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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트 닥터, [소울] | ARTLECTURE

피트 닥터, [소울]

-여기, 삶이 있다-

/Art & Preview/
by 박정수

피트 닥터, [소울]
-여기, 삶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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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IGHLIGHT


본 글에서 다룰 <소울>은 이 같은 기억과 삶의 의지를 탐구하는 작품이다. 이를 연출하는 1968년 미국 태생의 피트 닥터는 픽사 스튜디오의 중추적인 감독 중 한 명이다. 그는 <몬스터 주식회사>를 통해 장편 데뷔 하였으며, 이후 <업>, <인사이드 아웃>과 같은, 비평과 흥행을 모두 손에 쥔 걸출한 작품들을 선보였다. 그의 작품세계에서 도드라지며 본 작품으로 이어져 오는 닥터의 관심이 바로 '기억'이다.

피트 닥터(Pete Docter), <소울>(Soul) - 여기, 삶이 있다

“또 항상 공공연하게는 아닐지라도 궁극의 목표가 소멸된 것으로 착각하고 목표를 제거하기에 이른다. 무언가 바라고 노력할 여지가 남아 있을 때가 가장 행복한 것이다.” -아르투르 쇼펜하우어-


망각을 일삼는 자, 그들의 인생은 무의미함의 반복일지 모른다. 자신이 과거에 저질렀던 과오를 망각하고 이에 어떠한 죄책감도, 수치심도 느끼지 않는다면, 현재에 이 같은 일을 다시금 반복함에 거리낌이 없으리라. 또 우리가 유년기에 품어왔던 각별한 꿈의 기억을 잊어버린다면, 우리의 현재는 과연 어디로 나아가야 하겠는가. 꿈의 기억이 없는 그들에겐 인생의 이정표가 없다. 그들에게 개인은 없다. 공적 영역에서 그저 상부가 요구하는 데로 지침에 따라, 나의 의지가 부재한 마리오네트로서의 삶만을 살아갈지 모른다. 그래서 기억한다는 것, 그것은 곧 나로서 살아간다는 것과도 관련되리라. 최소한 공적 영역에서는 우리가 원치 않는 요구들과 의견에 타협하고 절충해가며 나를 희생할지 모른다. 하지만 나의 기억이 보존된 사적 영역으로 돌아와서, 공적 영역에서 괄시 되었던 나의 작지만 고귀한 꿈을 향해 전진해나간다. 우리는 그러한 꿈을 실현해왔고, 성취해간다. 그리고 이렇게 도달한 꿈은 한때 사명과도 같았다. 그것은 나의 궁극적 목표로 여겨졌다. 하지만 '목표'였지 '궁극'은 아니었다. 사명을 다한 지금에도 나는 여전히 삶에 갈증을 느끼고, 이에 다른 목표를, 다른 의지를 향해 나아간다. 먼 과거에도 사명을 이뤘고, 가까운 과거에도 과업을 이룬 현재의 나는, 이를 통해 자신을 구성한다. 그러한 나는 닫히지 않았다. 회고하는 우리는 ‘여러 가지’ 궁극적 목표와 사명이 있었음을 마주하고, 그것을 성취하고 또 다른 의지로 나아가는 것이 행복이라는 것을 일깨운다. 그리고 본 글에서 다룰 <소울>은 이 같은 기억과 삶의 의지를 탐구하는 작품이다. 이를 연출하는 1968년 미국 태생의 피트 닥터는 픽사 스튜디오의 중추적인 감독 중 한 명이다. 그는 <몬스터 주식회사>를 통해 장편 데뷔 하였으며, 이후 <업>, <인사이드 아웃>과 같은, 비평과 흥행을 모두 손에 쥔 걸출한 작품들을 선보였다. 그의 작품세계에서 도드라지며 본 작품으로 이어져 오는 닥터의 관심이 바로 '기억'이다.     





