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난(災難)이란 무엇인가? 그리고 우린 그를 통해 무엇을 경험하는가? 재난은 뜻밖에 일어난 재앙과 고난을 의미한다. 현재 한국 사회에서 재난은 크게 세 가지로 구분된다. 태풍·홍수·호우·지진·황사 등의 자연 현상으로 인하여 발생하는 ‘자연 재난’, 화재·붕괴·폭발·교통사고 등 대통령이 정하는 규모 이상의 피해를 부르는 ‘사회 재난’, 그리고 마지막으로 민방위사태로서의 재난이다. 여러 유형의 재난을 겪은 도시는 재난 이후부터 회복과 재생을 시작한다. 이는 ‘도시회복력(resilience)’이라는 척도로 파악된다. 여기서 회복력이란 ‘개인, 물질 또는 시스템이 충격이나 교란 이후, 이전의 균형으로 빠르게 돌아가는 것’을 의미하는데, 이는 도시에 대한 생태학적 이해와 맞닿아 있다.1) 도시는 물리적 구조물의 집합체이면서도 사회 시스템의 복합체이며, 도시를 이루는 다양한 유형·무형의 요소들은 서로 얽혀 하나의 네트워크를 이룬다. 이러한 이유로 도시는 마치 생명체처럼 작은 자극에도 연쇄적인 반응을 일으키기도 한다.
도시회복력 개념에서 중요한 것은 재난 이후 도시 시스템의 핵심 기능을 유지하는 능력을 중심으로 두되, 반드시 재난 이전의 상태로 복귀하는 것을 목표로 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는 재난을 일어난 사실과 사건으로 이해하고, 도시의 회복 혹은 재생의 목표가 주어진 사건 이전의 과거로 되돌아가는 것이 아님을 뜻한다. 재난이 일어났다면 그 이전의 상태로 완전히 돌아가는 것은 불가능하다. 도시는 이미 특정 사건을 겪었고, 이후의 시간은 그 재난의 흔적과 맞물려 이어진다. 복구와 흡수, 그리고 수선과 재생의 시간을 거치며 새로운 시작을 맞이하는 땅과 사회. 이 과정에서 재난 이후의 폐허와 잿더미는 새로운 풍경과 인식을 싹트게 하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
폐허 위에서 시작된 고고학: 간토 대지진과 곤 와지로(杉山直樹)의 고현학(考現學)
한국에서는 관동(關東) 대지진, 일본에서는 간토 대지진으로 불리는 지진은 1923년 9월 1일(다이쇼 12년) 일본 도쿄와 요코하마 등 일본 관동 지역을 중심으로 일어난 해구형 지진이다. 이 대규모의 지진은 5분 간격으로 세 차례 일어났는데, 그 이후 강력한 여진와 대규모 화재가 일어나면서 큰 피해가 발생한 사건이다. 이는 일본이 메이지유신 이후 근대사회로 진입하면서 맞이한 최대의 재난에 해당한다. 일본 정부의 방재백서에 따르면, 당시 지진에 의한 직접 사망자 및 행방불명자는 10만5천명으로 2011년 동일본대지진 사망자의 5.8배에 달한다. 또한 당시 전파되거나 전소된 주택은 29만 채에 달했는데, 이를 종합해보면 간토 대지진 이후 도시는 말 그대로 폐허였음을 알 수 있다.
