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의 공포', 바이러스로부터 강력한 백신 구하기 -<너, 이 그림 본 적 있니? 연재시리즈 1>-
VIEW 5041
HIGHLIGHT
"어둠은 어둠을 밀어낼 수 없다. 빛만이 그렇게 할 수 있다. 혐오도 혐오를 밀어낼 수 없다. 사랑만이 그렇게 할 수 있다."
분무기에 '침묵'을 담아서 모든 도로와 상점에 고르고 빠짐없이 뿌려놓은 듯 하구나. 바람이 부르르 떨며 창에 닿는 소리도, 자동차의 '바빠요 바빠요'하는 경적 소리도, 산책하는 강아지의 우쭐거리는 발걸음 소리도 들리지 않네. 창 밖엔 '고요'가 사방을 뒤덮고 있어. 모두 간단없는 이 불안이 무서운 게지. '바이러스'란 단어는 '공포'와 나란히 걸어 다니니까. 갑자기 아파트 문 밖이 온통 두려운 세상이 되어 버렸구나. 엄마는 겁이 많아 번지 점프를 하거나, 더블락 스핀을 타거나, 오지로 탐험을 나간다거나 하는 건 말할 것도 없고, 사회적 이슈에 대해 가두시위를 한다거나, 글을 써 견해를 주장하는, 일상적이고 평범한 행동조차도 가끔은 두려워하지. 심지어 부정적인 댓글만 봐도 심장이 오그라드는걸. 뉴스를 보면서 갈수록 승해지는 바이러스가 무섭구나. 엄마의 심장은 가엽게도 꽈리가 되었단다.
느루야, 넌 지금 먼 곳에 있고 나름 행복한 시간을 보내고 있을 테니 이곳의 소식을 자세히 알리고 싶지는 않아. 결국 삶에 모든 일들은 시간이라는 깔때기를 통과한 뒤, 한 곳으로 모이게 될 테니까. 반복되는 일로 가득한 인간의 시간에서 바이러스가 처음은 아니었겠지. 맞아. 100여 년 전, 인간은 신종 바이러스의 등장에 공포와 두려움에 떨었단다. 이유는 중세의 흑사병 같이 고대로부터 경험되어진 유행병이 아니었거든.
아놀드 뵈클린 <흑사병>
제1차 세계대전이 한창이었던 1918년 인플루엔자 A형 바이러스의 변형인 H1N1 바이러스에 의한 독감이었지. '스페인 독감'이라고 불렸어. 미국 시카고에서 처음 보고되었고, 유럽을 초토화시킨 그 피해는 어마어마했단다. 유럽 인구가 16억 정도였는데 5억이 감염되었고 사망자가 2,500만~1억 명 정도로 추정하니까. 당시 1차 세계대전으로 인한 보도 검열로 인해 정확한 파악을 할 수 없었어. 1차 대전에 참전하지 않았던 스페인이 자세히 다루어서 거꾸로 '스페인 독감'이라는 불명예를 안았지. 이 그림을 보고 이야기해 볼까?
너, 이 그림 본 적 있니?
에곤 쉴레 <죽음과 소녀>
공허한 눈빛의 검은 옷을 입은 사내와 불안에 떠는 소녀가 있구나. 소녀는 검은 옷을 입은 남자에게 매달리고 있어. 하지만 붙잡을 수 있을 것 같진 않아. 그녀의 간구와 애원을 담은 팔은 가느다란 뼈만 남았거든. 전 체중을 실어 그에게 매달려 보지만 그는 몸을 뒤로 뺀 채,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고 있어. "이제 그만 헤어져야 해."하고 설득하는 양. 주위는 파괴되고 부서져 푸른 이끼가 낀 돌덩이들로 가득하지. 돌덩이 위로 구겨진 시트는 소녀와 검은 사내가 나누었던 환희의 조각들을 보여주고 있는 것 같아. 이 그림은 에곤 쉴레(Egon Schiele, 1890~1918)의 <죽음과 소녀>란다.
에곤 쉴레는 오스트리아 북쪽 도나우 강변에 있는 도시 툴린(Tuoon)에서 툴린 역 역장을 하던 아돌프 쉴레의 아들로 태어났어. 손가락으로 연필을 쥘 수 있을 때부터 쉬지 않고 드로잉을 했다고 하는구나. 공부는 하지 않고 그림만 그려대는 모습을 본 아버지는 그의 스케치 북을 던져 버렸지만, 여동생 게르티 쉴레는 기꺼이 모델을 서 주곤 했어. 그가 15살 때, 아버지는 매독으로 사망하지. 매독 균으로 인한 정신착란과 발작을 일으키는 아버지의 모습은 이후 그의 작품에서 왜곡되고 거칠게 묘사된 인물의 누드와 작고 쪼그라든 성기로 나타나게 돼. 그렇다고 그가 결벽주의자가 된 건 아니었어. 성(性)을 혐오하면서 동시에 탐닉했지.