<몬스터 주식회사>는 언뜻 보기에는 기억이라는 관점에서 가장 멀리 있는 작품이다. 통념의 전환, 편견과 ‘틀림’을 ‘다름’으로 뒤바꾸는 데 초점이 맞춰진 작품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러한 통념은 보통 유년기에 각인되곤 한다. 아이들이 몬스터를 마주하고 화들짝 놀라 겁에 질리게 되는 기억은 하얀 캔버스에 거무튀튀하게 그려져, 향후 어른이 되어서까지 괴물은 공포의 대상으로만 각인될 것이다. 즉 통념은 유년기의 순수한 기억에 의해 좌우되는 경향이 있으며, 이러한 어린 시절의 추억을 보다 긍정적으로 뒤바꾸고 열려있는 사고로 남겨둘 수 있게 만드는 작업이 <몬스터 주식회사>라 할 수 있다. 더 이상 아이들은 괴물들에 대한 나쁜 추억을 갖지 않는다. 함께 웃고 즐기는 기억이 뇌리에 각인되며, 그들이 장성한 이후에도 괴물들에 대한 추억은 여전히 긍정적이리라. <업>에서도 닥터의 기억에 대한 관심은 여전히 이어진다. 이제는 노년이 된 칼, 하지만 그는 아내 엘리와 유년기에 품었던 모험에 대한 꿈을 여전히 가슴 속 깊이 품고 살아간다. 그가 모험을 위해 집에 매단 풍선 하나하나가 유년기에 꿈꿨던 기억 방울방울이리라. 이 같은 기억에 의해 그는 비행하고, 유년기의 꿈을 바탕으로 현재에 결정을 내린다. 비단 모험뿐만이 아니다. 아내와 함께 살아간 인생의 총체 자체가 현재의 그를 지탱하는, 무수한 풍선이자 모험 그 자체였다. 그가 몸담은 시대는 변해만 간다. 일련 거기에 순응해야 할 측면도 존재한다. 하지만 그렇게 변화에만 몸담으면 과연 나의 정체성은 무어란 말인가. <업>은 이러한 나를 이루는 기억의 의미를 고찰하는 작품이다. 그리고 꿈을 성취한 이후에 또 다른 꿈으로 이어지는, 설령 삶으로서 풍선 하나하나가 언젠가 터질 것이란 걸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비행을 중단하지 않는 인생을 예찬하는 작품이다. <인사이드 아웃>도 이와 유사하다. 무수한 기억들이 첩첩이 쌓여가지만, 그 와중에 잊히고 폐기되어 가는 우리 기억의 생멸과 기억의 축적에 따라 무수한 감정을 느껴가며 성장하는 우리의 초상을 비추는 작품이다. 기억이 매립됨에 따라서 우리는 새로운 기억을 쌓아갈 수 있지만, 한편 기억의 붕괴는 지금껏 믿어왔던 나의 상실이다. 무엇보다 슬프고 화나는, 부정적인 기억이라 할지라도 우리에게 무의미하지 않다. 오히려 그것이 세계를 솔직하게 반영하는 나를 솔직히 환기하고, 또 부끄럽거나 수치스러웠던 기억들이 현재에 되풀이되지 않게 해준다.   

   

