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lecture Facebook
Artlecture Facebook
Artlecture Twitter
Artlecture Blog
Artlecture Post
Artlecture Band
Artlecture Main
|
HIGHLIGHT
|
쉘부르의 우산, 자크 드미 감독 특집(1) 지난글: https://artlecture.com/article/1090

*<롤라>
드미의 대표작 <쉘부르의 우산>은 결코 독립적인 작품이 아니다. <쉘부르의 작품>속 주느비에브와 결혼하게 되는 까사르가 과거를 회고할 때, 고전주의 양식으로 조각된 여인상이 가득한 공간이 드러난다. 이 같은 공간은 드미의 장편 데뷔작인 <롤라>에서 나타난 공간이다. 애초에 롤랑 까사르가 <쉘부르의 우산>에만 등장하는 독립적인 인물이 아니다. 까사르는 <롤라>의 중심인물이다. <롤라>에서도 쉘부르는 끊임없이 언급된다. <쉘부르의 우산>은 곧 <롤라>의 시퀄에 다름 아닌 것이다. <롤라>는 뮤지컬은 아니다. 오히려 자연주의라 할 수 있는 드라마에 드미의 감각성을 일련 섞어내고, <쉘부르의 우산>과 마찬가지의 불발되는 사랑에 대한 탐구가 도드라진다. <롤라>와 <쉘부르의 우산>은 서로가 은닉한 채 드러내지 않았던 바들을 비춰내곤 한다. 일례로 <롤라>에서 언급으로만 드러나던 미셸과 세실의 과거는 곧 <쉘부르의 우산>에서 주느비에브와 기의 관계에 다름 아니다. 남자는 타율적인 영향 하에, 그리고 노동에 의해서 짝을 떠나가고, 여자는 아이와 함께 덩그러니 남게 된다. 어린 세실의 존재 또한 마찬가지다. 그녀는 주느비에브와 기 소생의 프랑수아즈와도 같다. 그녀는 아버지에 대한 비밀을 모른다. 마담 데노이어가 쉘부르로 향해 아버지에 대한 사실을 밝힐 것이라 <롤랑>에서 말한다. <쉘부르의 우산>속에서 성인의 관계는 청산되었을지언정, 프랑소아즈에 대한 바는 구체적으로 언급된 바 없다. 훗날 주느비에브는 프랑수아즈에게 기에 대한 진실을 밝힐지 모른다. 왜냐하면 <롤라>에서는 인생에 있어 세대 간의 무수한 반복이 포착되고, <쉘부르의 우산>은 이 같은 <롤라>에서 긴밀하게 이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쉘부르의 우산>에서 포착할 수 있었던 황홀한 색감은 본 극에서 포착되지 않는다. 본 극의 매체가 흑백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드미의 감각성이 나타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우선 영화는 2.35:1의 널따란 화면비를 자랑하는 시네마스코프를 사용한다. 하지만 이 같은 화면비의 광대함을 본 극에선 쉬이 느껴보기 어렵다. 오프닝에서 카우보이라 불리는 한 남자가 도로를 질주할 때만 이 같은 화면비를 느껴볼 수 있을 뿐이다. 이는 그 남자를 포착하는 연출의 운동감이 수직적이었기 때문이요, 이후에는 줄곧 수평적인 트래킹 내지는 패닝만이 동원되기 때문이다. 수평적인 움직임의 갑갑함과 더불어, 드미가 어릴 적 살던 낭트라는 공간의 폐쇄성을 강조하기 위해서 널따란 공간감 자체를 드러내지 않는다. 널따란 공간감을 포착하는 것 대신 인물들의 얼굴을 프레임에 크게 포착하여 갑갑함을 형성한다. 이 같은 얼마 안 되는 인물들이 끊임없이 교차되고 부딪히기 때문에, 또한 그들의 인생이 좁은 세계 속에서 끊임없이 순환하고 있기 때문에 형식적으로도 그리고 플롯 자체로도 본 극은 폐쇄성이 강조된다. 허나 옛 연인을 만나러 가는 기쁨이 수직적인 운동으로, 파고들어가는 트래킹으로 포착되는 등, 갑갑하고 폐쇄적인 연출 속에 가뭄의 단비처럼 사용되는 일련의 감각적인 연출은 대단히 극적으로 사용된다. 또한 <쉘부르의 우산>속 색채가 없는 대신 찬란한 빛과 조명이 대두되는데, 롤라와 까사르의 재회와 같은 사랑과 생의 활력을 회복하는 숏들에서 이 같은 감각적인 연출이 동원된다. 음악 또한 마찬가지다. 필름 오페라로 불린 <쉘부르의 우산>와 같은 음악의 사용은 찾아보기 어렵다. 대단히 건조하고 낭트의 정경을 크게 훼손하지 않은 작품에 다름 아니지만, 이 같은 남루한 일상에 생기를 부여하는 에로스적인 사건에 음악이 사용된다.
