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마망, 루이스 브루주아, 캐나다 국립미술관 >
지금 이 작품은 보이는 그대로 거미를 표현했습니다. 끝이 뾰족한 다리를 길게 뻗고 위태롭게 서 있는 거미. 하지만 뜻밖에도 이 작품의 제목은 바로 '마망', 프랑스어로는 '엄마'입니다.
이 작품의 작가는 루이스 부르주아라는 프랑스계 미국인 여류 작가입니다.
60세까지 철저히 무명시절을 보내다가 이 '마망' 시리즈로 70대부터 주목받기 시작해서 98세로 돌아가시기 전까지 전성기를 누렸던 작가입니다. 도대체 왜 이 작가는 거미 형상에 엄마라는 이름을 붙인걸까요? 그 이유를 찾으려면 이 작가가 살아온 삶을 함께 봐야합니다.
<루이스 브루주아>
루이스 부르주아는 1911년 12월 25일 파리, 태피스트리를 수선하고 판매하는 아버지 루이 부르주아(Louis Bourgeois)와 어머니 조세핀 부르주아(Josephine Bourgeois) 사이에서 태어났습니다. 아버지가 하고 있던 테피스트리 사업은 직물 공장 같은 것으로, 당시에 상당히 큰 돈을 벌고 있었기 때문에 상당히 유복한 환경이었습니다. 가정 교사까지 둬서 공부를 할 수 있던 걱정도 없고 부족할 것도 없는 행복한 어린 시절을 보냈던 거죠.
그런 그녀에게 이후의 평생을 결정짓는 충격적인 사건이 벌어지게 됩니다. 그것은 바로 유년 시절 수년을 믿고 따르며 친언니처럼 따르고 사랑했던 가정 교사가, 아버지와 불륜 관계를 오랫동안 지속해 왔던 사실을 알게 된 것이죠. 그녀의 행복했던 유년시절은 이때부터 산산조각나게 됩니다.
그녀는 분노했습니다. 아버지를 증오했고, 가정교사를 증오했습니다. 하지만 그 어떤 것보다 그녀가 증오하게 되었던 것은 이 모든 사실을 아주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으면서도 가정을 깨지 않으려 이를 방관했던 무력한 어머니였습니다. 부정을 저질렀던 아버지와 가정교사 보다도 이러한 부당한 상황을 이어가고자 했던 바보같은 어머니에 대한 증오가 활활 불타올랐습니다.
그녀는 이 사건이 자신의 인생을 바꿨다고 후에 이야기했습니다. 그녀가 예술가가 될 수 있었던 원천은 이러한 '관계'에 대한 허무함과 고민 때문이었다구요. 그렇다면 루이스 브루주아는 그렇게 미워한 어머니를 쳐다보기조차 징그러운 거미로 표현함으로써 자신의 증오를 드러내려 한것일까요?
<마망, 스페인 구겐하임 빌바오>
다시 거미의 모습을 자세히 살펴 보겠습니다. 작품을 다시 보면 거미는 칼처럼 뾰족뾰족한 날카로운 다리로 몸을 지탱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좀 더 자세히 보면 거미의 몸통 부분이 실제보다 많이 위로 올라가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실제 거미라고 보기엔 이상한 모습니다. 거미는 긴 다리로 무게 중심을 잡기 위해서 몸통을 가능한 낮게 위치시키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작품의 거미는 몸통이 굉장히 위쪽으로 올라와 있고 그래서 아주 부자연스러운 모습처럼 보입니다. 얇은 다리들이 억지로 들어올린 몸통을 부들부들 떨면서 지탱하고 있는 모습인것을 알 수 있습니다. 곧바로 옆으로 쓰러질 듯한 아주 위태로운 모습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보통의 거미답지 않은 자세로 몸통을 잔뜩 치켜 올린 모습을 아래쪽에서 보면, 다른 부분이 한 가지 눈에 띕니다. 망으로 둘러쳐진 그물안에 대리색으로 만들어진 하얀 대리석 구슬들이 보이세요? 이것들은 바로 거미의 '알'들입니다.
<마망, 거미 배 아래 부분>
그러니까 거미가 이렇게 위태로운 모습으로 저항하듯 하늘로 몸을 잔뜩 추켜올리면서도 꿋꿋히 버티고 서 있는 그 이유는, 바로 이 배 아래쪽의 알들을 위험으로부터 지켜내기 위해서 인 거죠. 루이스 부르주아는 거미의 이 모습에서 '엄마'를 발견해 냈던 것입니다.
거미가 매일 실을 뽑아내듯 작물을 뽑아내는 일밖에 할 줄 모르는 엄마,
남편의 부정을 미련하게 지켜보기만 했던, 거미처럼 흉측한 엄마.
하지만, 거미가 알을 지키려 하는 것처럼 자식들을 지키기 위해서 몸부림 쳤던 엄마.
부들부들 떨리는 얇은 다리로 자식들을 배 아래 숨기고 자신이 모든 고통을 감내했던,
우둔한, 너무나 미운, 하지만 생각할수록 눈물이 나는,
바보같은 그런 엄마.
루이스 부르주아에게 엄마라는 존재는,
죽어가는 순간조차 자식들이 자신의 몸을 먹도록 허락하는 거미 그 자체였던 것입니다.
엄마를 너무나 미워했기에, 유년 시절 루이스 부르주아에게 엄마란 생각할 수 있는 가장 흉측한 존재인 거미와 같은 혐오의 대상이었습니다. 하지만 동시에 엄마가 그렇게 미련하리 만큼 고통을 참아낸 이유는 바로 배 안의 알, 자신 때문이었다는 것을 살아가며 깨닫게 된 것이었죠. 이렇게 자신 안의 모순된 감정을 해결해가는 처절한 삶의 과정이 바로 '마망'으로 탄생했던 것이 아닐까요?
이와같이 자신에게 닥쳤던 가장 고통스런 일들을 극복해 내기 위해 괴로움을 고백하고 그것을 예술로 승화시키는 루이스 부르주아의 작품을 '고백 예술'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그녀의 삶을 이해하고 다시 거미를 보니 이 거미가 안고 있는 삶의 무게와 모성애가 조금 느껴지지 않으신가요.
저는 이 '마망' 작품을 보면 예전에 한 드라마에서 나왔던 글귀가 생각이 납니다.
'신이 모든 곳에 있을 수 없어 엄마를 만들었다고 한다.
엄마의 나이가 되어서도 여전히 엄마는 나의 수호신이며,
여전히 엄마는 부르는 것만으로도 가슴 매이는 이름이다.
엄마는 여전히...힘이 세다.'
오늘은 한 번쯤 엄마에게 전화를 걸어보시는 건 어떨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