즉 닥터는 지금까지 한 개인의 뇌리를 탐구하고, 기억의 의미와 그것이 각인되어가는 과정에 주목했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닥터는 한 개인에게 국한되던 기억과 과거를 보다 확장한다. 그것은 바로 내가 모르는 탄생 이전 우리의 영혼이다. 일단 본 작품의 연출부터 살펴보자. 영화는 가장 먼저 ‘자유’에 대한 작품이라 할 수 있다. 주인공 조는 재즈 연주를 할 때 진정으로 자신이 자유롭다고 느낀다. 그는 자신이 전설적인 뮤지션 도로테아 윌리엄스와 협연을 할 수 있게 되자, 마치 날아다니는 것처럼 온 거리를 누비고 다니며, 영화는 이를 역동적인 운동감으로 담아낸다. 하지만 그가 마치 바위처럼 멈춰서고, 이에 따라 카메라도 뻣뻣이 굳을 때가 있다. 바로 자신이 크게 바라지 않은 학교 정규직화가 결정되었을 때, 엄마가 이를 강요할 때, 조의 자유는 얼어붙는다. 영화는 그의 자유를 운동감의 대비를 통해 보여준다. 그리고 영화는 2차원과 3차원의 차이도 도드라진다. 조가 맨홀 추락사로 인해 사후로 이행될 때, 그는 삶에 여전히 미련이 남아 이탈을 시도한다. 그리고 탄생 이전으로 이탈할 때 영화는 20세기 초반, 미국 애니메이션의 2d 형식을 차용한다. 그리고 삶과 그 준비단계는 3d로 포착된다. 어쩌면 삶과 죽음의 바깥에 놓이거나, 죽음 그 자체는 2d처럼 우리의 가능성이 축소되는 차원일지 모른다. 하지만 우리의 무궁무진한 가능성이 내재한 삶은 3d 그 자체로서 다채로움을 선사한다. 우리는 그 다채로움을 2d로 획일화시켜선 안 되리라. 또한 영화는 색채를 아주 절묘하게 사용한다. 일단 조 자신이 진정으로 염원하는 재즈와 물아일체 될 때, 그는 오직 내면으로만 젖어 든다. 이러한 내면의 세계는 파랑과 보랏빛으로 표현되는데, 파랑은 색채론에서 우리가 다가설 수 없지만 지향하는, 저 하늘의 이상성에 상응하는 색채다. 그리고 긍정적으로 사용되는 보라는 로마 시대의 귀족들이나 종교 지도자들의 의복에 칠해지던 색채로서 고귀함을 상징한다. 어쩌면 자신의 내면을 진솔하게 만천하에 표현하고 드러낼 수 있다는 것, 그것은 이상성의 실현이자 진정으로 고귀한 가치에 다름 아니리라.     


이후 사고가 난 이후에 조는 영혼 상태가 되어 마치 우주와도 같은 암흑세계로 추락한다. 검정은 모든 유채색을 뒤섞으면 귀결하는 '끝'으로서의 무(無)에 상응한다. 하지만 완전히 죽은 이후에 도달하는 사후는 순백의 거대한 빛, 그 자체로 상징된다. 하양도 똑같이 무를 지칭하지만 그것은 탄생 이전의 무, 어떤 생명력을 피워낼 수 있는 잠재태로서의 무다. 또한 영화 속에서 빛은 개인들이 틔워내는 무수한 삶의 가치에 상응하지 않던가. 영화는 죽음 이후를 비관적으로만 보지 않는 듯하다. 우리는 검정의 세계로 이행된 이후에 멘토로서 빛나거나, 다시 제 삶을 피워낼 수 있는 순환에 놓인 것인지 모른다. 마지막으로 영혼의 색채는 바로 초록이다. 온유하고 부드러운 조형성 내에서 따스한 온기를 간직한 초록으로 영혼이 표현된다. 녹색은 저 하늘로 뻗어 나가는 나무와 숲의 생명력에 상응하는 색채이자, 가장 극단의 운동성과 온도에 놓인 노랑과 파랑이 온전한 조화를 이룬 색채다. 온전한 중립을 보여주는 초록은 노랑이나 파랑이 간직한 차갑거나 뜨겁거나, 응축하거나 발산하거나 하는 속성이 결정되어 있지 않은데, 영혼의 상태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이제 불꽃을 틔워가고, 육체의 준비단계에 놓인 영혼들은 이 같은 속성이 규정되기 이전, 무궁무진한 가능성을 품은 생명력 그 자체이랴. 이러한 초록은 자신에 의해서 자유로이 다른 속성으로 뒤바뀌어야만 한다. 하지만 다른 존재에 의해 나의 영혼의 색채가 원치 않는 방향으로 칠해질 때가 있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조의 영혼이 어머니에 의해 규정될 때, 그리고 사회의 인습, 우리를 둘러싼 이념에 의해 차갑게 식어만 가는 영혼의 형태가 바로 그렇다. 이는 영화 속 길 잃은 영혼, 그리고 지하철에서 무감각하게 퇴근만을 기다리는 사람들의 모습으로 포착된다. 이에 반하여 나를 회복할 수 있는 수단은 다름 아닌 예술, 그중에서도 음악이다. 본 작품에서 예술은 솔직한 영혼의 울림 그 자체다. 영화 속 예술은 영혼의 떨림에 따라 그 미묘한 진동, 변화를 모두 반영한다. 그중에서도 음악은 가장 감각적인 예술 중 하나이다. 고대의 플라톤은 춤, 시, 음악을 코레이아라는 개념으로 묶고 이를 폴리스에서 추방하길 권장한다. 왜냐하면 인간다운 요소인 이성을 마비시키고, 동물적이고도 혼란한 감각, 정념, 본능으로 사회를 어지럽히는 불경한 작업이라 여겼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는 산자의 특권인 감각을 통해서, 내가 뜨겁게 끓어오르는 정념을 느끼면서, 자신이 살아있다는 것을 느끼지는 않은가? 




