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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 그대로를 담은 가우디의 바르셀로나 (2) | ARTLECTURE

자연 그대로를 담은 가우디의 바르셀로나 (2)


/Site-specific / Art-Space/
by uumin_ol
자연 그대로를 담은 가우디의 바르셀로나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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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IGHLIGHT


그가 살던 시절에 그의 건물들은 평생 놀림거리였고 많은 사람들의 비난을 받았지만, 지금은 바르셀로나에서 가장 화려하고 아름다운 건물을 지어낸 가우디로 기억된다.

바르셀로나 도심 곳곳을 벗어나 카르멜 언덕을 오르고 올라가다보면 지금의 공용 공원과 초등학교가 위치한 구엘 공원을 만날 수 있다. 시멘트 사업으로 부자였던 ‘에우세비 구엘’은 1878년 파리에서 열린 만국박람회서 스페인 전시관을 둘러보던 중, 한 장갑 회사의 가죽 장갑 진열대 앞에서 한참을 서 있었다. 명품 가죽장갑이 맘에 들었던 게 아니라, 가죽 장갑 진열대에 매료된 구엘은 곧바로 진열대를 만든 사람을 수소문하게 되었고, 그렇게 가우디와 구엘은 둘도 없는 친구이자 후원자가 되었다. 





가우디의 천재성을 발견한 구엘은 가우디에게 협업을 재안하였고, 가우디 역시나 구엘을 진정한 신사라고 일컬을 만큼 서로의 신뢰가 상당했다. 구엘 덕분에 실제로 가우디는 일이 끊기지 않았고 그렇게 둘은 거대한 프로젝트를 함께 하게 된다.






영국을 여행 중이던 구엘은 주택단지와 공원이 함께 있는 전원주택단지를 보고는 바르셀로나에도 이러한 것을 만들면 좋겠다고 생각해 귀국 후 바로 가우디를 찾아갔다. 그렇게 시작한 프로젝트가 바로 ‘구엘 공원 프로젝트’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프로젝트는 쫄딱 망해버렸다. 60가구가 분양 예정이었던 구엘 공원에는 가우디와 구엘, 구엘의 변호사만이 살게 되었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구엘 공원은 시내로부터 멀어도 너무 멀었고 카르멜 언덕을 오르고 올라야만 갈 수 있었다(경사가 심각했다). 심지어 그 주변은 돌산이라 물이 항상 부족했다. 이 모든 문제를 가우디가 해결했지만 아무도 이곳에 입주하지 않게 되었고 결국 적자가 너무나 심했던 구엘 공원은 이후 손자들이 시에 기증하게 되면서 관람객들에게 개방되었다.





구엘 공원은 깨진 타일을 모자이크 형태로 붙이는 ‘트랜카디스 기법’으로 만들어졌다. 곡선을 포기할 수 없었던 가우디는 인체 공학적으로 만들어진 벤치를 중심으로 공원을 형성하였고 이국적인 공원을 중심으로 위, 아래, 양옆, 어디서 봐도 입체적인 십자가를 볼 수 있는 전망대까지 그야말로 유토피아를 연상케 하는 공원을 구성했다. 실제로 의자를 만들 때 마르지 않은 석고에 사람을 앉혀 틀을 만들었다고 한다. 그래서 엉덩이를 의자 끝까지 밀어 넣고 허리를 곧게 새우면 인체공학적으로 완벽하게 편안한 자세가 된다. 





