 아니요, 이내 곧 거대한 입에 먹혀들어 갔다가 다시 태어나는 등, 삶과 성애, 그리고 탄생과 죽음은 거대한 대순환을 이룬다.      


또한 에펠탑, 피사의 사탑, 전투기, 탱크, 기차 등의 운동과 성교를 나누는 사람의 이완, 수축은 서로 이어지고 있는데,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기술 문명이라 할지라도, 그 원동력은 인류의 본원적 욕망에 바탕을 두고 있다는 것을 밝혀낸다. 이렇게 기술과 욕망, 인류사와 성을 정신분석학적인 시야에서 엮어낸 크르스틱은 이제 그 시선을 예술로 이어온다. 일단 본 작품의 연출부터 살펴보자. 영화의 도입부, 자신의 몸을 이완·수축하며 느리게 이동하는 달팽이가 포착되고, 이후 텅 빈 철길을 위압적인 속도감으로 가득 채우는 기차의 질주가 연이어 포착된다. 본 도입부는 앞으로 펼쳐질 영화의 연출을 함축해서 보여준다. 바로 느림과 빠름이라는, 양극단에 놓인 속도, 리듬감을 교차 배치하여, 대비 속에서 양자의 자극을 극대화하는 편집이다. 줄곧 느리거나 빠른 감각만 반복되면 이내 곧 자극은 보편적으로 익숙해지지만, 극단적으로 다른 두 개의 감각이 줄곧 교차하며 하나의 감각에 보편적으로 안주하지 않게끔 만든다. 극단적인 리듬감, 속도감을 줄곧 대비하는 연출과 함께, 영화는 특정한 차원에만 머무르지 않으며 여러 영역을 오간다. 영화는 하나의 차원에 머물러 정체되어 있지 않고, 서로 상충되는 여러 경계들의 경계를 허문다. 꿈과 현실, 가상의 예술 작품과 실재 등, 서로 다른 차원을 이어내는 편집이나, 현재로부터 과거로 향하는 플래시백은 매우 즉흥적이고 거칠어 경계를 파괴하고 있는데, 분리되어 있지 않고 서로 긴밀하게 영향을 주고받는 차원의 관계를 이 같은 연출로 구현한다. 무엇보다 이성적으로 이해되지 않고, 무의식의 즉흥적인 연상으로 이어지는 듯한 영화의 전개는, 흡사 꿈을 스크린에 구현한 것과도 같다. 크르스틱의 작품 세계는 초현실주의자들로부터도 결코 적지 않은 영향을 받았는데, 초현실주의자들이 한 폭의 캔버스 안에 오토마티즘, 데페이즈망 등의 기법으로 꿈을 구현하고자 했다면, 크르스틱은 그들의 색채를 계승함과 더불어, 한 폭의 작품이 아니라 무수한 폭의 캔버스를 이어내는 영화의 요소인 몽타주, 편집으로 초현실주의자들이 예술에 적용하고자 한 꿈의 구현을 시도한다. 이렇게 초현실주의의 유산을 계승하는 크르스틱은 이외에도 큐비즘, 신즉물주의 등 3차원의 재현이라는 '억압'에서 해방되어 자유로이 2차원성을 표현한 20세기 모더니즘 사조의 공을 이어온다. 그래서 영화 속 여러 눈을 가진 인물들, 두 개의 측면이 공존하는 초상은 마찬가지로 평평한 2차원의 스크린에 3차원이 구현되는, 영화라는 매체의 속성을 환기하듯 느껴진다.