에곤 쉴레 <남성 누드>
다정하지 않은 어머니에 대한 애정결핍과 천재적 재능이 주는 오만한 자아를 갖고 있던 그는 빈 미술아카데미에 입학해. 히틀러가 재수 끝에 낙방해 결국 가지 못했던 그 미술아카데미란다. 클림트도 이곳에서 공부했구나. 하지만 이곳은 전통적이고 보수적인 학풍이 지배적인 곳이었어. 그는 고집스러운 교수와 끝내 불화했고 회의에 빠진 채 학교를 나온단다.
당시 오스트리아는 구스타프 클림트가 "각 세기마다 고유한 예술을. 예술에는 자유를!"이라고 슬로건을 내세우고 <빈 분리파>를 만들었던 때야. 쉴레와 만난 클림트는 그의 비상한 재능과 실력을 인정했지. 작품을 구매해 주었고, 예술을 후원하는 후원자들을 소개해 주었단다. 이때 클림트의 모델이었던 발리 노이질(Wally Neuzil)을 만난단다. 그녀는 17살이었어. 쉴레는 노이질과 4년을 동거했어. 노이질은 그의 모델이 되어 주었고, 그의 식사를 준비했으며, 그의 연인이기도 했지. 쉴레가 어린 소녀를 유괴했다는 혐의로 구금되고 재판에서 작품이 불태워지는 모멸을 당했을 때에도 헌신적으로 그를 보살폈구나.
에곤 쉴레 <검은 스타킹을 신은 발리 노이질>
하지만 쉴레는 1915년 중류층의 얌전하고 미소가 고왔던 에디트 하름스(Edith Harms)와 결혼해. 아마도 쉴레는 남들이 말하는 '일반적인 가정'을 갖고 싶었던 것 같아. 사회적으로 받아들여지기를 원했고, 자신의 재능이 인정받길 바랐지. 뒤틀리고 일그러진 형태, 음울한 색, 시니컬한 표정, 거부하는 동시에 격렬하게 집착했던 성(性), 자긍(自矜)과 자학(自虐) 사이를 오가며 신경질적이던 자아의 허물을 노이질에게 남겨두고, 에디트를 통해 평온한 미래를 갈구했지. 노이질과 헤어지고 난 뒤, 쉴레는 이별에 대한 마음을 검은 옷의 사내로 표현했어. 사랑은 죽었다고 말이야. 그는 무한히 헌신했던 노이질에게 큰 상처를 입혔어. 노이질은 자신의 상처를 치유하는 방법으로 1차 세계대전의 종군 간호사로 자원했고 전쟁터에서 선홍 열로 사망해.
<죽음과 소녀>라는 모티브는 다른 화가의 작품도 있지만 슈베르트가 현악 4중주의 곡으로 만들기도 했단다. 슈베르트는 1817년 마티아스 클라우디우스(1740~1815)의 시를 가사로 <죽음과 소녀>라는 가곡을 썼어. 스무 살이었던 그가 학교의 교장선생님으로 있던 아버지의 그늘에서 벗어나 친구의 집을 전전하던 때였거든. 슈베르트는 외로웠고, 불투명한 미래에 흔들렸지만 귓가엔 늘 낭만적인 음표가 댄스화를 신은 듯 춤을 추었지. 그는 친구와 사창가를 기웃대다 죽음의 원인이 된 매독에 걸리게 돼. 1824년, 죽음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생각한 슈베르트는 <죽음과 소녀>라는 가곡을 현악 4중주 곡으로 작곡하지.
슈베르트 현악 4중주 <죽음과 소녀>
죽음이 다가오자 어린 소녀가 애원한단다. "나는 아직 어려요. 그냥 지나가 주세요."
죽음은 "네 손을 다오. 아름답고 사랑스러운 소녀여. 괴롭히려 온 것이 아니야. 내 팔 안에서 편히 잠들어라." 하며 달콤하게 속삭이지.
구스타프 클림트 <피아노를 치는 슈베르트>
쉴레는 결혼 후 3일 만에 군 복무 명령을 받고 프라하에 근무하게 되었단다. 군 복무 중이었음에도 그는 베를린과 취리히, 프라하, 드레스덴 등에서 활발히 전시했어. 군중의 반응이 놀라왔단다. 근대는 개인이 발견된 시기지. 개인의 욕망과 본능, 도전과 좌절을 최초로 표현했던 시기야. 폭력적인 전쟁 속에서 상대적으로 개인의 자유로움을 추구하게 되었고, 직설적인 감정과 원시적 정신의 자유분방함을 중시했어. 문명의 진보는 본능적 쾌락의 억압을 동반한단다.
