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어쩌면 잊히면 안 될 수많은 소재를 잊어버립니다. 잊히는 것. 잊히는 것.
'잊는다'라는 피동사 '잊힌다'가 맞는 표현이지만 우리는 '잊혀지다'라는 비표준어에 더 익숙합니다. 나 자신이 잊는 것은 대체로 무의식의 흐름에 따라 결정되지만, 무리 속 관계를 맺고 살아가는 인간은 타인에게 잊혀지는 것을 두려워합니다. 타인을 의식할수록 두려움의 대상은 커집니다.
그래서 인간의 모든 관계가 단절되고 돌아오지 않는 '죽음'이 하나의 큰 사건입니다. 인간이 타인 속에 머무를 수 없는 최종 무곡(舞曲)인 셈이지요.
영화 <코코> 스틸 컷, 2017 / 리 언크리치 감독
인간의 최종 무곡인 사후세계를 이야기할 수 있는 것도 죽음으로 단절되지 않은 살아있는 사람들의 몫입니다. 죽음과 잊혀지는 것. 이것을 잘 조응(照應)한 디즈니 애니메이션 영화 <코코(2017)>는 멕시코의 명절인 망자의 날(Día de Los Muertos)을 배경으로 합니다.
영화 속 세계관인 저승에서는 이미 죽은 망자들도 마지막 죽음(Final Death)을 겪을 수 있다고 합니다. 이승에서 기억해주는 사람이 단 한 명도 남지 않은 망자는 결국 망자의 세계에서도 소멸해버린다는 이야기입니다. 이미 겪은 죽음보다 사람들에게서 잊혀지는 것을 두려워하는 망자들. 영화에서 멕시코 실존 인물들이 죽은 자로 등장하기도 하는데요.
이 세계 속엔 아는 만큼 반가운 인물들이 등장합니다. 그 중 프리다 칼로는 조연급으로 등장해 반가움을 금치 못했습니다. 많은 이들이 기억해 준 덕분에 그녀는 무(無)의 영역에서 생전 반려동물로 키웠던 원숭이와 함께 아프지 않고 영원히 살아갈 겁니다.
필자의 방 한쪽 <알라메다 공원의 어느 일요일 오후의 꿈> 엽서의 일부.
프리다 칼로는 모두에게 위용 적이며 만대에도 어김없이 회자할 화가입니다. 생전에 그다지 주목받는 화가는 아니었고 사람들은 멕시코 민중 벽화의 거장 디에고 리베라의 아내 정도로 알고 있었습니다. 지금은 두 사람 모두 멕시코를 대표하는 화가로 인정받습니다. 이 둘은 떼려야 뗄 수 없는 애증의 관계로 <사랑과 전쟁>이 시트콤같이 느껴질 정도입니다.
디에고 리베라는 벽화 작품으로 이미 유명했습니다. 남미의 화려한 색감을 화폭에 재현했고 멕시코 특유의 정신을 구현해 거장 예술가였습니다. 건물에 벽화를 그리기도 했는데 주요 주제는 인디오들의 농업과 삶이었고, 사회 비판적인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마르크스주의 이념 1)을 영향받아 서사적인 사실주의 2)회화를 지향했습니다. 군부독재와 자본주의 역시 각종 인물을 내세워 우회적으로 비판해 대중들의 많은 지지를 받았습니다.
내 방 한쪽에도 디에고 리베라의 <알라메다 공원의 어느 일요일 오후의 꿈> 엽서가 붙여져 있습니다.
영화 <프리다> 스틸 컷, 2002 / 줄리 테이머 감독
비둘기와 코끼리의 사랑. 들어본 적이 있나요?
앞서 말한 프리다 칼로와 디에고 리베라를 부르는 애칭입니다. 프리다 칼로가 자신의 그림을 디에고 리베라가 평가해 달라고 부탁하게 되면서 인연이 시작되었습니다. 그 후 불륜과 이혼, 재혼을 반복하며 순탄치 못한 결혼생활을 보냈습니다. 남편 디에고 리베라의 화려한 여성 편력이 유명한데요. 유부남의 바람기론 모자라 혼외자식도 있어서 도덕적 관념이 의심스럽습니다. 영화 <프리다(2003)>에서는 프리다 칼로의 여동생 크리스티나 칼로와 디에고 리베라의 불륜 장면을 프리다 칼로가 목격합니다. 그들은 서로에게 예술의 영향을 끼치기도 하고 의지하는 동료이기도 했습니다. 어떨 때는 적이기도 했습니다.