에두아르 마네, <폴리 베르제르의 바>, 1882



또 영화 속 주체들이라 할 수 있는 루벤, 미미, 코왈스키는 영화를 바라보는 감상자들과 유사한, 보편적인 이목구비를 가진 반면, 그들로부터 ‘타자’들이 이 같은 미술사의 영향이 묻어난 개성적인 초상으로 그려진다. 이는 익숙하고 보편적인 나의 기준에서, 언제나 무한하게 예측에서 벗어나는 타자의 얼굴을 이 같은 무수히 다르고 나의 기준으로 환원되지 않는 얼굴로 드러내는 것이리라. 즉 이 같은 표현법은 무수히 다른 개인들의 개성을 드러내는 것이랴. 실제로 영화의 초반부, 파리에서 벌어진 추격전에 대다수의 사람은 각자의 일을 하기에 급급하며, 심지어 몇몇 사람들은 심드렁하고 무관심하다. 똑같은 세계에 놓여있더라도 각자의 의식은 개개의 표상에 갇혀있다는 것을 드러내기에, 개인의 무수한 다름을 그려내는 영화의 초상은 적절해 보인다. 한편 20세기 당시에 모더니즘은 분명 이전 시대로부터의 해방이었지만, 이내 곧 강령이 되어버린 이론은 미술이 표현 가능한 폭을 축소시켰다. 또 당대의 유명한 걸작들을 오마주하며 동시대의 파리를 구현하는 본 작품에서도 마찬가지로, 과거가 현재를 개념화하는 형국이다. 특히 남성과 여성의 엄격하게 분리된 젠더가 눈에 띈다. 일단 여성부터 살펴보자. 19~20세기의 모더니즘 회화는 여성의 빈곤하고 너절한 삶을 객관적으로, 그저 눈에 비추는 대로 전달하는 경향이 짙었다. 그리고 이러한 회화가 스크린에 오마주되며 동시대의 파리가 구성되고 있다. 이에 과거에 남성 중심적 경제에 의해 매춘부로 전락했던 여성들은, 동시대에도 여전히 그들에게 종속된 웨이터, 웨이트리스, 바의 가수, 애인으로 그려진다. 마네의 <폴리 베르제르의 바>를 오마주한 장면이 가장 대표적이다. 이는 어쩌면 특정 여성상을 요구하고, 오랜 세월 그것이 반복되어 본질처럼 여겨진 여성상이 동시대의 여성을 억압하는 형국을 보여주는 것이랴. 그리고 영화 속 주체적인 여성인 미미는 이러한 남성들로부터 줄곧 도망가는 모습으로 그려진다. 그녀는 큐레이터의 손에 의해 타율적으로 배치되고 갇힌 유물, 전시품들을 해방하고, 자신 또한 남성 탐정인 코왈스키의 추적으로부터 저 멀리 달아난다. 미미를 바라보고자 하는 남성들의 시선에서 열기구를 타고 훌쩍 달아나고, 또 그녀는 남성들에게 선택당하지 않고 자신에게 필요한 남성인 심리치료사 루벤에게 먼저 능동적으로 연락한다.       