3층의 공원을 중심으로 2층은 시장을 위한 공간으로 형성되었다. 도심과 거리가 꽤 멀기 때문에 주민들이 편하게 장을 보게끔 구성한 공간이다. 기둥선의 높이를 다 다르게 만들어 원근법을 파괴해 기둥 때문에 어지러운 현상을 최소화하였다. 어느 곳에서 바라보나 착시현상 덕분에 기둥선의 높이가 일정하다. 비가 오면 3층 공원에 깔린 흙바닥을 통해 비가 기둥 안 파이프로 걸러져서 물탱크로 이동해 식수로 사용하거나 1층에 있는 도마뱀 분수대로 이동해 물 순환이 이루어진다. 물 부족과 물 순환을 해결하면서 그와 동시에 기둥을 물탱크로 활용해 실용성과 심미성을 동시에 해결하였다. 1층에 있는 유명한 도마뱀 분수대 역시나 트랜카디스 기법으로 만들었고 실제로는 용 모양을 하고 있는 그리스로마신화 속 지하수의 정령을 상징한다. 도마뱀의 오른쪽 앞발을 만지면 부자가 된다는 속설 때문에 이곳에서 사진을 찍게 되면 단체사진으로 변해버리는 상황이 발생하지만 그래도 부자가 될 수 있다면, 단독 사진쯤은 포기하고 단체사진이라도 건지기를 추천한다.





구엘 공원 내의 많은 단점을 해결했음에도 많은 부자들의 입주 거부로 결국에 구엘 공원에는 가우디와 구엘, 구엘의 변호사 트리우스만이 살게 되었다. 변호사 트리우스의 가문만 지금까지 유일하게 이 공원에 무료로, 차를 갖고 24시간 내내 들어올 수 있는 가문이 되었다. 바르셀로나 시민들 역시나 무료로 구엘공원에 입장이 가능하지만 관람객은 입장권을 구매해야 한다. (위치는 바르셀로나 시내에서 조금 떨어진 Carrer d’Olot, 5, 08024 Barcelona Spain에 위치하고 있다. L3 Lesseps 역에서 도보로 17분, L4 Alfons X 역에서 유료 셔틀 버스로 15분이 소요되는데 입장권 지참 시 무료로 셔틀버스를 이용할 수 있다.)





구엘 공원에서 오랫동안 살게 된 가우디는 바르셀로나를 먹여 살리는 가우디의 걸작, 사그라다 파밀리아 성당의 설계를 맡게 된다. 처음부터 설계를 맡은 것은 아니었고, 건축학교 스승이었던 비야르로부터 1883년에 이어받아 성당을 설계했다. 가우디는 비야르가 설계했던 설계도를 모두 버리고 새로운 설계도를 제작했다. 성당건축위원회에서 완공을 재촉하자 가우디는 ‘제 고객은 신이고, 서두르지 않습니다.’라며 완공을 200년 뒤로 미뤘다. 가우디는 성당 지하에 거주하며 성당 건축에만 집중했으나 아직까지도 성당은 완공되지 않았고 여전히 공사가 진행 중이다. 성당의 중심부와 지하만 가우디가 직접 만들었으며, 원래는 설계도를 많이 남기지 않는 가우디인데 본인이 건축을 다 끝내지 못한다는 것을 알고 최대한 많은, 디테일한 설계도면을 남겼다고 한다. 교황청의 지원이나 연계된 수도원 없이 개인 기부금과 관람객들의 입장료로만 짓는 중이어서 예산 부족으로 건축을 한 번에 이어가지 못하고 아직까지 멈췄다 지었다를 반복 중이다. 





사그라다 파밀리아 성당은 탄생의 파사드, 수난의 파사드, 영광의 파사드로 이어진다. 탄생의 파사드는 가장 정면에 위치해 예수의 탄생, 유년기, 청년기를 상징하는 조각들로 장식되어 있고 가브리엘 천사가 마리아를 찾아오는 수태고지 장면, 마구간에서 탄생하는 예수의 모습, 동방박사와 목동의 이야기 등이 조각으로 장식되어 있다. 많은 조각들이 석고를 직접 떠서 떼어냈기 때문에 조각 모두가 생생하다. 관람객들의 출구 방면에 위치한 수난의 파사드는 예수의 죽음과 부활이 조각되어 있다. 수난의 파사드는 가우디의 손을 거치지 않은 부분이기 때문에 조각 스타일이 가우디와 다르다. 곡선을 사랑하는 가우디에 비해 다른 사람이 조각한 것들은 직선을 많이 띄고 어딘가 모르게 이질감이 든다. 영광의 파사드는 현재 공사 중으로 예상 모습을 성당 내부에서 3D로 만나볼 수 있지만 아직은 바람일 뿐이다. 2026년을 완공 목표로 잡았으나 코로나 때문에 이마저도 불확실해졌다. 향후 사그라다 파밀리아 성당의 메인 출입구가 될 영광의 파사드는 남쪽 면에 접해 있는 일반 상가 건물을 모두 철거하고 공원으로 조성될 예정이다.






