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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오 앙겔로풀로스 감독 (1) - 앙겔로풀로스의 세계 | ARTLECTURE

테오 앙겔로풀로스 감독 (1) - 앙겔로풀로스의 세계

/People & Artist/
by 박정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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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오 앙겔로풀로스 감독 (1) - 앙겔로풀로스의 세계



 

*롱테이크의 대가들

우리가 일반적으로 기대하는 영화들은 서사에 있어서는 주로 극적이고, 짧은 숏들의 분할과 빠른 리듬감을 동반하며 감상자들의 혼을 빼놓는다. 이러한 대중의 통념은 영화가 탄생한 이래부터 줄곧 형성된 영화의 역할에서 기인할 것이다. 많은 자본이 동원되고, 그러한 자본의 영향력이 반영된다. 투자한 자본을 다시금 회수해야하고 이익을 내야만 하는 구조 속에서 자연스레 영화는 다양한 대중들의 쾌를 자극하는 방향으로 그 문법이 형성됐을 수밖에 없으리라. 허나 20세기 중반의 여러 사조들은 이러한 통념을 전복하고, 자율성을 획득하고자 하는 움직임을 모색한다. 누군가는 저예산에 즉흥적으로 로케이션을 하며, 비전문 배우들을 기용하며 실제 삶을 스크린에 녹여내려 하였다. 또 다른 누군가는 그간 많은 대중들의 몰입을 자아내던 영화의 문법에 소격효과랄지 점프컷과 같은 혁신적이고도 실험적인 기법으로, 감상자의 집중을 의도적으로 깨뜨리곤 하였다. 한편 다른 누군가는 다른 방식의 몰입을 도모하였다. 지금까지의 몰입이 대중들의 쾌와 관심을 자극하는 감상자 위주에서 이뤄졌다면, 반대로 감상자들이 고도의 집중력을 동반하여 영화에 몰입해야하는 명상의 차원을 스크린에 구현해내고자 했다. 그들은 긴 호흡의 롱테이크나 숏이 분할되지 않는 원쇼트원씬(플랑 세캉스)을 동원하여 현실의 시간과 스크린의 시간을 동화시키고, 대중들이 염원하는 세계가 아닌, 대중들이 살아가야만 하는 시간과 세계를 비춰내곤 하였다. 이에 대표적인 시네아스트로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와 테오 앙겔로풀로스가 있다.

 

*앙겔로풀로스와 타르코프스키

이 둘은 분명 닮아있다. 타르코프스키의 영화를 보면 자연스레 앙겔로풀로스가 떠오르고, 앙겔로풀로스의 영화를 봐도 자연스레 타르코프스키의 영화가 연상된다. 허나 이 둘은 유사하면서도 다르다. 타르코프스키에게서 강조되는 연출의 키워드가 롱테이크라면 앙겔로풀로스에게 있어서 강조되는 연출은 앞서 언급한 원쇼트원씬이다. 타르코프스키는 후기로 가면 갈수록 분절되지 않는 숏들을 추구하기는 했지만, 초기작들의 시퀀스에선 숏을 쪼개내는 분절이 분명 이뤄진다. 허나 앙겔로풀로스는 타르코프스키보다도 더욱 끈질기게 숏의 분절을 절제하려 하였다. 이러한 긴 호흡을 필두로 타르코프스키는 숏을 쪼개내면서도 긴 호흡을 포기하지 않으며, 절대적인 시간을 결코 훼손시키지 않으려는 관점이 도드라졌다. 앙겔로풀로스의 원쇼트원씬으로 표명되는 시간성도 분명 타르코프스키의 절대적인 시간과 유사한 측면이 있다. 허나 앙겔로풀로스의 원쇼트원씬은 종교적인 차원에서 절대적인 시간을 탐구하던 타르코프스키와는 다르게 보다 정치적이다. 그것은 현재를 이루는 흘러간 역사들 속에서 우리가 결코 자유로울 수 없다는, 연속선상에 놓여있다는 시간의 총합에 관련된다. 그래서 절대적인 시간을 구현하는 연출 속에서 포착하는 신비스럽고 환상적인 연출 또한 유사하지만, 타르코프스키가 종교성을 강조했다면 앙겔로풀로스는 역사에서 비롯된 연극성을 강조했다. 그리고 타르코프스키가 추구하는 거리감은 롱숏과 클로즈업을 넘나든다. 클로즈업은 자전적인 이야기를 풀어내는 일련의 명확함이나 뚜렷함처럼 느껴지고, 또한 있는 그대로의 자연을 포착하는 감각성을 드러낸다.