(좌) 툴루즈 로트렉, <키스>, 1892 / (우) 에두아르 마네, <올랭피아>, 1863




이는 미미의 저택에 걸려 있는 툴루즈 로트렉의 <키스>와도 같다. 언뜻 보기에는 남과 여가 침대에 함께 누워 있는 것 같지만, 실제로 남자로 오인된 인물은 머리가 짧은 여성이며, 둘은 레즈비언이다. 낮부터 밤까지 온종일 노동을 해야 겨우 제 몫을 벌 수 있었고, 무엇보다 그녀들의 노동은 남성 손님들의 취향에 부합하기 위해 제 자신을 은닉하면서 수행되었다. 하지만 로트렉은 우리에게 비치는 노동 너머에서 그녀들이 능동적으로 염원하는 사랑을 담아내며, 타자들 간의 연대를 그려냈다. 미미가 바라는 것도 바로 남성들에게 종속된 노동, 삶으로부터의 해방이리라. 그리고 이러한 능동적인 여성이 남성을 상호보완하며 돕는다. 영화 속 미미나 마리나는 파리에서 남성들에게 성적으로 종속되는 여성과는 달리, 주체적인 능력을 갖추고 있다. 하지만 남성은 이 같은 적극적인 여성, 팜므파탈에게 두려움을 품고 있다. 영화의 도입부에서 루벤은 벨라스케스의 그림에 등장하는 공주, 그리고 자기 눈앞에서 달팽이와 함께 있는 여성에 의해, 기차에서 추락하는 악몽을 꾼다. 달팽이는 전통적으로 성의 상징이다. 초현실주의 화가 살바도르 달리는 달팽이, 민달팽이의 축 처진 형체, 확대와 축소를 거듭하는 움직임을 남근에 빗대지 않았던가. 이러한 남근을 여성이 쥐고 있다. 그리고 이렇게 성을 제 손에 쥐고 있는 능동적인 여성은 미술사에서 전통적으로 두려움의 대상으로 그려졌다. 모더니즘 이전까지 유일하게 허용되었던 비너스, 다이애나, 수잔나 등의 누드화에서 여성의 시선은, 그녀들을 바라보는 남성 관람객의 시선을 배려하듯, 온유하게 내리고 있었다. 남성 관람객의 시선이 부드럽게 눈동자를 내린 순종적인 여성을 지배한다. 하지만 루벤이 악몽을 꾸는 회화 중 하나인, 모더니즘의 시작을 열어젖힌 마네의 <올랭피아>는 다르다. 여신이 아닌 매춘부의 지위에서 아주 과감하고 도발적인 시선으로, 남성 관람객을 쏘아본다. 매춘부, 요부가 남성 관람객을 쏘아봄에, 그들은 매춘부를 상대하러 온 고객으로 규정되고, 이전까지 시선으로 남성이 여성을 지배하던 관계가 뒤집힌다.



루벤은 이렇게 성적으로 지배되는, 흡사 유혹되어 미미를 줄곧 따라다니다가 위협까지 겪게 되는 코왈스키의 위치가 두려운 것이랴. 하지만 남성들의 욕망이 과연 실로 주체적이고 능동적일까. 코왈스키가 미미를 좇는 이유 중 하나를 어머니와 함께 촬영된 유년기의 사진에서 추측할 수 있다. 젊은 시절 어머니의 용모와 미미는 매우 흡사하다. 코왈스키는 아들의 첫 번째 욕망에 다름 아닌 어머니에게서 벗어날 수 없는 것일지 모른다. 이러한 과정에서 코왈스키는 더불어 아버지를 찾는다. 아버지는 어머니를 빼앗아간 연적이다. 그러므로 오이디푸스처럼, 『텔레고네이아』의 텔레고노스처럼, 아버지를 무너뜨려야지만 자신의 첫 번째 욕망을 차지할 수 있다. 이렇게 어머니를 닮은 미미를 좇음과 동시에 아버지가 누군지를 물색하는 코왈스키는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에 지배되는 남성을 보여준다. 코왈스키가 근엄하게 얼어붙은 중년 남성상 얼음을 술에 녹여서 마시는 것도, 아버지를 제 지배에 두겠다는 상징이리라. 아버지를 직면해야지만 억압을 이겨낼 수 있다. 영화의 결말에서 서로 다른 존재인 줄 알았던 코왈스키와 루벤이 동일 인물일 수 있음이 암시된다. 동일한 인물이라면 루벤은 현실에서 꿈, 무의식에 지배되는 ‘의식의 인격’이라 할 수 있고, 반면 어머니와 닮은 미미를 좇고 유년기의 억압을 향해 점점 더 다가서는 코왈스키는 잠재된 ‘무의식의 인격’이라 할 수 있다. 루벤은 아버지를 알고 있지만, 그가 자신에게 실험한 무의식의 여파를 모르고 있다. 반면 코왈스키는 아버지를 모르지만, 미미를 찾는 과정에서 그와 직면하고 싶다. 그리고 루벤은 인지하지 못한, 혹은 외면해온 아버지의 억압을 맞닥뜨리고, 코왈스키는 아버지의 정체와 마주하게 된다. 이렇게 양분된 동일한 존재 모두가 아버지를 직면하고 그를 넘어서며 아들은 온전한 성인이 되는데, 이는 단순히 루벤이 겪은 아버지의 죽음, 장례식으로만 해결되지 않는다. 무의식에서 억압되어 지배되는, 아버지의 그늘이 정확히 무엇인지를 인지하고 이를 이겨내야만 한다. 