파블로 피카소, <새와 함께 있는 여인 초상>, 1970





이는 영화 속에서도 마찬가지다. 길 잃은 영혼을 치유하는 것, 그리고 삶에 확신을 갖지 못하던 22번이 꼭 한 번 해보고자 하는 것이 바로 재즈다. 어쩌면 타인들이 만들어 놓은 체제, 극도의 효율성만을 추구하는 삶에서 우리의 감각성은 포기된다. 반복이 맹목적으로 지속되면 우리의 삶은 지겨워지고, 그 의미를 잃어버린 채로 번 아웃을 일으키리라. 이에 나의 삶은 길을 잃는 것이랴. 하지만 우리는 나의 재즈를 되찾아야만 한다. 영혼을 되찾는다는 것은 하나의 이탈이다. 본 작품의 감성과 이성에 대한 관계는 죽음에 상응하는 테리에게서 포착된다. 테리는 수학자이자 탁월한 회계사라 할 수 있다. 주판을 들고 철두철미한 계산 하에 죽음을 집행하며, 거기에는 여지가 없다. 그리고 이러한 테리와 자애로운 생명력의 원천이라 할 수 있는 제리도 앞서 언급한 2차원으로 그려지곤 한다. 피카소를 연상케 하는 큐비즘적 형태로 말이다. 어쩌면 그들은 단순하다. 죽음은 영화 속 거대한 빛으로 향하는 레일에서 벗어나지 않는 것, 탄생은 지구로 다이빙하는 것이다. 그 이외의 방도는 없다. 하지만 살아간다는 것은 무한히 다채롭다. 태어나기 이전에 삶을 미리 체험해보고 불꽃을 틔워보는 세계는, 구불구불한 원형에 모든 것이 변화 가능한 형태를 띤 체험장, 전당이 가득한 세계다. 그 건축들과 마찬가지로 원형으로서 다양한 형태를 지닐 수 있는 영혼은 무한한 형상으로 변화한다. 그것이 곧 삶일 것이다. 이러한 무한한 가능성을 일깨우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쉽고 단순한 죽음은 우리의 곁을 줄곧 스토킹한다. 자유를 추구하는 조를 뒤따라 건설 현장의 자재가 떨어지고, 교통사고가 날 뻔 한다. 그리고 맨홀로 추락사하는 조에게 죽음은 예고되지 않으며, 조를 잡으러 온 테리에 의해 일순간 죽음을 경험한 행인도 마찬가지다. 죽음은 우리에게 우발적으로 닥쳐오는 것이며, 자유란 이러한 죽음으로부터 위반하고 달아나는 것인지 모른다. 그저 안주하고 있으면 가장 쉬운 것이 죽음이다. 반면 자유는 힘겨운 것이다. 조의 어머니가 남편을 회고하면서 하는 말은 꿈을 찾기 위해 그는 궁핍했고 힘겨웠다는 것이다. 어쩌면 자유는 행복 그 자체는 아닐지 모른다.     