대단히 간헐적으로 사용되는 빛과 음악, 그 감각성은 극 중 인물들이 생의 의미를 일깨웠을 때만이 사용되어 그 효과를 드높인다. 극 중 까사르는 생에 활기가 없다. 노동의 목적이 부재하기 때문에, 지각하기 일쑤이며 이내 곧 해고당한다. 노동은 곧 생의 영위에 다름 아니지만, 까사르는 생을 영위할 만한 의미가 없다. 욕망이 부재하고 있기 때문이다. 까사르에게 낭트라는 공간은 지루하고 어떠한 사건도 존재하지 않는 무감한 공간에 다름 아니지만, 미국에서 온 해군들에게는 대단히 생경한 공간에 다름 아니다. 까사르와 달리 그들에게는 생기가 포착되며, 바다를 누비는 노동의 목적이 분명해 보인다. 바로 무희들과 맺는 달콤한 관계를 위해서, 일련의 에로티즘을 맛보기 위함에 다름 아니다. 이 같은 에로티즘은 무희인 롤라를 통해서 더욱 강조된다. 다른 무희들은 이 같은 행위를 노동으로 생각하지만, 그녀는 옛 연인과 닮은 프랭키와의 관계를 쉽게 노동으로 규정하지 않는 듯 보인다. 그녀는 프랭키와의 관계에 있어 모든 것을 허용하지 않는 일련의 금기를 설정한다. 다른 무희들이 금기와 위반의 관계가 부재한 노동으로 예속된 정사를 나눈다면, 그녀는 노동으로부터 유리된 금기로부터 위반을 행하는 정사를 프랭키와 행하는 것이리라. 다른 무희들의 집이 어떨지 모르지만, 롤라의 집은 빈곤하다. 낭트의 일상적인 정경이라 한들, 그녀의 집이 포착되기 이전에는 그래도 번듯하고 정제된 풍광들이 포착되었다. 허나 그녀의 집 외관은 허물어져가고 있으며 한눈에 보기에도 궁핍해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생은 무용하지 않다. 프랭키가 사준 옷을 입어보는 그녀의 집 안으로 화사한 집이 들어온다. 그녀가 형성한 관계는 삶을 영위해야 할 의미를 띠게 된다.
물론 그 관계는 결코 지속적이지 않다. 프랭키는 결코 미셸을 대체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극의 오프닝에는 미셸로 추정되는 카우보이라 불리는 남자가 빠른 속도로 낭트의 도로를 지나가는 장면이 포착된다. 이를 두고 미셸의 어머니는 현실에서 일어난 일이자, 자신이 꿈에서 본 풍경이라고도 말한다. 그리고 까사르에게 있어서 미셸의 행태는 자기 아버지와 유사하다. 또한 롤라 역시 미셸이 돌아오기를 바라고 있다. 그 오프닝은 낭트 공동체의 집단적 공유에 다름 아닐지 모른다. 까사르에게는 방종하게 자신을 태어나게 만들고 책임지지 않은 아버지의 그늘이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고, 롤라는 미셸이 돌아오기를 간절히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 같은 집단적 공유는 곧 세대의 순환을 의미하기도 한다. 떠나간 아버지와 홀로 자신을 키우는 어머니의 관계망은 까사르와 이본, 그리고 마담 데노이어의 딸 세실을 통해 지속적으로 이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같은 부재하는 아버지는 그들의 방종에서도 기인하지만, <쉘부르의 우산>에서 알제리에 징집된 기처럼 전쟁에 의한 것이기도 하다. 결국 이 같은 전쟁을 발발케 하는, 또한 방종한 남성들을 허용하는 이데올로기에 의해 지속적인 순환이 나타나는 것이리라. 연인으로서도 그렇다. 마담 데노이어는 까사르를, 그리고 세실은 프랭키를 연모한다. 허나 이들은 모두 떠나간다. 그래서 몇 세대에 거쳐 그들은 같은 꿈을 꾸고 있는 것이리라. 아버지와 연인들이 돌아오길 바라는 꿈을 말이다. 아버지의 부재와 떠나가는 연인을 바라보는 세실은 동명의 롤라나, 까사르의 과거에 다름 아니고, 이 같은 성년들이 곧 마찬가지로 세실의 미래일지 모른다. 세실은 과거의 성년들을 포착하고, 이들이 그녀의 미래로서 비춰지며 본 극의 순환이라는 테마를 가장 직접적으로 보여주는 존재에 다름 아니다.