쉴레는 문명과 사회 속에 자아를 감추고 살던 개별적인 내면을 조준했고, 그가 쏘았던 표현주의의 화살은 근대의 개인이라는 과녁에 정확히 꽂혔어. 에곤 쉴레를 표현주의의 대표화가라고 하는 건 대상의 묘사보다 거침없이 표현하는 내면의 분출에 있어. 위태로운 내면을 표현하는 그의 드로잉은 그 자체만으로 하나의 위대한 작품이야. 또한 그의 그림이 예술과 외설 사이에 드라마틱한 균형을 이루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지.
에곤 쉴레 <누드 >
에곤 쉴레 <자화상의 기록>
1918년 가을, 중세의 흑사병보다 훨씬 많은 사망자 수를 기록한 스페인 독감이 빈에 도착했단다. 바이러스는 비행기나 기차를 타지 않고 사람을 숙주로 하여 뚜벅뚜벅 유럽 각지로 퍼져 나갔지. 유럽 인구의 1/3이 독감에 걸렸어. 그가 안정적인 삶을 보내려고 빈에 내렸을 때, 바이러스가 먼저 그를 기다리고 있었구나. 스페인 독감은 똑똑똑 문을 두드렸단다. 그리고 쉴레의 아이를 임신하고 있던 에디트를 향해 천천히 다가갔지. 어떠한 방책도 없이 그녀는 허망하게 스러졌어. 옆에서 간호하던 쉴레는 에디트가 죽고 난 3일 뒤, 그녀를 따라갔단다. 그가 그토록 바라던 단란하고 구순한 가족은 끝내 이루지 못했어. 혼란과 도취에 빠져 있던 시절, 그의 감정과 재능은 무분별하게 대출되었고 그의 짧았던 시간은 그것을 회수하지 못했어. 그는 돌아오지 못했지. 노이질에게도, 에디트에게도, 표현주의를 성숙시키려 했던 작가들에게도.
에곤 쉴레 <가족>
스페인 독감은 그 후에도 명망 있는 예술가들의 손에서 붓을, 악보를, 펜을 빼앗았단다. 1920년 즈음에 스페인 독감은 소멸했어. 인간은 무수한 목숨을 대가로 면역을 키웠고 백신을 만들었지. 이후에도 몇 번 돌연변이 변종의 바이러스가 생겨났고 세계는 아직도 분투(奮鬪) 중이란다.
느루야, 엄마는 인간은 인간으로 태어나는 게 아니라, 비로소 인간으로 죽는 것 같아. 생태계 안에서 하나의 생명으로 태어나, 존중과 깨달음을 통해 인간이 되기도 하고, 그냥 생명체 중의 하나로 생을 마치기도 한다고 말이야. 자연이 인간을 향해 도전할 때, 인간의 치열한 응전(應戰)이야말로 인간이 '인간다움'을 획득하는 과정이라고. 그 과정에서 나를 정확히 바라보게 되고, 인간에 대한 휴머니즘이 싹트고, 타인을 위한 희생과 공동체를 위한 헌신이 생겨나는 게 아닐까? 바이러스의 가장 강력한 백신은 인간과 인간의 뜨거운 연대일지도 몰라.
네가 어제 "어둠은 어둠을 밀어낼 수 없다. 빛만이 그렇게 할 수 있다. 혐오도 혐오를 밀어낼 수 없다. 사랑만이 그렇게 할 수 있다."라는 마틴 루터 킹 목사의 구절을 보내주었지. 사회가 어려울 때, 시비(是非)를 가려 책임을 지우는 것보다 힘을 모아 어려움을 이겨 나가는 것, 곤란과 궁핍한 시기를 겪고 있는 이가 있을 때, 어떤 도움이 필요한가를 먼저 살피는 것, 나와 다른 의견을 가진 이에게 혐오와 질시보다 이해와 공감을 하려 노력하는 것이야말로 아름다운 인간이 되는 방법이라고 생각한단다. 두려움에 오그라든 가슴을 주먹으로 쳐 본다. 네가 돌아올 때쯤, 저 문 밖은 다시 따뜻한 연대와 협력으로 가득 차 있을 거야. 나도 노력 하마.
에곤 쉴레 <4그루의 나무들>, <채식주의자>의 표지 그림
all images/words ⓒ the artist(s) and organization(s)
Enquiry for Registration / Advertisement / Article Registration: support@artlecture.com Purchase or Sales Enquiry: support@artistnote.com
*Art&Project can be registered directly after signing up anyone. *It will be all registered on Google and other web portals after posting. **Please click the link(add an event) on the top or contact us email If you want to advertise your project on the main pag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