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연에 의해 이뤄지는 재산 분배에서 가장 적은 몫을 탄, 따라서 가장 배려를 받아 마땅한 구성원들을 사회가 그렇게 대우하는 것은 부당한 일이 아닌가?" -빅토르 위고-
여자와 어린이, 하인, 약자, 빈자, 무식자… 19세기 프랑스의 대문호 빅토르 위고는 그들을 ‘불쌍하고도 비참한 사람들’이라 명명하고, 이들을 위한 소설을 집필한다. 바로 그 유명한 『레 미제라블』이다. 이 절망적인 사람들을 보라. 불운한 대다수는 자신의 운명이 무엇인지도 자각하지 못하였으며, 운 좋은 누군가는 자신의 숙명에서 벗어나고자 발버둥을 친다. 하지만 그들의 몸을 휘감고 있는 가난이라는 사슬은 사회의 가장 밑바닥, 가장 흉흉한 심연으로 끌어당기고 있으니, 달아나려는 움직임은 곧 착각이다. 끌어 당겨져 떨어지는 움직임을 나아감이라고 오독하는 착각, 퇴보를 상승이라 착오하고 안주함에 더더욱 달아날 수 없으니. 이렇게 떨어진 진창에선 선한 가치란 찾아보기 어렵다. 자신의 일부를 내어주는 선이란 그들에게 사치에 불과하다. 평생토록 선을 본 적이 없는 그들은 절대 선인을 믿지 않는다. 서로를 시기·질투·불신하며 남겨진 이들은 대체로 유대를 포기한 채 끝없는 혐오의 격류에 갇히게 되기 일쑤지만, 때때로 이곳에서 빠져나가는 이들이 존재한다. 그러나 목숨을 담보로 행한 선택은 대체로 또 다른 음지와 결탁하여, 인간의 가장 추악한 본성이 드러나는 헤어날 수 없는 전장으로 인도된다. 양지로 향할 순 있지만, 결코 자신의 존재를 유지하면서 나아갈 순 없다. 비참한 자신의 존재를 지우고 거짓된 신분으로 회개를 일삼아야지만, 어둠의 속박에서 탈출할 수 있다. 자의로도 거짓을 선택해야 하고 타의로도 마찬가지다. 권위는 약자들에게 진실이 아닌 거짓에 굴종하게 만든다. 이에 좌절한 몇몇 이들은 인간 너머, 절대자의 현현을 희망하고 성역으로 향한다. 그러나 절대자가 설파하는 교리의 본령과는 달리, 약자들은 그곳에 ‘감히’ 머물 수 없다. 이에 끝끝내 폭발한 그들은 민권이 지상으로 내려와 주기를, 또 존재의 자유를 실현하고자 비참함을 혁명의 원동력으로 뒤바꾼다. 하지만 세상은 결코 단번에 나아지지 않는다. 지난 시대의 유행이 새로운 흐름에 줄곧 훼방을 놓는다. 그런데도 혁명이란, 그리고 청년이란 앞으로 나아가고자 한다.

이렇게 서론에서 국내에 장장 5권으로 번역된 『레 미제라블』을 아주 간략히 축약해보았다. 그리고 19세기 프랑스 문학을 대표하는 소설의 제목은 이제 2019년 프랑스를 관통하는 영화의 제목으로 차용된다. 소설의 플롯과는 닮은 구석이 없지만, 여전히 동시대의 ‘레 미제라블’도 헤어날 수 없는 수렁에 빠졌다는 것은 동일하다. 동시대의 절망을 다루는 본 작품은 1978년 말리 태생의 프랑스 감독인 래드 리 감독이 연출하며, 이를 통해 장편 데뷔한다. 그에게 특이한 이력이 있다면 바로 범법을 저질러 교도소 복역 기간이 있다는 것이다. 이에 실제 범죄자들이 배우로 분하며 우아한 예술과 거친 현실의 경계를 허물던 타비아니 형제의 <시저는 죽어야 한다>가 연상되기도 한다. <시저는 죽어야 한다>에서 배역과 배우의 경계가 허물어진다면, 래드 리 감독은 그가 직접 경험한 '불쌍하고도 비참한 사람들'의 현실과 영화의 경계를 허물고자 한다. 