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세계화와 다원화를 주창하는 시대상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세계화와 다원화를 통해 맛볼 수 있는 다채로운 문화의 면모들은 각국과 여러 민족들의 생활사와 민속, 예술 등을 통해서도 드러나지만, 가장 주요한 매개는 언어에 다름 아니다. 언어는 한 국가와 민족들이 어떠한 생각과 사고로 살아가는지, 어떠한 인식으로 이 세계를 바라보는지를 반영한다. 세계에서 가장 뜻이 긴 단어이자 가장 번역이 어려운 단어로 유명한, 야간어의 마밀라피나타파이 라는 단어를 예시로 보자. 본 단어에 담긴 뜻은 ‘서로에게 꼭 필요한 것이면서도 자신은 굳이 하고 싶지 않은 어떤 일에 대해서 상대방이 자원하여 해 주기를 바라면서, 두 사람 사이에서 조용하면서도 긴급하게 오가는 미묘한 눈빛'이란 뜻으로 야간족을 제외한 세계 각국은 이러한 가치의 개념에 크게 주목하지 않는다. 주목하지 않는 개념이기에 단어로 명명하지 않았다. 허나 야간족이 이러한 의미의 가치를 단어로서 규정하고 명명한 것은, 그들의 삶에 있어서는 이러한 가치가 중요하기 때문이랴. 우리가 잘 모르는 소수민족의 예시가 아니더라도, 불교문화권인 동북아에 살고 있는 우리에게 '인연'이란 단어는 쉬이 통용된다. 허나 서양에서 인연은 쉽사리 번역되지 않는다. 그들 문화권에서는 주목하지 않는 생소한 가치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언어는 각 나라와 민족의 문화에서 주목하는 가치들을 반영한다. 허나 이러한 작금의 풍조와 역설적이게도, 공존되어야 할 언어들은 서서히 사라져가고 있고, 이로써 문화들도 상실되어 간다. 그렇게 소멸위기에 놓인 문화의 매개로서의 다양한 언어들, 다원화의 시대에 필히 경계해야하는 작금의 모순을 본 극 <나는 다른 언어로 꿈을 꾼다>에서 이야기한다.
영화포스터
본 극에서 포착되는 세계부터 살펴보자. 영화가 포착하는 세계는 열대우림으로 자욱한 멕시코의 산골마을인 산이시드로다. 본 극의 초반부터 이 세계를 포착함에 있어 두드러지는 묘사는, 토속적인 문화들이 사라지고, 인력은 미국으로 떠나가고 있다는 바다. 이들의 주된 매체인 라디오에서는 이들이 미국으로 향했을 때 사용해야 하는 언어인 영어교육이 행해진다. 그리고 미국에서 주로 사용해야하는 문장들이 학습되는데, 그들이 필요한 바를 요구하는 문장들이 주를 이룬다. 그리고 그 필요한 바는 주로 경제적인 요소들이다. 이렇게 산이시드로의 주민들은 작금인 21세기에 경제와 언어의 영향을 미국으로부터 줄곧 받고 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들은 이전 시대에도 자유롭지 않았다. 극의 전개에 따라서 행해지는 플래시백 속에서, 20세기의 산이시드로 주민들은 스페인의 선교사들에게 에스파냐어를 학습 받았고, 또한 기독교를 전파 받았음이 드러난다.
이렇게 비서구를 서구화하는 패권국들의 문화, 언어, 경제로 구성된 이데올로기의 영향을, 인도의 탈식민주의자인 가야트리 스피박은 '세계구성'이라고 명명하였다. 이러한 세계구성은 주로 서구 중심적으로 구성되어, 서구는 비서구들을 향해 폭력적인 '계몽'을 행한다. 또한 거대한 세계의 원리 자체가 서구적으로 구성되어있기에, 이에 도태되지 않기 위해서 비서구들이 자발적으로도 서구적인 세계구성 속으로 진입하려 한다. 세계화의 시대에 특히나 두드러진다. 그래서 본 극에서 포착되는 산이시드로는 이러한 세계구성이 강제되거나, 그들이 자발적으로 걸어들어가며 비서구로서의 문화가 유실되어가는 현장이 포착된다. 그들의 문화는 결코 자율적이지 않다. 서구적인 시선 속에서 산이시드로의 인프라는 절망적이고, 여전히 패권국으로부터 경제적인 지원이 절실함이 마르틴이 선물하는 tv를 통해서 단적으로 드러난다.