수많은 역경을 지나온 그녀는 영화 <프리다(2003)>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일생 나는 심각한 사고를 두 번 당했다. 하나는 16살 때 나를 부스러뜨린 전차이다.
두 번째 사고는 바로 디에고다. 두 사고를 비교하면 디에고가 더 끔찍했다.
영화 <프리다> 스틸 컷, 2002 / 줄리 테이머 감독
프리다 칼로는 1925년에 하굣길에 탄 버스가 전차와 부딪히면서 그녀의 옆구리를 뚫고 들어간 쇠 봉이 척추와 골반, 허벅지를 관통한 교통사고로 인해 삶의 목표와 인생이 송두리째 바뀌어 버렸습니다. 이 사고가 그녀에게 치명적이었던 이유는 쇠 봉이 자궁 또한 관통해 버렸기 때문입니다. 살아남은 게 기적이라고 말하는 의사들은 그녀에게 더는 걸을 수 없을 거라고 했습니다. 그녀는 평생 30여 차례의 고통스러운 수술을 받으며 평생을 보내야 했습니다. 3)
프리다 칼로는 병실에서 유일하게 자유로이 사용 가능한 두 손으로 가장 그리기 좋은 것, 자기 얼굴을 그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녀는 육체적, 정신적 고통을 그림으로 표현하며 아픔을 예술로 승화시켰습니다. 그녀는 평생 아이를 원했지만 사고 후 후유증이 매우 심각해서 매번 유산했습니다.
<헨리 포드 병원>, 30.5x38cm, 1932 / 프리다 칼로
<헨리 포드 병원>이라는 작품은 자전적인 슬픔과 고통을 처음으로 담아내어 중요한 작품으로 꼽힙니다. 당시 프리다 칼로는 벽화 제작을 의뢰받은 남편 디에고 리베라를 따라 미국 디트로이트로 떠나 있었고, 첫 번째 임신을 하게 되었지만 안타깝게도 석 달 만에 유산을 하게 되는데, 이때의 쓰라린 기억을 그렸습니다. 아이가 유산되어 슬픈 그녀의 감정이 여기까지 느껴지는 듯합니다. 그녀는 후에도 아픈 몸을 이끌고 작업을 전념하다 폐렴이 재발하여 폐경색으로 세상을 떠나게 됩니다.
사후 멕시코 정부는 그녀의 작품을 모두 국보로 지정했습니다. 4)
모든 존재는 관심으로부터 시작되는 것입니다. 삶을 덧대어 보면 사소한 것들도 각자의 관심이 필요하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나는 작은 관심이라 한들 어느 누군가의 가슴 속에 살아가며 유희하고 싶습니다.
니체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제1부 첫 문장에서 정신의 세 단계를 '낙타', '사자', '어린아이'로 구분했습니다. '낙타'는 주인이 시키는 당위적 세계에서 복종하며 무거운 짐을 지고 살아갑니다. 낙타는 의식이나 성찰 없이 주어진 시간을 복종하는데 할애합니다. 인간은 이와 같은 당위적 세계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살아가는 힘을 지녀야 합니다. '사자'는 타율적이지 않고 자신의 의지대로 살아가는 힘을 갖고 있습니다. 하지만 사자 또한 자신의 가치는 찾지 못합니다. 니체는 '어린아이'의 단계에 궁극을 두었습니다. 아이는 자유롭기도 하고 복종하지도 않습니다. 가치를 찾아 유희할 수 있는 단계. 자신의 삶에 있어 부정-긍정, 선-악, 미-추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경지입니다. 5)
나 자신만의 예술을 발견할 수 있고 순간을 유희하며 충실하게 살아가는 '어린아이'처럼 되고 싶습니다. 가슴 속에 예술을 켜켜이 삼켜 잊히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고 죽음을 맞이한다면 예술은 결코 마지막 죽음을 맞이할 수 없을 겁니다.
예술의 종류를 의미하는 개념인 '장르'는 어느덧 인간의 삶에 틈입하여 이야기들을 나누고 관계하며 색깔을 만들어 갑니다. 삶과 죽음. 물감과 화폭처럼 그들을 조응하게 될 때 내면은 그림처럼 번져갈 것입니다.
사물과 사물이 만나는 관계를 표현한다는 것. 한국의 모노하(物派;ものは) 6)대표 미술가 이우환이 먼저 떠오릅니다.