예배당 내부는 스테인드글라스를 통해 무지개의 빛이 들어온다. 종교가 없는 나도 무언가가 있다고 믿게 될 만큼 정교하고 아름답다. 동쪽의 푸른 스테인드글라스는 희망, 탄생을 의미하며 서쪽의 붉은 스테인드글라스는 죽음 순교를 의미한다고 한다. 




Carrer de Mallorca, 401, 08013, Barcelona Spain



하나하나 꼼꼼하게 사그라다 파밀리아 성당에 여생을 투자했던 가우디는 너무나도 애석하게 세상을 떠났다. 가우디는 구엘 공원에서 오랫동안 살다가 성당 건축을 맡자 가방 하나만 들고 공사장으로 와서 여생을 보냈다. 어릴 때부터 몸이 약했던 가우디는 새벽 기도와 건축을 끝낸  오후에는 고딕 지구를 매일 산책했다. 가우디는 평소와 다름없이 산책을 했으나 그날따라 그의 머릿속에 많은 생각이 떠올랐을지도 모른다. 가우디는 자기를 향해 달려오는 전차를 스치듯 피했으나 반대쪽에서 빠르게 달려오는 전차는 피할 수 없었다. 전차 기관사는 가우디의 행색을 보고 그를 인도로 치운 후 전차를 계속 몰았다. 가우디를 노숙자라고 생각했던 사람들은 병원으로 데려가기 위해 택시를 불렀으나 초라한 가우디의 모습에 택시는 승차를 거부했고 결국 경찰의 도움으로 병원에 이송되었다. 병원에서도 신원미상으로 빠른 진료가 이뤄지지 않았고 한동안 방치되다가 가우디를 찾던 동료들에 의해 신원이 확인되어 그제야 좋은 병원으로 이송하려 했으나 가우디 본인의 반대로 인해 결국 3일 뒤 세상을 떠났다. 사그라다 파밀리아 성당을 만드는 가우디라고 본인을 소개했더라면 빠르게 치료를 받을 수 있었을 것이고 병원 또한 노숙자 치료를 전담하던 병원이 아닌 좋은 병원에서 치료를 받았을 지도 모른다. 마치 신의 뜻인 듯 그는 사람의 권위에 상관없이 그 누구와 다르지 않게 세상을 떠났다.


가우디는 생전 유언을 딱 두 가지 남겼다. 첫 번째는 자신의 전 재산을 사그라다 파밀리아에 기부해달라는 것이었고, 두 번째는 자신의 장례식을 작게 열어 달라는 것이었다. 두 번째 유언은 지켜지지 못했고, 가우디를 사랑했던 바르셀로나 시민들은 대성당에서부터 사그라다 파밀리아 성당까지 3.2킬로의 행렬을 이뤄 모두가 가우디를 추모했다. 






평생을 건축에 몰두했던 가우디는 애석하지만 일반 사람들과 똑같이 죽음을 맞이했다. 그가 살던 시절에 그의 건물들은 평생 놀림거리였고 많은 사람들의 비난을 받았지만, 지금은 바르셀로나에서 가장 화려하고 아름다운 건물을 지어낸 가우디로 기억된다. 사그라다 파밀리아 성당의 완공 모습을 다시 보기 위해서라도 꼭 방문해야 하는 바르셀로나는 특히나 여름에 방문해 뜨거운 여름을 맘껏 즐기고, 가우디의 건축물 이외에도 즐길 것, 먹을 것, 느낄 것이 풍부한 이곳을 방문해 보길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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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umin_ol_글로 기록을 남기고 그림으로 기억합니다. 독일에서 활동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