전쟁은 모든 것을 앗아가게끔 만들었다. 전쟁에 의해 결별한 까사르는 롤라와 결별하였고, 바이올린이라는 취미도 포기했다. 이 같은 전쟁기간 동안 세실은 롤라라는 타율적인 가명을 사용하게 되었고, 마담 데노이어는 모든 것을 잃어버렸다고 말한다. 타율적으로 태어난 그들은 타율적인 세계 속에서 주체적인 삶을 끊임없이 위협받고 침범 받는다. 또한 그들의 생을 유의미하게 만들어주는 욕망은 동시에 그들을 좌절케 만든다. 롤라의 등장에 까사르는 다시금 노동에 대한 욕구를 회복한다. 허나 자신과 대상사이에 존재하는 거대한 간극에 의해 무수하게 양자는 엇갈린다. 마담 데노이어는 까사르를 바라보지만, 그는 롤라를 바라보고, 그녀는 미셸을 바라본다. 그 대상들은 결코 자신을 바라보지 않으며, 그 간극을 넘어서지 못한다. 불어가 사용되는 낭트에서 영어를 사용하는 미국 선원들이 존재하고, 양자 모두가 서로의 언어를 배우려 노력하는 것도 타인과의 간극을 좁혀내는 노력의 일환에 다름 아닐지 모른다. 허나 그럼에도 욕망의 대상은 자신으로부터 떠나가 버린다. 그래서 <쉘부르의 우산>과 같았다면 본 극도 무수한 엇갈림과 떠나감만을 포착했을 것이다. 허나 가상 속에서 현실을 포착했던 <쉘부르의 우산>과 달리, 본 극은 현실 속에서 꿈을 실현한다. 롤라의 앞에 미셸이 나타난 것이다. 그것이 현실에 도래해야할 기적에 다름 아닐 것이다. 특히나 이본은 곧 세실이나 까사르로 성장해나갔을지 모른다. 허나 아버지가 존재하게 된 이본은 순환을 끊어내며, 더 이상 그들과 동일한 삶이 아니게 되었다. 이본은 본 극에서 줄곧 통제되지 않은 채로, 유일하게 자유로이 낭트를 돌아다니는 그 삶을 유지할 수 있게 되었다. 롤라에 의해 마르세이유로 향하지 않아도 되니 말이다. 비로소 욕망의 대상과 엇갈리지 않아도 된 롤라의 시선에 떠나가는 까사르가 비춰진다. 꿈의 실현은 극히 일부요, 여전히 욕망의 대상들은 끊임없이 지나치고 떠나가고 있다. 허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능하다는 것을 드미는 본 극을 통해서, 특히 진정으로 자유로운 이본의 삶을 허용함으로써 이를 역설한다.
*<로슈포르의 숙녀들>
<위플래쉬>와 <라 라 랜드>로 유명한 데미언 셔젤은 <쉘부르의 우산>때 언급했다시피 자크 드미의 작품들을 좋아라했고, 그에게 경의를 품었다. 이 같은 <라 라 랜드>에는 드미의 두 작품들이 얽혀있다. 정신성에 있어서는 <쉘부르의 우산>에 가깝지만, 형식에 있어서는 <로슈포르의 숙녀들>이 밀접하다. <라 라 랜드>의 음악 또한 본 극의 ost를 오마쥬한 것으로서 상당히 유사하며, 시각적으로도 오프닝 시퀀스의 로슈포르로 진입하던 축제 차량의 탑승객들이 갑자기 뛰어내려 뮤지컬을 하는 것도 본 극에서 등장하는 시퀀스의 오마쥬라 할 수 있다. <라 라 랜드>속 꽉 막힌 교통체증, 그리고 노동으로 향하는 <로슈포르의 숙녀들>의 도로는 크게 다르지 아니하며, 이러한 일상, 현실로부터 춤과 노래로 돌파구를 찾는 점은 사실상 <라 라 랜드>가 행한 오마쥬다. 본 극은 씨네 오페라가 아닌 뮤지컬이다. 춤과 노래를 일삼는 감각적인 장면들과 일상과 현실의 장면들은 엄연히 구분된다. 풍광 또한 <롤라>의 기조와 유사하여 <쉘부르의 우산>이나 향후 살펴볼 <도심 속의 방>에 등장하는 정제된 풍경을 찾아볼 수 없다. <롤라>가 낭트를 비췄다면 단지 본 극은 로슈포르를 차갑게 비춰낼 뿐이다. 솔랑쥬와 델핀 자매의 의상에서만이 일련의 가상성을 찾아볼 수 있을 뿐이지만, 그녀들마저도 지극히 현실의 인물들이다.