 

하지만 앙겔로풀로스는 타르코프스키의 근거리보다도 멀다. 인물을 포착함에 있어선 주로 풀숏을, 또한 세계를 포착함에 있어선 롱숏과 익스트림 롱숏을 사용한다. 타르코프스키 또한 롱숏을 통해서 세계와 자연 속에서 유기적으로 구성되는 인간의 자리를 탐구하기도 하였지만, <거울>이나 <잠입자>와 같은 작품들에서 표명되는 분명한 클로즈업들은 한 개인의 일대기 그 자체에도 관심을 둔 것으로 보인다. 허나 앙겔로풀로스의 주목은 독립적인 한 개인이 아닌, 세계에서 유기적으로 형성되는 상대적인 개인에 주목하는 것처럼 보인다. 앙겔로풀로스의 작품 속에서 인물들의 얼굴은 어렴풋이, 희미하게 포착될 뿐이다. 잔느 모로나 마르첼로 마스트로얀니와 같은 대배우들의 초상이 그토록 작게, 어떤 인물인지 분간되기 어렵게 포착된 작품도 드물 것이다. 이러한 개인들은 세계를 초월하여 살아갈 수 없다. 개인은 세계 속에 놓인 여러 상호관계 속에서 구성된다. 그래서 앙겔로풀로스의 시퀀스에서 쇠락하는 풍경이나 자연물들, 오브제들은 결코 개인과 유리된 무의미하거나 독립적인 것들이 아니다. 그것들은 개인에게 닥쳐오는 시련을 의미하거나 개인을 구성하고 영향 주는 것들이다. 특히나 앙겔로풀로스의 구도는 낭만주의 화가 카스파 다비드 프리드리히의 숭고한 구도를 연상케 한다. 인간은 마치 우주 속의 먼지처럼 대단히 작게 표현되고, 오히려 이러한 인물이 세계를 포착하기 위한 배경인 것 마냥, 기존 영화문법에서 전복을 일으킨다. 이러한 구도는 인간을 겸허하게 만든다. 세계 없이는 존재할 수 없는 인간, 또한 거대한 세계에 비한다면 너무도 나약한 인간의 위치를 재확인시킨다.

 

앙겔로풀로스가 인간을 겸허하게 만드는 방식은, 그간의 인류가 저지른 오만함에서 비롯한 실수와 비극의 역사를 고발함에 있다. 지금까지의 역사 속에서 인간이 오만하다는 태도는 타르코프스키 또한 취한 바가 있다. 정신성을 결핍한 채 물질 중심적으로 이뤄지는 문명의 발전을 경계하고, 이에 영성의 회복만이 유일한 해답이라 그는 바라봤다. 허나 타르코프스키는 그렇게 정치적인 작가는 아니다. 그의 가장 정치적이라 할 수 있을 작품인 <이반의 어린시절>이나 <잠입자>, <희생>정도를 제외한다면, 그 오만함으로 세워진 세계를 직접적으로 비춰내지 않는다. 그리고 여기서 앙겔로풀로스의 타르코프스키와의 차이점이 발생한다. 앙겔로풀로스의 해답 또한 정신성이나 인류애의 회복에 있지만, 그것은 영성과 종교의 본령을 비추는 것이 아니라, 지옥도 그 자체인 세계를 생생히 감상자가 목도하게끔 만드는 것에 있다. 앙겔로풀로스의 관심은 당대의 여러 유럽의 현실과, 국경 및 난민들을 똑바로 응시하는 것에 있다. 타르코프스키의 <노스텔지아>같은 작품의 정치성은 대단히 암시적인 것을 생각할 때, 양자의 차이는 도드라진다. 그리고 앙겔로풀로스의 시기의 난민들은 작금의 난민들과는 다소 차이가 있다. 작금에 난민의 주요 발생지는 중동과 아프리카라 할 수 있다. 작금의 난민은 종교 간의 분쟁 및 전쟁으로 인한 자국의 혼란한 상황으로 인하여, 또한 암담한 경제상황에서도 기인한다. 앙겔로풀로스가 포착하는 난민들은 지금과 유사하다고도 볼 수 있을, 유고 내전 속에서 발생한 난민들이 존재한다. 한편 지금과의 차이는 냉전구도 속에서 부당하게 낙인찍힌 정치범들이 난민으로 존재한다는 것이다.

