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문정동이었을까?
'올림픽과 연관된 동네? 장소?'라고 했을 때 아마도 대부분의 사람들이 가장 먼저 방이동 올림픽공원과 올림픽 선수 기자촌 아파트를 떠올릴 것이다. 그런데 여기 말고 가까운 거리에 또 하나의 올림픽과 관련된 동네가 있다.
바로 문정동이다. 경기도 광주군 문정리였으나 1963년 1월 서울시에 편입되어 성동구-> 강남구 -> 강동구 -> 송파구 문정동이 되었다. 서울에 편입되고 나서도 농사를 생업으로 하여 살아가는 농민들이 살고 있는 농촌지역이었다. 대부분 논이었고, 비닐하우스가 있었다. 1977년에는 6.25 전쟁 이후 몸을 다친 군인과 경찰관을 위해 시흥 상이군경 용사촌 완공되었고, 1980년에는 도심에서 자리하기 힘든 정신지체 특수학교인 충현 학교가 있었다. 서울이지만 경기도 시절의 특성과 서울 외곽지역으로서 성격을 강하게 나타내는 공간들이 자리 잡고 있었던 것이다. 1970년대 건립된 서울공항(성남 공군기지)과 가까이에 있기도 한 여러모로 도시의 성격을 가지지 어려운 동네였다.
<사진출처: 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 1989년 10월 15일자 신문>
그러다 1988년 올림픽을 계기로 하여 올림픽 훼미리 아파트가 준공되었다. 대회 관계자와 올림픽 선수 가족들을 위한 아파트로 4,500여 세대의 대단지였다. 앞서 언급했던 상황이나 동네 분위기로 봤을 때 문정동에 많은 사람들이 살기에는 아직 인프라가 구축이 되기 전이 었을 가능성이 높아 보이는데 '왜 문정동이었을까?'라는 궁금증이 문득 들었다. 그저 '대규모 인원을 수용할 수 있는 넓은 부지' 하나만으로 충분했던 것일까? 바로 앞 동네인 가락동에 1985년에 형성된 가락시장과 1982년 준공된 가락시영아파트가 있긴 했다. 음. 어쩌면 그게 전부였을지도 모르겠다.
문정동 훼미리 아파트
가락시영아파트와 가락시장
한 달이 채 안 되는 올림픽 기간 동안 잠시 머물 그들을 위해 대규모 아파트 단지를 조성한 이후로 '문정동'이라는 동네의 성격은 어떻게 바뀌었을까? 기존에 문정동에서 살던 사람들에게는 어떤 영향을 주었을까? 문정동과 가까운 거리에 있는 동네와의 연결고리는 어느 정도로 바뀌었을까?
# 문정동은 어떤 동네였을까?
현재의 강남 어느 지역과 다를 것 없는 원래 경기도였다가 서울로 편입된 동네다. *동유래를 살펴보아도 물 맛이 좋고 문 씨 성을 가진 이들이 많이 모여 살았다는 정도뿐이다. 원래 존재하고 있던 자연마을들은 1980년대 구획정리사업으로 사라졌고, 올림픽이 계기가 되어 올림픽훼미리아파트를 지으면서 문정2동이 생겨났다.
조선시대: 경기도 광주
1914년 : 문정골, 핵경머리, 두데미 너머 마을 -> 광주군 문정리
1963년 : 서울시 성동구 편입 후 문정동으로 변경
1975년 : 서울시 강남구 문정동
1988년 : 서울시 송파구 문정동
1980년을 기준으로 문정동을 포함한 주변 동네의 변화 상황들을 살펴보면 아래와 같다. 근 현대사적으로 중요한 지점이라고 생각되는 부분들을 정리해보았다.
1) 1977년 가락동에 있었던 성동 구치소: 2017년 6월까지 운영
-> 성동구였었던 가락동. 그래서 성동구치소.
2) 1982년 가락시영아파트 준공
3) 1985년 가락시장
4) 1988년 문정동 올림픽 훼미리아파트 준공
5) 1989년 문정동 시영아파트 준공
6) 1989년 문정골 향토회관 건립
7) 1993년 문정동 건영아파트 준공 (공군기지법상 공군부대 비행안전 5~6구역에 해당)
8) 서울 남부순환선 1기 계획, 1965년 / 2기 계획 1978년 / 철도부지 매입, 오봉역 여객 승강장 설치 1983년 / 1993년 폐기
동은 다르지만 위치상으로 '훼미리아파트 - 가락시장 - 가락동 시영아파트'로 이어지는 공간의 배치를 중심으로 주변부가 형성되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고 1994년 11월 20일 동아일보에 실린 <송파구 도시계획> 지도를 보면 청소 관련 시설, 사회복지시설, 중앙전파관리소, 성동구치소, 경찰서, 경찰병원, 철도공원까지 - 공간 구성 계획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도심에는 없는 사람들이 기피하는 공간들. 구치소, 사회복지시설, 전파관리소가 있는 걸 보면 이곳은 확실히 서울의 외곽지였다. 가락시영아파트 또한 무주택 철거민들에게 집을 제공하기 위해 마련된 아파트였다.
<지도 출처: 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 1994년 11월 20일>
* 그럼 문정1동은?
현재의 문정동 주민센터와 로데오거리가 있던 자리에는 문정골이 있었다. 물 맛이 좋고 문 씨들이 모여 살았기 때문에 <문정>이라 불리었다는 시작점이 바로 이곳이었던 것이다. 꽤나 오랜 시간 문정골에 자리한 느티나무 두 그루가 사이좋게 길을 사이에 두고 나란히 자리하고 있고, 앞쪽에 문정마을의 유래에 대한 설명이 적힌 비석도 함께 있다. 문정동의 자연마을이 이곳이 유일했는지 느티나무와 비석을 기준하여 주변부로 존재를 알리려 애쓴 흔적이 역력했다.