영화의 구분은 곧 노동에 다름 아니다. 오프닝 시퀀스에서 춤을 추는 장면은 로슈포르로 향하는 배를 타서, 비로소 대지로부터 속박되는 그 순간에 일어난다. 이후 다시금 로슈포르의 대지에 발을 붙였을 땐 유랑극단 주변에 군인들이 지나가고, 양자의 행렬은 크게 다르지 아니하다. 이들은 평평하고 직선적인 구도 및 시각을 선보인다. 허나 뮤지컬이 행해짐에 영화의 트래킹숏은 역동적으로 이동하며, 또한 수직적인 구도로 이동한다. 물론 로슈포르로 진입하는 그 순간에 현실과 꿈, 노동과 일탈의 구분을 위해 사용된 연출로서, 극의 전개에 따라서 이 같은 구분은 보다 무뎌진다. 그리고 두드러지는 것은 롱테이크에 다름 아니다. 물론 리버스 숏 또한 사용되지만, 그들을 포착함에 있어 분절되지 않은 뮤지컬이기에 느껴지지 않은 롱테이크가 드러난다. 이는 결국 감상자의 시간과 동화시켜 이들의 일탈조차도 현실의 영역임을 상기시키는 듯하다. 영화는 노동과 일탈을 오가다 델핀과 솔랑쥬 자매의 노동으로 향한다. 그녀들로 향함에 음악의 선율은 슬프다. 축제를 위한 노동이 포착됨에, 찰나적인 일탈이 끝나고 노동의 시간으로 회귀하는 아린 선율이리라. 또한 델핀과 솔랑쥬의 춤과 노래는 노동과 결합된 것이기에, 온당 자유롭고 감각적이지 않기에 슬픈 것인지 모른다. 노동의 시간이 끝난 후에야 비로소 염원하는 춤과 노래를 온당 회복한다. 그리고 이렇게 펼쳐지는 노래는 언제나 직설적으로 그들의 상황을 지칭하진 않는다. 오히려 노동과 현실 속 좌절하는 우리의 인생은 곧 감각성으로, 예술로 승화된다.
자매가 부르는 노래의 가사에는 패배감과 자신들의 과거에 대한 그늘로 가득하다. 편모가정에서 자랐다는 것, 로슈포르에서는 꿈을 펼칠 수 있는 기회가 부재 한다는 것, 허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매의 표정은 밝고 선율은 경쾌하고 명랑하다. 다른 이들도 마찬가지다. 이상형을 찾지 못함에, 누군가와 작별함에, 그리고 신문에서 살인이야기를 접하면서 행하는 그들의 노래는 우중충하고 괴괴한 사건들과 어울리지 않게 가볍고 밝다. 본 작품은 <롤라>의 계보에 어울리는 작품이다. 그렇기 때문에 <쉘부르의 우산>에서처럼 현실 속에서도 비극이 펼쳐지지 않는다. <롤라>가 현실 속에서 가능한 이상향이었다면, 본 극은 그 과정을 포착함으로써 어떻게 삭막한 현실을 타개해나갈지, 무수히 좌절하게 되는 현실 속에서 꿈을 잃지 않으려는 방도는 모색하고, 드미는 이를 예술과 감각성이라 답한다. 이본느가 살인이야기로 노래하며 마무리에 탁자를 닦아낸다. 현실의 추함을 지워내는 예술로서 위협적이고 자욱한 그늘로 가득한 세계임에도 버텨나갈 수 있는 것이리라. 대망의 일요일에 노동은 전혀 포착되지 않고 오직 춤과 노래로만 전개되는 바도 그렇다. 어떠한 현실도 연상시키지 않고 오직 가상에만 도취하게 만드는 그러한 예술, 허나 그것은 찰나적이다. 월요일이 도래하고 축제의 현장을 치우는 노동의 시간이 도래할 뿐이다. 허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시금 찾아올 일탈과 축제를 위해, 그리고 언젠가 도래할 꿈을 위해 그들은 버텨나간다.
영화 속 맥신은 이상향을 논하며 이데아를 말한다. 그는 사실상 만나본적도 없는 델핀을 간절히 바라고 있다. 그의 이데아에는 있지만 플라톤에 따르면 그것을 어설프게 복제한 현상계에서 맥신의 시선으론 델핀이 존재하지 않는다. 영화는 불완전함을, 특히나 사랑의 불완전함을 포착한다. 불완전한 인류는 기억을 온전히 상기하지 못해 타인에게 인연을 매개해주지 못하며, 선에 있어서도 불완전한 그들은 이기적인 욕심에 그들의 만남을 갈라놓는다. 기욤이나 에디트를 통해선 누군가를 사랑해도, 그 사람이 자신을 쳐다보지 않기에 좌절하는 사랑이 포착된다. 그리고 로슈포르라는 작은 공간임에도 불구하고 무수한 엇갈림 속에서 마주치지 못하는 델핀, 솔랑쥬, 그리고 그들의 어머니 이본느의 사랑을 포착한다. 영화는 <롤라>의 기조와 유사하면서도, 중반부에는 그것마저도 부정하려는 듯한 씬이 포착되곤 한다. 60살의 무희 롤라롤라라는 무희가 토막살인 당했다는 것이다. <롤라>속 그녀에 비한다면 분명 노인에 다름 아니지만, 한편 동명의 이름과 같은 직업의 그녀를 과연 별개의 사람이라 여길 수 있을까. 그래서 중반부에선 <롤라>에서 이뤘던 이상의 성취를 다시 한 번 비트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롤라롤라라는 이름은 다만 <롤라>와 유사할 뿐이요, 결국 본 극의 클라이맥스는 현실 속에서 가능한 꿈의 성취와 이데아의 도래를 노래하며 <롤라>를 반복한다. 물론 이데아의 도래는 솔랑쥬와 이본느 뿐 델핀에게는 불발한다. 하지만 그녀들이 가능했음에 맥신과 같은 곳으로 향하는 그녀의 여정 속에서 서로가 만날 수 있기를, 이본느에게 도래한 이데아가 20여년 넘게 걸렸지만 그럼에도 도래했다는 것을 염두한다면 그녀의 가능성은 열려있다. 즉 <로슈포르의 숙녀들>은 <롤라>의 기조에 뮤지컬을 섞어내어 삭막한 현실을 버텨낼 수 있는 감각성을, 그리고 도래할 수 있는 이데아를 희망하는 극이라 할 수 있다.