이러한 현실과의 경계 허물기는 실제로 이러한 삶을 살아가는 비전문 배우들을 적극 기용하며 이뤄진다. 알랭 기로디의 <스테잉 버티컬>의 주연으로 유명한 다미엔 보나드를 제외한다면 영화 속 인물들은 대부분이 비전문 배우이며, 실제의 이름을 영화 속에서도 사용하고 있다. 이에 허구의 배역과 실제 배우의 삶은 쉽게 구분되지 않는다. 그리고 영화의 초반부, 축구 경기를 관람하기 위해 거리에 모여든 사람들은 카메라를 의식하고 응시하며, 스크린 너머 현실 속 관객들에게 시선을 보내는 듯하다. 그래서 허구적 차원인 영화 내에만 머물지 않는 그들의 시선과 현실의 삶, 이름과 구분되지 않는 배역을 통해 래드 리 감독은 현실 그 자체를 길어오고자 한다. 이 같은 그의 경향은 <스피크 업>이라는 다큐멘터리를 공동 연출한 감독의 경력을 이어온 것이랴. 현실과 영화의 경계를 허무는 연출 외에 형식 자체로도 영화는 리얼리즘을 추구한다. 영화는 급박하고도 격렬하게 흔들리는 핸드헬드를 사용하여, 카메라의 시선과 영화 속 '불쌍하고도 비참한 사람들'의 거친 시선을 상응하고 있다. 또 롱테이크를 추구하며 그들의 잘려 나가지 않은 시간을 담아내고자 하며, 특히 경찰들이 은폐하고자 하는 진실을 있는 그대로 기록하고자 시도한다.
이러한 진실을 더욱 눈여겨보고 집중하는 듯한 줌인 또한 연출에서 눈여겨볼 측면이며, 의미작용 외 형식미 자체로도 대단히 감각적이다. 흡사 자비에 돌란의 <마티아스와 막심>에서 사용된 심장 박동에 상응하는 줌인처럼 느껴지기도 하는데, 본 작품에서도 쿵쿵 뛰는 듯한 줌인은 그 경향이 유사할 지다. 래드 리 감독은 명백히 살아 숨 쉬지만, 존재하지 않은 것으로 치부되는 사람들의 약동하는 생명력을 이러한 줌인으로 여실히 담아내듯 보인다. 영화는 여러 인물의 삶을 비추고 있긴 하지만, 그중에서도 카메라에 시선을 대응시키는 주체는 크게 세 인물이라 할 수 있다. 하나는 감독이 포착하는 몽페르메유에 실거주하는 이사의 시선이요, 다른 하나는 감독의 아들이 연기하는 드론을 조종하는 버즈의 시선이라 할 수 있고, 마지막으로 외지인이자 전문 배우가 연기하는 루이즈의 시선이라 할 수 있다. 이 중 루이즈의 시점에서 공권력이 정의롭게 사용되지 못하고, 많은 것들이 부조리하게 은폐되며, 부조리와 악덕이 보편이 된 몽페르메유에서 그의 시선은 자연스레 당혹하고 놀라움을 금치 못하는 줌인으로 변모할 수밖에 없으리라. 그간 비교적 평온한 대도시에서 쌓여온 인식에, 거칠고도 정제되지 않은 몽페르메유의 삶은 하나의 돌발흔적, 힘으로 작용하여 감각을 일깨우기 때문이다. 이에 다미엔 보나드의 연기는 어딘가 위축되어 보이는 인상을 풍긴다. 당황한 듯 어딘지 모르게 뻣뻣하고, 비전문 배우들의 자연스러움에 비한다면 딱딱해 보인다. 몽페르메유를 소개하는 홈페이지에서 텍스트로만 배운 정보와 실제는 거리가 멀다. 이에 텍스트라는 허구를 보고 배운 양식은 실재와 불협화음을 일으킨다. 이렇게 영화는 외부에 드러나지 않은 내지인의 살아있는 시선과 외지인의 생경하고도 낯선 시선을 교차하여 몽페르메유를 비춰낸다. 이러한 몽페르메유는 아프리카에서 이주한 흑인, 무슬림들의 집단 거주지라 할 수 있으며, 여기서 백인 프랑스인들의 흔적은 찾아보기 어렵다. 백인들이 이주해온 유색인종들을 '욱여넣은' 듯한, 수용소 같은 느낌을 풍기는 몽페르메유는 거대한 게토다.
