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풀들은 가장자리를 좋아하나 봐." O가 말했다. 걷고 있던 길 위에서 잠시 멈춰 섰다. 고개를 이리저리 돌려 주위를 살펴보니, 길가의 가장자리를 따라 풀들이 일렬로 솟아 있었다. 전화기 너머의 O는 내가 걷고 있는 길을 알고 있는 것 같았다. 소름이 돋았다. 사실 소름이 돋을 필요가 없었다. 풀들은 어디에서나 주로, 가장자리 혹은 경계에서 자란다. 당연한 것을 오래도록 생각해보고 싶을 때가 있다. 왜 그럴까. 왜 그럴까. 왜 풀들은 가장자리에서 자라날까.
그러다, 아- 내가 이 길을 밟고 있어서 그렇구나. 하고 깨닫는다. 중심에서 자라나는 것들을 나도 모르게 짓밟아 버릴 때가 많다. 발걸음을 내디딜 길이 평평했으면 좋겠다. 한 걸음 한 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넘어질까 걱정하고 싶지는 않다. 잘 걷고 싶다. 당장 잘 걸으려고 수없이 많은 것들을 중심에서 밀어낸다. 밀려난 것들은 점점 밖으로 밀려 가장자리까지 가서 자라난다. 아- 너무 많은 것들을 밀어내 버렸나.
문득 앞에 깔린 길이 너무도 엉성해 보인다. 이 엉성한 길에 한 걸음을 더 내디디면 나는 쑥- 하고 빠져버릴 것 같다. 어떡하지. 고개를 이리저리 돌려 살펴본다. 가장자리에 자라난 풀들을 따라 쭉 걸어볼까. 눈으로 풀들을 따라가 본다. 1초 2초 3초 ……. 어라, 계속 있다. 몸을 한 바퀴 뺑 돌린다. 가장자리를 따라 자라난 풀들이 계속 이어져 테두리를 이루고 있음을 깨닫는다. 그리고 동시에 왠지 모를 안정감과 벅찬 마음. 밀어낸 수많은 것들은 사라져 버린 것이 아니구나. 가장자리에서 꿋꿋이 자라나고 있구나. 나를 감싸는 테두리가 되었구나.
- ‘가장자리에서 자라나는 마음‘ 전시 소개글 중에서-

10월 7일부터 27일까지 한남동에 위치한 갤러리 아노브에서 ‘가장자리에서 자라나는 마음’이라는 제목으로 이한나 작가의 개인전이 진행된다. 작가는 가장자리 혹은 경계로 밀려났지만, 그곳에서 계속 자라나는 것들에 관해 이야기하고자 한다. 주로 자연물에서 영감을 받아 그것들의 존재 자체를 조명하고, 가장자리에서 자라나는 것들이 품고 있는 힘을 시각적인 기록으로 남긴다.
작가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생태학적으로 인간은 자연에 속한 존재이며, 물리적으로도 우리가 가는 곳 어디에나 자연물이 있다. 그런데 각자가 길 위에 서있을 때, 혹은 도로 위를 달릴 때,자연물은 길의 양 옆으로 밀려나 있음을 알 수 있다. 편리 혹은 시각적 아름다움을 위해 사람이 다니는 길 위에서는 제거되는 것이다. 우리의 삶도 이와 비슷하다. 당장 나아갈 길 위에서의 효율과 안정을 위해 옆으로 제쳐놓은 것들이 많다."



전시장에는 중심이 아닌 주변에 존재하고, 그곳에서 자라나는 것들의 이미지들이 모여있다. 일상에서 걷다가, 혹은 창 밖을 내다 보았을 때 흔히 발견할 수 있는 풍경을 담아낸 그림, 아주 작은 자연물을 확대해놓은 이미지 등등 말이다. 작가는 사소하고 소박한 자연물이 품고 있는 힘에 주목하고, 관객들에게 그 힘을 설명하고자 한다. 자연물의 시각적 이미지를 제시하는 것에 덧붙여, 그것들에 담긴 이야기를 설명할 수 있는 조형물들을 함께 디스플레이 해놓았다.

작가는 관람객들이 이곳에서 발견되는 소박하지만 계속해서 자라나는 힘을 품고 있는 자연물들의 이미지를 통해, 각자가 제쳐놓은 것들 또한 계속해서 자라나고 있음을 믿게 되길 바란다. 또한, 가장자리에서 자라나고 있는 것들은 점점 중심으로 다가오고 있음을 알게 되길 원한다고 말한다. 전시를 관람하다보면, 전시장 벽면을 따라 걷게될 것이다. 즉, 공간의 가장자리에 작품들이 설치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작품을 감상하며 관람객들의 마음 속에서 어떠한 작은 감정이 자라나길 바라는 작가의 마음일까 생각해보게 된다. 전시 작품들은 벽면을 더불어, 전시 공간에서의 물리적 중앙부까지 설치되어 있다. 가장자리에서 자라나는 것들이 중앙부까지 닿게 된 것이다.

설치된 작업물들을 바라보며, 각자의 마음 속의 중심과 가장자리에는 어떤 것이 존재하는지 생각해보았으면 한다. 우리는 현실과 타협하며, 마음의 중심에 있는 것들을 자꾸 밀어내고는 한다. 하지만 마음의 가장자리로 밀려난 것들은 계속 밀려나 사라지는 경우보다, 경계에서 계속 자라나 마음의 중심까지 닿게 되는 경우가 많다. 이곳에서 발견되는 소박하지만 계속해서 자라나는 힘을 품고 있는 자연물들의 이미지를 통해, 각자가 제쳐놓은 것들 또한 계속해서 자라나고 있음을 믿게 되길 바란다. 또한, 가장자리에서 자라나고 있는 것들은 점점 중심으로 다가오고 있음을 알게 되길 원한다.

[ 전시 정보 ] LEE HAN NA solo exhibition @leehanna_doc [가장자리에서 자라나는 마음] 전시기간: 2020.10.07(WED) - 2020.10.27(TUE) 시간: 월-금 16:00-22:00 / 토,일 12:00-22:00 전시 위치 : 한남동 618-7 ,3F 갤러리 아노브 @gallery_anov 입장료: 무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