이미지 1 1923년 9월 1일 간토 대지진와 그로 인한 대규모 화재 이후 폐허가 된 도시의 모습
대지진 이후 일본 와세다대학 건축학과 교수였던 곤 와지로(杉山直樹)는 대지진으로 인하여 자신이 살았던 집이 무너져 임시 거처로 이동하던 중 사람들이 폐허에서 움막과 같은 원시주택의 형태로 임시 거주지를 마련해 살아가고 있는 풍경을 목격한다. 이를 계기로 와지로는 지진에서 살아남아 극한의 상황을 견디고 있던 사람들이 가진 변덕스러움, 그리고 비록 해체될 가건물에 불과하지만 생존을 위해 순간적인 건축적 패턴과 문양, 장식을 띄게 된 것들에 주목했다. 곤와지로는 이러한 임시가옥과 복구 되어가는 거리의 풍경, 다채로운 삶의 모양새 등 재난의 생종 상황에서 사람들의 일상과 복식, 물건들을 자세히 관찰하며 기록을 남기기 시작했다. 또한 관동대지진 직후 도쿄가 이전과 다르게 재생해 나가는 과정에서의 현상과 풍경을 채집하였다.2) 그리고 그가 지진 이후 복구되는 건축물과 사회, 일상을 관찰하고 채집한 작업은 고현학(考現學, modernology)이라는 학문으로 이어졌다. 우리가 현재 도시를 하나의 생태학적 생명체로 보듯이 와지로 역시 현대사회를 거대한 맥박의 움직임으로 보았는데, 고현학이란 비가시적인 춤의 악곡을 기록하는 시도였다..3)
“그것은 1923년의 지진이 일어난 때부터였다. 나는 이전의 죽음의 도시에서 도망쳐온 예술가들처럼 어안이 벙벙해 있었다. 그러나 우리는 그때의 도쿄의 흙 위에 서 있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응시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에서 많은 것을 느꼈다. … 내가 눈에 보이는 여러 가지를 기록하는 것에 심취했던 것은 그때 즈음이었다. 그곳에서 사람들의 모든 행동을 분석적으로 바라보는 것, 그리고 그 기록방식에 관해 공부했던 것, 그러한 것들이 아무것도 아니었던 황량한 벌판 위의 나를 재촉했던 것이었다. (중략) 지진이 일어나기 전까지는 대도시에 관한 사물의 기록이라는 것은 너무나 복잡한 것이었기 때문에 감당할 수 없는 것이라고 생각할 수 밖에 없었지만, 원시적인 상태 로 바뀐 그 당시의 도쿄에서는 기록 작성이 용이하다고 생각되었던 것이다.”.4) |
고현학(考現學)은 “우리 시대의 풍속이나 사회의 삶의 양상에 대해 연구하려는 태도나 방법, 그리고 그러한 연구 작업 전반”을 의미하며, 일반적인 고고학(考古學, archaeology)에 대항하려는 의지가 담긴 학문이다. 이러한 의지는 재해 이후 이전과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세상의 질서를 새롭게 이해하려는 시도에서 비롯되었다. 간토 대지진 이후, 예술가들은 함석으로 지붕을 만들고 찌그러진 냄비로 밥을 짓는 모습 등 잔해 속에서 근대 사회의 오래된 것과 새로운 것이 혼재하는 풍경을 관찰하며, 고현학적 시각으로 도시를 탐구하기 시작했다.5) 고현학은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근현대(modern era)의 도시 풍속과 세태를 꼼꼼히 탐구하며, 당시 도시의 복구와 재건 과정을 삶의 양식이라는 관점에서 분석했다. 특히, 도시의 풍경이 형성된 기원과 도시민들의 생활 세계, 그리고 그것과 밀접히 연관된 상품 세계에 주목하며, 재난 이후 도시의 질서와 변화의 과정을 세밀하게 관찰하는 데 주목했다. 이는 도시 재생 과정에서 단순히 물리적 복구를 넘어 삶과 공간, 그리고 그것을 둘러싼 사회적 맥락을 연구하려는 시도였다.

