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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네에서 세잔까지: 예루살렘 이스라엘 박물관 인상파 걸작展 (2) | ARTLECTURE

모네에서 세잔까지: 예루살렘 이스라엘 박물관 인상파 걸작展 (2)

-인상주의를 넘어서-

/Insight/
by 박정수
모네에서 세잔까지: 예루살렘 이스라엘 박물관 인상파 걸작展 (2)
-인상주의를 넘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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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IGHLIGHT


본 전시는 미술에서 새로운 시대의 시작과 그것이 어떻게 흘러가는지를 약 80여년에 거쳐 조망한다. 몇 백여 년간 플라톤이 논하는 이데아에 근접하려던 화가들은, 더 이상 현실 너머의 이상향을 사유하려 들지 않았다. 그들은 변화하는 현실을 우리의 살아 숨 쉬는 육체로 힘껏 만끽·지각하였다. 이를 변화무쌍한 색채로, 때로는 연작으로, 더 나아가서는 이를 마주하는 나의 느낌을 표현하기 시작했다....


에드가 드가, <"장애물 경마" 실내 인테리어>, 1880~81




인상주의를 논할 때 자주 언급되는 테마 중 하나는 경마나 발레를 꼽을 수 있다. 바로 드가의 대표적인 작품들이다. 하지만 드가는 엄밀한 인상주의자는 아니다. 야외작업을 하지도 않았고 또한 변화하는 풍경이라는 인상주의자들의 관심이 목가적이라면, 드가는 도회적으로 그가 포착한 것은 도시의 인물들이다. 그를 2편에서 다루는 이유이기도 하다. 1834년 태생한 드가는 데뷔 전까지는 고전주의자 그 자체였다. 신고전주의, 특히 앵그르의 그림을 좋아하였고, 앵그르의 직속 제자에게 그림을 수학하였으니 말이다. 하지만 그는 아카데미즘에 반발을 품기 시작하였고, 그는 당대의 변화하는 정신적인 기조와 발전하는 기술문명에 입각한 새로운 대상들을 담아내는 화풍을 고안하고자 했다. 당대의 진보하는 기술문명의 새로운 형식 중 하나는 바로 스냅사진의 즉흥적인, 프레임 내에 피사체가 완전하게 담겨지지 않고 불완전하게 잘려나가는 구도였다. 드가는 이를 그림에 적극 도입해온다. 또한 그는 인상주의자들과 깊은 교류를 가졌으며, 1882년의 인상주의 전시회를 제외하고 모두 참여하였다. 심지어 드가의 구도는 다른 인상주의자들보다도 훨씬 현대적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드가의 형태감은 대단히 견고한 편이었다. 인상주의자들이 빛과 색의 포착을 위해 그것을 아예 괄시해버린 경향과는 전혀 다른 화풍이었다. 또한 포착하는 것은 현대적이었지만, 그가 고수한 실내작업은 대단히 고전적인 방식이었다. 이렇게 그는 분명 인상주의자라 할 수 없는 요소들을 갖추고 있지만, 도시의 노동계층에 대한 관심과 작품에 당대에 태동한 차가운 개인주의적 경향은 인상주의자가 아님에도 그가 인상주의자로 불리는 요소들이 되었다.

 



