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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수와 추악 그 이전 | ARTLECTURE

순수와 추악 그 이전

-너 이 그림 본 적 있니? 조르주 드 라 투르 (2)-

/Picture Essay/
by 안노라
순수와 추악 그 이전
-너 이 그림 본 적 있니? 조르주 드 라 투르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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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IGHLIGHT


길을 가다가 멈춰 선 것처럼, 인생 어느 부분에 다시금 서 있을 수 있다면 어디로 갈까? 은갈치 빛 진주 목걸이를 하고 실크 블라우스와 허리를 강조한 플레어스커트를 입고 또각또각 하이힐 소리를 멈추고 싶은 곳은 어디인가? 바로 여기! 모두를 속이고 모두가 속는 곳! 기름기 흐르는 언변과 샹들리에처럼 빛나는 보석과 치명적인 유혹이 있는 곳. 단 한 판에 인생의 희로애락을 배울 수 있는 곳이지. 이곳의 술수는 죽은 제갈공명이 관 뚜껑을 열고 일어나 한 수 배우고 싶다고 할 거야. 배신과 조롱이 난무하지만 그러기에 더욱 인생에서 무엇이 소중하고 무엇을 지켜야 하는지도 알 수 있는 곳이지. 느루야, 오늘은 어제 네가 물었던 질문에 대한 엄마의 생각을 말해 줄게. 안경과 커피 한 잔을 가지고 엄마 곁에 와 앉겠니?


조르주 드 라 투르 <카드 사기꾼, 1630~34>


  

너, 이 그림 본 적 있니?


  

조르주 드 라 투르의 <카드 사기꾼, 1630~34>이야. 붉은 깃털로 장식한 화려한 모자에 여러 줄의 진주 목걸이를 하고 벨벳 드레스를 입은 여인이 중앙에 있구나. 깊게 파인 목선으로 인해 젖무덤이 반이나 드러났어. 그런데 애써 꾸민 차림에 비해 영 품위 있어 보이진 않아. 저 희고 갸름한 미인형 얼굴이 무색하게 날래고 영악해 보이는 눈은 칼로 상대의 목을 겨눈 것처럼 날카로워.


화려한 여인 곁에서 왼손으로 와인병을 꽉 쥐고 오른손으론 와인잔을 건네고 있는 하녀의 눈을 봐. 왼쪽에 있는 남자에게 뭔가 신호를 보내고 있는 것 같지 않니? 주파수를 맞춰 하녀의 시그널을 접수한 걸까? 왼쪽에 있는 남자는 약간의 허세를 연출하듯 오른손으로 살짝 카드를 노출하는 노련함을 보이지만, 가려진 왼손으로 허리춤에서 에이스 카드를 빼고 있구나. 그의 가파른 턱과 볼품없는 수염, 닳고 닳은 눈빛이 몹시 교활해 보이네.  


그림 오른쪽에 앉은 어리고 순진해 보이는 젊은이는 어쩌다 이곳에 왔을까? 바람이 분다면 풍성하게 물결치며 살랑거릴 고급스러운 장식 모자를 쓰고, 아직 젖살이 빠지지 않은 듯 볼살이 통통한 얼굴을 하고 있어. 게다가 저 목깃을 보렴. 실크 위에 색색의 실로 정성스레 수를 놓았네. 엄마 눈에 실크의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들리는 걸 보니 손 위에 올려놓고 호호 불며 키웠을 부잣집 귀한 도련님 같구나.


자신의 카드를 바라보느라 주변의 분위기를 전혀 눈치채지 못한 그는 방금 금화와 은화를 테이블에 올려놓았어. 어쩌면 멀지 않아 그가 지녔던 세상에 대한 순수함, 약한 자에 대한 동정심, 미래에 대한 소박한 여유까지 저 테이블 위로 올라갈지 몰라. 어린 그가 금화와 은화를 잃는 순간, 자신이 갖고 있던 소중한 것들이 그저 테이블 위에 배팅할 수 있는 칩으로 보일 수도 있으니까. 곧이어 속임수와 비열함이 횡행하는 거칠고 난폭한 세상이 보이고 명예와 우정의 유통기한을 알게 되겠지.  








