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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혜수 신작 리뷰, 《올해의 작가상 2019 시리즈 1편》 | ARTLECTURE

#박혜수 신작 리뷰, 《올해의 작가상 2019 시리즈 1편》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올해의 작가상 2019》리뷰 #1 박혜수 작가-

/People & Artist/
by 정미

#박혜수 신작 리뷰, 《올해의 작가상 2019 시리즈 1편》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올해의 작가상 2019》리뷰 #1 박혜수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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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IGHLIGHT


박혜수 작가는 우리 사회에 내포된 집단적 무의식 또는 보편적 인식이라 여기는 가치들을 시각적으로 드러내는 작업으로 지속해온 작가입니다. 이번 전시에서 그녀는 “우리”가 생각하는 “우리”에 대하여 말하고자 합니다...

#작가인터뷰 | 박혜수 | 올해의 작가상 2019 (from국립현대미술관)


올해의 작가상 20192019. 10. 12.(토) ~ 2020. 3. 1.(일)국립현대미술관 서울 1, 2전시실


2019년 올해의 작가상 전시가 시작되었습니다. 《올해의 작가상》 은 한국 미술의 새로운 비전을 제시할 작가들을 육성, 지원하기 위하여 2012년부터 제정된 전시입니다. 물론 관람자인 제 입장에서 올해의 작가상은 저물어가는 한해를 되돌아볼 시기가 다가왔음을 알리는 신호이기도 합니다.



《올해의 작가상 2019》전시 포스터


올해 열리는 《올해의 작가상》 전시는 후보자 모두가 ‘여성’이라는 점에서 특별합니다. 필자의 경우  전시장을 들어가기 직전에 후보 작가 네 명이 모두 여성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후보자가 모두 여성이라는 사실은 필자에게 매우 이례적인 일로 다가왔습니다. 그리고 필자 본인이 이를 '특별한 일'로 여기고 있는 것 자체가 여전히 “작가는 주로 남성”이라는 공식에서 자유롭지 못한 내면을 드러내는 것 같아 불편한 마음도 들었습니다. 만약 후보 작가가 모두 남성이었다면 “남성 작가가 네 명이 꼽혔구나!”라고 생각지 않았을 것입니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좋은 작가들이 ‘남성’ 이어왔던 미술계의 뿌리 깊은 선입견이 2019년을 살아가는 지금 필자에게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니, 참 무서운 일입니다. 어쨌거나 후보자 선정부터가 우리의 견고한 인식의 틀을 다시금 확인하게 하고, 그것에 균열을 야기한다는 점에서 무척이나 기대가 되는 전시입니다.



 후보에 오른  작가 들은 모두 여성입니다.




전시에 대한 이야기를 하기에 앞서 이 글을 읽는 당신에게 묻고 싶습니다.



"올해 당신에게 시상의 권한이 주어진다면 당신은 어떤 작가를 택하고 싶나요?"



조심스럽지만, 필자 개인적으로는 박혜수의 작업이 가장 좋았습니다.


추후 이어질 글에서 네 작가의 작업을 모두 다룰 예정이나, 박혜수의 작업을 가장 먼저 다루는 데는 이유가 있습니다. 필자 개인적으로 박혜수 작가의 작업이 마음에 들었기 때문입니다.


박혜수의 작업은 세련됩니다. 그러나 그것이 전부는 아닙니다. 박혜수의 작업은 시각적인 만족을 주는데 그치지 않고 다양한 생각거리들을 던져줍니다. 박혜수의 작업을 따라 전시장을 찬찬히 걷다 보면, 작품들은 당신에게 질문을 건네기 시작할 것입니다. 전시장을 다 둘러본 뒤에 전시장 한 귀퉁이에 가만히 앉아 머릿속에 드는 질문들에 하나하나 대답하다 보면 시간은 금세 지나갑니다. 그리고 지금 당신이 보는 글은 그 질문들에 대한 답변입니다.




박혜수 작가



"우리"는 정말 "우리"를 의미할까요?



박혜수 작가는 우리 사회에 내포된 집단적 무의식 또는 보편적 인식이라 여기는 가치들을 시각적으로 드러내는 작업으로 지속해온 작가입니다. 이번 전시에서 그녀는 “우리”가 생각하는 “우리”에 대하여 말하고자 합니다.