특히 산이시드로에 녹아든 주요한 서구의 문화중 하나는 일신교인 카톨릭과 에스파냐어에 다름 아니다. 극의 초반에 시크릴족인 에바레스토가 교회에 간다는 언급이나, 또한 플래시백으로 포착된 카톨릭과 에스파냐어로 그들을 ‘계몽’시키려는 선교사들의 묘사 등, 산이시드로가 세계구성에 의해 영향 받는 바는 주로 카톨릭과 에스파냐어로서 드러난다. 하지만 한때 식민제국이었던 스페인이 강제한 세계구성에 의해 짓밟힌 산이시드로의 언어와 문화는 이와 정반대임이 묘사된다. 카톨릭과 에스파냐어가 일신교라면, 시크릴어는 다신교다. 서구의 문명은 자신들의 문명으로부터 자연을 배제하는 방향으로 발전되었고, 또한 자연을 멸시하는 방향으로 발전되었다. 허나 시크릴족과 그 언어의 기원은 이와 정반대로서, 절대자의 화신으로서 인류가 창조한 언어가 아닌, 자연이 인류에게 하사한 언어라는 관점이 두드러진다. 그들의 민족 신화는 여신에 다름 아닐 여성 조류와, 남성 인간이 열렬히 사랑했지만, 그들은 그 사랑을 나눌만한 언어가 부재하였다. 그래서 여성 조류가 자연 내에서 통용되는 그들의 언어를 인류에게 하사하였고, 언어를 통해 두 남녀는 비로소 감정을 교류하고 사랑할 수 있게 되었다. 이렇게 사랑하는 두 남녀의 후손이 시크릴족으로서, 그들에게서 인류는 자연을 결코 배척할 수 없는, 자연의 후손에 다름 아니다. 이러한 독자적인 시점에서 산이시드로는 태고의 자연을 간직한, 인류의 요람에 다름 아닐 테다. 그래서 시크릴어를 간직한 최후의 민족들은 자연 속에서 동화되는 길을 택하지만, 에스파냐어를 사용하고 영어를 학습하는 서구화된 그들의 후손들은 산이시드로의 어떠한 가치도 포착할 수 없다.
이러한 세계를 포착하는 본 극의 연출은 대비쌍을 이루거나, 시크릴족의 삶과 시크릴어를 몸소 느끼게 할 효과들이 동반된다. 먼저 대비쌍으로서 본 극은 지난 12월 개봉한 <로마>에서처럼 수평적인 무빙이 두드러진다. 평면적인 구도 속에서 고정되어있다면 주로 패닝 숏이, 역동적인 달리 숏들 조차 수평적인 움직임만이 강조되어 제한적이고 갑갑한 느낌을 동반한다. 이러한 연출은 감상자 및 마르틴이 시크릴어를 몸소 체험하기 이전으로써, 에스파냐어와 영어만을 사용하는 인식 속에서 이 세계를 조망하는 시선에는 한계가 있다는 바를 드러내려는 연출처럼 느껴진다. 이후 마르틴이 시크릴어와 시크릴족의 문화를 몸소 접하며, 울창한 녹림 속에서 시크릴어의 기원을 찾기 위한 역동적인 수직적인 운동성이 두드러진다. 즉 언어를 통해서 다른 문화를 접하고, 인식의 지평을 넓혀갈 수 있다는 바를, 수평에서 수직으로 나아가는 연출로서 표현한다. 그리고 시크릴족의 삶을 몸소 느끼게 할 연출로서, 그들이 살아가고 문화로서 긍정하는 불가해한 미지의 자연을, 자욱한 안개와 우거진 녹림을 익스트림 롱숏으로 포착하는 바다. 그 세계를 살아가는 작지만 강인한 그들의 숭고함을 강조한다.
그리고 시크릴어의 기원이 조류라는 신화를 전개하기 이전에도, 다양한 야조들이 지저귀는 환경을 청각적으로 강조하며, 그들이 언어와 신화를 형성할 수밖에 없었을 환경과 배경을 감각적으로 드러낸다. 또한 삶과 죽음의 엄격한 분리가 이뤄지는 서구의 사고와 달리, 그들의 삶과 죽음에 대한 사고는 뒤섞여서 분간되지 않고, 죽음은 삶의 새로운 확장에 다름 아니다. 서구의 사고가 삶과 죽음은 일련의 한 쌍이더라도, 삶과 죽음은 각각의 다른 차원에 놓인다는 인식이 강조된다면, 시크릴족의 사고는 삶과 죽음이 한 쌍임과 동시에 동일한 차원에서 연속선상이며 분리할 수 없다. 이렇게 삶과 죽음이 하나의 차원에 뒤섞인 신묘한 그들의 인식을 드러내는 마술적 리얼리즘을 본 극은 지향한다. 본 극의 신묘한 시퀀스들, 죽음으로 향하는 이사우로나, 죽은 일족들과 대화하는 에바레스토는 현실과 분리된 환상적인 차원이 아닌, 현실 속에 공존하는 동일한 하나의 차원이다. 이러한 마술적 리얼리즘은 서구가 그들을 식민화하면서 강제로 주입시킨 문화를 벗어나고, 자신들의 고유한 문화를 복권하려는 운동의 한 경향이라 할 수 있다. 중남미의 문호들과 예술가들에 의해 전개되었으며, 특히나 프리다 칼로 및 디에고 리베라에 의해 유명하다. 그리고 본 극 또한 이러한 경향을 계승하며, 멕시코의 토속적인 문화와 인식을 부활시켜 이를 통해 영화의 형식을 이뤄내려는 시도를 선보인다.