*<당나귀 공주>
현실 그 자체를 비추며 꿈을 실현하던 <롤라>와 <로슈포르의 숙녀들>, 현실에서 점차적으로 유리되기 시작하며 가상의 미를 선보인 <쉘부르의 우산>, 드미의 세계는 천천히 현실과 작별을 고하는 듯 했다. 그리고 동화를 영화화하는 <당나귀 공주>에서는 가장 급진적으로 현실과의 결별이 이뤄진다. 하지만 현실과 결별을 행하면서도 정신적인 영역에 있어선 언제나 현실을 비춰내던 드미 답게, <당나귀 공주>에서도 역시 현실과 오롯이 결별하진 않는다. 대단히 몽환적이고 감각적인 아름다움을 선보이는 본 극, 허나 본 극이 마법이나 초자연적인 현상을 시각화함에 있어 결코 불완전한 현실을 오롯이 소거해내지 않는다. 당대의 한계일지도 모르고, 의도적으로 가상임을 명시한 것일지 모르지만, 이것이 한계이든 의도이든 결코 온전하게 이행하지 못한 가상의 세계, 불완전한 인간의 손으로 만들어진 가상의 세계라는 점에서, 결국에는 이를 마주하는 감상자의 세계로 눈 돌리게끔 만든다. 본 극의 일련의 결함이나 조야함은 이를 마주하는 현상계에 놓인 감상자의 요소인 것이다. 특히 결말에서 당대의 시대상과 어울리지 않은, 지극히 당대를 지칭하고 현대적인 요소인 헬기를 집어넣는 것도 결말에 이르러서는 현실과의 화해를 도모한다고 볼 수 있다. 영화는 합스부르크적인 세계나 자연을 배척하는 세계, 계급갈등이 뚜렷한 세계로부터 점진적으로 발전해나가는 극에 다름 아니기 때문이다.
영화의 연출부터 살펴보자. 가장 눈에 띠는 것은 색채에 다름 아닐 것이다. 공주의 세계는 파랑으로 가득하고, 왕자의 세계는 빨강이 가득하며, 이들은 각각 자연의 색채로부터 유리되어 있다. 자연은 감상자의 현실에서 마주할 수 있는 색채를 잃지 않는다. 그리고 결말에서는 하양이 강조된다. 일단 파랑 자체는 자연과 일치하는, 청기사파의 마르크나 낭만주의의 대문호 노발리스가 동경한 이상향의 푸른빛일 수 있다. 하지만 본 극에서는 현실과 유리된 비자연적인 색채, 그리고 근친을 자행하려하고 바깥을 보지 않는 왕궁의 폐쇄성, 안으로의 응집성을 드러내는 우울한 파랑에 다름 아니다. 파랑은 내부로 줄곧 응축한다. 파란 왕궁의 세계에서 백성의 세계나, 왕궁 바깥의 세계는 찾아보기 어렵다. 그리고 빨강에 상응하는 왕자의 세계는 곧 활기, 생기, 욕망에 다름 아닐 것이다. 빨강이라는 색채가 띠는 축제가 강조되고, 또한 바깥으로 나아가는 활력이 강조된다. 왕자의 세계에서는 백성의 세계를 마주할 수 있으니 말이다. 그래서 내부로 위축되는 파랑과 바깥으로 나아가려는 빨강은 서로 조화를 이뤄야만 한다. 그것은 본래의 색채를 간직한 자연의 조율에 의한다. 이 같은 자연은 금은보화를 낳는 당나귀나 마법을 부리는 요정으로 대표되며, 전지전능한 힘을 가진 화해의 대상으로서 나타나곤 한다. 이러한 자연의 조율에 근친의 세계와 계급론의 세계로부터 벗어나 ‘순수한’ 사랑이 가능한, 또한 무한한 가능성이 열어젖혀진 하양의 세계로 나아간다.
