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이 다가오다가 또 한 발자국 멀어지는 요즘, 나는 서울 길목에 위치한 한 작업실에서 방예은 작가와 그녀의 작품을 만났다.
<hop>, 2024, acrylic on translucent fabric, 152 x 150 cm
방예은 작가는 스스로를 “이 세계가 가지고 있는 유한함에 대한 생각하며 그리고 그 유한함이 가지고 있는 연약함에서 아름다움을 느끼는 사람”이라 소개했다. 그녀에게 있어서 ‘유한함’이란 무엇인가? ‘유한하다’는 것은 ‘일정한 정도나 한계가 있다’는 의미로 우리 주변을 둘러싼 모든 것들이 이 ‘유한성’을 가지고 있다. 우리는 상상 속의 뱀파이어나 설화의 주인공들과 같이 죽음을 피해 영원한 삶을 영위할 수 없다. 심해 속에 존재하는 몇몇 생물을 제외하고 수많은 생명체들은 인간보다 오랜 시간을 견딜 수 있을 뿐 무한한 생명력을 가지지 못한다. 이는 생명을 지닌 것에 국한되지 않고 우리 주변을 둘러싼 수많은 물질들도 견고해 보일지라도 어느 순간 부식되고, 부러지고 사라진다. 삶을 구성하는 모든 것은 죽음을 시작하고, 또한 죽음을 향해가기 때문에 죽음은 동시에 삶이라는 하이데거의 철학처럼 세계가 가지고 있는 유한함은 우리가 존재하며 가지는 모든 것들을 표현하고 있는 것이라 볼 수 있다.
작가는 작가는 개인적인 상실을 경험한 후 세상에 많은 것들이 결국에는 사라지며 손끝에서 미끄러져 빠져나가는 감각을 경험했다. 미끄러지지 않기 위해 순간들을 붙잡아 사진, 영상과 같은 기록 데이터를 외장하드에 수집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 외장하드가 단 한번의 실수로 고장나는 사건은 그녀에게 순간의 사고로 사라져 버리는 데이터에 지루함을 느끼게 했다. 이로 인해 자신이 진짜로 붙잡고 기억하고 싶었던 것은 데이터 바깥에 존재하는 불확실한 것들이 아닐까라고 생각하며 데이터로 저장하지 못해 잊히거나 사라지는 인상, 경험과 같은 주관적이고 총체적인 감각을 포착하고자 한다.
우리는 단 한 순간도 동일한 상태를 유지하지 못한다. 오늘의 나는 어제의 나는 그저 비슷해 보이는 큰 껍데기를 가진 다른 사람이다. 우리의 몸에 존재하는 수많은 세포들은 죽어 새롭게 대체되고, 오늘의 경험을 지나온 ‘나’는 이것을 겪지 않은 어제의 ‘나’의 상태로 시간을 역행할 수 없다. 이는 사람을 넘어서 동물, 식물 그리고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물건에도 마찬가지 일 것이다. 생명이 있는 것들은 조금씩 죽음을 향해 자라나고, 물건들은 사용함에 따라 조금씩 낡아 간다. 이처럼 만물이 가진 유약함과 소멸됨에 주목하는 그녀의 감각은 과거에 보았던 물리학에 대한 이야기를 떠올리게 했다. 만물을 형성하고 있는 가장 작은 단위인 원자는 건물이 무너지고, 나무가 불타고, 사람이 죽어도 소멸되지 않고 흩어져 또다른 무언가를 구성하는 가장 작은 단위가 된다는 것이다. 작가가 포착하고자 하는 것은 우리가 볼 수 없지만 실존하고 언어로 설명되지 않더라도 내재되어 있다는 점에서 원자와 닮아 있다.
‘나’를 주체 삼기에 더욱 극대화되는 실존적 감각은 빛이 투과되는 반투명한 천을 바탕 삼아 표현되고 있다. 얇고 투명하지만 뻣뻣한 듯한 느낌이 드는 천은 마치 아주 고운 체처럼 감각들을 다채로운 색체로 걸러내는 듯하다. 표면에 머무는 색들은 날씨와 시간에 따라 바뀌는 빛과 어우러져 끊임없이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감각을 포착한다. <눈 앞의 날아다니는 불빛과 작은 화면 속 노을>은 작가가 감각하는 ‘빛’에 대해 느껴볼 수 있는 작품이라 생각된다. 특히 자연의 빛은 사실 그저 태양이 발산하는 빛이 지구에 도달한 것뿐이지만 대기상태, 많은 사람들의 심리 상태 등 많은 것에 영향을 받아 우리 모두에게 다르게 다가온다. 이 작품에서 화면의 중앙을 차지하고 있는 붉은 덩어리는 ‘노을’처럼 보인다. 이 붉은 빛을 둘러싼 새파란 흐름과 차분한 녹색은 이 ‘노을’이 아침 해가 뜰 때 생긴 것이 아닐까 라는 생각이 들게 한다. 많은 문학 작품들 속에서 ‘노을’은 저물어가고 삶과 죽음의 경계를 나타내는 다소 음울한 기운이 돌지만, 여기서 ‘노을’에는 새로움의 기운이 스쳐 지나가는 듯하다. 해의 아우라를 둘러싸고 역동적인 움직임을 보이는 주황색 빛들은 작가가 녹아내고자 하는 찰나의 순간들을 더욱 돋보이게 한다. 혹시 어두운 밤, 밝게 빛나는 스탠드 앞에서 눈을 감아본 적이 있는가? 광원 앞에서 눈을 감으면 눈꺼풀을 통과한 빛에 의해 노이즈 또는 섬광이 보인다. 눈을 깜빡이는 짧은 찰나에 보인 빛의 흔적과 눈 앞에 보인 풍경의 결합은 각막에 짧은 시간 새겨졌다 소멸된 풍경의 흔적일 것이다.
