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이지 않는 선으로 연결된 세계
딸아이의 얼굴에서 얼핏 외할머니의 얼굴을 본다. 동그란 얼굴과 볼록한 볼, 초승달 같은 눈. 영락없이 외할머니다. 그 간극이 멀게 느껴져 때로 신기하고 가끔은 기이하다. 먼 시골에 살아 자주 볼 수 없었던 외할머니와는 살가운 관계를 쌓지 못했다. 우리 사이엔 그리움이 자랄 시간이 없었다. 오래 앓다 돌아가셨을 때 크게 슬픔을 느끼지 못했던 것도 그 때문일 것이다.
그랬던 외할머니의 얼굴이 사랑하는 딸아이의 얼굴에 박혀 있다. 살아생전 충분히 전하지 못했던 사랑을 이렇게 보충하나 싶다. 그런데도 남편을 쏙 빼닮은 딸아이는 아빠 붕어빵이라는 별명을 가졌고 요즘은 필자를 닮았다는 이야기도 종종 듣는다. 딸아이가 지금보다 어릴 적 필자의 엄마와 나들이를 할 때면 외할머니(필자의 엄마)를 닮았다는 소리를 들었고. 그러니 아이의 얼굴엔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흔적이 담겨 있는 걸까.
카렐 차페크의 소설 <평범한 인생>(송순섭 옮김, 열린책들)에 나오는 문장처럼 “우리 각자는 세대에서 세대를 통해 불어나는 사람들의 총합인지 모른다.” 책 속 주인공은 “그들도 어떤 모습으로든 내 안에 존재하고 있고, 내 자아들 중 누군가가 그들의 모습을 닮았는지도 모른다”라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의 삶은 우리의 삶이라고. 보이지 않는 선으로 연결된 여러 존재들이 개인의 삶을 이끈다고 말이다.
삶과 죽음, 존재와 부재, 자아와 타자 사이의 경계 허물기
보이지 않는 선으로 연결된 세계, 그 비가시적 연결을 가시적으로 구현하는 작업을 지속해온 작가가 있다. 일본 오사카 출신으로 독일에서 수학하고 그곳을 근거지로 활동하고 있는 시오타 치하루(1972~)다.
시오타 치하루는 어린 시절 할머니의 무덤에서 느낀 공포와 이웃에서 화재 후 집 밖에 내다 버린 불탄 피아노의 강렬한 인상을 통해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지녔다고 한다. 독일 이주 후 잦은 이사로 겪은 혼란과 두 번의 암 투병은 삶과 죽음에 대한 고민을 실존의 문제로 직결시켰다. 자신을 사로잡은 경험과 트라우마를 바탕으로 작가는 실을 사용해 사물과 대상을 잇는 작품을 선보여왔다. 거기에는 삶과 죽음, 존재와 부재, 자아와 타자의 경계에 대한 성찰이 담겨 있다.
Connected to the Universe, 2022, Shiota Chiharu
그는 한 인터뷰에서 "실이 자꾸 겹쳐 눈이 실의 가닥을 따라갈 수 없을 정도로 짙어질 때 비로소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표현했다는 느낌이 든다"라고 말했다. 시오타 치하루의 실은 개인의 내면과 외부 세계를 연결하면서 ‘보이지 않는 연결된 삶’¹을 표상한다. 그녀의 작품에서는 엄청난 길이의 실이 겹쳐지는 축적을 통해 비가시적인 세계가 가시적인 세계로 드러난다. 이때 실은 “누구도 볼 수 없고 자신조차도 파악하기 어려운 자신의 가상현실과의 연결(미술사가 안드레아 얀의 인터뷰)”¹이 된다.
‘보이지 않는 연결’의 기원은 <Connected to the Universe> 연작을 통해 드러난다. 이 작품에서 시오타 치하루는 우주나 자연, 세계를 구성하는 입자와 사람 사이를 실로 연결하여 자아의 내면과 외부(가상현실)가 엮이어 있음을 보여준다. 사람과 사람을 연결하기도 하는 실은 탯줄이나 혈관처럼 생명을 나르는 선이 된다.
몸의 세포나 장기 형태를 띤 유리 모형을 검은색, 붉은색의 네트(그물망)로 감싼 작업 <Cell> 또한 이러한 개념 선상에서 이해할 수 있다. 우리 몸은 세포와 세포, 기관과 기관, 혈관과 조직의 연결로 이루어져 있다. 세포와 장기, 혈관의 유기적 연결 없이는 생명을 유지할 수 없는 신체처럼 개인은 타인과 세계 사이의 긴밀한 연결 없이 사회 속에 존립할 수 없음을 상기시킨다.