대문호 알베르 카뮈가 『전락』에서 말하는 것처럼, 자유는 고역이요 진력나는 장거리 경주일지 모른다. 자유라는 것은 곧 우리를 얼어붙게 만드는 타인들에게 반항하는 과정임과 동시에, 나를 잘 다스리는 일에도 상응한다. 하지만 그게 과연 쉬운 일인가. 내 영혼의 뜻대로 나의 육체는 움직여지지 않는다. 22번이 조의 육체에 처음 들어갈 때 대단히 힘겨워한 것처럼, 진정으로 자유롭기 위해선 영혼과 육체의 무수한 단련이 필요하다. 또 내 마음대로 행동하면 사람들이 나를 광인으로 여긴다. 진정으로 자유롭게 코니는 연주하지만, 이를 비웃어 무안을 주는 학우들처럼 말이다. 자유란 이를 이겨내야 하므로 결코 쉬울 수 없다. 그리고 이 같은 자유는 곧 자신의 기억에서 억압되기도 한다. 실존주의 철학자 장 폴 사르트르는 자유란, 그리고 대자란 역사, 과거의 자신을 부정하고 넘어서고 반성하고 초월하는 것이라 말한다. 하지만 우리의 기억은 분명 현재의 삶을 지탱하기도 한다. 그렇다면 어떻게 기억을 다루란 말인가. 조는 재즈가 자신의 사명이라 여긴다. 그리고 색소폰 연주가 훌륭한 12살 코니에게 음악가의 길을 추천한다. 하지만 그녀는 자신은 아직 어리다며 일단 제안을 거부한다. 기억으로 꿈을 구체적으로 자각하기에 그녀의 영혼은 여전히 순수한 '초록'이다. 어쩌면 기억은 분명 우리의 장래 희망, 꿈, 사명을 결정한다. 하지만 오직 하나 만의 사명을 좇는 조만이 유일한 자신인가? 영화 속 과거로서 현재에 도움을 주는 탄생 이전의 멘토들은, 우리의 현실에도 있는 멘토들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멘토들은 주로 위인이다. 더 이상 삶으로 존재하지 않는 그들은 고정되어 있다. 지상에서 이룬 그들의 삶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지고, 자신이 겪어본 과거를 바탕으로만 이야기하지 새로운 미래를 논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영화 속 멘토링을 받아보고 스스로 멘토가 되어보는 22번의 태도를 고찰하건대, 제자들을 특정한 방향으로 규정하는 것은 과거와 멘토의 덕목이 아니다. 조의 학생과 대화하는 22번에게 나타나는 멘토의 덕목이란 '산파'다.     


멘토링을 받는 학생들은 자신이 무얼 해야 할지도 모르겠고, 또 인생 그 자체가 너무도 오리무중 하다. 여기서 멘토는 학생을 감히 규정하지 않는다. 과거에서 축적된 기억들로 코니를 감히 다그치지도 않는다. 학생과 대화하며 그가 진정으로 좋아하고 자유로우며, 염원하는 것을 깨우치게 할 뿐이다. 산파로서 멘토는 스스로가 알에서 깨어날 수 있게 다만 자극을 줄 뿐이다. 과거로서 자신이 행한 루트를 그대로 밟아가게 하지 않는다. 다만 그것으로 마찰을 줄 뿐이다. 유세미나에서 지구로 다이빙하기 이전에 영혼들은 출입증을 만들기 위해, 여러 경험을 통해 성격 배지를 획득하고, 영감을 얻어 불꽃이라는 마지막 배지도 획득한다. 그런데 이렇게 만들어진 출입증이 곧 지상에서의 사명을 결정하는 것일까? 하지만 불꽃은 대단히 보잘것없는 행위로도 발생한다. 만약 조처럼 불꽃을 사명으로 여긴다면, 그 사소한 목적이 영혼의 운명이 되는 것일까? 물론 목적은 단 하나일지 모른다. 살기를 원한다는 것, 하지만 그 삶의 목적은 많은 배지의 조합으로 만들어질 무수한 가능성, 마찬가지로 많은 배지를 가진 무수한 타인을 만남에 형성되는 불꽃들로 인해 절대 '하나'로 귀결되지 않는다. 즉 우리 과거의 영혼이 겪은 바가 지금 우리의 삶을 규정하는 것이 아니라, 다만 우리의 삶에 무수한 불꽃이 있다는 바를 체험 시켜 주는 촉매제에 불과할 뿐이다. 성격이 일련 규정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성격도 하나로 굳어지지 아니하고 다양한 특성들이 서로 조합되며, 쉽게 규정될 수 없는 입체적 정체성을 이룬다. 죽어서 거대한 파노라마가 펼쳐지는 위인들의 아쉬움도 휘황한 과업이 끊겼다는 아쉬움이 아니라 그 모든 가능성, 사소할지만 나를 깨우는 그 작은 불꽃이 가능했던, 삶 그 자체에서 우러나오는 자유를 애틋하게 여기는 것이 아닐까. 즉 우리는 과거로부터 규정되어 있는 나를 넘어서야 할 것이다. 과거의 덕목이란 우리의 현재를 결정하는 것이 아니다. 과거의 무수한 기억들은 내가 그렇게 다채로이 느낄 수 있었고, 무수한 형태로 변형될 수 있었다는 것을 반성하는 것이리라. 그것이 곧 규정되어 버리고 하나의 목적을 지닌 즉자로부터, 진정 자유로운 대자로 진입하는 일이요, 나의 과거와 기억을 반성하고 검토하여 현재로 나아가는 일이랴.      