조르주 드 라 투르는 대담하게도 영웅과 성경 속 미담이 차지하고 있던 캔버스에 17세기 도박판의 사기꾼들을 캐스팅했어. 그는 특권층들이 루비를 녹인 듯 영롱한 와인잔을 기울이며 사색의 대상으로 삼던 삶의 진리를 도박판을 기웃거리는 사기꾼, 거리에서 노래하는 부랑인, 자신의 미래도 맞추지 못하는 점쟁이들에게로 가지고 왔단다. 그리곤 말했지. 삶의 진리란 별이 빛나는 하늘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오물과 진창이 섞여 있는 이 땅 위에 있다고 말이야.   


그런데 이 그림이 어제 네가 질문했던 것과 무슨 상관이 있느냐고?  왜, 이 순간에 서 있고 싶으냐고?

 

느루가 이렇게 말했나?

  


"엄마, 나이를 먹는 건 약고 비열해지는 것 같아요. 남을 의심하고 순수한 걸 잃어버리는 일 같아."


엄마가 단호히 말한다면 "아니야. 오히려 제대로 순수해지는 법을 배우는 일이야."



삶에 대한 순수함은 진흙 위에 피는 연꽃처럼 더럽고 추악한 걸 다 겪어낸 이후에 갖는 맑음이거든. 믿음에 대한 배신으로 잠 못 이루는 밤을 지나고 난 후 용서에 이른 새벽이거든. 자신의 어리석음에 발등을 찍히고 난 뒤 다시금 신들메를 고쳐 신는 현명함이거든. 모든 문이 열려 있으되 차별과 모순은 사라지지 않는다는 아픈 현실을 인정하고 나서 흘리는 땀과 노력이거든. 그래서 저 부잣집 도련님은 아직 순수하지 않아. 순수와 추악 그 이전에 있지. 그가 금화를 모두 잃고, 믿음에 뒤통수를 맞고, 청춘을 낭비하고 난 후에 폭풍처럼 밀려드는 자기 환멸을 극복할 때 그는 그제야 순수해지는 거란다.



미켈란젤로 다 카라바조 <카드놀이 사기꾼, 1596>



느루가 아프구나. 첫 직장에 적응하느라 긴장하면서도 동아리 활동에 도움이 되려고 주말에도 쉬지 않고 학술지를 확인하는 모습을 보고 엄만 대견했단다. 그런 진심이 받아들여지지 않고, 웃음과 친절 뒤에 계산과 악의가 있지 않았나 의심하는 상황이 슬플 거야. 그래, 그 서글픈 마음을 이해해. 너를 도와주고 가르쳐 주려는 줄 알았던 선배가 누구나 하기 싫어하는 업무를 네게 슬쩍 넘겨버린 것 같다고 했지? 너의 덧나고 헤진 마음에 반창고를 붙여주고 싶구나.


따뜻한 커피 향을 음미하며 엄마의 얘기를 들어보련.  네가 그동안 있었던 일을 통해 제대로 배운다면 약고 비열한 어른이 아니라 세상에 남아있는 아름다움을 볼 수 있는 순수한 어른으로 성장할 수 있단다. 엄마가 엄마의 선배에게서 배웠던 것처럼 네게도 가르쳐주마.


엄마가 아직도 운전 서툰 것 알지? 이십오 년이 넘는 운전 경력에도 불구하고 아직 고속도로를 타지 못하는 쫄보에 허당이니까! 그건 아마 어린 널 태우고 차량 뒤꽁무니를 박은 뒤부터 생긴 후유증일 거야.


  

발렌틴 드 불로뉴 <카드놀이 사기꾼, 1620>



초보 운전자라 자라목에 눈을 앞 차창에 붙이듯 운전하면서 직장을 오갈 때였어. 네가 유치원에 들어갔구나. 회의가 있는 월요일 아침, 늦잠을 자 머리도 묶지 못한 널 옆 좌석에 태우고 아파트 단지를 서둘러 빠져나오고 있었어. 건물 모퉁이를 도는데 커다란 탑 차가 보이는 게야. 급한 마음에 차가 앞으로 나가고 있다고 생각한 나는 브레이크를 밟지 않았고, 주차해 있던 차를 들이받았지. 넌 그 이후로 내 차를 타지 않았어. 버스 네 정거장 거리를 인도로 뛰어 유치원엘 갔어.