장 루이 포랭, <어린 무용수>, 1900




본 전시에서 드가의 작품은 한 작품이 소개된다. 허나 단 한 작품만으로도 드가의 특징을 온당 느낄 수 있다. <"장애물 경마" 실내 인테리어>가 바로 그것이다. 드가는 경마에 대한 관심이 많았다. 그는 경마의 순간을 마치 야외에서 생생하게 그려낸 듯 화폭 속에 옮겨내는데, 실내작업을 한 것이라곤 믿기 어렵다. 또한 문틈 사이로 앞선 기수가 탄 말의 형체와, 뒤따라오는 말의 형체가 자유롭게 잘려나간 것은, 스냅사진의 구도에서 기인한 드가의 전매특허와 같은 구도라 할 수 있다. 카메라가 그저 보이는 시각만을 기계적으로 포착하듯, 드가는 기계적인 차가운 태도로 시각만을 화폭 속에 옮겨 담으려 하였다. 그가 이 같은 불완전한 구도 내에 옮겨내고자 하는 것은 바로 찰나였다. 본 전시에서 드가의 작품이 단 한 작품만 소개되는 것은 아쉬운 일이나, 드가가 즐겨 그린 소재를 접할 수 없는 것은 아니다. 사실주의의 풍자화의 대가 도미에의 전통을 이어받고, 드가의 비공식 제자로서 무용수에 대한 관심을 선보인 장 루이 포랭의 <어린 무용수>를 통해, 드가의 관심을 엿볼 수 있다. 물론 드가에서처럼 시각 자체에 대한 관심이라 보긴 어렵다. 도미에의 작품에서처럼 그는 당대 발레리나를 두고 부르주아지 남성들의 저열함과, 여성들의 나약함, 경제적 위계를 고발하고자 하였다. 드가의 작품 속에서 우리는 무용수를 둘러싼 정치성을 읽어낼 수 없다. 다만 당대의 시대상 속에서 추측할 뿐이다. 허나 포랭의 작품에서는 마치 기독교적인 순교의 하얀 발레복을 입고 남성들에게 전시되는 발레리나와, 그것을 불길하게 응시하는 거무튀튀한 옷을 입은 남성들의 대비가 이뤄진다. 당대 발레리나들은 부르주아지 남성에 의해 매춘을 강요받거나, 성적 후원자로 전락되곤 하였다. 그녀들은 암암리에 화폐로 전락했던 것이다. 드가의 작품에서처럼 발레리나에 대한 아름다움은 쉽게 찾아볼 수 없다. 허나 인상주의의 빠른 필치와 색채 그 자체의 강조는, 발레리나가 처할 위기와 포랭의 정치성을 더욱 효과적으로 강호하고 있다. 




폴 시냑, <예인선, 시모아의 운하>, 1901




신인상주의자들이 공통적으로 공유한 이론은 슈브륄의 『동시 대비의 법칙에 대하여』라는 저서가 대표적이다. 본 저서에는 붉은색, 노란색, 푸른색 물체의 가장자리가 녹색 보라색, 주황색 빛을 띤다는 점이 증명되어 있는데, 그들은 이 같은 이론을 바탕으로 그들이 캔버스 내에 구현한 대상들의 윤곽을 철저하게 색과 점으로 구성했다. 또한 샤를 앙리의 광학연구도 신인상주의에 영향을 끼친 대표적인 이론 중 하나였는데, 이 같은 이론들을 가장 적극적으로 화폭 속에 옮겨낸 화가가 바로 폴 시냐크였다. 그는 1863년, 즉 인상주의자들이 태동할 즈음 파리에서 태생하였다. 그리고 청년시기에 피사로와 쇠라를 만나서 영향을 받았고, 그들과 함께 훗날 신인상주의로 불리게 되는 혁신을 개척하였다. 광학 연구를 회화에 적용하여 색들을 기본적인 빛의 요소로 환원시키는 새로운 화풍을 선보였다. 시냐크를 비롯한 신인상주의는 일정한 거리에서 형태와 리듬감, 입체감을 구성하는 빛을 마주하는 우리의 시각에 대해 집중하였다. 그가 색채를 조합하는 방식과 구성하는 방식은 실로 과학적이었다. 시냐크의 화풍은 언뜻 보기에는 인상주의자들처럼 즉흥적으로 보이나, 실은 대단히 규칙적이고 정교한 것이었다. 이러한 폴 시냐크는 쇠라와 화풍에 있어 대단히 유사하기에 별 차이 없게 여겨지기도 하지만, 작품을 얼마 남기지 않고 요절한 쇠라에 비해서 비교적 작품 수가 많고, 그 사이즈가 작다는 것을 차이로 둘 수 있다. 무엇보다 시냐크는 후기시기에는 신인상주의의 한계에 다름 아닌, 너무도 따분하고 딱딱한 형태감을 극복하기 위해 신인상주의에 표현주의적인 비자연적인 색채에 몰두함을 보여준다. 실제로 그가 과학이론에 집중한 것이 맞지만, 화가로서 찬동한 것은 불타오르는 듯한 색채의 해방을 보여준 들라클루아였기 때문에, 후기의 시냐크는 신인상주의적인 화풍과 자유분방한 색채의 해방, 양자의 조화를 보여준다.