이렇게 과거를 바라보며 우리가 다시 일깨우는 건 ‘무엇이, 또 어떤 순간들이 즐거웠냐’는 것이다. 그리고 영화 속 우리를 즐겁게 하는 것은 감각이다. 22번은 반복되는 멘토링과 그들의 평가 속에서 감각을 느끼기보다는 지쳐버린 눈치다. 이성적으로 삶을 논증해야만 하고, 산다는 것의 가치나 옳고 그름을 판단해야만 한다. 한편 그 이성적 계산은 자기 삶의 가치를 일깨우지 못한다. 오히려 누군가의 이론에 맞춰 자신의 가치가 쓸모없다고만 평가되거나, 자신은 원치 않은 타인의 눈동자에서 가치를 얻었을 뿐이다. 하지만 우리의 삶은 이러한 평가 이전에도 존재했고, 이후에도 여전히 존재한다. 조의 육체에 들어간 22번은 처음으로 즐겁다. 피자와 핫도그를 먹으며 미각과 후각을 향유함에, 음악을 들으며 청각을 자극함에 나의 오감과 영혼이 피어나며 스스로 살아있다는 것을 느낀다. 유세미나에서 병원으로, 그리고 병원 바깥 뉴욕 거리로 나갔을 때, 영화는 음향을 더욱 크게 강조한다. 이에 두려움도 앞서지만, 비로소 내가 살아있기에 가능한 특권으로서 '감각'이 느껴진다. 22번은 평가와 인정이 아니라, 감각하며 자신이 깨어있고 살아있음을 느낀다. 유쾌하게 감각하는 우리는 영혼의 상태로, 죽음의 세계로 돌아가고 싶지 않다. 죽어서는 감각할 수 없으니, 비로소 느껴지는 삶을 절실히 열망하며 가치가 샘솟는다. 그리고 이러한 세계에는 타인들이 있다. 이러한 타인들은 ‘평가하는 멘토’가 아니라, 다채로운 인생을 간직하고 그저 진솔히 서로 터놓는 자유인이어야 한다. 22번은 서로 논증하는 대화가 아니라, 그저 몸과 몸, 영혼과 영혼을 터놓고 교감하는 대화를 처음으로 경험한다. 이에 미용사 친구, 어머니와 대화를 통해서 서로의 삶과 자유를 존중하는 단계로 넘어선다. 22번은 이를 통해 지상에서 처음으로 자신의 영혼을 있는 그대로 이해하는 사람을 만나게 되었고, 친구이자 서로의 멘토로서 서로의 삶이 '틀리지' 않았음을 확인하고 용기를 고양한다.     