시오타 치하루는 오랜 고민과 경험을 통해 죽음이란 “육체로서는 끝이지만 내면의 의식은 영원히 존재할 뿐 아니라 새로운 시작”²을 의미함을 깨달았다고 한다. “신체는 수명이 다해 사라지더라도, 나를 구성하는 요소들, 즉 의식은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작품을 통해 드러내”²고자 했다. 그의 작품은 ‘부재와 현존’이 동시에 존재함을 보여주며 육신의 물리적 사라짐 이후에도 의식은 남아 있음을 표현한다.
이러한 작가의 의식을 담고 있는 작품으로 <State of Being> 연작을 꼽을 수 있다. 이 작품은 붉은색, 검은색, 흰색 실을 엮어 만든 직육면체 안에 ‘기억’을 은유하는 사물을 가두고 있다. 낡은 사진첩이나 책, 오래된 편지와 악보, 카드나 권총. 그것을 지니고 있던 사람의 부재를 떠올리게 하는 동시에 그의 흔적이 담긴 사물의 현존을 통해 존재의 있었음을 되살린다.
Being of State, 2002, Shiota Chiharu
사라질 운명에 놓인 (존재의)기억을 포획하는 작업은 삶과 죽음, 부재와 현존 사이의 경계를 허무는 시도로 보인다. 실을 겹겹이 덧대어 개별 가닥을 분별할 수 없을 때까지 지속함으로써 자아와 타자 사이의 구분은 희미해진다.
흰색 실로 완성한 거대한 기억의 바다
삶과 죽음, 존재와 부재, 타자와 자아의 경계를 실로 연결하는 작품을 통해 작가는 이분법적인 구분을 지우는 작업을 해왔다. 이러한 작가의 고민을 한눈에 보여주는 작품이 <In Memory> 일 것이다.
2년 전 붉은 실로 가득 채운 <Between Us>를 선보였던 그녀가 이번엔 ‘흰색’을 주제로 작업했다. 2020년 지인의 소개로 알게 된 한강의 소설 <흰>(난다, 2016)을 감명 깊게 읽고 거기서 받은 영감을 작품으로 풀어냈다고 한다.
소설 <흰>에는 태어난 지 2시간 만에 죽은 언니를 떠올리는 화자가 등장한다. 강보, 배내옷, 안개, 눈, 흰 도시. 흰 것을 응시하는 일은 죽은 언니가 살아있다면 이라는 상상으로 건너가고 그녀의 시선은 죽은 언니의 것이 되었다가 아기를 먼저 떠나보낸 엄마의 것이 된다. “죽지 마. 죽지 마라 제발.” 아기를 품에 안고 빌었던 엄마의 기도는 “죽지 말아요. 살아가요.”라는 작별의 말로 재탄생한다. 세상의 모든 흰 것을 매개로 화자와 죽은 아기는 연결되고 기억됨으로써 되살아난다. 흰 것이 표상하는 ‘기억’을 통해 ‘삶’과 ‘죽음’은 하나가 된다.
“죽지 마. 죽지 마라 제발.” 소설 속 간절한 중얼거림은 시오타 치하루의 경험과 맞닿아 있다. 그녀가 암에 걸려 임신 6개월에 아이를 유산한 일은 소설 속 ‘죽은 아기’ 이야기와 겹쳐진다. 소설 <흰>에서 영감을 얻은 작가는 흰 실을 엮어 거대한 기억의 바다를 완성한다.
넓은 전시실이 흰색의 실로 뒤덮여 있다. 성에로 가득 찬 차가운 공간에 들어선 듯 선득하다가도 누에고치 속처럼 편안하다는 모순적 감각이 발생하는 공간. 중앙에는 골조만 남은 배가 한 척 있고 그 위에 하얀 드레스가 유령처럼 서 있다. 거미줄처럼 바닥에서 솟구쳐 올라 벽을 타고 천정을 덮은 겹겹의 실 사이에는 포획된 것처럼 흰 종이들이 갇혀 있다. 온통 흰 것들. 사방이 눈부시도록 희다.