앙리 에드몽 크로스, <프로방스 숲 속의 빈터>, 1906




대단히 따분한 신인상주의의 전형은 1부에서 언급한 시냐크의 작품으로 엿볼 수 있다. 허나 신인상주의의 화가들은 90년대에 이르러 상징주의의 오딜롱 르동을 연상케 하는, 또한 향후 야수파와 표현주의를 예고하는 비자연적인 색채와 점묘법의 결합을 선보인다. 시냐크의 <예인선, 사모아의 운하>가 바로 그것이다. 피사로의 점과 점간의 틈을 찾아볼 수 없는 견고한 짜임새에 비한다면, 본 작품에서 점과 점 사이는 보다 느슨히 벌어져있다. 오히려 그 사이에 다른 색깔이 침투하여 더 작은 점으로 환원된 반짝거리는 인상주의 작품의 느낌을 띤다. 이제 신인상주의자들의 관심은 더 이상 형태를 어떻게 견고히 옮겨 담을 것인가가 아닌, 점과 색을 어떻게 활용할 것인가로 뒤바뀐다. 점을 통해 자연과학으로 환원되어 따분한 세계를 옮겨오던 신인상주의자들은, 오직 색 그 자체에 다름 아닌 점의 해방을 보여준다. 그들에게 색과 빛 그 자체에 다름 아닌 점의 활용은, 이제 세상이 가질 수 있는 무궁무진한 가능성, 또한 표현주의의 물결과 결부되어 화가의 주관적인 정념을 드러내는 색채로 확대된다. 이는 다른 신인상주의자들도 마찬가지였다. 앙리 에드몽 크로스도 유명한 신인상주의자들 중 한 명이다. 후기의 시냐크가 상징주의적인, 물질적인 세계 너머의 비가시적인 세계를 표현하려는 도구로서 색채를 사용하는 시도를 보였다면, 크로스의 불타는 듯한 <프로방스 숲 속의 빈터>는 본능 그것 자체에 상응하는 듯한 야수파적인 색채의 사용을 보여준다. 무엇보다 서구에서 결코 끝나지 않던 선과 색의 논쟁에서, 선이 합리성 및 이성에 상응하고, 색이 본능 및 정념에 상응하던 것을 생각해보면, 신인상주의의 이 같은 변화는 색의 본령이라 여겨진 것의 회복이자 해방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피에르 보나르, <식당>, 1923




이렇게 앞서 다룬 신인상주의는 점묘법이라는 특징이 분명하다. 그리고 이 같은 점묘주의에 상징주의적인 색채가 결합된 후기의 화풍이라 할지라도 형식에 있어선 그 특징이 분명하다. 그리고 신인상주의와 동시대에 전개되었던 다른 사조들도 화풍에 있어서는 각 화가마다 무수한 차이를 보인다. 일례로 상징주의의 경우에는 르동은 모더니즘적이라 할 수 있는 화풍을 선보였다면, 모로는 아카데미즘에 입각한 화풍을 선보였기에 형식에 있어서는 하나로 뭉칠 수 없는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주제에 있어서 당대 인상주의가 이끌어온 차가운 물질주의, 즉물성에 반기를 들고, 다시금 정신과 내면의 영역을 복권시키겠다는 정신만큼은 모두가 공통점을 가진다. 라파엘 전파 또한 아카데미즘 및 인상주의를 전면 거부하고, 라파엘 이전의 르네상스 초기 화풍으로 회귀하고자하는 강령은 모두 동일했다.