이미지 2 도시 복구 과정에서 임시로 지어진 반지하식 판자집
도시의 재생에 예술이 함께하는 법: 바라쿠(バラック) 장식과 거리로부터의 채집
와지로는 불타 버린 곳에 거칠게 세워진 판잣집들, 폐허에서 싹 튼 바라쿠(バラック)의 생명력에 주목하였었고, 1925년 미술학교 후배, 젊은 예술가들과 함께 1긴자에 ‘바라쿠 장식사(バラック装飾社)’를 설립한다. 이들은 ‘바라쿠 시대’의 도쿄에서 상점, 공장, 레스토랑, 카페, 주거 및 사무실을 아름답게 장식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단체였다. 이들은 낮은 가격을 받고 바라쿠에 페인트로 그림을 그리거나, 재료로 장식하였는데, 대표적으로 긴자의 ‘카페 기린’이 있다. 와지로는 이러한 활동을 통해 새로운 질서로서의 ‘근대’의 싹을 포착했다. 당시 고현학은 동아시아에서 가장 먼저 근대화를 경험한 일본이 대규모 재해로 폐허가 된 도시에서 새로운 모더니즘을 구축해가는 과정에서 중요한 축이 되었다. 이는 잿더미 위에서 도시를 재건하며 나타난 새로운 질서와 미학적 운동의 발현과 밀접히 연결되어 있었다. 특히 와지로는 물리적으로 붕괴된 대도시 도쿄가 재건되는 과정에서 도시의 활력을 관찰하고, 그 속에서 발현된 새로운 미학적 움직임들에 직접적으로 관여하거나 간접적으로 영향을 미쳤다. 그는 건축가, 문학가, 공예미술가, 작가들과 협력하며 새로운 ‘근대’가 열리는 현장을 성실히 기록하며, 그 과정을 동시대적 시각으로 면밀히 탐구했다.6)
이미지 3 ‘바라쿠 장식사’ 장식한 긴자의 카페 기린, 벽면에 괴수 같이 입을 벌린 그로테스크한 터치의 기린
이미지 4 부락 외벽에 그림을 그리는 모습
그리고 이러한 고현학과 노상관찰의 방식은 당시 일본의 아방가르드 문학, 시각예술, 건축가들에게 핵심적인 시야로 작용하였다. 특히 고현학은 고고학과 달리 연구 대상을 ‘현재’로 한다는 점에서 당시 “새로운 근대”가 쓰여지고 있는 현재의 도시, 미시적인 일상과 생활을 이해하고 관찰하는 방법론이 되었다. 그리고 이는 당시 재난 이후 일본 예술가들에게 재난에 굴복하지 않고, 그를 전복하며 새로운 현재를 재건할 수 있는 가능성이 되었다. 고현학은 사람의 행동, 주거, 의복 외에 유리가 깨지는 방법, 짐을 지는 방법, 스포츠 관람석의 모습 등등 세부적인 생활을 채집과 연구의 대상으로 삼았다. 이는 고고학이 과거의 유물을 역사박물관에 진열한다면, 고현학은 도시 거리에 있는 쇼윈도의 물건처럼 모든 대상으로 비유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와지로의 작업 중 『긴자 거리 풍속』의 경우 긴자 거리를 걷는 사람들의 의복, 헤어스타일, 인구의 이동과 변화, 직업 구성 등을 스케치 뿐 아니라 그래프, 도표의 방식 등 다양하게 기록하였다.7)
이미지 5 곤 와지로의 『긴자 거리 풍속』(1925) 중 남녀 패션의 차이에 대한 인덱스

이미지 6 곤 와지로의 거리 채집 중 일부(1925), 유리창이 깨진 모습과 노동자들이 휴식을 취하는 모습에 대한 관찰
이처럼 고현학은 거리에서부터 시작해 학문으로 발전한 동시에 혁신적인 형태로 재난 이후 예술가들로 하여금 재난의 의미를 새롭게 정의하였다. 무엇보다 질서가 무너진 상황이 곧 사회의 방향을 바꿀 수 있는 투쟁의 기회임을 인식하도록 했다는 점에서 재난 이후 새로운 현재의 인류학이자 고고학으로서 기능했다. 그리고 우리는 그로부터 100년 전의 재난 이후 도시인들의 삶과 도시의 회복이 어떻게 이뤄졌으며, 그 과정에서 예술은 무엇을 새롭게 포착하고 생성할 수 있었는지 알 수 있다. 이는 시차를 건너 현재 재난 상황에서의 도시의 모습을 상상할 수 있도록 도와주고, 그 사이에서 예술은 무엇을 할 수 있으며, 우리 삶과의 긴밀한 협력 속에서 재건과 부흥이라는 이름으로 예술이 정착할 수 있는 방식을 보여주기도 한다.
