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으로만 보시오”
“만지지 마시오”
미술관 내 오래된 암묵적 규율이다.
이번 아트선재센터 «미니멀리즘-맥시멀리즘-메커니즈즈즘»의 3막과 4막 전시에선 이 규율이 적용되지 않는다. 대다수의 작업은 관객의 참여를 유도하며, 관객이 ‘몸’으로 가까이 다가와 작업을 만지도록 유도한다.
작품과의 거리를 좁혀 직접 만지는 행위를 통해 작품과 관객은 진정 가까워질 수 있을까?
전시에 동행한 필자의 지인은 비-미술 전공자로, 이러한 관객 참여형 전시에 대한 경험이 전무했다. 전시장에는 많은 사람이 있었다. 어떤 이는 작가가 제시한 프로젝트에 참여하며 꽤 전시를 즐기는 듯했다. 다만 지인을 포함해 몇몇 이들은 무엇을 어떻게 감상해야 할지 주저하며 설명문만 들여다보았다. 관객과의 상호작용을 위한 전시 방식이 되레 벽이 된 거다. 이럴 때면 미술에 대한 배경지식 없이 현대미술을 오롯이 감상하고 향유하는 게 가능한 일인지 의심된다.
“아트선재센터는 야콥 파브리시우스가 총 네 막으로 구분하여 개념화한 전시 «미니멀리즘-맥시멀리즘-메커니즈즈즘»의 3막과 4막을 3월 17일부터 4월 24일까지 개최한다 ... 3막과 4막은 관객이 자신의 신체를 사용해 작품과 상호작용하며 전시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도록 이끈다. 3막에서 관객은 미술 작업을 공유하고 누리며 소비하게 된다. 여기서 관객은 서로의 경험을 공유하는데, 이를 통해 작업, 작가, 그리고 다른 관객들과 다양한 관계를 형성한다.” 출처: 아트선재센터 홈페이지
전시포스터
‘관객’, ‘신체’, ‘상호작용’, ‘참여’, ‘관계’. 이와 같은 키워드는 90년대 이후 미술계에 크게 대두되었다. 베를린 장벽 붕괴와 소련의 해체 이후 지구는 신자유주의 경제체제 아래에 일원화됐다. 이는 미술계에도 큰 영향을 주었다. 많은 작가가 미술의 상품화를 비판하며 소위 팔릴 수 있는 회화나 조각 같은 오브제로서의 작품이 아닌, 퍼포먼스와 같은 비물질적 작품을 제작한다. 또한 자본주의 사회의 인간 소외를 직면하며 새로운 사회적 관계, 공동체를 형성하는 작업이 등장한다. 이러한 흐름을 2000년대 니콜라 부리오는 “관계 미술”이라 규정했으며, 이런 작품들은 맥락에 따라 참여 미술, 관객 참여형 예술, 사회 참여적 예술 등으로 불리기도 한다.
포스트모더니즘 이전의 서구사회에서 ‘시각’은 가장 주요한 감각이었고, 감상 행위는 거리를 두고 관조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오늘날 많은 작업은 시각이 아닌 촉각, 후각, 청각 등 신체의 여러 감각을 전시장 내에 도입한다. 관계미술 작업에서 관객의 감상은 관조가 아닌 신체를 사용한 작품과의 상호작용, 더 나아가 적극적인 참여로 이어진다. 관객은 참여를 통해 작품의 수동적 수용자에서 능동적 참여자이자 작품의 제작자가 되기도 한다. 미술관 내에는 관객들의 적극적 행위를 통해 다양한 형태의 관계들이 쌓이며, 전시장은 관객의 행위, 대화, 관계 등 보이지 않는 비물질들로 채워진다.
«미니멀리즘-맥시멀리즘-메커니즈즈즘» 전시장 4층에 설치된 알리 카짐의 <봉헌된 오브제>는 관객들의 적극적 참여로 이뤄진다. 전시장에 들어서면 마치 물류창고와 같은 풍경이 펼쳐진다. 선반 위에 종이상자가 나열돼 있고, 상자엔 작가가 만들고 수집한 오브제가 들어있다. 관객들은 열어보고 싶은 상자를 작가가 설치해둔 책상 위에서 마음껏 열 수 있다. 상자가 열리며 오브제가 나타나는 그 모습은 설치된 카메라로 녹화되며 3층 전시장에 실시간으로 송출된다. 관객은 작품을 직접 움직이고 손으로 만지며 적극적 참여자인 동시에 작품을 완성 시키는 창작자가 된다. 즉 관객의 참여 없이 이 작업은 구현될 수 없다. 이때 작업에서 무엇이 ‘작품’이 되는지 규정하기 어렵다. 상자 속 오브제, 관객의 움직임, 오브제를 보고 관객들이 떠올린 생각, 전시장을 메우는 대화, 카메라로 송출되는 시시각각 변하는 영상 등 작품의 형태는 끝없이 확장되며 예측이 불가하다.
롤랑 바르트의 저자의 죽음 이후 예술에선 관객의 역할론에 대한 새로운 논의는 계속돼 왔다. 동시대 미술에서 작품의 의미는 고정불변한 진리가 아니며 개인에 따라 끊임없이 재구성될 수 있다. 전시를 본 필자의 지인은 작가의 의도와 작품의 의미를 찾고자 노력하다 결국 아무것도 얻지 못했다 말했다. 오늘날의 미술은 고급 예술의 경계를 허물며 일상으로, 놀이로, 관객에게 가까이 다가온다. 그러나 동시대 미술이 우리의 일상과 가까워지며 그 경계가 모호해질수록, 어쩌면 미술과 비-미술 전공자들 사이의 거리는 더 멀어지기도 한다. 주체성을 지닌 관객이 된다는 건, 어쩌면 작가가 이미 설정해 둔 프로젝트 안에 참여자가 되는 것만을 의미하진 않는다. 때에 따라 작품과 거리를 두며, 또 다가갈 수도 있을 때 비로소 우리에게 예술은 놀이가 된다. / 글.박소현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