<조응>, 145.5x112.1cm, 1995 / 이우환
<조응> 시리즈 작품으로 논란의 정점을 찍으며 17억에 낙찰되었습니다. '그들만의 리그'는 현대미술을 대중과 거리감을 만들었고 거리감은 대중에게 괴리감을 느끼게 했습니다. 이우환은 이전까지 작업에 여러 개의 점이나 선이 등장했던 것과는 달리 캔버스에 점 하나만 찍히는 아주 간단한 구조로 변화했습니다. 점 하나에 17억입니다. 말이 된다고 생각하시나요?
이 작품을 보고 '저런 건 나도 하겠다.'라는 일침을 놓기도 하지만 과정을 파헤쳐 보면 절대적으로 쉽지 않습니다. 캔버스, 물감, 붓 모두 특수 제작되는데 캔버스는 일본이나 유럽의 공장에서 직접 주문하고 물감은 작가가 직접 돌을 공수해와 갈아서 사용한다고 합니다. 캔버스를 바닥에 눕힌 뒤 점의 비슷한 크기의 종이를 꺼내 이리저리 놓아보며 그릴 위치를 정합니다. 수십 번 측량 끝에 허리를 90도로 꺾고 붓을 움직이기 시작합니다. 한 번 칠한 물감은 며칠에 걸쳐 덧칠해져 최종적으로 점 하나를 그립니다. 한 번 숨을 잘못 쉬어서 삐끗하면 점의 형태가 완전히 망가지기 때문에 호흡 역시 중요한 과정입니다. 작가는 숨을 내쉬면서 긋거나 아예 숨을 참고 긋는다고 합니다. 이 과정이 무려 두 달이나 필요한데 이것마저도 11번이나 실패한 뒤 완성되었습니다. 7)
이우환 작품을 보면 철판 : 돌, 물감 : 화폭의 관계에 서로 만나는 관계를 대응시키고 현상학적으로 해석하라고 던져주는 것 같습니다. 사실 작품은 자신이 느낀 바에 따라 감상하면 그만입니다. 다만 이우환도 미술이론가로 활동하며 작품에 그런 이론을 담았고 수억 원을 호가하는 철학에 그의 작품이 외형적으로 단순하다는 이유만으로 어렵다고 인식하는 것입니다.
그림이 저만치의 값을 치를 만큼 기교적이냐 묻는다면 아니라고 말하고 싶지만, 철학적이냐 묻는다면 그렇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아직도 대중으로선 추상화가 낯설지만, 작가 본인이 하고 싶은 대로 작품활동을 해 오며 고수한 철학은 누구도 따라 할 수 없는 희소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나는 널리 알려진 이 일화를 좋아합니다.
어떤 귀부인 한 명이 피카소의 화필 실력을 듣고 피카소에게 자신의 모습을 아름답게 그려달라고 의뢰하고자 멀리서부터 찾아왔습니다. 적절한 대가를 치르겠다면서요. 피카소는 몇 분 만에 귀부인의 모습을 그렸습니다. 귀부인은 피카소에게 그림의 값이 얼마냐고 물었습니다. 피카소는 50만 프랑 8)을 요구하자 여자가 놀라서 항의했습니다. “아니, 불과 몇 분밖에 걸리지 않았잖아요?”
피카소는 대답했습니다. “천만에요. 나는 당신을 이렇게 그리는 실력을 얻기까지 40년의 세월이 걸렸습니다.”
간단한 그림 하나에도 숙련된 실력은 필요합니다. 고된 숙련으로 그림은 오직 작가의 세계관을 품습니다. 순수한 세계관이 값어치와 연결되는 시선보다 관심을 가지며 음미하고 싶습니다. 정말이지 어려운 예술이지만 마냥 즐겨보고 싶습니다. 그림처럼 우리는 각자의 세계관을 몸에 품은 창조자이며 예술가입니다. 이 예술은 기억에서 잊혀질 때 죽음을 맞이하게 될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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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마르크스와 엥겔스에 의해서 체계화된 소위 과학적 사회주의
2)사물의 실재성을 주장하는 뜻을 통칭하는 개념
3)출처: https://www.nationalgeographic.com/culture/2019/01/excerpt-frida-kahlo-artist-praise-difficult-women/
4)참고 : http://eng.where.ru/spb/magazine/one/326
5)참고 : 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892546&cid=60618&categoryId=60618
6)1960년대 말부터 1970년대에 걸쳐 일본에 나타난 미술 경향. 모노는 일본어로 ‘물(物)’, 즉 물건, 물체라는 뜻
7)출처 : https://news.joins.com/article/8692811
8)당시 한화 약 8천만 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