프랑스 내에서 다른 문화와 녹아들지 못하고 배척된 흑인 공동체에 대한 탐구는 셀린 시아마의 <걸후드>에서도 탐구된 바 있지만, 실제 거주의 경험이 있는 래드 리 감독은 게토화된 지역성 그 자체를 더욱 깊게 파고들어 간다. 주류 백인들에게 귀찮은 존재, 이해되지 않는 존재로 치부되는 집시, 무슬림, 흑인들이 모조리 몽페르메유에 사실상 ‘격리’되어 있다. 이러한 몽페르메유에 즐비한 것은 쓰레기, 폐품들이며 아이들은 이를 가지고 논다. 용적률이 과다한 아파트는 마치 닭장 같다. 여기서 정치 권력이 그들을 신경 쓴다거나 개선하려는 시도는 찾아보기 어렵다. 오히려 백인 권력은 그들을 착취한다. 부패한 백인 경찰 크리스는 시장에게 뇌물을 상납받는다. 이에 경제활동을 해도 빼앗기는 형국이니, 그 비참한 실정은 나아지지 않는다. 또 당국은 그들을 크게 신경 쓰지 않으니, 매춘과 마약 등 온갖 불법적인 일들이 성행한다. 무엇보다 이는 계승된다. 영화가 중심적으로 비추는 대상은 아이들이다. 그리고 경찰서에 끌려간 아이들에게 보호자가 어떻게 교육하는지, 또 도둑 촬영하는 아이들의 행동을 어른들이 과연 방치하는지 교정하는지를 중점적으로 살펴본다. 어른들의 교육은 아이들의 행동을 교화하기에 무리가 있다. 무관심에 부조리는 범람하고, 보호자의 폭력성이 아이들에게 계승된다. 이에 경제적으로는 착취당해 가난은 반복되고, 극복해야 할 정신성은 되레 계승되며 악덕과 위법이 보편이 됨에, 21세기의 <레 미제라블>은 19세기에서처럼 악순환을 이루며 결코 나아질 줄 모른다. 이러한 영화의 초반부에 래드 리 감독은 거리에 뛰쳐나온 관중들이 들고 있는 프랑스의 국기인 삼색기를 강조하였다. 그리고 영화는 본 몽페르메유에서 삼색기가 가리키는 자유·평등·우애의 정신이 과연 실현되고 있는지를 고찰하듯 보인다.
일단 평등부터 살펴보자. 몽페르메유에 전근 간 루이즈는 처음으로 배정받은 경찰서에 방문하고, 상사와 마주한다. 그리고 여성 상사는 자신보다 낮은 지위인 그와다의 다리를 아무렇지 않게 만진다. 직급에 의한 천대는 크리스가 스테판을 대하는 태도에서도 마찬가지로, 평등을 집행해야 할 공권력 내에서 차별과 우열이 나뉘고, 이에 따라 아래 계급을 부당하게 지배하고 입을 틀어막는다. 이들이 외부를 순찰하는 몽페르메유에서 평등은 당연히 실현될 리 만무하다. 경찰, 특히 백인 경찰인 크리스는 흑인, 무슬림, 집시들이 가득한 몽페르메유에서 그 경찰이라는 지위와 더불어 '피부색' 자체로 특권적 위치에 놓이듯 보인다. 그가 어딜 가든 유색인종은 그에게 굽신대고 뇌물을 상납한다. 그는 유색인종들에게 법 위에 군림하며, 법의 감시는 그에게는 해당하지 않는다. 자유 또한 마찬가지로 박탈된다. 평등이 불발되고 우열이 나뉘며, 상위계층이 하위계층을 속박하기에 자연스레 자유는 불발된다. 영화는 이 같은 자유의 불발을 소년 버즈가 촬영하는 드론을 통한 광활한 버즈 아이 뷰로 보여주곤 한다. 대기를 날아다니는 드론으로 촬영된 숏은 시원하고 광활해야 마땅할 것이다. 모든 제약에서 벗어난 채로 말이다. 하지만 불법이 만연한 몽페르메유에서 본 숏은 널따란 하늘, 이상을 바라보는 버즈 아이 뷰에 상응하지 않고, 누군가를 감시하고 굽어보며 훔쳐보는 갑갑한 느낌을 주는 하이 앵글 구도로 뒤바뀐다. 이에 나의 삶이 타인에게 노출되고 지배됨에 자유는 불발된다. 무엇보다 백인과 경찰은 이러한 감시에서 벗어나 있다. 흑인들은 그들이 져야 할 것 이상의 책임을 지지만, 백인들은 어떠한 책임도 지지 않는다. 백인은 방종을 누리고, 그 대가로 몽페르메유 거주민들의 자유는 박탈된다. 이에 이사는 사자를 훔쳤는지 모른다. 몽페르메유의 선한 구심점인 살라가 코란의 사자 이야기를 꺼낸다. 사자는 위엄 있는 동물이지만 인간에 의해서 그 위엄과 자유가 박탈당했다고, 그래서 자유롭고 싶다고 말이다. 인간도 마찬가지로 태어나면서부터 인권을 타고나 마땅히 자유를 추구해야 할 존재지만, 몽페르메유에서 이는 불발된다. 이사는 사자가 곧 자신처럼 보이지는 않았을까, 이에 사자를 훔쳐서 자유로이 평원을 누비게끔 풀어준 것은 아닌가.