또 개념적으로 판단한 인간·세계가 아닌, 자신이 미처 알지 못한 다채로운 타인들이 존재하고, 또 한 타인의 내부에서도 무수하게 다른 시간이 공존함을 깨우친다. 대화를 통해 서로의 일면에 불과했던 삶을 더욱더 넓은 시간으로 확장하고, 이를 존중함에 각자는 온 생애가 깨어나는 살아있음을 느낄 것이다. 아버지의 삶이 조의 기억 속에 각인되고 간직되며, 타인의 세계에서 여전히 살아있는 경험을 말이다. 이렇듯 감각은 나 홀로 가능한 것이 아니기에, 타인들과 뒤섞여 가능한 것이기에 나는 그들을 위해서 기꺼이 스스로를 희생할 수도 있다. 조가 22번을 위해 출입증을 내어주는 것처럼, 하나의 출입증은 곧 나 홀로 만든 것이 아니요, 이에 함께 애써준 상대방을 위해 희생할 수 있다. 영화 속 기적이란 바로 그런 것이다. 이기적인 나만의 구원이 아니라, 나의 삶을 타인에게 내어줄 수 있음에 도래하는 궁극적인 스스로의 기적, 영화 속 제리의 구원은 함께 살아가는 삶을 환기한다. 나의 삶을 일깨워준, 함께 살아가는 그들에게 우리는 일말의 책임이 있으므로. 일깨워지는 것, 그것은 바로 삶이란 단 하나의 사명이나 목적으로 살아가지 않는다는 것이다. 가치란 우리의 삶이 여전히 필요하고 중요하다는 것을 일깨워주는 하나의 확인이랴. 이러한 가치가 사명과 목적에 의해 규정되는가, 그것을 이루고 타인에게 환호와 박수를 받으면 우리는 삶의 가치를 확인하는 것인가? 유세미나에서 자신의 인생을 파노라마로 펼쳐보며 울적해 하는 조처럼 사명을 이루지 못한 자신은 무의미한 것인가? 영화는 ‘절대 그렇지 않다’라고 답한다. 오히려 사명을 이루기 전에 그는 행복했다. 조는 본인의 사명을 이뤘음에도 불구하고 크게 기쁘지 않다. 오히려 이전과 같거나, 기대감이 불발함에 울적하다. 영화에서도 오프닝 타이틀이 띄워지기 이전부터, 픽사와 디즈니 로고가 떠오르는 와중에도 조와 학생들의 연주는 펼쳐지고 있었다. 특정한 존재로 거듭나지 않아도, 새로운 삶으로 뛰어넘지 않아서 불완전한 연주일지라도, 인생은 그렇게 흘러간다.      


그렇게 내가 원하는 바를 자유롭게 추구할 수 있던 순간순간이 모두 나의 삶을 빛나게 만든다. 수의사의 꿈을 바랐지만 지금은 미용사로 살아감에도 결코 불행하다고 느끼지 않고, 오히려 순간순간 자유를 느끼며 행복한 미용사 친구처럼 말이다. 영화 속 울적함, 길 잃음은 자유의 불발, 꿈의 불발에서 기인한다. 하지만 꿈을 향해 나아갈 수 있다는, 그 과정 자체와 이를 가능케 하는 자유로운 삶이 행복한 것이다. 꿈에 그리던 사명을 이룬 이후, 인생을 돌이켜보니 사소하지만 고귀한 자유에 의해서 삶이 행복했다는 것을 자각하는 조처럼 말이다. 자유로운 우리는 이미 우리가 바라던 거대한 대양에 놓여있다. 해방의 감각을 아는 자는 이를 미래에도 틔우고 기약하고자, 삶을 더욱 간절히 여기게 되리라. 즉 우리의 삶은 사명과 목적에 의해서가 아니라, 상황 속에서 내가 자유로이 원하는 것들을 흠뻑 추구하고 달성하며 느끼는 하나의 즉흥이리라. 조의 연주는 무수한 음악 장르 중에서도 다름 아닌 재즈다. 아프리카계 미국인들의 핍박과 고통, 그 자체를 솔직하게 음악으로 승화시킨 재즈는 그들의 삶을 진솔하게 녹여낸 음악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재즈는 특정한 목적대로 흘러가지 않는다. 그날의 감정과 세션들과의 협동, 심지어 관객들마저도 즉흥의 요소가 된다. 즉 재즈는 다듬어지지 않은, 무한한 가능성을 지닌 삶 그 자체를 반영한다. 그리고 22번이 다른 것도 아닌 바로 그 재즈 연주를 바란 것처럼, 우리 삶은 하나의 재즈로 흘러가야만 한다. 정해지고 결정된 목적으로서 악보가 아니라, 내 삶을 지탱하게 해준 무수한 요소들, 나의 살아있음을 빛내주는 감각의 편린들로 매시간 새로 쓰이는 하나의 우발적 사건이어야 하리라. 어쩌면 우리가 영화 속에서 만난 길 잃은 영혼들도, 지하철의 사람들도, 타인들의 요구가 아니라 자신의 사명을 추구하는 이들이 섞여 있을지 모른다. 무아지경과 집착은 한 끗 차이라는 영화 속 대사처럼 말이다. 스스로의 사명이라 할지라도, 오직 그것만을 위한 삶은 나 자신을 목적의 도구로 착취하는 셈이다. 또 우리의 변덕스러운 감정은 매 순간 온갖 다채로운 것을 요구하니, 사명만을 좇는 삶은 이 감정을 무시하는, 이성만을 위한 삶이 될지 모른다. 우리는 그것으로부터 해방되어 순간순간의 자유와 감각의 조화를 이뤄야 하리라.     