영화는 아름다움에 대한 집착으로 딸과 혼인하려는 왕의 광기를, 그리고 이 같은 왕의 집착으로부터 쉬이 벗어나지 못하는 공주의 갈팡질팡하는 마음을 드러낸다. 전자는 이상에 대한 집착으로 인해 반인륜적이고 비자연적인 근친을 자행한 합스부르크가의 역사를 상기시키고, 후자는 이 같은 광기에도 불구하고 아버지에 대한 자연스러운 사랑에 의해 이를 거부하지 못하는 유아기적인 엘렉트라 콤플렉스로 보인다. 전자의 경우에는 말과 인류를 파랑으로 덧칠하여 자연으로부터 멀어지거나, 당나귀와 같이 자연의 일부를 착취의 대상으로 전락시킨다. 이 같은 행동들은 자연을 정복 및 배척의 대상으로 삼고, 인류만을 고립시켜 이상을 추구하려는 전근대의 서구적 사고의 상징으로서 보인다. 그래서 공주가 임금에게 좋은 날씨와 달과 밤, 그리고 태양에 상응하는, 자연의 원리에 벗어나지 않는 드레스들을 요구한 것은 비자연적인 왕궁에서 자연을 회복하려는 움직임에 다름 아니다. 좋은 날씨에 상응하는 드레스를 현실의 조명을 이용하여 반짝이는 효과를 추구한 것도, 현실로부터 그리고 자연으로부터 유리되지 않으려는 연출처럼 느껴지며, 소박하지만 대단히 감각적인 효과를 자아낸다. 그리고 후자는 공주가 남근기에서 잠복기로 진입하며, 열린 세계로 나아가고 다른 타인들에게 집중하며 자연스레 극복될 바다. 자연으로서 요정은 공주가 이 같은 단계를 넘어설 수 있게끔 해방을 선언한다. 이 같은 모험을 위해서 당나귀 탈을 뒤집어쓰는 것도 비자연적인 세계로부터 자연으로 향해가기 위한 일련의 주체성에 다름 아닐지 모른다. 허나 자연으로 나아가도 영화의 시간이 결코 자연적이지 않다. 공주가 처음으로 왕궁 밖에 발을 내딛고 달려 나가는 모습을 영화는 슬로우모션으로 포착한다. 첫 도약하는 숭고한 순간에 대한 집중을 자아내는 연출처럼 보이지만, 이후 백성이 사는 마을로 향했을 때 농민들이 멈춰있다는 것이 제시된다. 정지된 시간을 거스르기 위해서 느리게 포착되는 움직임일 것이리라.
그리고 정지된 마을은 다시금 시간을 부여받는다. 허나 이는 한정적이다. 노동의 시간과 왕자가 도래한 시간에서만 움직이는 그들이 포착된다. 노동과 왕정으로부터의 충성 이외에는 그들에게 시간이 허용될 수 없는 것일까. 당나귀 가죽으로 불리는 공주는 그 세계에서 더 이상 왕족이 아니다. 가장 천한 신분을 지니며 다른 농민들도 그녀를 무시한다. 왕자는 태양의 드레스를 입은 그녀의 존재 자체를 포착하지만, 천한 계급으로 낙인찍힌 그녀와의 사랑은 결코 온전할 수 없다. 그래서 이들의 사랑은 오직 영혼의 형태로만이 가능하였고, 왕자는 상사병을 앓는다. 이윽고 공주가 몰래 마법으로서 전해준 반지를 위해 마치 <신데렐라>에서처럼 나라의 모든 여성들을 귀천에 상관없이 불러 모은다. 왕자와 계급에 구애 없이 혼인할 수 있는 공정한 장이 펼쳐짐에, 노동과 왕정에 귀속되던 백성의 시간은 극복될 수 있을까. 물론 왕자와 공주의 혼인이라는 점에서, 당대의 모든 한계를 극복했다 말하기는 어려우리라. 허나 계급을 뛰어넘을 수 있었던 사랑, 아버지를 벗어난 공주의 욕망, 서구문명으로서의 임금과 자연으로서 요정의 혼인은 포착되었던 세계의 한계들을 극복한 것이라 볼 수 있다. 가상의 세계였지만 지적된 한계들은 인류의 역사가 품었던 과오들에 다름 아니다. 드미는 인류로부터 진정으로 멀어진 가상이라면, 인류의 물리적인 불완전함뿐만 아니라 정신적인 미숙함조차 극복되어야 함을, 현실에서 가장 멀어지려 하는 본 극을 통해서 나타내는 듯 보인다.
*<도심 속의 방>
마지막으로 그의 후기 시기 대표작인 <도심 속의 방>이다. 드미는 <쉘부르의 우산>부터 이어진 씨네 오페라를 본 극에서도 도입한다. 하지만 <쉘부르의 방>이나 <로슈포르의 숙녀들>에서 느껴지는 낭만성은 본 극에서 포착하기 어렵다. 찰나적인 사랑은 이전 작들에서보다 더욱 짧아졌으며, 가상적인 공간에서도 색채는 온당 감각성을 위해서만 봉사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현실로부터 유리된 가상의 공간이라 한들, 결국 불완전한 인류의 공간에 다름 아니다. 마치 이상향에 다름 아닌 공간을 불완전한 인간이 점유하여 결국에는 비극으로 점철되는 <쉘부르의 우산>과는 달리 철저히 현실적이다. 또한 가상적인 공간의 비중은 그리 높지 않으며, 노동자들이 점유한 공간은 실제의 술집이나 마감 이후의 찌꺼기와 구정물만 남은 현실적인 공간이다. 이전 작들에서 일련의 가상으로의 도피가 느껴졌다면, 본 극은 가상성 조차도 오직 현실을 비추기 위한 도구에 다름 아니다. 이러한 본 작품은 드미의 <레 미제라블>이라 해도 결코 과언이 아닌데, 그의 주된 테마인 사랑과 더불어 사회비판적, 계급론적인 메시지가 결부된다. 그리고 이 같은 바는 형식으로도 나타나는데, 본 극의 시작은 흑백이다. 1955년 낭트 대파업에서의 프롤레타리아트와 부르주아지의 편에선 경찰의 팽팽한 긴장감이 감도는 대치상황이 포착된다. 이 같은 신경전은 곧 충돌로 이어지고, 이내 곧 컬러로 뒤바뀐다. 컬러로 뒤바뀌며 포착되는 것은 몰락한 남작가의 부인으로서 부르주아지에 다름 아닌 뇌빌 부인이다. 컬러라는 감각성을 누릴 수 있는 것은 곧 부르주아지요, 노동자의 매체는 곧 삭막하고 황량한 흑백인 것인가.
