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과 시간 (2) 순간을 영원처럼
-인상의 발견과 되찾은 시간-
전편: https://artlecture.com/article/1138/
인상의 발견
가족이 사는 독일에 와 있다.
독일의 한적한 시골마을에서 보내는 가을은 축복이다. 별다른 일을 꾸밀 것도 없이 그저 실내에 가만히 앉아 창밖 풍경을 바라만 보는 것으로도 충분히 즐겁다. 이불처럼 펼쳐진 노란 밀밭 위로 점점이 까마귀 떼가 날고, 하얀 카모마일 흐드러진 밭에 풀벌레가 운다. 솜뭉치같은 뭉게구름은 벽돌집의 세모난 지붕에 허리를 찌를 듯 낮게 떠다니고, 멀찍이서 달려오는 기차 소리를 담은 바람이 이따금씩 창가를 휘익-하고 스쳐 지나간다. 고흐와 모네와 르누아르의 그림이 무거운 액자를 훌렁 벗어던지고 우리 집 앞 뜰에 누워 한가로이 일광욕을 즐기는 듯한 풍경이다.
햇살은 그 어떤 것도 빠트림 없이 골고루 보듬는 자비로움을 보이는가 하면, 아침부터 저녁까지 매 시간마다 변화무쌍하게 옷을 갈아입는 변덕을 부린다. 나는 햇살에 빛나는 모든 것들을 황홀하게 쳐다본다.
하나의 색점이라도 놓칠세라 매 순간 햇살의 꽁무니를 쫒은 인상주의 화가들의 눈으로.
빛의 기록, 되찾은 시간
Monet, Impression, 1872
미술사에서 인상주의가 하나의 유파로 인정받게 된 시점은 1874년, 파리 살롱전에서 낙선한 이들이 특정한 명칭도 없이 삼삼오오 모여 연 전시회로부터 시작된다. 이들 중 <인상>이란 제목을 붙인 모네의 그림은 오늘날까지 인상주의를 대표하는 그림으로 가장 먼저 손꼽힌다. 모네는 알았을까? 자신이 남긴 말이 미술사에 두고두고 회자될 줄을!
"르아브르에서 그린 걸로 한 점 보냈다. 안개 속에 태양이 빛나고, 돛대를 세운 선박 몇 척 이 떠있는... 제목을 묻기에 이렇게 말해 주었다. <인상>이라고 하세!
Sylvie Patin, Monet, "Un oeil... mais, bon Dieu, quel oeil!"*
Monet, La Cattedrale di Rouen, 1892-1894
인상주의 그림의 소재는 전통 아카데미 미술과 별다른 차이가 없지만 인상주의 화가들은 소재에서 점점 더 많은 빛의 변화를 발견해 나갔다. 화가의 눈은 빛에 따라 시시각각 변하는 대상의 색을 추적하고 새롭게 와 닿는 인상들을 포착했다. 그것은 관찰과 느낌과 표현을 녹아낸 전혀 새로운 화풍으로 점진적인 진화였다.
당시 인상주의 화가들과 친분이 두터웠던 소설가이자 비평가 에밀 졸라는 화단에 새롭게 부는 이 혁명의 바람을 예사롭지 않게 바라봤다. "만일 우리가 아틀리에의 인공적인 빛 가운데 그려진 아카데미풍의 그림들을 고집하지 않는다면, 그리고 드넓고도 변화무쌍한 자연으로 나아간다면, 끝없이 다채롭게, 작품의 혼이 되어주는 것은 바로 빛이다."**
모네가 그린 <루앙 대성당 시리즈>는 빛의 따른 변화와 우연한 순간을 탁월하게 표현했다. 모네는 대성당 앞에서 캠버스를 여러 개 세워두고서 시간마다 자리를 옮겨가며 그림을 그렸다.
그림을 보면 태양빛과 시간과 날씨 조건에 따라 건물의 색이 달라 보인다. 아침 햇살 속의 루앙 대성당은 파란색과 조화를 이루고, 흐린 날 아침의 대성당은 안개에 휩싸인 듯 뿌옇고 물기 감이 느껴진다. 오후 날 밝은 태양빛에 보이는 대성당은 파란색과 금색으로 이루어져 있고, 해가 떨어지는 시각에는 노을에 반사되어 회색과 분홍 색조를 띤다. 모네는 이렇게 모두 33점의 다채로운 루앙 대성당을 완성했다.
순간적으로 지나가 버리는 빛과 그것을 담은 인상은 반복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이 우연하고도 순간적인 인상을 붙잡아 그림으로 재현하는 것은 무의식중에 잃어버린 소중한 시간을 되찾는 일이다.
새롭게 눈 뜸
인상주의 화가들의 창조적인 시선을 실습하다 보면 나도 모르게 나의 자아로부터도 자유로워진다. 인상주의 화가들의 그림에서 마주한 빛과 색채는 내 시야와 사고에 드리워진 장막을 걷어 젖히며 습관적으로 생각하고 바라보고 듣는 것을 멈추게 한다. 이른바 새롭게 눈뜸이다.
콘크리트 같은 기준과 질서와 습관 속에 매여 있던 나를 해방시키고 이제껏 제대로 느껴보지 못한 지금의 나를 주목하게 한다. 과거와 미래에 매여 지금 이 순간의 나를 잃어버리지 않도록, 나는 인상주의 화가들이 현재의 빛을 붙들어 다채로운 색채의 공간을 발견했듯, 지금 이 순간의 나에 집중함으로써 다양한 가능성을 지닌 나를 발견한다. 이른바 시선의 연금술이다.
여느 때와 별반 다르지 않은 보통의 오후 날, 나는 창밖 풍경을 내다보며 한 순간 100년도 훨씬 넘은 인상주의 화가들의 아뜰리에를 흠씬 누볐다. 이 경험은 오늘 내가 사는 시공간 속에서 놀랍도록 창조적인 힘을 발휘하며 혁명적인 사건이 되었다.
하마터면 영원히 잃어버릴 수 있었던 순간들과 눈 맞춤하면서 나는 일종의 영원을 맛본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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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 『모네: 순간에서 영원으로』, 송은경 역, 시공 디스커버리 총서, 시공사, 1996
** 이시내, 「프루스트의 인상주의 미학과 글쓰기: À l'ombre des jeunes filles en fleurs를 중심으로」, 연세대학교 대학원 불문학과 석사학위청구논문, 2001에서 재인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