즉 삶의 자격이란 운명도, 사명도, 궁극적 목적도 아닌, 그저 살고 싶다는 의지와 이를 가능케 하는 자유에서 비롯한다. 이에 나의 몸은 스스로 빛나는 하나의 항성이 되리니, 그 항성들이 모여 도시와 국가를 이루고 지구를 빛나게 하며, 곧 은하와 우주를 수놓는 빛의 찬연한 일부가 되리니. 이렇게 영화는 이성만을 추구하는 삶도 아니요 사명을 추구하는 삶도 아닌, 어느 날 바람에 의해 하늘에서 내려와 지상에 뿌리내리려는 '씨앗' 그 자체로서의 삶을 황홀한 연출로 예찬한다. 그 누구에게나 똑같은 이름, 탄생으로서 제리, 죽음으로서 테리, 탄생과 죽음은 만인에게 동일하다. 하지만 자유롭게 형체를 뒤바꾸는 '진흙'과도 같은 하나의 질료로서 삶은 무수한 변화를 이루게 되리라. 각자의 감정도 제각각이고, 감각하는 것도 제각각이며, 각자가 시간을 다루는 방식도 제각각이다. 각자도 다르지만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나도 다르고, 내일의 나도 다르리라. 기억을 돌이켜보며 과거의 내가 현재의 내게 일깨워주는 바는, 진정한 자유는 어떤 하나의 목적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순간순간 원하는 것을 자유롭게 추구하는 '해방'의 삶이라는 것을 이정표로 제시한다. 우리는 이 다양성을 서로 긍정하고, 또 너무 무한하여 현기증 나는 삶에 대해 서로 멘토가 되어 용기를 일깨워줘야 하리라. 이렇게 피트 닥터는 자유와 기억을 또다시 환기한다. 일단 자유에 있어 그는 자신의 작업 경향을 이어온 픽사의 후배 감독 댄 스캔론이 <몬스터 대학교>와 <온워드: 단 하루의 기적>에서 좁혀놓은 자유를 다시금 무한히 확장해 놓는다. 닥터의 <몬스터 주식회사>를 계승하는 스캔론의 작품이 선천적으로 결정되는 능력과 목적이 도드라졌다면, 닥터는 이에 반론을 표시한다. 선천적으로 일련 성격이 형성되더라도 그것은 단 하나로 좁혀지기에는 너무도 다채롭고, 그렇게 획득한 삶의 자격 또한 살고 싶다는 의지이지, 결코 운명이나 궁극의 목적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리고 기억은 나를 이룬다. 하지만 과거는 나를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무수한 감각과 경험에 의해 삶이 행복했음을 기억하고, 이에 다시금 무한한 현재를 향해 삶의 의지를 도약시킨다. 그러한 편린들 하나하나를 곱게 포착하며 끝끝내 인생을 직조하는 닥터는 숭고하고도 경이로운 자유와 감각, 그것의 광채를 스크린에 담아내며, 우리의 인생을 고양하는 고귀한 경험을 선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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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박정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