사실 이러한 상징이 아니어도 이사는 의아했을 것이다. 불법이 만연하고 단속조차 해이한 풍조만을 보고 자랐는데, 왜 자신에게만 그토록 가혹하게 좁혀오는지가 말이다. 마지막으로 우애도 불발하고 있다. 진정으로 자유로운 자는 서로를 존중해야 한다. 하지만 자유는 박탈되어 있고, 또 평등 대신 차별이 만연하다. 이에 계급, 민족, 인종을 뛰어넘는 숭엄한 인류애인 우애도 불발된다. 백인에게 멸시받아 증오에 찬 흑인과 집시는 마찬가지로 서로를 박해하며 우열을 가리고자 보인다. 이에 부당한 증오와 정당한 분노는 혼란하게 뒤섞이고, 건드리면 터질 것만 같은 수준으로 팽창되어만 간다. 그리고 내지인의 시선에서 이는 너무도 익숙하여 문제라고 인식되지 않는다. 하지만 외지인 루이즈의 시선에서는 평등에 상응하는 공정과 경찰이 무관하다는 것이, 지배 권력에 의해 시민들의 자유와 민족, 인종 간의 우애가 박탈되었다는 것이 생생히 눈에 띈다. 몽페르메유에 소속되고 참여하며 익숙해진 내지인은 그 장소가 부여하는 장애에 익숙해진 상태다. 하지만 외지인은 그 장애가 톡톡히 느껴진다. 그리고 이에 스며들지 않아야만 문제임을 밝힐 수 있다. 루이즈는 몽페르메유의 보편성에 잠식되지 않고 경찰과 용의자는 동등한 시민이므로 서로 존댓말을 쓰고 손을 빼는 평등, 부당하게 억압당한 소년의 해방을 요구하는 자유, 생명이 위태로운 이사를 마땅히 약국에 데려가는 우애를 몸소 펼친다. 몸소 그 정신을 실천한다면 선의는 되돌려 받을 수 있다. 케밥을 내어주며 마찬가지의 우애를 선보이는 살라처럼, 또 결말에서 자신에게 유일하게 친절했던 루이즈에게 이사가 화염병 던지기를 주저하는 것처럼 말이다. 그 누구도 몽페르메유에 당연시된 장애를 인식하지 못했다. 아이들은 별 생각 없이 그들에게 주어진 쓰레기를 타고 놀았다. 하지만 스며들지 않는 외지인은 날카로운 가시와도 같다. 느끼지 못하던 장애를 느끼게끔 해주는 하나의 자극제로 말이다. 다만 외부인은 몽페르메유의 구원자는 되지 못한다. 그는 비참한 소굴에 휩싸이지 않는 제 자신을 지킬 뿐이다. 자신의 구원은 외부로부터 자극받은 스스로의 몫이다.