<눈 앞의 날아다니는 불빛과 작은 화면 속 노을>, 2024, acrylic on translucent fabric, 68.2 x 29.0 cm
방예은 작가가 최근 많은 관심을 두고 있는 것은 우리가 살고 있는 ‘도시’이다. 도시가 계속 변하고 사라지고 새롭게 나타나는 것이 자신의 관심을 끌고 있다고 말한다. 특히 건축 공사에서 볼 수 있는 철골 구조물이 도시의 가변성을 보여주는 상징 같기도 하다고 했다. 올해 5월 작가의 작품을 선보일 <제12회 아마도애뉴얼날레> 전시에서 도시에 대한 작가의 관점을 더 살펴볼 수 있을 것이다. 그녀는 이 전시를 위해 전시 기획자와 함께 지도나 스마트폰에 의지하지 않고 도시를 오랜 시간 돌아다녔는데, 그녀는 도시를 ‘표류’하는 재미에 대해 신체의 감각 스위치를 켜는 듯한 느낌이라고 말했다. 여기서 ‘표류’는 사전적 의미를 벗어나, 상황주의(Situationalisum)에서 설명하는 ‘표류(dérive)’와 연관시켜 설명하고 있다. 쉽게 설명하자면 도시를 걸으며 지루한 일상공간인 도시의 예술적 변화를 추구하는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녀는 ‘표류’를 할 때 평소에 안 가던 길을 개척하며 개발을 기다리느라고 다 폐허가 된 건물터, 특성이 딱 보이는 광고 표지판, 외국어로 되어 있는 안내 광고 소리나 신호등에서 나오는 신호음과 같은 것들이 새롭게 바라보았다. 평소 우리가 무시하고 지나갔던 것들을 새롭게 볼 수도 있는 흥미로운 시간이었다고 이야기했다.
오늘날 우리는 흥미로운 자극이 넘쳐나는 환경 속에서 살아가고 있으며, 사회가 요구하는 여러 조건들과 은은하게 작용하는 타인의 시선은 우리를 무의식적으로 압박한다. 이러한 요소들은 우리가 아무런 생각 없이 표류하듯 살아가는 것을 점점 더 어렵게 만든다. ‘정처 없이 돌아다닌다’는 행위는 우리가 익숙한 장소를 거닐 때와, 낯선 여행지에서 길을 걷는 상황에서 서로 다른 의미를 가진다. 익숙한 곳에서의 방황은 몸의 기억과 무의식 속 인식이 이끄는, 스스로도 인지하지 못한 목적지를 향해 나아가는 과정일 수 있다. 이는 과거의 추억이 깃든 장소를 다시 찾는 경험처럼, 감성적이고 회고적인 표류라고 할 수 있다. 반면, 낯선 장소에서의 표류는 진정한 의미의 ‘모험’에 가깝다. 어떤 사람을 만나고, 어떤 사건이 벌어질지 알 수 없는 상황 속에서 우리는 끊임없이 새로운 것을 발견하게 된다. 이러한 과정은 예측할 수 없기에 더욱 생생하며, 감각은 한층 예민해진다. 작가의 작업을 가로지르는 ‘유한함의 순간을 감각하는 것’은 이처럼 표류의 경험과 맞닿아 있다. 익숙함과 낯섦 사이에서 우리가 마주하는 감정의 파편들은 유한한 시간 속에서 존재의 의미를 되묻게 하며, 결국 그것이 작가가 포착하려는 ‘순간’일 것이다.
방예은 작가의 작업은 결국 사라짐과 남겨짐, 인식과 감각 사이의 틈을 끈질기게 탐색하는 여정이다. 그녀는 세계가 가진 유한성을 받아들이면서도 그 속에서 반짝이는 찰나의 순간들을 포착하고, 그것이 전하는 감정의 결을 붙잡으려 한다. 이는 단순한 기록이나 재현을 넘어서, 삶의 덧없음과 그 안에서 피어나는 감각의 밀도를 드러내는 시도다. 오는 5월, 유한한 존재로 살아가는 우리가 매일 새롭게 맞이하는 순간들을 어떻게 마주할 것인가에 대한 깊은 성찰을 보여주는 그녀의 작품들을 만날 수 있는 아마도예술공간의 전시에서 수많은 찰나들을 담아낸 그녀의 표류의 여정을 함께 거닐어 보길 바란다.
<초여름의 움직이는 창 너머>, 2024, acrylic on translucent fabric, 225 x 150 cm
방예은 | Yeeun Bang
작가의 더 많은 작품들은 아래 SNS를 통해 살펴볼 수 있습니다.
Instagram: @polowingu
*전시정보
전시제목: 이별의 능력
장소: 챔버
기간: 2025.04.25 ~ 05.11
전시제목: 제12회 아마도애뉴얼날레
장소: 아마도예술공간
기간: 2025.05.16 ~ 06.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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