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대라 천대받았던 남도 국악의 거인
국악은 예나 지금이나 대접을 잘 받지 못한다. 예전에는 광대라고 천시했고, 요즘은 촌스럽다고 외면한다. 일제강점기 비참했던 광대의 삶을 거부하고 새로운 사회를 찾아간 당대 최고의 국악인 정남희(丁南希, 1905~1984). 그는 남북 국악계에 엄청난 발자취를 남긴 월북 예술가다.
도올 김용옥은 정남희 저항정신에 대해 “무속인 주제에 빨갱이가 되어 자진 월북했다는 사실만으로도 그의 삶의 자세의 한 측면을 엿볼 수 있다”라고 평가했다. <김용옥, 조선의 예혼 황병기류의 탄생에 부쳐, 황병기 가야금 산조 해설집, 씨엘엔뮤직, 2014>
정남희의 예술세계 음반표지
정남희는 1905년 나주에서 태어나 어릴 적 아버지 몰래 가야금을 배웠다. 그러다가 할아버지 환갑잔치 때 연주실력을 인정받아 겨우 전문적으로 음악을 배우기 시작했다. 10대부터 탁월한 재능으로 수제자가 되어 광대가 된 것이다. 정남희는 광대라면 당연히 당해야 했던 천시에 대해 절대 참지 않았다.
“그러나 다시 나에게는 「광대」라는 간판이 붙게 되자 나에게는 새로운 고민을 느끼게 되어 생각튼 차에 함경도에 연주 여행을 떠나게 되어 함흥에 가보니 그곳은 「광대」를 멸시하는 봉건 픙습이 전라도 보담은 관찬어서 나를 환대하여 주었으므로 나는 함흥에 본적까지 옴기고 나의 가족까지 모시게 되었다. <정남희, 나의 회상, 경향신문, 1947.02.13.>
해방 후 심청전을 공연할 당시에도 그 성미는 살아있었다. 정남희는 심청 역을 맡았던 배우 오양금을 수도경찰청장 장택상이 첩으로 삼고 계속 불러대자 “세상이 뒤바뀌어야만 건방진 놈들에 복수를 하지”라며 강한 분노를 드러냈다고 한다. <김석배 편, 나의 이력서 박록주, (사)명창 박록주 기념사업회, 2015, 62~63쪽.>
1947년 미 군정은 남로당 등 좌익계열을 대대적으로 검거했다. 국악원을 이끌던 남로당 당원 정남희도 체포되어 오랫동안 붙들려가 고생을 많이 했다. 그만큼 그에게 새로운 세상에 대한 갈망은 클 수밖에 없었다.
다재다능한 시대의 천재 국악인
정남희는 말로는 다 할 수 없는 국악의 천재였다. 전도유망한 남도 명창이자 최고의 연주자이자 작곡가였다.
“김소희· 박귀희 원로 남도 악인들의 말에 의하면, 일제 시대에 민속악의 본거지였던 조선 성악연구회에서 가야금 산조의 어른으로는 강태홍을 꼽았고, 그 아래 세대로는 정남희를 최고로 쳤다고 한다. 그는 병창과 창극 음반도 여러 장 남길 만큼 소리도 잘했는데, 원로 작곡가 정윤주의 말에 의하면 설장구도 전무후무하다고 할 만큼 잘 쳤다고 한다. <황병기, 정남희 가야금 산조의 고 음반, 한국음반학2, 한국고음반연구회, 1992>
정남희는 1934년(29세) 함흥에서 첫 가야금 산조 음반(일본 콜롬비아축음기 주식회사)을 발표하면서 전국적인 명성을 얻기 시작했다. 그의 가야금 산조 음반은 유성기에 재생하는 음반 중의 명반으로 평가된다. 정남희의 장구 연주 역시 최고 경지에 올랐다고 평가되었다.
1935년, 서울로 온 정남희는 조선 성악연구회 이사로 창극 기획을 주도했다. 창극인으로서 실력도 출중해 배비장전, 유충렬전, 숙영낭자전, 옹고집전 등의 주역을 도맡았다.