네가 유치원에 도착하는 걸 지켜보느라 지각한 날이었을 거야. 평소 9시에 턱걸이 출근하는 걸 준비성 없다고 생각했던 직장 선배가 전체 직원 앞에서 근무태도에 대해 크게 나무랐어. "아이 때문에..."라고 얼버무리자 "직장인의 기본자세가 부족하군요. 그런 변명 하려거든 당장 얘 돌보러 들어가세요." 하는 거야. 엄만 눈이 튀어나올 것 같았어. 압박붕대로 지혈하듯 힘껏 힘을 주어 간신히 눈물을 막았구나. 철철 피 흘리는 자존심은 물론, 섭섭함도 이루 말할 수 없었지.


그런데 이튿날, 아파트 동 입구에 그 선배가 차를 대고 기다리고 있는 거야. 기억나지? 네가 좋아했던 프라이드 이모 선생님. 네 아침을 걱정하며 곧잘 김밥이나 머핀을 싸 오셨잖아. 널 간신히 세수만 시켜 차에 태우면 선배는 색 고운 머리끈으로 머리도 묶어 주었지. 차량 운행을 하는 유치원으로 옮기는 6개월 동안, 최대한 시간을 내어 널 데려다주었어. 잊지 못할 선배님이란다. 눈물을 쏙 빼는 날카로운 지적은 업무의 실수를 줄이게 했고 덕분에 일을 빠르게 배울 수 있었지. 또한 선배의 객관적이고 냉철하고 직업적인 앞모습 뒤에 숨겨진 깊은 배려와 주의(注意)는 엄마의 얄팍하고 감정적인 인간관계를 새롭게 돌아보게 했어.



조르주 드 라 투르 <악사들의 난투극, 1610~30>

  


느루야, 인간관계가 고되지? 엄마도 아직 능숙하지 못하단다. 하지만 지금 네가 겪고 있는 일, 네 주위에 있는 모든 것을 판단하지 말고 스스로 흘러가도록 잠깐 뒤로 물러나 있으렴. 자연이 위대한 잠언이듯 삶의 다양한 모습 또한 커다란 스승이란다. 전체가 보일 때까지 신경을 쇠약하게 만드는 오해와 쓸데없는 간섭에서 벗어나야 해. 살아보니 한 살 한 살 나이가 든다는 게 더하기 같지만 실은 빼기더라. 자꾸 덜어내어 속이 비어야 세상과 공명할 수 있더구나. 엄만 어떤 경우에도 네 편이야. 절대 널 홀로 두거나 외롭게 하지 않을 거야.


마음이 번거로울 때, 드 라 투르 <악사들의 난투극, 1610~1630>을 보겠니? 드 라 투르는 화면의 구도를 상반신으로 잘라 빼앗을 것도 빼앗길 것도 없는 초라한 그들의 다툼을 연극적으로 표현했어. 화면 중앙, 머리가 희끗한 두 노인이 팽팽히 맞서고 있네. 왼쪽 노인의 단검을 든 오른 손아귀에 힘이 잔뜩 들어가 있어. 당장이라도 찌를 듯한 태세야. 맞은편 노인의 왼손은 플루트를 거머쥐어 칼을 피하고 다른 한 손으론 상대의 눈에 레몬즙을 짜 넣으려는 듯 해. 마치 왼쪽 노인이 가짜 시각장애인 행세로 더 많은 적선을 받는 걸 미워하는 것 같아.


