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전시 전경1
기억과 허구가 뒤섞여 만들어낸 비현실적인 풍경 속에 수많은 갈래의 길이 나 있다. 외부와 면한 통 유리 창을 통해 빛이 들어오는 퐁피두센터 1층에 위치한 제3갤러리에서는 타티아나 트루베(TatianaTrouvé)의 «방향감각 상실의 대지도(Le grand atlas de la désorientation)» 전시가 개최되었다. 2019년부터 시작된 드로잉 연작과 동명인 이 전시는 지도를 뜻하는 아틀라스와 방향감각 상실이라는 어울리지 않는 두 개념이 만나 앞으로 전개될 꿈속 같은 특별한 여정을 예고한다.
전세계적으로 활발히 활동하는 동시대 예술가 중 한 명인 타티아나 트루베는 1968년생으로 이탈리아 코센차(Cosenza)에서 태어나 17세때 프랑스로 이주, 니스 소재 국립 고등 미술학교 빌라 아르송(VillaArson)에서 수학한 후 1995년 부터 파리에 정착하여 작업하고 있다.트루베의 작품은 데셍, 조각,설치를 넘나들며 건축적인 요소가 결합된 새로운 공간을 창조해내는 것이 특징이다. 2001년 리카 재단상(prix de la Fondationd’entreprise Ricard), 2007년 프리 마르셀 뒤샹(Prix Marcel Duchamp)을 수상했으며 첫 회고전은 2014년 제네바 근현대 미술관(MAMCO)에서 개최한 바 있다.

전시전경2
가장 흥미로운 점은 작품과 전시 공간 구성을 비롯하여 이 전시 자체가 유기적으로 작용하며 우리의 보편적인 시공간에 관한 인식의 지표를 흔들어 놓는 것이다. 먼저 트루베가 만들어낸 열린 세계는 끝없이 변화하고 확장하는 공간이다.퐁피두 센터의 제3갤러리는 투명한 유리로 만든 큐브 형태의 공간으로 원래 드로잉 작품 전시에는 적합하지 않지만,작가는 대형 커튼을 활용해 실루엣을 통해 외부와의 연속성을 주며 드로잉과 외부 건축 공간의 대화가 이어질 수 있도록 했다. 대형 드로잉 작품들이 입체적으로 매달린 기묘한 풍경은 칸막이도 없으며 그림들은 서로 등을 맞대고 있거나 각기 다른 높이에 매달려 있어서 관람객은 정해진 경로 없이 자유롭게 거닐 수 있다.우리의 발 앞에는 원주민의 꿈의 지도, 개미의 이동 경로,늑대의 후각 지도, 자폐 아동이 그린 지도 등 어디로 이끄는지 알 수 없는 경로들이 수놓아져 있다.이 같은 수많은 움직임과 이동법은 이 또한 가변적인 것으로 세상 속 다양한 삶의 방식을 보여주며 ‘대지도’의 일부로 관람객과 모험을 함께 한다.전시의 포문을 여는 <3월에서 5월까지(From March to May)>(2020) 드로잉 연작은 팬데믹으로 인한 첫번째 락다운 기간동안 몽트뢰이 작업실에서 자신의 반려견과 함께 보낸54일간의 시간을 기록한다. 전 세계 일간지 중 하나를 골라 첫 장을 인쇄해 그 위에 그림을 그렸다. 매일 급변하는 현실과 작가의 작품세계 혹은 개인적인 삶이 만나고 서로 다른 언어와 이미지가 교차하며 가상과 현실이 뒤섞인 끝없이 팽창된 세계를 재 창조 한다.