 

*앙겔로풀로스의 시선

그리고 앙겔로풀로스의 관심은 세계를 포착하는 것이요, 특히 인세를 이루는 이데올로기와 구조를 바라보고, 이들의 부당함을 포착함에 있다. 그의 침묵 3부작 중에서 <시테라 섬으로의 여행>에서 공산주의자라는 낙인으로 인해 자국에서 추방된 난민이 포착된다. 해외를 떠돌다가 그는 말년에 다시금 자국으로 돌아오지만, 여전히 그 세계는 한 치도 나아지지 않았다. 쇠락한 몸을 가진 그를 여전히 추방할 뿐이다. 또한 침묵 3부작 이후에 그는 국경 3부작을 연출하며, 난민이라는 주제의식을 보다 적극적으로 강조해나간다. <황새의 정지된 비상>에서 결혼식을 올려야 마땅한 두 남녀가, 거대한 국가들에 의해 구획된 강을 두고 애련하게 멀리 떨어져 있는 풍광 자체가, 오만한 인류에 의해서 구획되어버린 세계와 이에 의해 고통 받는 개인들을 함축하여 드러낸다. 또한 <율리시스의 시선>에서는 보다 직접적으로 발칸 반도의 혼란한 상황을 포착한다. 그래서 타르코프스키의 명상이란 곧 순일한 종교적인 시간으로 침잠하는 것이라면, 앙겔로풀로스는 우리가 일반적인 영화 속에서 빠르게 지나쳐 버리는 이 세계 자체에 깊이 몰입할 것을 요구하는 명상이라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세계는 어떻게 바뀌어야 하는가?

 

*앙겔로풀로스의

이러한 질문에 앙겔로풀로스는 과거의 극복, 예술의 역할, 우리가 잃어버린 것들을 되찾는 여정 속에서 해답을 길어낸다. 종교의 급진적인 배격은 아니더라도, 종교가 띠었던 관계망에 있어서 앙겔로풀로스는 비판적인 입장을 취한다. 특히 아버지들의 부재에 있어 날카로운 태도를 보이기에, 이 지점에서 타르코프스키와의 극명한 차이점이 도드라진다. <비키퍼>에서 아버지가 딸아이에게 던지는 사과를 던지지만, 한편 여왕벌을 향한 경쟁 속에서 승리했던 숫벌이라는 자신의 성취를 결코 극복해내지 못하는 가장들과 가부장제의 건재함을 드러낸다. 나아가려는 모습 속에서도 그가 보이는 고압적인 태도랄지 폭력성을 당대의 괴리로서 포착해낸다. 또한 아버지의 부재가 허용됐던 종교의 관계망을 통렬히 비판한다. <안개 속의 풍경>에서 부재하는 아버지를 찾아 나서기 위해서 아이들은 위험천만한 여정에 내던져진다. 아이들은 신화 속 영웅들 마냥 시련을 극복해내지 못하고, 또한 현실 속에서 본류를 찾아 올라갈 수 없다. 한편으로 이를 극복할 것으로 오레스테스라는 인물을 설정하여 인류애와 연대를 외쳐낸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 다름 아닌 사랑이다. <시테라 섬으로의 여행>에서 직접적인 테마는, 세계와 이데올로기가 퇴보하고 모든 것이 저물어갈지라도, 영속적인 사랑을 위한 노력을 끊이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

 