스스로 외부의 자극에 고통을 느끼며 되찾고자 하는 권리를 명확히 자각해야 자신을 구원하는 혁명은 도래한다. 처음에는 루이즈 한 명에 국한되던 부조리함의 고통이 이사, 버즈를 너머서 무수한 아이들의 의식으로 확장되어간다. 이에 몽페르메유의 부당함은 극의 말미에 만인의 장애로 인식된다. 그렇게 다 함께 장애를 느끼는 것, 다수가 공통적 장애를 느끼는 것이 혁명의 원동력이다. 장애를 극복하고, 어긋난 시대를 뛰어넘기 위한 추동은 곧 보편을 뛰어넘으면서 비롯한다. 체제를 유지하고자 하는 권력 집단은 이 장애를 느끼지 못하게끔 만든다. 그리고 위압적인 태도로, 시민들에게 일임받은 권력을 약자를 탄압하는 데 사용한다. 법의 위에 군림하며 인권을 짓밟고 무리한 수색을 시도하는 크리스, 무의식적으로 권위에 의한 폭력을 긍정한 듯 이사에게 고무탄을 발사한 그와다, 어린 약자인 이사를 사자 우리로 데려가 겁을 주고 위협하는 조로, 강력반을 내쫓고 그 자리를 차지하며 체제는 유지하려는 시장 등, 영화 속 폭력은 주로 자신의 권력을 뽐내고 유지하기 위한 수단으로 악용된다. 물론 일정 수준의 폭력은 잘못에 대한 처벌로 필요하지만, 본 작품에서 폭력의 강도는 단순히 흡연, 절도를 처벌하기 위한 수준을 넘어선다. 이러한 영화 속 폭력은 철학자 모리스 메를로-퐁티가 말하는 폭력의 악용과 유사하다. 메를로-퐁티는 저서 『휴머니즘과 폭력』에서 폭력에 관해 자유주의와 공산주의 진영 모두를 비판한다. 육화된 존재인 인간에게 폭력은 운명이다. 그래서 본 폭력을 바탕으로 현실을 긍정적으로 바꾸어 나가는 폭력만이 허용되어야 하리라. 그중 하나가 혁명이다. 하지만 공산주의의 초기에는 혁명을 위해 폭력을 사용했으나, 점차 순수한 이념에서 멀어진 채로 폭력이 남용되고, 심지어 이전 시대와 별다를 바 없이 소수 권력의 독점과 체제 유지를 위해 폭력이 악용되었다. 그리고 자유주의 진영은 이를 비판하였으나, 그들 또한 이념과 제도를 유지하고자 폭력을 사용하고, 서구 자유주의는 식민지와 전쟁, 즉 악랄한 폭력 자체에 기반을 두고 있었다. 이러한 폭력에 의해 공산주의는 공산주의가 아니게 되었고, 자유주의도 자유주의가 아니게 되었다. 절대적 진리로 변질된 이념은 점차 현실에서 멀어지기 시작하였고, 폭력은 이를 위해 현실을 희생시켰다.
그렇다면 본 작의 폭력은 과연 어떠한가. 이런 관점과 유사하게 본 작품도 현실을 희생시키는 폭력은 매섭게 바라보는 반면, 혁명의 원동력이 되는 폭력은 긍정한다. 처벌받지 않은 경찰들을 향한 응당한 징벌과 빼앗긴 그들의 자리를 되찾기 위한 폭력이 말이다. 흑인 소년들의 분노가 극에 달해 폭발한 영화의 클라이막스, 경찰들은 점점 더 코너로 몰린다. 그들이 흑인들로부터 탈취한 널따란 자리를 빼앗긴다. 흑인, 그중에서도 아이들은 정당한 권리로서, 백인과 어른들의 체제가 빼앗은 현재와 미래라는 자리를 되찾는다. 이러한 반란을 있게 한 분노를 래드 리 감독은 이미지 그 자체로 차근차근 쌓아간다. 혁명에서 중요한 것은 도래시킬 이념이 아니라 살아있는 사람이다. 어떤 이념도, 국가도 사람보다 우선일 수 없다. 영화는 초반부 축구 경기를 관람하러 나온 관중들을 경이로운 익스트림 롱숏으로 포착한다. 그렇게 운집하고 자신의 감정을 마음껏 표출하는 개개의 군중과 프랑스를 대표하는 개선문, 에펠탑을 교차한다. 이후에는 한 축구선수가 골을 넣고 승리하여 국가의 명예를 드높였다는 소식이 라디오로 전해진다. 하지만 에펠탑과 개선문보다 영화에서 거대하게 비추는 것이 운집한 군중이며, 축구선수의 감각보다 더욱 요동치는 장엄한 힘을 비추는 것이 바로 생명력으로 약동하는 군중의 모습이다. 에펠탑, 개선문, 축구 경기, 그것 자체로는 의미가 없다. 건축물은 움직이지 않고, 그저 청각으로 소식만 들려오는 경기에는 감각성이 적다. 있는 그대로도 의미가 있을 수 있고, 끊임없는 몸의 진동에 멈출 줄 모르는 힘과 감각을 선보이는 것이 바로 인간 그 자체이며, 그들이 역으로 개선문과 에펠탑, 축구 경기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무수한 사람들이 부대끼며 살아가는, 바글거리며 약동하는 생명력이 포착되는 시장도 마찬가지다. 이 세계를 지탱하는 것은 시장, 도시, 국가가 아니라 그 내부를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권력은 무력과 달리 그것 자체에는 힘이 없다. 이렇게 축구 경기를 보러, 시장에서 필요한 것들을 나누고 교환하러 모여드는 사람들이 합의 하에, 자신의 힘을 일부 양도하며 집약된 힘이 바로 권력이다. 나의 힘, 그 일부를 양도한 권력이 부조리하게 사용됨에, 그리고 그 부당함을 만인이 느낄 때, 비로소 권력을 되찾기 위한 반란은 발생한다. 단순히 물질적인 것을 좇는 것은 폭동이다. 하지만 정신적으로 진보하고자 하는 움직임, 부조리한 이념에 맞서는 반란은 바로 혁명이다. 그리고 래드 리는 바로 이 혁명을 포착한다. 그 명분이 되는 백인, 정치 권력에 대한 몽페르메유 거주민들의 분노를, 건드리면 터질 것만 같은 신경질적 이미지로 생생히 보여준다.
