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에게 작업실은 어떤 의미일까. 우리가 ‘나의 집’을 내가 거주하는 건물이라고 하지 않는 것 처럼 작업실은 단순히 작업을 하는 공간을 넘어서 창작의 시작이자 근원이 되는 공간이다.
외부적으로는 작업실을 오가는 주변의 풍경, 내부적으로 작업실 내 캔버스나 설치물이 걸리는 벽과 바닥의 면적, 작품의 실질적 사이즈를 규정하는 입출구의 사이즈 같은 현실적인 문제까지. 작가의 작업실은 완성된 작품에 반영될 수 밖에 없는 수없이 많은 데이터를 훔쳐보는 희열을 안겨 준다. 때문에 매번 레지던시 오픈스튜디오를 방문하는 이들에게는 작품에 반영되었을 이면의 변수에 대한 호기심과 궁금증이 내포되어 있다.
코로나19로 인해 작가의 작업실을 볼 수 있는 오픈스튜디오 없이 펼쳐진 명륜동작업실 결과보고전이 아쉽기는했지만 곳곳에서 발견할 수 있는 작가의 비하인드 스토리가 다른 그룹전과 차별화되어 즐거움을 안겨주었다.
2021년 명륜동작업실 입주 작가는 김세은, 안상훈, 최수정작가다. 이례적으로 3명 모두 회화를 하는 작가들로 구성된 2021년 레지던시 결과보고전은 회화 안에서 펼칠 수 있는 작가적 시도와 시선, 행위들을 작가별로 확인해 볼 수 있다.
전시명 <부피, 빛, 리듬>에서 부피를 담당하고 있는 김세은 작가의 2021년 작품들은 이전 작업이 주변의 건물이나 도로, 특정 풍경을 지날 때의 감정들을 담아내었다면, 조금 더 내면으로 들어와 작가의 몸 안에서의 실험적 시도들이 엿보인다. 캔버스에 담기기 전까지 작가 스스로가 생각했을 수없이 많은 고민들이 무색하게 망설임의 터치감도 없는 과감한 선은 작가가 말하는 또 하나의 실험적 시도인 물성에 대한 정보를 고스란히 작가의 힘의 강도와 함께 느껴진다. 덩어리지는 그림체의 구조 때문에 부피라 말하였지만 리듬감 역시 찾아볼 수 있는 김세은의 작품은 또 한 번 발전된 형태로 관객에게 작가의 무한한 가능성을 보여준다.
김세은 전시 전경©캔 파운데이션
김세은, long shoot, 캔버스에 아크릴과 유화, 190x190cm, 2021©캔 파운데이션
전시의 리듬을 담당하고 있는 안상훈 작가의 작품을 처음 마주할 때 윌렘 드 쿠닝(willem de kooning)의 작품이 떠올랐다. 그도 그럴 것이 작가 스스로도 작품과 이미지가 포화인 현실에서 형상을 만들어 내는 것이 의미가 있을 까 하는 내적 질문에서 형상을 없애고 조형적 형태만 남겨 그 자체를 표현한 작업이라 이야기 한다. 그래서인지 언뜻언뜻 보이는 사라지기 이전의 구상은 그림에 서사를 더하고 지워진 흔적 안에서의 의미를 찾게 한다. 악보의 음표처럼 보이는 붓의 터치로 만들어진 둥글고 긴 선들은 캔버스 안에서 운율을 만들고 아래에서 위로 켜켜이 쌓여가는 물성의 두께만큼 화음을 완성해 더해진 작품의 제목으로 시를 연상케 한다.
안상훈, 아주 약간의 윤기, 현수막에 혼합매체,130x105cm, 2021©캔 파운데이션
작품의 형상이나 구도에 따라 같은 평면 회화여도 감상의 거리가 달라지곤하는데 애너그리프(anaglyph)방식 처럼 보이는 최수정작가의 작품은 그런 의미에서 한발 뒤에서 봐야 제대로된 형상이 감지된다. 태양광의 조명 아래 놓인 식물원을 연상하게 하는 작품은 형상이 없는 빛을 받아 성장하는 식물의 보이지 않는 비물질적 대상을 화폭에 끌어 담는다. 캔버스에 자수를 놓는 것이 특징인 최수정작가는 그런 빛의 표현 수단으로 반사되는 부위에 여김없이 자수를 놓았다. 작가는 회화적 환영 위에 놓인 표면적 질감을 표현함으로써 화폭과의 거리, 캔버스 표면의 질감 등 관객이 시각예술을 감상할 때의 모든 시각요소를 다 활용하게 한다. 세밀한 세필에서도 느껴지는 작가의 면밀한 생각의 깊이와 감상적 태도에 대한 고민이 고스란히 화폭을 통해 전해진다.
안상훈작가 스페이스캔 전시 전경 ©캔 파운데이션
최수정작가 전시 전경 ©캔 파운데이션
미술의 탄생이래 가장 오랜 역사를 갖는 회화이지만 모든 사람이 다른 것처럼 작가안에서 피어날수 있는 새로운 형태의 회화가 새삼 놀랍다. 그리고 전시되는 전시장의 변화뿐만 아니라 작업이 완성되는 작업실의 변화가 또 어떻게 지금의 작가들에게 영향을 주고 이 다음의 작품에 표현될지 기대하게 하는 전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