하지만 후기인상주의는 형식에 있어서도 정신성에 있어서도 전혀 하나로 통합할 수 없다. 후기인상주의의 가장 주요한 세 거장은 고흐, 고갱, 세잔으로 나뉘는데 고흐는 표현주의 계열로, 고갱은 원시주의 및 상징주의 계열로, 그리고 세잔은 큐비즘 계열의 선조로 여겨져, 각각이 후대에 끼친 여파 또한 제각각이다. 그나마 서로 동거까지 한 고갱과 고흐의 색채에서 일련의 긴밀함을 포착할 수 있을지 모르나, 그 둘 마저도 결국에는 너무도 상이한 화풍과 성격차이 때문에 고흐가 귓볼까지 잘라낼 정도로 성을 내며 싸우고 틀어졌으니 말이다. 전혀 하나의 사조로 뭉칠만한 화가들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이 같이 공통된 사조로 묶이게 된 이유는 1886년 마지막 인상주의전 이후에 비평가 펠릭스 페네옹이 인상주의가 막을 내리고 새로운 인상주의가 태동한다는 의미에서, 인상주의 이후의 화가를 뭉뚱그려 규정했기 때문이다. 이후에 후기인상주의라는 용어를 정식으로 사용한 로저 프라이에 의해 뭉뚱그려진 다른 화가들은 신인상주의와 같이 새로이 규정되고, 주로 고흐·고갱·세잔이 본 사조를 대표하는 가장 중요한 세 거장으로 강조된다. 즉 이 셋은 개성이 드러나지 않는 본 사조로 묶이기에는 너무도 그 개성이 강렬한 화가들에도 틀림없으며, 사실상 후기인상주의란 사조 이름에서는 어떠한 정신적, 형식적 특징, 강령도 찾아볼 수 없다.




폴 세뤼지에, <아이들의 저녁 식사>, 1907




이 같은 후기인상주의자들 중 일부는 나비파라는 사조로 재분류된다. 그들은 오딜롱 르동, 귀스타브 모로 등이 몸담았던 상징주의의 계승자라 할 수 있다. 그들은 물질적으로 흘러가는 당대의 세태 속에서 정신성과 종교성을 회복시키고자 하였고, 그들의 사조 명에서의 '나비'도 히브리어에서 '예언자'를 의미한다. 본 전시에서 한때 후기인상주의자로 분류되었지만, 이후 나비파로 재분류된 피에르 보나르와 폴 세뤼지에가 소개된다. 먼저 피에르 보나르의 <식당>부터 살펴보자. 분명 일상의 순간이지만 색채는 비가시적인, 외피 너머의 내면을 표현하는 수단처럼 느껴진다. 그것은 야수파 및 표현주의가 보인 정념에 상응하는 비자연적 색채와도 다르다. 그들과 달리 필치도 온화하다. 보나르의 비자연적인 색채는 대단히 온화하고 고요하다. 또한 물질적인 황금의 고귀함을 연상케 하던 르누아르의 노랑보다도 더욱 어둡고 둔탁하다. 색채와 형태, 그리고 잘려나간 구도 등은 그것이 물리적으로 삭막하게 환원되지 않게끔 모호한 여지를 남긴다. 우리는 다만 가시적인 영역 너머의 고요한 비가시적 영역, 고요한 명상의 영역으로 인도되어 잠시 속세를 잊어낼 뿐이다. 폴 세뤼지에의 <아이들의 저녁 식사>도 마찬가지다. 후기인상주의에 거쳐 다시금 회복된, 구성의 일환으로 환원되어 화가들에게 무관심한 대상인 인류가 아니라, 그것 자체로 존귀한 인간에 대한 관심이 돋보인다. 또한 양식을 나누는 종교적인 색채와 아이들의 진중한 표정을 통해, 우리는 물질적인 세태 속에서 잃어버리기 쉬운 인간성, 도덕성, 근원적인 가치를 환기하게 된다. 물질적으로 흘러가는 당대에 금욕적인 가치, 느린 분위기, 물리적인 것 너머의 비가시적인 영역의 뉘앙스를 품기는 것 자체가 예언자로서 그들이 도래시키고자 하는 일련의 예지에 다름 아니었을 것이다. 