“과거의 해독제이자 미래의 설계도”로서 재난 상황에서의 “디자인”으로서의 예술
곤 와지로는 일제강점기 조선에 방문해 조선의 민가, 건물, 공장 등의 건축물과 일상 풍경을 기록한 바 있다. 조선이라는 현장을 기록한 곤 와지로의 필드 노트(field note)와 그 의미에 관해서는 2016년 서울역사박물관이 연구하여 학술총서로 발행하였다. 서울역사박물관의 『콘 와지로의 필드 노트: 1920년대 조선 민가와 생활에 대한 소묘』(2016)에 따르면, 와지로는 자신만의 건축인류학적 관점에서 경성 뿐 아니라 평양, 개성, 경상북도 등 조선 각지를 돌아다니며 1920년대 서울과 조선의 모습을 기록하였다. 또한 당시 건축학부 학생인 건축가 김윤기와 법정대학 예과 학생인 박태원은 와세다대학의 건축학과 교수였던 콘 와지로의 영향을 받았다. 김윤기의 경우 콘 와지로가 조선의 민가를 조사하고 귀국한 다음 해에 와세다 대학에 입학하였고, 졸업논문으로 조선 주택의 장단점, 개선에 대한 개인적인 의견을 제시하였는데, 이는 와지로가 조선부락에 관해 조사한 시기의 기록에서부터 큰 영향을 받았다고 알려져 있다. 또한 한국 근현대기 소설로 유명한 박태원의 「구보씨의 하루」(1943)과 「천변풍경」(1936)은 와지로의 고현학 수법과 연관되어 있다. 주인공인 소설가가 노트를 들고 경성의 거리를 배회하고, 노상 관찰하며 그 풍경을 담담하고 정밀하게 묘사한 것은 객관적 기록을 중요시 했던 와지로의 고현학의 태도와 유사하다.9) 이는 비록 일제강점기 시기 일제와 조선의 관계 속에서 이루어진 민속학적 조사, 혹은 영향 관계로서 다른 각도로 접근 가능하지만, 일본의 근대를 뒤바꾼 대규모의 재난으로부터 출발한 관찰과 발화의 방식, 예술의 개입 방식이 또 다른 모더니즘을 맞이하고 있던 조선의 상황에서 재해석된 상황 자체로서 흥미롭다. 지진 이후 폐허가 된 도시의 상황은 식민지 조선의 도시공간과 민중의 생활, 혹은 한국 전쟁 이후 국가부터 새롭게 재건해야 했던 한국의 가까운 도시사에 대한 이해와도 맞닿아 있다.