*앙겔로풀로스의 예술에 대한 고찰

무엇보다 이러한 가치들을 인도함에 있어 예술의 역할이 중요하다. 그가 연출하는 영화 속에서도 리얼리즘의 정신은 열렬히 빛난다. 그리고 이러한 자신의 영화론으로서 <율리시스의 시선>에서 이데올로기에 의해 유폐되고 상실되었을지도 모르는 리얼리즘 영화를 찾아 나서는 예술가의 일대기가 포착된다. <영원과 하루>에서 당대의 시인은 난민의 언어를 반영해야 한다고 말한다. 예술가들은 세계를 통찰해내고 삶 그 자체를 작품 속에 진솔히 녹여내어야 한다는 그의 천명이다. 즉 그에게서 예술은 현실을 개혁하기 위해서 예술은 진실한 것을 포착하고 담아내어야만 하며, 또한 그것은 사랑과도 결부되고 폭압적인 이데올로기를 극복함에 있다. 무엇보다 앙겔로풀로스의 여정은 원류, 일련의 본질을 찾아나서는 여정이라 할 수 있다. 허나 그 여정은 비극이다. 앙겔로풀로스의 시선은 우리의 삶에서 진리의 탐구가 대단히 힘겨움을, 특히나 실재할 수 있는 필름을 찾는 <율리시스의 시선>을 제외한다면 그것은 죽음 이후에 일어난다는 점이 강조된다. 앙겔로풀로스의 작품들은 서구의 비극론들과 깊은 연관성을 둘 수 있다. 그것은 삶의 극복보다도 우리가 극복할 수 없는 삶의 무상성과 허무함을 강조한다는 측면에서 쇼펜하우어의 비극론과 유사하다고 할 수 있다. 그럼에도 어떻게든 살아가야함을 지속시키는 예술이라기보다는, 우리를 둘러 싼 세계와 자연 자체가 악하기에 살아간다는 것의 본질이기에, 나의 고통이 아닌 전 인류의 고통이요, 모두가 이를 극복할 수 없으리라는 염세주의적인 비극이 드러난다.

 

*즉자에서 대자로의 나아감

한편 이렇게 비극적인 세계 자체와는 분리될 수 없고, 또한 악한 영향관계를 떼어낼 수 없는 인간일지라도, 이데올로기가 고압적으로 구획하는 보편에서 탈피하려는 실존적인 움직임이 그에게서 포착된다. 그러한 움직임이 도드라지기 때문에 우리는 그의 작품들을 마주하며 찰나적으로 우리를 둘러싼 우울증과 권태, 무기력함을 극복해내곤 한다. <황새의 정지된 비상>에서 마스트로얀니가 정치인을 연기한다. 허나 그는 말만 번지르르하고 대외적으로 형성된 이미지로서 정치인인, 즉자인 자신이 존재했다. 허나 그러한 즉자로서의 자신과 결별하고 실제 삶의 현장인 난민들이 모여드는 국경에 가서 규정된 이미지를 씻어낸다. 그의 부인을 분하는 잔느 모로는 대자로서의 그를 보고 그가 아니라고 주장한다. 세계가 규정한 즉자로서의 그가 아니기 때문에 타인들은 그를 외면한다. 허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대자로 거듭나는 인물들의 움직임 속에서만이 세게는 희망과 변화의 맹아를 품어낸다. 무엇보다 이러한 즉자에서 대자로 나아감은 과거를 극복하는 것에 있다. <비키퍼>에서 남성들은 가장이라는 자신들에게 영예로웠던 즉자를 그리워만 한다. 그러한 과거로서의 즉자에서 삶은 한 발자국도 나아가지 못한다. 허나 모순적이고 과거와 현재가 부딪히더라도, <비키퍼>의 마스트로얀니는 그들과 달리 현재로, 또한 변화하는 존재로 나아가려 한다.

 

*앙겔로풀로스의 시간관

이러한 실존적인 존재는 한 개인이 지닐 수 있는 무궁무진한 가능성, 곧 자유에 상응한다. 이러한 개인의 총체를 이루는 다양함 또한 시간성으로 그는 포착한다. 타르코프스키의 <거울>처럼 개인의 역사가 종합되는 과정이 <영원과 하루>에서 르네 마그리트나 살바도르 달리의 회화를 연상케 할 초현실적인 시퀀스로 드러난다. 그것은 자신이 돌아가고자 하는 과거와 지금의 현재가 복잡하게 뒤얽힌 시간으로서, 타르코프스키 <노스텔지아>에서 마지막 시퀀스를 연상케 하기도 한다. <율리시즈의 시선>에서도 마찬가지다. 하비 케이텔이 분하는 주인공은 고향인 그리스로 돌아가 일련의 회고에 휩싸인다. 허나 그 회고는 플래시백으로 이뤄지지 않는다. 지금 여기에서 살아가고 있는 현재의 ''에게 과거의 인물들이 펼쳐진다. 과거는 현재의 그에게서 동떨어진 것이 아니라, 지금 여기의 그를 이루는 혼재하는 것이다. 과거로 돌아갈 수 없다면 그것은 이미 그것을 자신의 총체에 담아내고 있기 때문일 것이리라. 즉 이렇게 과거와 현재가 종합된 시간은 앞서 언급한 우리가 결별하거나 떼어낼 수 없는 과거, 흘러간 것이 아닌 쌓이고 축적된 것으로서의 시간이라는 것을 강조한다. 한편으로 현재에서의 시간은 때때로 상징성을 띤다. <영원과 하루>에서 눈이 내리는 황홀한 정경에 빠져들어 정지된 인물들과, 반면 여전히 움직이는 두 아이들은 정체된 인물들과 여전히 여정을 끊이지 않는 인물들의 대비를 자아낸다. 감독은 영화 및 예술이기에 가능한 시간성에 주목하고, 이렇게 표현된 시간은 인류가 시간을 사용하는 여러 방식들을 고찰한다.