폴 고갱, <마르티니크의 마을>, 1887




후기인상주의로부터 분류된 나비파를 살펴본 이후, 가장 먼저 논할 후기인상주의의 일원인 폴 고갱이다. 앞서 언급한대로 후기인상주의의 대표적인 세 구성원은 서로간의 조화를 보이지 않는다. 각자를 일컫는 개념, 용어들은 모두 상반된다. 그중 폴 고갱에게 따라다니는 수식은 종합주의, 원시주의, 클루아조니즘(종합주의)라 할 수 있다. 이중 종합주의와 원시주의는 정신성에 관련되고, 클루아조니즘은 형식성에 관련된다. 1848년 파리 태생의 고갱의 청년 시기는 경제활동에 매진하였다. 그는 상인으로 지내기도 했고, 1871~82년까지는 증권 브로커로 지내기도 하였다. 그리고 증권 브로커로 지내던 시기에 에밀 쉬프네케르를 만나 그림에 가까워졌고, 그는 인상주의 작품들을 수집하며 미술에 대한 열망을 꽃피웠고, 1883년부터는 본격적으로 미술에 전념하기 시작한다. 그의 화풍에 영향을 끼친 것은 상인 기간 동안 모으게 된 인상주의 작품들과, 또한 그 시기에 수집하고 거래하게 된 이국의 조각, 도자기, 카페트 등의 양식에서도 기인한다. 프랑스인과 페루인의 혼혈 가정에서 태어난 그였기에 프랑스에 전적으로 얽매이기보다는, 끊임없이 해외로 향하여 자신의 그림 속 양분이 되는 정신성과 형식성을 찾아 헤매었다. 혼성적인 그의 출신 속에서 인종, 민족성에 얽매이지 않는 인류의 근원을 찾아 해매는 형이상학적인 관심을 보여준다. 또한 상징주의 화가들이 당대의 물질주의 사회에 크나큰 염증을 느꼈던 것처럼, 그 또한 당대의 산업사회에 크나큰 반기를 들고 타히티로 향했다. 이 시기에 그려진 작품들이야말로 고갱의 정신성이 온당 녹아있다고 평가받으며, 훗날 마티스나 피카소 등의 화가들에게도 큰 영향을 끼친다.   




폴 고갱, <우파 우파(불춤)>, 1891



먼저 <마르티니크의 마을>이다. 원시주의는 서구로부터 미지의 대상에 다름 아닌 아프리카, 오세아니아, 중남미의 원주민들에 대한 관심을 예술적으로 승화한 사조 내지는 화파이다. 하지만 그들 중 일부는 들라클루아 및 앵그르가 서구를 위협하는 오스만을 편협한 시선과 얄팍한 이해로 바라보며 선전적 오리엔탈리즘을 선보였던 것처럼, 여전히 이 같은 시각을 벗어나지 못한 채 태고적 세계를 바라보곤 하였다. 허나 고갱은 달랐다. 1부에서 논한 피사로가 실제 농민이 되어 그 세계에 녹아들었듯, 고갱도 직접 타히티라는 세계에 몸담고 구성원으로서 살아갔다. 그래서 표현된 결과물로서 다채로운 원색과 온화함, 느슨하나 분위기는 서구가 타히티에 기대하는 것이 아니라, 고갱이 직접 느끼고 경험한 타히티에 대한 시각적 승화인 것이다. 그리고 <우파 우파(불춤)>이야 말로 그의 특징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작품이 아닐까. 타히티 전통적인 민속춤이 일어나고 있고, 거대한 캔버스 내에서 불길의 상승하는 운동감과, 그 아래 주민들이 앉아있는 하강하는 운동감은 교차되어 있다. 이 같은 세계의 구분은 클루아조니즘의 선구자이자 우키요에에 큰 영향을 받은 고갱답게, 과감히 중앙을 대각선으로 가로지는 나무에 의해 이뤄지고 있다. 또한 색채의 표현은 자연적인 것과 비자연적인 것이 함께 교차되고 있으며, 분리되지 않은 하나의 차원 내에서는 다양한 삶들이 공존하고 있다. 누군가는 사랑을 나누고, 누군가는 기대어 우정을 돈독히 느낀다. 또한 누군가는 앉아서 불길을 바라보고, 누군가는 동굴 바깥으로 떠나간다. 이는 하나의 차원 내에서 탄생과 생, 죽음에 대한 형이상학적인 탐구를 행하던 <우리는 어디서 왔는가, 우리는 누구인가, 우리는 어디로 갈 것인가>와 닮아있는 작업이라 할 수 있다. 작품의 산만한 구성은 언뜻 보기에는 개개의 대상에 집중하지 않는 인상주의의 구성과도 닮아있을지 모른다. 허나 그는 개개의 삶에 집중하여, 그 다채로움을 화폭 속에 조화로이 드러내기 위해 본 구성을 채택한 것이다.