<왼쪽: 현재 문정동(로데오거리쪽) / 오른쪽:
어찌 되었든 존재를 알리려는 시도는 좋았다만, 그 이후 시간이 흐르면서 변화된 과정들과 현재의 모습도 같이 비교하면서 동네를 알렸으면 더 좋았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동네의 모든 역사가 항상 조선시대에만 머물러 있는 것 같아서 아쉽다. 바로 옆이 로데오거리기도 하고, 새로 지은 원룸이나 빌라 사이로 정확한 시기는 알 수 없지만 80년대 -90년대 사이로 추정되는 적벽돌로 지은 주택도 보였기 때문이다.
# 비닐하우스촌 그리고 법조단지
2010년까지만 해도 비닐하우스촌이 존재했던 문정동. 강남의 마지막 미개발지. 도심에서 밀려난, 갈 곳 없는 이들이 살던 곳. 이곳에 개미마을이 있었다. 무허가 건물이라 주소가 존재하지 않았고, 수도와 전기가 제공되지 않았으며, 주민등록증도 부여되지 않았던 곳이기도 하다. 그런 그들이 사라지고, 법조 단지가 생겨났다.
왜 하필이면, 이곳을 법조단지로 조성했을까?
<사진출처: http://blog.naver.com/PostList.nhn?blogId=0472200&from=postList&categoryNo=1, 2009년 개미마을>
인근에 서울공항이 있어 고도제한이 존재했고 그린벨트로 묶여 있어 개발이 쉽지 않았는데 이명박 정부 당시 그린벨트가 해제되면서 개발이 본격적으로 추진되었다. 참으로 묘하게도 서초동 꽃마을 개발 당시 지주 대표도 이명박이었고, 이후에 서초동 법조단지가 조성되었다. 문정동도 같은 절차를 밟고 있는 것에 소름 끼치도록 놀랍다. 왜 법조단지로 조성되었는지는 더 이상 묻지 않아도 알 것만 같다.
법조단지가 조성되면 그 일대는 고소득 전문직 종사자들로 구성이 되고, 그들이 기반을 잡고 활동하게 되면 그와 연계된 상권이 자연스럽게 형성되며 부가가치를 만들게 된다. 법조계 관련 기관들이 있다 보니 자연스럽게 인근에는 경찰, 검찰기관도 함께 자리하게 되는데 사람들에게는 자연스럽게 치안이나 보안에 대한 안정감을 부여하게 된다. 결과적으로는 부동산의 가치도 함께 올라가는 것이다. 그렇게 문정동은 법조단지로 탄생했다.
#서울 남부순환선의 흔적
문정동은 생각보다 많은 이야기가 쌓여 있는 동네였다. 아무것도 없을 줄 알았던 이곳에 기찻길이 놓일 뻔했다는 사실을 아는가? 계획이 여러 차례 변경이 되고 현실화되진 못했지만 최근까지도 그 흔적이 남아 있었다는 것에 새삼 놀라웠다. 서울 남부순환선은 경기도 남양주시 다산동에 있는 <도농역>과 경기도 의왕시 삼동에 있는 <의왕역> 간을 연결하는 철도노선으로 여객과 화물열차가 서울 시내를 거치지 않고 외곽을 통과함으로써 시내의 혼잡함을 덜어주기 위한 목적으로 계획되었다. 구체적인 노선을 살펴보면 아래와 같다.
<지도 출처: https://pgr21.com/freedom/62514>
"2차 5개년 계획은 1967년부터 시행되었던 경제계획인지라 원안 자체는 1966년 정도에 확정이 되었을 걸로 추정이 됩니다. 막연하게 계획선 목록에서 오류동-왕십리로 적었던 걸 보아서 서울의 남부순환로 계획과 연관이 있을 거라고 추정을 했는데, 정작 실체는 그거보다 더 장대한 흡사 서울 교외선에 가까운 그런 노선 구상이었던 게 확인이 됩니다. 노선장 53km라는 숫자도 사실 서울 시내만으로는 나올 수 없는 숫자 기도 했고 말입니다."
"저 계획이 70년대 이후엔 강남 개발이나 컨테이너 수송, 남부 화물기지 건설 같은 게 끼어들면서 계획을 전환해서 오류동-안양 간을 버리고, 의왕(당시의 부곡)에서 도농으로 노선계획으로 바뀌게 된 걸로 보입니다. 그리고 그건 어떤 이유에서인지 남부 화물기지 건설 이후엔 방기 되어버렸고 말입니다. 60년대 중후반엔 외국 자문단의 권고의 형태를 띤 압력으로 국철선 건설 계획들이 대거 포기되고, 경영 합리와와 기업회계 도입 같은 합리화 노선으로 철도가 전환되어 버렸는데 그런 흐름에서 일단 추진력을 상실했고, 67년도의 총선 및 대선에 앞서서 계획의 무모한 착공이 남발될 때에도 정치적으로 노선을 후원할만한 사람이 없던 노선축이다 보니 착공조차 제대로 못해본 채 70년대를 맞이했던 게 아닌가 추정이 됩니다."
<내용 출처: https://inspektor.weebly.com/blog/20190801 >
노선으로 봤을 때 현재 다소 지하철 이용이 불편한 강동, 대모산 주변과 염곡 역을 지나 과천 -청계 - 오봉 - 의왕역으로 이어진다. 만약 이 노선이 현실화되었다고 가정한다면 이 주변의 지역들이 다소 다른 풍경을 가지게 되었을 테다. 철도노선이 현실화되지 못한 이유는 선로가 지나는 '인근 군부대와 협의가 잘 되지 않아서'라고 전해 지고 있다. 그럼에도 철도부지는 계속 남아 있었다. 1994년 4월 29일 자 매일경제 신문에 따르면 '근린공원으로 지정하는 내용이 도시계획 변경안을 마련했다' 고 되어있지만 실제로 조성된 것은 2004년 들어서 부터 였다. 철길 부지 흔적마저 사라졌다면 몰라도 공원으로서라도 남아 있으니 그 구간을 한번 걸어보기로 했다.