<쉘부르의 우산>이나 <로슈포르의 숙녀들>의 색채는 분명 감각적임과 동시에 상징성을 띠었다. 허나 본 극에서의 색채는 상징성이 도드라진다. 처음에 포착되는 뇌빌 부인의 빨강은 곧 프랑수아를 향한 억압과 결부되어, 그녀가 현재 갖고 있는 욕망의 결핍과 분출을 의미할 것이다. 그 빨강은 궁핍함의 충족을 갈망하는 강렬함에 다름 아니리라. 뇌빌 부인의 옷과 벽지가 빨강이라면, 프랑수아의 벽지는 파랑이요 옷은 노랑이다. 벽지의 채도가 낮은 파랑은 둔탁하여 그의 우울한 상황을, 그리고 내부로만 응축하는 운동성을 보여준다. 이는 외부로 권리를 표명하지 못하는 노동자의 상황에 다름 아니리라. 이 같은 파랑은 곧 프랑수아의 의복에 다름 아닌 노랑에 의해 절충된다. 권리를 표명하는 파업상황과 걸맞는, 외부로 끊임없이 에너지를 소모하고 분출하는 역동적이고 정력적인 색채가 그의 옷에 덧입혀진다. 그리고 프랑수아의 이전 연인이라 할 수 있는 비올렛은 우아한 연보라빛 의상을 입고 있다. 하지만 그것은 그리스도의 포도주를 지칭하며 신성함이나 경건함에 상응하기 보다는, 오히려 칸딘스키가 조화될 수 없는 색채로 규정했던 빨강과 파랑의 혼합, 파랑이 불꽃같은 빨강을 차갑게 얼려버린 병적인 불꽃의 색채에 다름 아니다. 프랑수아가 그녀를 바라보는 욕망은 식었으며, 그녀가 프랑수아를 향한 욕망은 더 이상 지속될 수 없는 식어버린 유형의 것이다. 또한 그녀의 벽지 또한 프랑수아를 향해 에너지를 발산하는 노랑이다. 그 옆의 어머니 방이 프랑수아 방의 파랑보다 채도가 높은 푸른빛을 띠어, 이상향이나 동경에 상응하며 그녀의 불안에도 흔들리지 않는 바가 다행이라면 다행이리라.
영화는 선천적으로 타고난 계급과 폐쇄적인 구조에 의해 저당 잡힌 개개인의 삶을 포착한다. 프랑수아의 삶을 재단하려는 듯한 뇌빌 부인의 삶부터 살펴보자. 그녀조차 남작 가문의 딸로서 보수적인 시대상을 살아왔고, 지금도 이 같은 사고로 살아가고 있다. 그녀가 딸 에디트와 대화가 불가능한 것은 이 같은 세대 차이에서 기인할 것이리라. 또한 낭글루와 대령과 혼인한 것이 과연 그녀의 자의였을까. 이 같은 혼사에 의해 그녀는 과부가 되었고 아들도 잃었다. 과거의 구조는 그녀를 발목 잡아 현재에서 도태되게 만든다. 그리고 이 같은 제도에 순응하는 태도와 그것에 반골적인 프랑수아의 태도는 충돌할 수밖에 없으리라. 노동자로의 추락이 아닌 태생부터 노동자였을 프랑수아는 직장에서 해고됨에도 동지애를 발현하여 파업을 이어나간다. 이 같은 노동자의 시간은 곧 담배안개로 가득한 밤이요, 공간은 자신들의 지붕이 아닌 술집이자, 지붕도 없는 길거리에 다름 아니다. 아녜스 바르다의 <방랑자>와 시기적으로 유사한 본 작품은 유사한 주제의식을 공유한다. 이 같은 자신의 지붕도 아니고, 지붕의 간직도 위태로운 프랑수아는 주체적인 결혼을 바란다. 그래서 비올렛에게 의존하는 결혼은 주체적인 삶을 투쟁하는 노동자로서 지양하고 싶은 것에 다름 아니다. 비올렛과의 관계에는 감각성보다도 경제적인 바가 대두된다.