(좌) 폴 세잔, <강굽이> / (우) <암초, 레스타크>, 1865



앞서 살펴본 고갱이 표현주의 계통의 주관적인 현대회화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면, 이어서 살펴볼 폴 세잔은 조형성, 형식미에 몰두하는 유미적인 현대회화에 큰 영향을 끼친 기수이다. 1839년 액상프로방스 태생의 폴 세잔은 그가 살아온 고향이나 레스타크, 생 빅투아르산을 주요한 소재로 삼아서 자신의 작품세계를 전개하였다. 그의 인생은 반골 그 자체로 요약할 수 있는데, 그는 변호사가 되길 희망하던 아버지의 반대를 무릅쓰고 화가의 길을 나아갔으며, 또한 당대의 인상주의 및 신인상주의보다도 더욱 과격한 것으로 평가되는 자신만의 화풍을 고집스레 밀고 나갔기 때문이다. 그는 인상주의시기에 붕괴되었던 조형성, 입체감을 다시금 재건하였다. 허나 그것은 아카데미즘에 입각한 고전적인 재현이 아니었다. 그는 모든 대상들은 가장 기본적인 조형인 원뿔, 원통, 구로 환원될 수 있다고 믿었고, 이를 바탕으로 피사체의 형태를 견고하게 화폭 속에 환원시켜 놓았다. 또한 대상의 형태를 이루는 선, 그것을 채워 넣는 색, 이 같은 이분법적인 고전적 회화의 문법을 전복시켰다. 그에게서 드로잉은 그것 자체로 그림자와 같은 역할을 수행하고, 색은 그가 환원시킨 기본적인 조형의 총체를 이루며, 고루한 문법으로부터 해방을 이끌어낸다. 또한 이 새로운 문법은 그에게서 결코 고착화되지 않으며, 양자의 영역은 서로 자유롭게 융화된다. 무엇보다 세잔의 회화에서 가장 유명한 것은 바로 다시점에 다름 아닐 것이다. 그는 3차원의 원근법을 폐기하고, 근본적으로 2차원일 수밖에 없는 캔버스의 공간감 내에서 회화의 고유한 세계를 창조하고자 하였다. 고갱에 비해서 주관적인 요소는 지양되곤 하지만, 다시점에서만큼은 화가의 개인적인 시선과 관심이 투영된다고 볼 수 있다. 이 같은 급진적인 화풍은 그의 청년, 중년 시기에는 인정받지 못하고 줄곧 비난과 외면을 받곤 했다. 허나 그의 말년과 사후에 그 독창적인 노고가 인정되고, 무엇보다 세잔은 회화의 고유성을 탐구한 선구자적인 화가로서 모더니즘의 가장 큰 공헌자로 평가받게 된다.