전시장에 설치된 박혜수 작가의 작업을 마주한다면 아마 사람들은 “이것도 예술이라 할 수 있는가?”라고 질문할 것입니다. (물론 이 질문은 현대미술가들이 "자주" 받는 질문이며, 앞으로도 변함없이 그러할 것으로 예상되긴 합니다.) 이번 전시에서 가장 먼저 접할 수 있는 박혜수의 작업은 <'당신’의 ‘우리’는 누구인가>(2019)입니다. 행과 열을 맞춰 나열된 형형색색의 종이들은 “우리"가 의미하는 바에 관하여 작가가 던진 질문에 대한 사람들의 답들을 표기한 설문지입니다. 섬유예술과 졸업 작품인가 싶어 들여다본 색실 작품은 설문지의 통계 결과를 시각화한 그래프입니다. 미술관에 설치된 설문지와 그래프라니. 거대한 유화 정물이나 풍경 작업을 기대하고 전시장을 찾은 관객이라면 당황스럽기 그지없을 것입니다. 이런 작품이 올해의 작품이라고요?



박혜수, <'당신’의 ‘우리’는 누구인가> (2019). 이 작품을 전시장에서 만난다면 훨씬 매력적이라 느낄 수 있습니다.  전시장에서 직접 눈으로 보시기를 권합니다!

     



박혜수의 신작은 예술가와 비예술가로 불릴 수 있는 대중들의 참여로 이루어진다는 점에서 가장 큰 의미가 있습니다. 작가는 전시장 안에 설문지를 비치해두어 《올해의 작가상 2019》전시를 찾은 관객들이 직접 이 설문에 답할 수 있도록 해두었습니다. 필자가 전시장을 찾았을 땐 파란 눈동자와 구불거린 머리를 가진 다양한 인종의 외국 사람들과 교복을 입은 학생들 흥미롭게 설문지를 작성하고 있었습니다. (전시장에는 영어로 작성된 설문지도 있기 때문에 외국인들도 설문에 참여할 수 있습니다. 아마 영어 설문지가 더 편안하게 느껴지는 사람들은 ‘우리가 남이가’를 말하고 들으며 한반도 땅에서 살아온 사람들과는 사뭇 다른 대답을 하지 않을까 궁금해집니다. 작가가 차후에 ‘우리’로 일컬어지는 사람들과 ‘우리’가 아닌 자들의 ‘우리’를 비교하는 작업으로까지 작업을 확장한다면 더욱 흥미로운 작업이 될 수 있지 않을까요? 조심스레 제안해봅니다.:D) 관람객 한 사람이 설문지를 작성하고, 그것을 제출(?)하는 순간, 박혜수의 작업에는 변화가 일어납니다. <'당신'의 ‘우리’는 누구인가>는 사람들의 생각과 손길들이 더하여지며 변화를 거듭합니다. 사람들의 생각이 수치화되고 시각화되는 과정이 하나의 예술이 될 수 있다니, 참으로 현대미술스럽습니다.




필자도 호기심을 이기지 못하고, 작가가 준비한 설문지를 작성해보았습니다. 처음에는 단지 작업에 참여한다는 사실에 의미를 두고 시작한 행위였습니다. 그러나 설문지를 작성하기 시작함과 동시에 불편한 질문들이 내면에서 불쑥 고개를 들기 시작했습니다. "'우리'에 포함될 수 있는 사람들은 주로 어떤 사람들일까요?", "해외 동포는 "우리"일까요?" "난민들은 "우리"가 될 수 있을까요?" 혹은 "우리와 정치적 사상이 다른 사람들도 "우리"가 될 수 있나요?" 질문 앞에선 필자는 당혹감을 느꼈습니다.  평소에 "우리"라고 생각하고 싶지 않았던 집단을 다시 떠올려야 하는 불편함과 그들을 "우리"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윤리적인 압박, 그러나 "우리"라는 견고한 틀을 유지할 때 얻을 수 있는 경제적 이익이나 내면의 평온함. 설문지를 작성하는 시간은 마주하고 싶지 낳았던 불편한 마음들을 직면해야 하는 시간이자, 필자의 '우리'가 지닌 협소함을 인정해야 하는 시간이었습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미술관의 사회적인 기능이 발휘되는 것 같습니다. 만약 전시장을 찾게 된다면, 박혜수 작가가 준비한 설문지를 작성하는 시간을 가져보시기를 권해봅니다.