이미지 7 서울역사박물관에서 발행한 『콘 와지로의 필드 노트: 1920년대 조선 민가와 생활에 대한 소묘』(2016)
이미지 8 곤 와지로가 기록한 경성 스케치 중 기생 김산월의 방
이미지 9 곤 와지로가 기록한 경성 스케치 중 경성 사산의 빈민가
도시회복력이란 재난 이전의 버전의 도시로 돌아가는 것이 아닌, 이미 벌어진 잔해 위에서 재난의 영향을 흡수하고 도시를 수선한다는 개념이다. 그리고 곤 와지로의 고현학과 그로부터 영향을 받아 진행된 당시 여러 아방가르드적인 예술가의 시도들은 이런 의미에서 도시회복력의 한 요소로 작동했다. 재난을 받아들이는 동시에 재난이 가진 역설을 통해 새로운 근대를 디자인한 작업들은 지난 글에서 필자가 언급한 라투르의 세계를 만드는 작업으로서의 섬세한 디자인의 맥락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디자인은 이미 벌어진 결과에 천착하지도, 앞으로 벌어질 미래를 그저 예언하기만 해선 안되는 현재의 작업”이며, “과거의 해독제이자 미래의 설계도”8)라고 말했던 라투르의 디자인 철학처럼, 곤 와지로의 고현학과 그가 동료들과 함께 한 건축/예술적 역시 이미 벌어진 재난을 충실히 기록하면서도 미래가 아닌 현재를 재건하는 작업이라고 보아야할 것이다. 거리로부터 출발한 학문을 만들고, 그 학문을 현실의 삶에 적용하여 미래를 디자인하는데 활용된 고현학. 이런 관점에서 다음 글에서는 와지로의 가까운 동료이자 무대 프로덕션 디자이너였던 켄키치 요시다(吉田 健一)가 공간 디자인과 삶을 연결했던 작업들에 대해 살피며, 도시 인류학적인 접근으로서의 예술의 실천에 대해 자세히 살펴보겠다. “디자이너”들에 의해 공간과 함께 적극적으로 디자인된 도시인의 삶과 일생, 재난의 상황에서 어떻게 우리의 현대적 삶은 재건되고 지속될 수 있을까? 100년 전 일본 열도에서 펼쳐진 그들의 작업과 관계, 일시적인 도시 위에서의 예술적 공동체로부터 현재의 한국 반도를 비춰볼 수 있지 않을까?
각주 1) 강정은, 김청일, 외 「재난과 도시회복력(urban resilience)」, pp. 9-10. 2) 심아정, 「관동대지진 후 지면(地面)과 지면(紙面)에서 펼쳐지는 감각의 각성: 곤 와지로와 하기와라 교지로의 예술활동을 중심으로」, pp. 319-328. 3) 구라카즈 시게루 지음, 한태준 옮김, 『나 자신이고자 하는 충동』(갈무리, 2015), 51쪽. 4) 今和次郎、『考現学入門』(ちくま文庫、2015), p. 361. 위의 글에서 재인용, p. 328. 5) 아카세가와 겐페이 외, 서하나 옮김, 『노상관찰학 입문』(워크룸 프레스, 2023), pp. 90-117. 6) 민현주, 「근대 대도시 일상의 파노라마: 발터 벤야민의 파리와 곤 와지로의 도쿄」, 『동서비교문학』(59), 2022, pp. 281-285. 7) 위의 글, pp. 286-287. 8) Bruno Latour, 「A Cautious Prometheus? A Few Steps Toward a Philosophy of Design(with Special Attention to Peter Sloterdijk)」, 2008. 9) 서울역사박물관, 『콘 와지로의 필드 노트: 1920년대 조선 민가와 생활에 대한 소묘』, 2016, pp. 248-250. |
이미지 1번: MeijiShowa.com/アフロ 이미지 2번: https://db.10plus1.jp/backnumber/article/articleid/489/ 이미지 3번: MoMAK 웹 페이지, https://www.momak.go.jp/Japanese/exhibitionArchive/2020/440-02-article02.html 이미지 4번: https://wadanaoko.com/2024/01/%EF%BC%83%E8%BF%91%E4%BB%A3%E5%BB%BA%E7%AF%89-in-%E3%80%8E%E3%83%81%E3%83%BB%E3%82%AB%E3%83%BB%E3%83%A9%E3%80%8F%E7%95%AA%E5%A4%96%E7%B7%A8%E3%80%80cafe-kirin.html 이미지 5번과 6번: Pen, “Modernology, Kon Wajiro’s Science of Everyday Observation” https://pen-online.com/culture/modernology-kon-wajiros-science-of-everyday-observation/ 이미지 7번, 8번, 9번: 서울역사박물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