폴 세잔, <강가의 시골 저택>, 1890




본 전시에서는 세잔의 초기시기부터 후기시기까지를 종합하여 전시한다. 그의 초기시기의 작품 <강굽이>와 <암초, 레스타크>를 살펴보자. 당대 바르비종파와 사실주의, 인상주의 시기 사이에 위치한 본 작품에서 형태감은 찾아볼 수 없다. 그저 일렁이는 마티에르의 연속, 특히 전자의 경우 경계를 분간할 수 없다. 그의 초기 대표작인 <강간>과 같은 작품에서처럼 오히려 표현주의적이고 정념적인 풍경이 펼쳐진다고 할 수 있다. 다만 본 작품의 의의는 조형언어를 모색하지도 않았고, 그만의 문법이 규정되기 이전임에도 불구하고 그 경향이 스멀스멀 느껴진다는 것이다. <암초, 레스타크>에서 높게 쌓인 돌들의 경계는 선이 아닌 색채와 색채 사이의 모호함 속에서 이뤄지고 있고, 선 또한 대상의 윤곽선만을 이루는 것이 아니라, 그것 자체로 그림자를 이루거나 공간감을 형성하는 등, 초기 시절에도 선과 색을 자유분방하게 사용하는 세잔의 경향을 느껴볼 수 있다. 이후 세잔의 1890년 작품인 <강가의 시골 저택>에서 온당 확립된 그의 화풍을 느껴볼 수 있다. 인상주의시기에 세잔 역시 형태의 견고함을 고려하지 않은 것으로 보건데, 오히려 몸담고 있던 시절에 그는 이에 별 자각이 없었는지 모른다. 허나 인상주의시기를 거치고 나서, 세잔은 무너져버린 형태를 비판적으로 생각한 듯하다. 이에 그는 형태를 부활시키지만 그것은 고전적인, 3차원의 환영이나 견고한 원근법을 복권하는 일이 아니었다. 지극히 2차원적인 방법으로, 또한 조형언어를 모색하는 방법으로 이뤄졌다. 본 작품에서 건물은 원통과 사각형, 삼각형 등으로, 그리고 숲들은 하나의 원형으로 환원되어, 모두 조형들을 연상케 한다. 무엇보다 숲은 색채 자체가 원형을 이루며 형태를 이룰 수 있음을 보여준다.  또한 대지와 강, 건물과 나무의 경계를 이루는 요소들은 결코 선이나 색 단 하나로 귀결되지 않는다. 또한 색채만이 강조되어 선이 괄시되던 인상주의의 문법과도 다르게, 각자의 역할만을 놓고 다투던 양 요소들은 화해를 이루고 서로의 영역에 자유분방하게 스며들고 있다.     



이렇게 본 전시는 미술에서 새로운 시대의 시작과 그것이 어떻게 흘러가는지를 약 80여년에 거쳐 조망한다. 몇 백여 년간 플라톤이 논하는 이데아에 근접하려던 화가들은, 더 이상 현실 너머의 이상향을 사유하려 들지 않았다. 그들은 변화하는 현실을 우리의 살아 숨 쉬는 육체로  힘껏 만끽·지각하였다. 이를 변화무쌍한 색채로, 때로는 연작으로, 더 나아가서는 이를 마주하는 나의 느낌을 표현하기 시작했다. 또한 더 이상 회화는 전근대적인 이데올로기의 선전 도구가 아니었다. 회화의 본령이 시각이자, 또한 사진과 차별화되는 2차원성이라면, 몇몇 화가들은 이러한 본령에의 탐구에 집중하였다. 또 다른 몇몇 화가들은 자신이 표현하고 싶은 사상과 신념을 자유롭게 노래하였고, 더 이상 오직 서구적인 화풍이란 존재하지 않았다. 한 폭의 캔버스에는 유럽과 아시아, 오세아니아, 아메리카, 아프리카가 담기기 시작하였고, 훌륭한 화가들의 경우 자신의 서구적인 시각을 극복하고자 노력하였다. 이 같은 19세기 중후반에서부터 20세기를 살아온 화가들의 치열한 고민과 사색을 본 전시는 비춘다. 어떤 하나의 화가, 인상주의라는 하나의 사조만을 조망하기 위한 기대는 잠시 접어두는 것이 좋을 것이다. 전시는 인상주의 이전과 이후를 폭 넓게 다루어, 누군가의 자식이자 누군가의 토대로서 인상주의를 다룬다. 또한 인상주의 내에서도 강령, 규정으로 묶이지 않는 화가들의 다채로운 색채를 보여준다. 새롭게 진보하는 시대의 자식들이었던 인상주의자를 위시한 모더니스트들, 그들이 지금까지도 유효한 이유는 무엇일까. 그들은 어느 시대에도 필연적인 절대적 진리, 바로 ‘흘러감’을 포착했기 때문이다. 영원하길 바라지만 시간에 의해 변하고 지나가버리고 말 것들, 마치 물길처럼 흘러가며 사금처럼 드러나는 새로운 시대의 정신, 또한 그것 또한 넘어서서 나아가야할 방향이 그들의 작품 속에 깃들어있다. 그래서 우리는 인상주의자들과 여전히 대화한다. 지금 여기가 불멸하지 않을 것을 알기에, 당대보다 더욱 급변하는 흐름 속에서 우리는 지금의 시대를 통찰해 내야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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