그래서 에디트와 프랑수아의 첫 만남이 나체인 것은 비올렛과의 관계에 부재하는 감각성의 표명이리라. 이 같은 나체에는 색채의 어떠한 상징성도 포착되지 않는다. 오히려 가장 순수한 감각성에 다름 아니다. 에디트에게서는 당대 여성들의 결혼, 개인의 감각성은 무시되고 경제적인 논리만이 강조된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계약으로서의 결혼이 강조된다. 이에 그녀들은 마치 종신적인 노예처럼 '나의 창녀'로 불리기 일쑤이며, 소유된 그녀들은 폭력으로 다뤄져 몸에는 멍과 상흔이 가득하다. 이렇게 당대의 구조는 개개인들을 억압하고, 한편으로 에디트와 같은 유형의 인물들은 이 같은 구조로 나아갈 수 없음을 표명하는 듯 보인다. 점괘에 의존하며 그것을 따라가려는 그녀의 여정이 말이다. 한편으로 이 같은 운명, 제도에 구획되어 있기 때문에 더더욱 바깥으로의 일탈은 불가능한 것이리라. 타인은 언제나 자신으로부터 떠나가기에 마음이 식어버린 프랑수아를 비올렛은 떠나갈 수 없으며, 프랑수아의 사망에 에디트의 사랑도 불발한다. 노동자들은 아침을 밝히기 위해 대규모로 집결하였다. 하지만 뇌빌 부인의 의상이 백골의 하양과 모든 색들의 귀결점으로서 죽음에 상응하는 죽음, 즉 애도의 색채로만 가득한 것은 불길함을 암시한다. 또한 붉은색과 둔탁한 색채의 의상을 입고 있는 에디트도 불길하기는 마찬가지요, 결연한 마지막 투쟁 날에 프랑수아는 빨강 옷을 입으며 불안이 예고된다. 투쟁을 위해 끝없이 에너지를 소진하던 노랑, 대의를 위한 마지막 날의 빨강은 결국 비극을 예고한 셈이 되었다. 그리고 영원불멸한 절대적인 사랑은 에디트의 죽음으로만 가능하게 되었으니, 살아서의 무수한 엇갈림과 불연속은 <롤라>를 제외한 거의 모든 드미 작품들의 공통이라 할 수 있다.
이 같은 드미의 작품들에서 과연 드미 자신이 배제되어있으리라 생각하기 어렵다. 특히나 후기시기의 <도심 속의 방>은 성 지향성을 명확히 인지한 이후, 바르다와의 결별도 겪은 이후에 다름 아니다. 그는 자신의 성 지향성을 통한 이상적이고 궁극적인 사랑의 실현이 온당 불가능하다고 느낀 것일까. 감각으로서의 사랑의 불가능은 <쉘부르의 우산>에서 그저 우울감 정도에 그쳤다면, <도심 속의 방>에서는 아예 죽음으로 귀결되니 말이다. 다만 이 같은 불가능의 이유는 분명하다. 인세 자체가 무수한 엇갈림의 연속임에도 분명하고, 타인이 언제나 욕망의 주체로부터 떠나가기에도 그 이유 중 하나다. 드미의 작품에는 이 같은 바가 분명이 드러난다. 허나 이보다 더욱 뚜렷한 바는 곧 제도의 개입에 다름 아니다. <쉘부르의 우산>속 입대, <도심 속의 방>에서의 전쟁의 암시나 불가능한 권리를 통해서 드러나는 제도의 부조리함, 이를 두고 드미는 <도심 속의 방>을 통해 직접적으로 폭력적이라 말한다. 현재를 비추는 드미는 언제나 이 같은 증오와 폭력의 당대를 그려내었지만, 폭력적이라 말하며 화합을 말하는 그는 결국 <롤라>를 바란 것이 아닐까. 당장 지금 여기에서 만날 수 없더라도 <로슈포르의 숙녀들>속 돌핀처럼 그 가능성을 열어두는 것은 아니었을까. 감각적인 형식 속 비관을 담아내는 시네오페라의 창시자 자크 드미, 허나 비관에 우리는 그것을 감각으로, 그리고 예술로 승화하려는 여정을 끊이지 않는다. / 글. 박정수
☆Donation:
London Design Festival 2023
Farmer Designers: An art of living
Niamh O'Malley, 'Glasshouse' (2014)
Tilda Swinton Pays Tribute to the Films of Pier Paolo Pasolini
New Methodology Visual Semiotic: Replica
Erwin Olaf. Strange Beauty
JOHN AKOMFRAH_Vertigo Sea, Montréal
The Sad Irony of Juergen Teller’s “Lazy” W Magazine Shoot
Berlin International Film Festival 2021
*Art&Project can be registered directly after signing up anyone.
*It will be all registered on Google and other web portals after posting.
**Please click the link(add an event) on the top or contact us email If you want to advertise your project on the main page.
☆Donation: https://www.paypal.com/paypalme2/artlecture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