이렇게 동시대의 산이시드로에 서서히 잠식하고 있는 서구적인 세계구성에 의하여, 시크릴족의 토속문화와 언어는 서서히 짓밟혀가고, 또한 이러한 보편원리에 의해 개인의 삶 또한 박탈당한다. 영화는 거시적인 세계를 포착한 이후, 미시적인 시선으로 바꿔 이러한 세계에 의해 박탈당한 시크릴족의 삶을 조명한다. 산이시드로에 기독교와 에스파냐어가 유입되고 그러한 원리가 보편률로 자리하며, 시크릴족의 문화와 언어, 그리고 삶은 찢겨진다. 특히 기독교가 강조하는 자연가족계획에 의해, 그들에 의한다면 비자연적인 것으로 여겨지는 동성애는 탄압 당한다. 이사우로와 에바레스코는 서로 사랑했지만, 기독교의 유입 및 에스파냐어를 사용하는 부유한 일원인 마리아의 시선에서 그것은 사랑이 아닌 죄악에 다름 아니다. 이러한 보편원리 속으로 편입되길 원하는 에바레스코는 마리아와 결혼하고, 또한 시크릴어보다 에스파냐어를 주로 사용한다. 허나 이사우로는 줄곧 시크릴어를 사용하고, 자연 속에서 합일되어 살아가는 삶을 지향한다. 허나 보편률에 벗어난 그 삶은 '미친 영감'이라고 매도된다. 세계화와 다원화의 시대인 지금에도, 특정한 보편적인 세계에 순응하지 않으면 배제하는 전체주의적인 폭력을 고발한다. 이를 통해 소수민족들의 언어, 그리고 언어가 전달하는 그들의 문화와 삶은 짓밟히는 모순적인 현실을 돌아보게 만든다.

이렇게 영화는 산이시드로라는 세계를 포착함에 있어, 세계구성이라는 탈식민주의의 주요개념을 통해 드러냈다면, 미시적으로는 독단적인 관점과 이에 반항하는 관점을 병치하는 연출을 지향한다. 이는 팔레스타인 출신의 탈식민주의자인 에드워드 사이드의 '대위법적 읽기’가 연출로서 표명된 것이라 할 수 있다. 대위법은 독립성이 강한 두 멜로디를 동시에 결합하는 음악기법으로서, 이에 착안한 사이드의 대위법적 읽기는 서구중심적인 기존의 '독단적' 음율과, 이에 의해 짓밟힌 저항적이고 토속적인 '새로운' 음율을 병치시켜, 기존의 음율에 다름 아닌 서구가 은폐하고 탄압하려는 바를 읽어내는 관점이다. 이는 독단적 음율을 갖고 있는 후손들, 두 음율을 몸소 다 갖추고 있는 최후의 민족들, 그리고 저항적 음율만을 갖춘 이사우로의 대비를 통해서 드러나며, 그것은 곧 주체성에 다름 아니다. 독단적 음율을 갖고 있는 후손들이 서구의 보편률에서 벗어나지 못하며 주체성과는 거리가 있지만, 에바레스코나 하신타는 보편률에 순응하면서도 주체성을 간직한다. 하신타가 딸의 명령에 응하지 않고 해먹을 밖에 내놓는 것, 언제나 스스로 의자를 들고 다니는 에바레스코를 통해, 주체적인 삶을 지향하는 그들의 태도가 드러난다. 허나 그들이 몸담고 있는 공간이 기독교적인 공간이고, 특히나 에바레스코의 욕망은 자유롭지 못하다. 그러한 불협화음 속에서 에바레스코는 주체적이지 못한 죄책감과 괴로움을 겪는다. 그리고 저항적 음율만을 갖춘 이사우로의 경우 기독교적인 세계와 유리된 독립적인 오두막에서 산다는 것과, 타인의 의지 없이 지팡이를 짚고 홀로 걸어 나간다는 것으로 그 주체성이 표명된다. 허나 독단적 음율이 그에게 가하는 억압과 폭력이 고발된다. 그들에게 편입되지 않으면 배제하고 상실시키려는 전략이 드러난다.