하얀 것들, ‘완장을 찬 자’들에게 부당하게 빼앗긴 나의 자리를 되찾기 위해, 더불어 미래를 새로 쓰기 위해 아이들은 다 함께 들고 일어서 봉기한다. 래드 리 감독은 이를 대단히 감각적인 연출로 담아낸다. 외지인에 의해 사건이 발생하고 익숙함이 부조리함으로 뒤바뀌는, 그 감정을 신경을 벅벅 긁는 이미지와 청각으로 구현한다. 대로에서 기이하게 차를 몰고, 의심스럽게 움직이는 소년들의 행동을 통해서 말이다. 그리고 감독은 혁명에서 폭동으로 나아가선 안 됨을 역설한다. 그들의 분노 대상은 자신들을 지배하는 부조리한 이념을 만들어낸 '나쁜 농부'이다. 나쁜 농부를 전복하여 새로운 사회를 도래시키고자 하는 것이지, 그들 스스로가 나쁜 농부가 돼선 안 된다. 그들은 강력반을 몰아내어 그 또한 나쁜 농부가 되고자 한 시장과 다르다. 그렇기에 이사는 루이즈에게 화염병을 던지지 아니하고, 루이즈도 소년에게 총을 쏘지 않는다. 그들, 특히 때가 덜 묻은 아이들은 자유·평등·우애에 기인한 새로운 정신을 정초해낼 수 있고, 감독 그 자신보다도 ‘아들’은 더욱더 순수하게 바라보고 기록할 수 있길 희망한다. 폭력은 이렇게 인간이 잃어버린 정당한 것을 되찾기 위해 사용되어야만 한다. 래드 리 감독은 그 명분이 되는 인간의 힘을 그것 자체로 감각적인 이미지로 표현한다. 최근 국제 영화계에서 주목받은 아프리카계 감독들이 이러한 이미지 그 자체의 감각성과 힘을 생생히 보여주곤 하였다. 2019년 칸 영화제에 래드 리와 함께 진출한 세네갈계 감독인 마티 디옵은 <애틀란틱스>에서 묘하게 끈적한 관능성과 서정성, 초자연적인 원리로 가득 차 있지만 텅 비어있는 기묘한 이미지 그 자체를 보여준 바 있다. 또 2017년 베를린 영화제에서 심사위원대상을 수상한 알랭 고미 감독은 <펠리시테>에서 서사나 상징작용으로부터 거리가 먼, 끓어오르는 희열과 분노, 폭력성 그 자체로 이미지를 보여줬다. 래드 리 감독도 이러한 경향을 본 작품을 통해 여실히 보여준다. 이와 더불어 실제 '레 미제라블'로 보편의 악덕을 경험하며 자라온 자신의 경험을 펼친다. 아마 2019년 칸 영화제에서 프리미어된 당시, 자신이 나고 자란 루베 지역의 빈곤함과 절망을 포착한 아르노 데플레생의 <오 머시!>와 비교가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사회적 탐구와 연출에서의 고민, 그 어느 것도 찾아볼 수 없어, 안일하고도 조야했던 <오 머시!>와 달리, 현실과 픽션의 경계를 허무는 리얼리즘을 선보이는 래드 리 감독은, 단순히 관조하여 파악한 것 너머의 실상을 녹여내는 영화의 지평을 보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