In Memory, 2022, Shiota Chiharu
전시장을 매운 침묵은 영혼의 소리 없는 노래이고 흰 실로 포획한 종이는 영혼들의 기억이다. 육신이 사라진데도 없어지지 않는 기억, “메모이기도 하고 일기이기도 하고 편지이기도 하고. 감정을 담은 기억의 종이”³. 기억들은 사라지지 않고 어딘가에 모여 하얀 세계를 이루는 걸까.
시오타 치하루는 흰 실과 흰 종이로 삶과 죽음을 연결하고 그 위로 배를 띄운다. 경계없는 영원하고 무한한 바다 위로. 배 위의 흰 드레스는 우리 자신이다. 누군가의 기억으로 넘실거리는 바다 위로 우리의 기억을 덧씌우며 나아갈 것이다. 이때 흰 종이, 백지는 가능성을 내포한다. 우리가 쓰게 될 이야기, 그들과 연결됨으로써 우리가 적게 될 이야기는 무엇일까.
“나에게 기억이 없다면, 나라는 존재를 설명할 수 있을까? 어떻게 내가 나라고 이야기할 수 있을까? 나의 기억과 죽음, 그리고 인간의 존재에 대해 생각한다. 큰 배 위에 얹힌 옷의 외피와 같이, 우리는 기억의 바다에서 영원히 방황하고 있다.”
_시오타 치하루
이 공간은 존재의 의미를 묻는다. 기억할 수 있고 기억될 수 있을 때 존재는 가능하다. 누구를 기억하고 누구에게 기억될 것인가. 살아가는 내내, 죽음 이후에도 기억 안(in memory)에서 우리는 사라지지 않는다. 그러므로 삶도 죽음도 기억의 바다 위를 맴도는 일. “삶에서 죽음으로 가는 과정은 소멸되는 것이 아니라, 더 거대한 무언가로 스며드는 과정”이라고 시오타 치하루는 말한다.
서로에게 깊숙이 연결되는 일, 사랑과 연대
한강의 소설 <흰>의 말미에는 죽은 언니를 향한 화자의 간절한 바람이 쓰여 있다. 나 대신 끝끝내 당신이 살아주었다면 이라는 말. 자기를 부정해야 가능해지는 문장. 그걸 적기 위해 얼마나 큰 사랑이 필요했을까. 헤아리려 할수록 아득해지던 필자는 실타래를 풀어가며 작업을 이어갔을 시오타 치하루를 떠올렸다.
죽음과 부재를 다루는 시오타 치하루의 작품은 삶과 현존에 대한 열렬함을 상기시킨다. 죽음에 닿을 때마다 그녀는 삶을 갈망했을 것이고 그 갈망은 자아와 타인, 세계와의 연결을 누구보다 깊이 바라보게 했을 것이다. 삶에 대한 갈망이란 생(生)에 대한 사랑과 다르지 않으며 타인과의 연결이란 이타적 사랑을 제하고 생각할 수 없다. 끝도 보이지 않는 실을 얽히고 엮고, 풀고 다시 묶는 수행적 작업을 그녀 또한 이 모든 사랑의 감정으로 이어갔을 것이다.
잠든 딸아이의 얼굴을 들여다보다 외할머니 생각이 났다. 짝을 이룬 듯 엄마 얼굴이 딸려 왔고. 엄마에게 전화를 걸어야겠다. 딸아이의 웃는 얼굴을 보여주며 외할머니 닮지 않았냐고 물어봐야지. 그러다 이런 이야기를 들을 수 있으면 좋겠다. 엄마의 할머니, 할머니의 할머니, 그들의 모든 할머니에 대한 이야기를. 그렇게 더 많은 존재를 필자의 삶에 연결할 수 있으면 좋겠다.
사랑 없이는 무엇과도 연결될 수 없다. 누군가를 알고자 하는 마음이 나를 타인과 연결한다. 사랑으로 우리는 서로에게 관여한다. 시오타 치하루의 겹겹이 덧대인 실처럼 서로에게 깊숙이 연결되는 일, 서로와 연대하는 삶. 더 넓은 기억의 바다로 나아가는 꿈은 사랑과 연대로 지금 여기에서 실현될 수 있지 않을까.
¹ 가나 아트 센터 전시 안내문 중 6. 전시 서문 (안소연, 미술비평가) 참조
² 가나 아트 센터 전시 안내문 중 2. 전시 소개 참조
³ TV 조선, 시오타 치하루 인터뷰 http://news.tvchosun.com/site/data/html_dir/2022/07/18/2022071890160.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