(좌) 살바도르 달리, <기억의 고집>, 1931 / (우) 렘브란트 반 레인, <가니메데의 납치>, 1635



이렇게 그들이 직시한 아버지의 억압은 바로 성이다. 유년기에 루벤은 야외로 나가 달팽이와 함께 놀고 싶었다. 하지만 아버지는 이를 금하고 자신의 지하실에서 루벤의 무의식을 통제하는 실험을 강행했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달팽이는 성의 상징이다. 남근기에 해당하는 아이들은 성기, 생리 현상의 자극에 즐거워하고, 무목적적인 호기심을 보인다. 이는 단순한 즐거움에서 기인한다. 하지만 미셸 푸코가 밝혀내듯, 성이 오직 번식을 위한 목적으로 규정되면, 즐거움을 위한 성은 금기와 배제의 대상으로 전락한다. 그래서 성이 단순한 즐거움과 쾌락이 목적일 수 있음을 드러내는 어린아이의 성은 더더욱 금기시된다. 이러한 유년기의 성에 대한 관심이 루벤에게 좌절된다. 그를 유혹하지 않는 보티첼리의 <비너스의 탄생>을 바라보며 죄의식, 고통을 느끼는 루벤의 초상이, 바로 유년 시절 성적 유희 대신, 아버지가 틀어주는 영화를 봐야 했던 억압에서 기인하리라. 더욱이 루빈의 유년 시절을 보여주는 장면 중 하나는, 바로 하늘을 날아다니는 독수리가 등장하는 숏이다. 미술사에서 독수리는 미소년 가니메데스를 납치한 제우스가 변신한 상징으로, 신화에서 가니메데스는 미소년으로 그려지지만, 렘브란트는 더 어린아이로 묘사하기도 했다. 이는 프로이트가 다 빈치의 <성 안나와 함께 있는 성 모자상>을 가니메데스 신화와 빗대어 동성애 취향의 투영이라고 해석한 것처럼, 신화와 고대 그리스에서 중년과 미소년의 동성애를 보여주는 상징이기도 하지만, 아버지적 존재에 의해 규정되고 지배되는 성에 대한 두려움을 읽힐 수 있다. 아버지적 존재인 제우스의 욕망에 의해 납치되고, 그 이후 가니메데스가 신들의 시종이 되어, 그들에게 성적으로 종속된 존재가 된 것처럼 말이다. 그래서 유년 시절 금기시된 성, 아버지에 의해 '납치'된 성에 의해, 루벤은 여성들로부터 해를 당하는 악몽을 꾸고, 그래서 코왈스키는 미미를 찾는 과정에서 이를 금기시한 아버지를 찾아 극복하려는 것이리라.     