"우리"가 붕괴된 곳에는 무엇이 자리 잡고 있을까요?

   


이후 이어지는 작품은 <Perfect Family (퍼펙트 패밀리)>입니다. 이 작품은 는 급증하는 1인 가구들을 위한 ‘가족 대여’ 사업에 대한 내용들을 담고 있습니다. 인간을 대여하는 ‘휴먼렌탈’ 서비스를 통해 작가는 현대 사회 속에서 가속화되는 가족의 붕괴를 풍자적으로 표현합니다. 서로 다름을 이해하고 맞추어가고, 때로는 손해를 보기도, 혹은 도움을 받기도 하며 연결되어 온 공동체는 현대에 이르러 붕괴되었습니다. 그리고 공동체가 붕괴된 빈자리에는 자본만 있으면 "구매"할 수 있는 “최적화된 인간들"이 있습니다.



박혜수, <퍼펙트 패밀리>의 일부. 카드섹션을 떠오르게 하는 작품이다.



앨리 러셀 혹실드(Alie Russell Hochschild, 1940~)는 그녀의 저서 『나를 빌려드립니다 (The Outsourced Self)』(2013) 에서 사생활을 사고파는 '아웃소싱 자본주의'를 다룹니다. 그리고 전통적으로 가족이나 친구가 도맡던 역할까지 자본이 대체하게 된 현대의 시대적 경향을 다양한 예시를 통하여 살펴봅니다. 박혜수의 <퍼펙트 패밀리>는 혹실드의 책을 생각나게 하는 지점들이 있습니다. 그녀의 작업은 전통적으로 인간에 의하여 수행되던 ‘역할’ 뿐만 아니라 인간 그 ‘자체’를 렌탈할 정도로 파편화된 세태에 대한 사유를 불러일으킵니다. 사람은 결코 혼자 살 수 없습니다. 그러나 차갑게 개인화된 현대사회에서, 타인을 사랑하기 위한 에너지나 자원을 투자하는 일은 어리석은 일로 치부됩니다. 타인에 대한 사랑이 식어가고, 전통적인 관계가 단절되기 시작하자, '자본'은 잽싸게 그 빈자리를 꿰차고 들어옵니다. 이 작업은 현대 사회에서 자본의 역할이 어디까지 미칠 수 있는지를 선명하게 드러내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할만합니다.  




지금 우리의 모습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하나의 현상.



마지막으로 살펴볼 작업은 <후손들에게 (To Future Generation)>(2019)입니다. <퍼펙트 패밀리>로부터 한걸음 걸어가면 마주할 수 있는 이 작품은 무연고 사망, 즉 고독사를 다룬 영상 작업입니다. 작품은 다섯 명의 유품 정리사와 네 명의 장래 지도사와의 인터뷰를 바탕으로 무연고 사망자들의 죽음을 이야기합니다. 아마 박혜수는 오랫동안 일본 사회의 고령화에 따라 제기되는 문제로만 대두되었던 “고독사”가 역시 우리 사회의 문제로 떠오르고 있다는 점을 포착하였을 것입니다. 이 작품은 개개인의 죽음에 초점을 맞추기보다 사회가 변화됨에 따라 함께 변화되는 공동체 개념, 특별히 가족 개념에 대하여 생각할 거리들을 던져줍니다. <후손들에게> 속에는 개인에게 짐과 원망이 되는 '공동체로서의 가족'과 사랑이 식어진 자리에 남겨진 '파편화된 개인들'이 놓여있습니다. 고독사가 점차 만연 해지는 사회의 한 단면을 조심스레 들춰내고 있는 것입니다. 필자 개인적으로는 전시장을 찾는 모든 이들이 잠시 멈춰서 이 작품을 감상했으면 합니다.



* 글은 2편에서 계속 이어집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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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미_학부에서는 심리학을, 대학원에서는 예술학을 전공했습니다. 주로 예술과 마음에 관한 글을 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