거리에서 악기를 연주하며 하루하루를 연명하는 거리 부랑인들의 싸움일 뿐이야. 낮은 자리에서 한 끼의 밥을 위해, 한 푼의 동전을 위해 자리다툼이나 하는 보잘것없는 사람들의 모습이지. 오른쪽 바이올리니스트와 꼬른뮤즈(cornemuse-17세기 관악기) 악사는 두 사람의 다툼이 한심한 지 어이없는 웃음을 짓고 있어. 당장 그들이 활을 잡는다면 울림통에서 비웃는 소리가 나올지도 몰라. 느루야, 우리의 삶 역시 이와 같지 않겠니. 신으로부터의 적선을 조금 더 받으려는 욕심 때문에 어리석어지는 게 아닐까?



조르주 드 라 투르 <점쟁이, 1632~35>



드 라 투르는 1630년대 후반에 루이 13세의 눈에 띄게 되었어. 그의 <성 이렌느의 간호를 받는 성 세바스티아누스> 작품에 깊은 감명을 받은 루이 13세가 자신의 침실에 있던 그림을 모두 치우고 그 작품 한 점만을 걸었다는 일화가 있을 정도야. 그에게 '궁정화가'라는 직함과 '경'이라는 호칭이 하사되었구나. 그럼 드 라 투르의 여생이 촛불 화가라는 은유대로 고아(高雅)했을 것 같은데, 불행히도 그의 졸년(卒年)은 몹시도 흉포(凶暴)한 이야기를 남겼어.


그는 일순간 광대한 영지를 소유한 로렌 지방의 부호가 되었고 재산을 지키려는 노력은 쉴 새 없이 거칠고 사나운 분쟁으로 이어졌지. 주위 사람들에겐 인색했고 하인들에겐 악행을 일삼는 고약한 영주였어. 또 고성을 지르며 폭력을 휘두르는 악덕 고리대금업자였다고도 해. 그는 농노들의 손에 죽었다고도 하고 흑사병으로, 또는 1652년 유행성 출혈열로 숨졌다는 말이 있어. 모두 불행한 결말이지. 눈먼 악사처럼 그는 멈추지 않는 욕망의 단검으로 세상에 남아있는 마지막 아름다움을 찔렀기 때문인지도 몰라.


고급스러운 옷을 차려입고 눈을 흘겨보는 수려한 젊은이가 점쟁이에게 치른 건 동전 한 닢이야. 그는 점괘를 통해 미래를 절약하고 싶었겠지만 "글쎄, 틀림없다니까." 하는 듯한 점쟁이의 검고 주름진 얼굴에서 그가 헛발질할 내일이 보여. 당장의 이익에 취해 그는 자신의 주머니를 탐하는 손길도, 금줄을 끊어내는 여인도 보지 못하거든. 엄만 드 라 투르의 <점쟁이, 1632~35>라는 작품에서 그의 내일을 읽혀. 그는 아마도 삶에서 빼기를 배우지 못했던 모양이야.


  

조르주 드 라 투르 <목자들의 경배, 1645>



느루야, 나침반이 흔들리는 건 중심을 잡기 위해서라고 하지. 우린 끊임없이 흔들려. 삶의 중심을 잡으려고 말이야. 경계에 서 있기 때문에 위태롭기도 하지. 하지만 인간을 구원하러 온 예수도 이렇듯 연약하고 가난한 모습이었단다. 너의 지금이 초라하게 느껴질지라도, 텅 빈 마음으로 다시금 친구를, 동료를, 선배를 믿어보지 않겠니?


세상에 닳고 물색없이 늙어버린 엄마가 다시 서고 싶은 자리는 압력과 시간에 의해 굳어진 화석 위가 아니란다. 넘치는 활력으로 옹색한 변명 따윈 멀리 던져버리는, 시기와 질투와 속임수를 하찮게 여기고 흔들리는 자신을 믿는, 곁에 있는 이를 스승 삼아 기어코 어제보다 더 성장하는, 바로 그 자리에 서고 싶구나!


all images/words ⓒ the artist(s) and organizatio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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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안노라_음악과 문학과 역사의 숨은 이야기를 그림으로 풀며 엄마와 딸이 알콩달콩 수다 중입니다. 6월에 <너, 이 그림 본 적 있니?> 도서 출간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