# 현재를 바라보며 과거를 상상하다.
존재하고 있는 무언가가 사라지는 순간도 아쉽지만 계획은 존재했으나 현실화되지 못한 순간도 아쉽다. 그나마 다행인 건 흔적을 남기고 있다는 사실이다. 문정동 기찻길은 공원화되었지만 지도상으로 확인되는 형태 자체가 선형으로 되어 있어서 일반 공원과는 다른 지점이라는 걸 보통의 사람들도 쉽게 알 수 있다. 물론 선형의 공원이 아예 없는 건 아니나 대부분 기찻길, 하천, 고가도로, 대교(브릿지)와 같은 역할을 다하고 용도가 변화하면서 조성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흔한 형태는 아닌 것으로 판단된다.




공원의 길이는 꽤나 길었다. 주변을 둘러보면 특별하다고 할 만 것이 없을 만큼 끝없이 펼쳐진 길과 마치 숲이라고 착각할 만큼의 나무들이 빼곡히 서 있었다. 중간지점에 도달하면 이곳이 철길이었다는 것을 알려주려는 듯 교차하고 있는 기찻길의 흔적이 남아 있다.


조금만 더 걸으면 곧장 주차장이 나온다. 빈공터에 주차장이 나오면 한 번쯤 의심해봐야 한다. 혹시 과거에 이 부지가 어떤 곳이었는지 살펴보면 이유를 알 수 있다. 빈 땅이라 하면 가만두지 않고 곧장 뭐라도 지어야 속이 시원한 대한민국에서 주차장으로 쓰인다고 했을 때 땅 주인이 욕심이 없거나 국유 지거나 혹은 특별한 이유가 있을 경우에나 가능한 일이다.



공원이 끝나는 지점은 거여동 사거리. 오른쪽에 보이는 서울 외곽순환도로가 이 철길을 대신한 듯 보인다.
88 올림픽을 이유로 조성된 아파트 단지가 궁금해 살펴보기 시작했던 문정동. 생각보다 많은 이야기가 있었고 현재도 쌓이는 중이다. 이는 어느 동네나 마찬가지였다. 드러나지 않았을 뿐이지 서울이라는 도시가 변화하고 도시조직들이 생겨나고 형성되면서 어느 하나 그냥 뚝딱하고 만들어진 곳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