해방 이후 정남희는 국악원에 들어가 창악부장으로 활동한다. 또한, 그는 조상선, 박록주 등과 함께 국악원 소속 창악인 단체인 국극사를 만들어 대표이사 역할을 하였다.
국악원은 조선 전통의 음악 예술을 확보하고 과거 특권계급에 독점되었던 음악 예술을 조선 민중에게 절대 개방을 기한다는 강령하에 창악계를 중심으로 조직하여 1947년 8월 미 군정 당국의 민족음악 진영의 비합법화 조치 이전까지 국악의 민중화와 예술화를 위해 주도적 역할을 한다. <민족음악연구회 연구분과, 해방공간의 민족음악론, 민족음악의 이해, 한울, 1992>
북한의 첫 공훈배우이자 인민배우
정남희는 한국전쟁이 발발하고 인민군이 서울에 내려왔을 때 월북을 선택했다. 그는 김일성 주석을 만나고 당시 소감을 <당의 품속에서, 1965>라는 글에서 남겼다.
“그런데 그이께서는 나를 보자 웃음을 띄고 나의 손을 굳게 쥐여 주시며 다음과 같은 내용의 말씀을 했다. ‘수고를 많이 하십니다. 어제 저녁에 공연을 보지 못 했는데 오늘 저녁에는 꼭 봅시다’ 하면서 앞으로 남반부 예술인들도 북반부 예술인들과 같이 새 조선의 민족 문화 건설을 위하여 투쟁해야 한다고 거듭 말씀하는 것이었다. 나는 끓어 넘치는 기쁨과 감격에 휩싸여 수상님의 말씀을 하나하나 마음속에 새겨 넣었다. 사실 나는 이때처럼 그렇게 예술인으로 태어난 긍지와 보람을 느껴 본 적은 아직 없었다. (중략)”
“일제 식민지 통치 시기와 8·15 해방 후 이승만 정권하에서 특히 민족음악을 전공하는 예술인들은 인간 이하의 천대와 멸시를 받았다. 어떤 때는 너무도 억울하고 분해서 당장 음악을 그만두고 노동을 하든지 농사나 짓자고 단단히 마음먹었다가도 집에 돌아와 울적한 심정을 하소할 데가 없어 가야금을 타기 시작하면 어느덧 잡념은 사라지고 또다시 가야금에 열중하기를 수십 번 아니 수백...” <정남희, 당의 품속에서, 조선음악, 1965년 4기, 이태화, 국악인 정남희의 월북과 판소리사적 의미, 164~165쪽 재인용, 판소리 연구 제43집>
그는 멸시와 차별 속에서 펼쳐왔던 민족음악가인 자신을 국가 지도자가 만나주고 예술 활동을 적극적으로 지원해 주는 것에 대해 크게 감동을 하였다.
1951년 정남희는 사회주의 국가들에 순회공연을 하는 국립민족예술단의 부단장으로 활동했다. 가야금을 독주하며 세계청년학생축전에 참가하여 국제적 명성도 얻었다. 1952년에는 공훈 배우로, 1959년에는 인민 배우 칭호를 수여 받았다. 그는 1958년부터 평양음악대학 민족음악 학부 학부장으로 학생들에게 가야금을 가르쳤다. 정남희는 1970년대 은퇴하고 음악가 동맹의 민요연구실에서 민요를 연구했다.
인민배우 정남희 생일 100돌 기념 가야금연주회
북한은 2005년 7월 20일 평양에서 김정일 위원장의 지시로 인민 배우 정남희 생일 100돐 기념 연주회를 개최했다. 통일신보는 "음악 예술의 영재이신 김정일 장군님께서 오랜 민족음악 작곡가였던 정남희 선생의 생일 100돐을 잊지 않으시고 마련해주신 화려한 무대였다"라고 소개했다. <조계창, 인민 배우 정남희 생일 100돐 기념 연주회, 북한 통일신보(7.30), 연합뉴스 인용, 2005.08.04>
범민족 통일음악회에서 풀린 인생의 숙원
남쪽에서는 정남희에게 가야금을 배운 김윤덕(金允德, 1916∼1978)이 정남희 가야금 산조의 명맥을 이어갔다. 김윤덕은 정남희의 산조를 고증 발전시켜 중요무형문화재 제23호 가야금 병창 및 산조의 예능 보유자가 된다. 이는 황병기(黃秉冀, 1936~2018)로 이어졌다.