장앙투안 와토 <키테라 섬의 순례> 1717

 

*고전의 영향

이러한 테마를 엮어냄에 있어서 타르코프스키에게선 정교회의 상징물들이 짙었다면, 앙겔로풀로스에게선 그리스 신화의 영향력이 짙다. <시테라 섬으로의 여행>에서 시테라 섬은 그리스 신화의 아프로디테의 섬으로, 그리스인들이 사랑의 축복을 받기 위해 순례를 떠났던 공간이다. 로코코의 화가 와토는 이와 동명의 회화작품을 그려내기도 하였다. 한편으로 신화 속에서, 그리고 와토의 작품 속에서 강조되는 것은 사랑은 결코 영속적이지 못하다는 것이다. 앙겔로풀로스 또한 사랑은 분명 찰나적이고, 세계를 바라보는 우리의 태도와 마찬가지로 좌절을 안겨줄지 모른다. 하지만 그렇게 불완전할 것일지라도 유일하게 변치 않는 것, 그리고 계승해야 할 것으로서 영속해야 할 것이라는 변주를 가한다. 이러한 신화적인 모티브는 <율리시스의 시선>에서 필름을 찾는 감독의 여정을 트로이 전쟁 이후 20여 년간 망망대해를 떠돈 오딧세우스에 빗댄 것과, 보다 매혹적이고 은유적인 상징은 <안개 속의 풍경>에서 아동들과 연대하는 소년의 이름을 오레스테스로 상정했다는 것에 있다. 신화 속 부정을 저지른 탄탈로스의 자손으로서 자손에게도 이어진 일련의 '운명'을 영화 속 오레스테스도 거스르기 어려웠다. 허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낙담하지 않고 움직이려는 태도가 포착된다.

 

*앙겔로풀로스의 종교성

종교적인 상징도 분명 존재한다. 그것은 <안개 속의 풍경>의 결말에서 두드러진다. 결국에 그들의 아버지는 현상계에서 마주할 수 없는 에덴의 성부로서 아버지다. 허나 죽어서야만 마주할 수 있는 아이들의 여정은 공허한 것이 되었다. 아이들을 죽음에 이르게 한 것은 결국 부재하는 아버지에 의한 것이 아니더냐. 결국 신화나 종교에 의해 긍정된, 부재할 수 있는 아버지의 자리를 극복해야만 한다. 또한 현대의 신화로서 부상하는 거대 조각들을 <율리시스의 시선>이나 <안개 속의 풍경>속에 드러내며 감독 고유의 상징성을 창조해내기도 한다. 허나 그것들은 해체되거나 저 멀리 떠나가며, 궁극적으로는 이데올로기로서의 신화로부터 자유로워져야함을 역설한다. 그래서 앙겔로풀로스는 단순히 고전에서 모티브를 길어오고 상징을 가져오는 것에 그치지 않고, 이를 극복하려는 움직임이 대두된다. 그 움직임이 결코 쉽지 않기에, 운명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그의 작품들이 비극적인 것이리라. 그러한 세계의 비극성 자체를 부정하지 않지만, 그럼에도 주인공들의 움직임은 낙담하지는 않는다. 그래서 우리는 그의 작품들을 보고 찰나적의 희망을 틔우는 것이리라. 비록 온전한 구원은 죽음 이후에 있을지라도 말이다. 이렇게 그의 예술세계를 관통해내는 공통된 예술론을 타르코프스키 및 신화들과 대비해내며 살펴보았다. 그리고 이제는 그의 대표적인 두 작품들을 보다 상세히 들여다보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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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작품론(<안개 속의 풍경>&<영원과 하루>로 이어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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