이러한 억압은 꿈에서 나타난다. 의식적으론 기억나지 않는 억압의 기원이 꿈에서 현시된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루벤이 의식이요 코왈스키가 무의식이라면 양자, 코왈스키가 루벤을 인지하면서부터 억압이 해소되는 이유가 여기서 기인하리라. 무의식이 억압의 원인을 의식에게 꿈으로 현시하고, 이에 따라 의식은 무의식이 밝힌 길로 향해간다. 이러한 꿈의 밝혀낸 억압의 원인을 밝혀내는 것이 도입부에서 루벤이 연출하는 『빨간 망토』 연극이랴. 억압의 원인이 된 유사한 상황을 재현하고 과거에 실행하지 못한 행동을 몸소 옮김으로써, 억압을 해소·해방하는 것이다. 또 명화를 훔치는 계획을 철두철미하게 실행하며 억압을 해소하는 하이스트 무비로서의 본 극 자체가 하나의 치료일 수 있다. 억압의 기원을 하나하나 따라가며 과거에 좌절되었던 상황을 현재에 철두철미한 계획으로 실현해가며 해소한다. 금기, 죄의식에 좌절되지 않고, 꿋꿋하게 해방을 향한 욕망을 따라가며, 더 이상 아버지가 금기시하는 달팽이를 마다하지 않는다. 루벤은 술잔에 달팽이 얼음을 녹여 먹는다. 이제 욕망은 제 입안에 있다. 아들은 아버지란 이름의 큐레이터에게 전시되었다. 선대가 규정해놓은 『예술 즐기기』란 경전에 의해 모름지기 예술가가 되기 위해서 봐야 하는 예술의 덕목, 커리큘럼이 규정되었고, 루벤이 제 꿈을 선택하기도 전에, 오히려 바라는 것은 달팽이와 함께 노는 것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바람은 좌절되고 아버지의 기획대로 성장됐다. 어쩌면 루벤은 큐레이터에게 기획된, 전시장에 의도대로 배치된 작품에 불과했다. 아버지의 의중대로 전시되고 규정된 루벤이란 작품은 타인의 의도대로 감상자들이 파악하게 되었으리라. 하지만 주체적인 성인이라면 다른 큐레이터에게 자신의 전시를 맡겨선 안 된다. 오히려 자신의 요소들을 스스로가 능동적으로 기획·배치하고, 또 세계를 바라보는 주관적인 시선을 능동적인 큐레이터로서 감상자들에게 매개해야 하리라.          



아버지, 큐레이터들에게 마찬가지로 갇혀있던, 그래서 특정한 방식으로밖에 볼 수 없게 된 작품들 또한 루벤과 입지가 유사했으리라. 그리고 이러한 규정에서 벗어나야지만, 비로소 억압에서 해방되어 자유로이 감상되고 해석될 수 있는 여지가 열리리라. 이렇게 본 작품은 정신분석학과 예술을 이어내며, 아버지에게 억압되어 있었던 아들의 성장을 그려낸다. 또 이전 시대의 시뮬라크르들이 동시대에 시뮬라시옹되며 여성들을 마찬가지로 억압하는 구속으로부터의 해방 또한 담아낸다. 더 이상 『예술 즐기기』에 의해 규정되고 갇혀있는 작품은 존재하지 않는다. 작품은 경전에 얽매여서 감상 되지 아니하고, 마찬가지로 감상자도 경전에 얽매이지 않는 자유로운 큐레이팅과 재배치를 선보이리라. 다만 도식의 타파를 말하는 작품이지만, 본 작품 자체가 지나치게 정신분석학의 도식에 얽매여있는 느낌을 준다. 마찬가지로 무수한 명화들의 오마주는 눈을 황홀하게 만들지만, 과연 크르스틱 본인의 독창적인 표현을 찾을 수 있을까. 서유럽 모더니즘의 유산과 중유럽, 동유럽에서 성행한 다다이즘, 신즉물주의의 유산에 마찬가지로 지나치게 경도되어 있는 것은 아닐까. 그래서 크르스틱의 이야기를 마주한 것 같진 않다. 또 20세기에 공개된 그의 단편은 셀 애니메이션이었지만, 작금에 공개된 본 작품은 디지털 애니메이션이다. 셀 애니메이션에서 느껴지던 화가로서의 회화다움이 디지털 애니메이션인 본 작품에서는 느껴지지 않는다. 또 움직임도 훨씬 더 투박하고 뻣뻣하다. 더욱이 아예 2차원성을 추구하던 전작으로부터, 본 작품은 3차원성과 타협하는데, 그래서 2차원성을 강조하는 큐비즘을 변형시킨 표현법은 잘 와닿지 않는다. 누군가의 꿈을 따라가는 듯한 현란한 편집과 인류가 공통으로 겪을 법한 억압의 해소를 다채로운 표현으로 풀어내는 미덕은 분명하나, 감독 개인의 색채가 보이지 않고, 또 화가이자 애니메이션 감독인 그의 형식이 디지털 애니메이션으로의 전환에서 퇴색되어버린 점이 아쉬움으로 남는다. / 박정수


all images/words ⓒ the artist(s) and organization(s)

☆Donation: https://www.paypal.com/paypalme/artlectur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