정남희는 월북 후 남한의 김윤덕에게 사사한 가야금 산조의 구조를 대폭 변화 발전시켰다. 북한에서 전해지는 정남희의 산조는 일제시대 녹음한 음반이나 김윤덕의 산조와 달랐다. 그의 창조적 역량은 월북 이후로도 꾸준히 발휘되고 확장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남쪽에서는 새롭게 창조된 정남희 가야금 산조의 정수를 접할 수가 없었다.
그 실타래는 1990년 10월 평양에서 개최된 범민족 통일음악회 당시 김윤덕의 제자, 황병기를 통해 풀리게 된다. 황병기는 작곡가 윤이상의 초청을 받아 민간인으로는 최초로 판문점을 통해 평양에 간 국악인이다.
1990년 10월 범민족통일음악회를 위해 100명 넘는 인원이 방북을 준비하는 모습
황병기는 범민족 통일음악회에서 낯익은 가야금 연주 가락을 듣게 된다. 그렇게 만난 주인공은 바로 정남희의 제자 김길환 평양 음악무용대 교수였다. 마침내 황병기는 북한에 있던 정남희의 가야금 산조 녹음테이프를 찾고 “내가 50년 세월을 공들여야 했던 모든 문제의 해답이 다 들어있더군요.”라며 기뻐했다. 인생의 숙원이 풀린 셈이다.
한국 가야금 산조의 획을 그은 ‘정남희제 황병기류 산조’가 1998년 그렇게 탄생했다. 황병기는 정남희가 완성한 가야금 산조를 자신만의 색깔로 다듬었다. <장병욱, 우리 시대의 거장 가야금 명인 황병기, 주간한국, 2002.05.31.>
정남희제 황병기류 가야금 산조는 다스름, 진양조, 중모리, 중중모리, 엇모리, 자진모리, 휘모리, 단모리의 총 8악장으로 70여 분에 달하는 가장 방대한 규모의 가야금 산조다. 산조는 장식이나 잔가락을 절제하며 가락의 논리적 전개와 구성미를 중요시하는 음악이다. 황병기는 정교하게 구성한 가야금 산조를 음악 자체에 몰두하여 ‘어떻게 연주하는가’에 집중하여 감상해 달라고 당부했다.
정남희가 남긴 발자국
우리에게 음반으로 발매된 정남희의 음반이 하나 더 있다. 해방 이전 유성기 음반 이후 국내에서 두 번째로 발매된 정남희의 음반이다. ‘가야금 명인 정남희의 예술세계’라는 음반은 1961년 1월 14일 평양음대 콘서트홀에서 열린 가야금 산조 연주회를 실황 녹음한 것이다. 일본의 한 음반회사를 통해 건너온 음원을 2004년 발매했다.
애석하게도 정남희의 연주 음반 발매는 모두 일본 회사를 통해 우리에게 전해졌다. 남북이 분단되었던 시절, 제3국을 통해 왕래할 수밖에 없었던 아픔을 아직도 겪고 있는 셈이다. 많은 남측 가야금 연주자들이 정남희제 황병기류 가야금 산조 유파를 따르며 연주하고 있지만 정작 정남희가 북에서 남긴 음원을 풍부하게 듣기란 아직도 불가능한 일이다.
북측의 연주자들과 남측의 연주자들이 정남희가 남긴 가야금 합주를 자신만의 색깔을 살려 연주하고 있다는 모습을 정남희는 어떻게 바라고 있을지 궁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