즉 서구가 강조하는 것은 보편성을 위해 순응하는 삶, 그리고 억압하는 것은 개인의 주체적인 삶에 다름 아니다. 즉 그들이 탄압하는 시크릴족이 강조하는 사상이 자유와 주체적인 삶의 태도에 다름 아니다. 또한 사랑에 의해 태동한 언어이니만큼, 몸소 느끼는 감각성이나 감정이 중시된다. 영화는 시크릴어를 줄곧 번역하지 않는다. 마르틴에게 결국 전승되지 못했기 때문이요, 번역되기 이전에 결국 멸종되어버렸기 때문이랴. 허나 번역하지 않음에도, 감정의 교류를 위해 태동한 언어이기에, 본 언어가 전달하는 진실한 감정들은 감상자들은 오롯이 느낄 수 있다. 또한 뜻을 알 수 없는 가사로 행해지는 노래지만, 그 노래를 맘껏 유희한다. 비록 뜻은 알 수 없지만 그 뉘앙스는 파악할 수 있다. 그래서 본 극의 번역하지 않는 연출은 감정을 전달하기 위해서 고안된 언어이기에, 비록 뜻을 오롯이는 모르더라도 감정은 전달된다는 듯한 의도를 보인다. 또한 각자의 자유와 주체성을 강조하는 언어이기에, 다른 언어를 사용하고 다른 주체성을 지향하는 이방인들에게도 포용적으로 열린 태도를 지향한다는 의도로도 느껴진다.
그리고 삶과 죽음이 다른 차원에 분리된 서구적인 인식 속에서, 이들의 언어는 소멸한 셈이다. 허나 삶과 죽음은 분리되지 않은 동일한 차원에 연속선상으로 이어진다는 시크릴족의 사고 속에서, 그들의 언어는 결코 사멸하지 않는다. 본 극의 초반에는 에바레스코의 기억이나 의식에 상응하는 거친 페이드아웃 기법이 사용되었다. 이사우로와의 욕망을 망각해야만 하는, 보편률에 의해 파편적으로 찢겨진 에바레스코의 기억이라 할 수 있다. 그들의 삶 속에서는 주체성을 지향하면서도, 이 세계의 폭력적인 보편률에 의하여 결코 그들의 주체성은 꽃피지 않았다. 허나 죽어서는 다른 차원으로 향해버려 더 이상 그들을 해하지 못하는 서구이기에, 죽음 이후에 비로소 그들의 주체성은 오롯이 꽃피운다. 죽음 이후에 비로소 그들 언어는 번역되며, 그들이 보편원리가 되며 더 이상 폭력적인 보편원리에 의해 탄압당하지 않는 자유로워진 환경을 보여준다. 또한 페이드아웃을 통해 표현된 에바레스코의 파편적인 기억은 비로소 시크릴어로 대화하며, 또한 죽음으로 근접해가며 온전히 회복되어 간다. 서구의 사고로는 침범할 수 없는 그들의 죽음, 그들에게는 삶의 연장에 다름 아닌 그 세계에서 비로소 시크릴족은 자유와 주체성을 꽃피운다.
이러한 죽음 이후의 엔딩은 삶과 죽음을 동일한 차원 속에 함께하는 것으로 본, 토착민족들에 대한 감독의 구원으로 읽어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살아서도 오롯이 주체적으로 살 수 있어야만 한다. 에바레스코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주체적으로 욕망하는 마르타와 주비아처럼 말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주체적인 길을 가로막는 보편원리들은 이제는 사멸해야만 할 것이다. 무엇보다 우리는 시크릴족이 세계를 바라보는 태도를 마주할 기회를 상실해가고 있다. 최후의 3인, 하신타와 에바레스코와 이사우로의 사멸로 우리는 마르타처럼 인식의 확장을 맛볼 길을 영영 잃어버린 셈이다. 다른 민족의 언어, 그것에 내재된 그들의 문화는 세계를 다르게, 더 넓게 바라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그것을 위해서 우리는 언어의 공존을 지향해야만 한다. 사멸한 시크릴족에게는 본 엔딩이 구원에 다름 아니지만, 살아있는 우리들에게 본 엔딩은 강렬한 경고에 다름 아니다. 세계화의 시대에 살아가는 우리는 하나의 보편적인 세계구성을 따라가는 세계화를 지향해서는 안 될 것이다. 그러한 세계는 몰개성적으로 주체성과는 거리가 멀다. 우리는 다양한 언어와 문화를 통해 세계를 다채롭게 바라볼 수 있을, 다원화를 통한 세계화를 지향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이를 위해선 타문화와 언어 및 개인들이 지향하는 주체성에 대해, 공존과 존중을 표하는 열린 태도가 요구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