FromMarch to May
트루베가 창조해낸 장소에서는 인간의 형상을 찾아볼 수 없다. 일상의 사물과 인간 활동에 대한 단서만이 남겨져 있어 멜랑콜리 한 분위기가 감돌고 있다.<방향 감각 상실의 대지도 (The Great Atlas of Disorientation)>(2019-)는 나무와 같은 자연 요소와 벽, 석재,판자 등 건축자재가 공존하는 풍경을 보여준다. 실내인지 외부인지 정체를 모를 장소와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단서를 추적하기 위한 시선이 바쁘게 움직인다.<인트랜퀼리티(Intranquillity)>(2005-) 드로잉 연작에서는 서로 다른 요소가 연결되고 단절되며 빚어낸 멈춰진 시간의 간극과 빈틈을 통해 현실 공간이 아닌 정신적인 장소에 실체를 부여하고자 한다.실내와 외부공간, 가정과 사회 나아가 자연의 경계가 흐려져 불안해진 틈을 타 그 순간 우리의 관념을 흔들어 놓는다.
이 기묘한 풍경은 사실 기억 혹은 기억을 모호하게 만들어버리는 망각이라는 주제 와도 관련이 있다. 브르타뉴 어로 알츠하이머 환자처럼 기억을 잃는 자를 뜻하는 <Les Dessouvenus>(2013-)연작에서는 기억과 망각 사이의 경계를 탐색한다. 색지 위에 자벨수를 뿌린 후 변색된 자리에서 흡사 현실처럼 느껴지는 사실적인 그림을 그려 나가는데 이때 전체적인 구상에서 우연이라는 요소가 큰 비중을 차지한다.건축소재, 자연물과 구리, 종이,코르크 등을 사용한 콜라주가 교차하며 시공간 속에서 나타남과 사라짐을 반복한다. 망각이 있다면 <잔상(Remanence)>(2008-)은 시간 속에서 소멸 이후 사라지지 않고 남아 있는 것에 대한 관심으로 작가는 과거의 작품을 상상속에서 소환해 낸다.어두운 기억속에서 끌어올린 것처럼 밤을 닮은 검은 바탕위에 유령 같은 오브제들이 서서히 나타난다. 관객의 시선을 따라 형상이 다르게 보인다는 점에서 조각과도 공통점이 있다.

Sanstitre, de la série « Intranquillity », 2017, Crayons de couleur et papier collé sur papiermarouflé sur toile. Collection Takeo Obayashi[i]
타티아나 트루베의 작업에서 빼놓을 수 없는 특징은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드로잉과 조각 사이의 보편적인 관계를 비틀어 놓는 것이다. « 저에게 조각과 드로잉은별도로 구분된 세계가 아닙니다. 다공성의 두 세계는 서로 뒤얽히고쉽게 젖어 듭니다. » 드로잉은 설치 작품을 2차원적으로 표현하고 조각은 다시 드로잉 작품에서 온 것으로 이 둘 사이는 차원을 넘나들며 교차하고 있다.예를 들면 드로잉 작품에서는 콜라주를 통해 주석, 구리,알루미늄 등 조각의 재료를 차용하고, 한걸음 나아가 이번 전시에서는 전시장 바닥을 석판으로 깔고 그 위에 드로잉과 유사한 그림을 그려 공간 속 거대한 작품을 완성하기에 이른다.또한 보이지 않는 <감시자(TheGuardian)>의 시선은 전시장 곳곳의 작품들을 지켜보고 있다. 조각도그림속의 황량한 풍경들처럼 사람은 없고 사람의 흔적만이 남아있다. 눈에 보이지 않지만 감시자들의 시선은 같은 공간 속에서 작용하며 또다른 관점을 열어준다.

The Guardian, 2022
이 꿈과 같은 거대한 지도는 어느 순간 길을 잃어버리기도 하고 우연한 발견이 녹아 들기도 하는 작품 창작의 과정과 닮았으며, 관람객이 일부가 되어 길을 선택하며 확장해 나가는 거대한 작품 세계라고도 할 수 있다.어쩌면 경계가 흐려진 이상한 세계를 걷다 보면 그동안 보지 못했던 새로운 시각을 발견할 수도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