팬톤(Pantone)에서는 매년 ‘올해의 색’을 발표한다. 올해는 클래식 블루(Classic Blue, 19-4052)가 선정되었다. ‘해 질 무렵의 어둑한 하늘을 암시하는 컬러는 새로운 시대로 접어들면서 안정적인 기반을 만들고자 하는 우리의 염원을 내비친다’는 것이 그 선정 이유이다. 팬톤은 2000년부터 올해의 색을 지정하기 시작했는데, 팬톤이 처음 선정한 색 또한 블루 계열의 세루리안 블루(Cerulean Blue, 15-4020)였다.
파란색은 전 세계적으로 인기가 많다. 하지만 색 중에 가장 미스터리하고 불명확한 역사를 가진 색 또한 파란색이다. 역사학자 미셸 파스투로(Michel Pastoureau)의 저서 ‘파랑의 역사’에 따르면 파란색은 원래 그 색도, 그 색을 지칭하는 명확한 단어조차 없던 미지의 색이었다. 지금은 빛의 3원색에 파란색이 포함되어있지만, 고대에는 적색, 흰색, 검은색만이 기본색으로 알려져 있었다. 몇 년 년이 흐른 후 염색 기술의 발전과 미술의 발달로 파란색은 점점 더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파란색이 사람들의 눈에 들어오기 시작한 건 12세기부터였다. 특히나 예술 분야에 파란색이 많이 쓰이며 더 인기를 얻기 시작했는데, 그 이전에는 큰 비중이 없는 모자이크나 배경에만 사용되다가 12세기부터는 중요한 색으로 떠올랐다. 현재는 성모 마리아의 상징색으로도 잘 알려져 있지만, 12세기 이전에는 검은색, 보라색, 회색 등 어두운 계열의 색이 성모 마리아의 의복 색으로 쓰였다. 당시에는 청색이 중요한 게 아니라 십자가 위에서 생을 마감한 아들에 대한 비탄함을 잘 표현하는 어두운색이면 충분했기 때문이다. 그리스 로마 시대 사람들은 상복으로 짙은 청색을 입었기 때문에 성모 마리아의 그림에 청색이 쓰이기 시작한 게 어색하지 않다.
염색업과 원료의 발달로 성모 마리아의 청색은 더 밝고, 선명한 색으로 이어졌다. 곧 청색은 성모 마리아와 동일시되며 신앙에 대한 숭고한 숭배를 받게 된다.

La Belle-Verrière
출처: Notre-Dame
de la Belle Verrière wikipedia
하지만 아무리 염색기술이 발달한다고 해도, 당시에 청색을 쉽게 얻을 수는 없었다. 청색이 유행하던 13세기에는 아직 인디고가 수입되지 않았는데 때문에 청색 염색을 위한 대청(Isatis tinctoria) 재배가 인기를 끌었다. 대청 잎을 빻은 다음 2~3주간 발효를 시켜야 고른 반죽을 얻게 되고 이 반죽을 호두 크기로 만든 후 말려, 대청 상인에게 팔아야 했다. 말린 대청을 이용해 파란색을 띠는 염료를
만드는 것은 대청 상인의 몫이었는데, 발효된 상태라 냄새가 심하고 손과 옷이 더러워지기 일쑤였다. 이러한 까다로운 작업 때문에 대청 염료는 굉장히 값비싸게 거래가 되곤 했다.
하지만 그마저도 서인도와 아프리카에서 들어오기 시작한 인디고 때문에 가격이 점점 내려가게 되고 만다.
16세기와 17세기에 각각 활동했던 알브레히트 뒤러(Albrecht Dürer)와
요하네스 페르메이르(Johannes Vermeer)는 청색 원료를 사용하기 위해 황금보다 비싼 값을
지불하기도 했다. 특히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로 유명한 페르메이르는 라피스라줄리(변성암의 일종, 푸른색 염료의 값비싼 원료로 유명)를 많이 사용하기도 했고, 밑그림에는 남동석(azurite)이나 산화코발트(smalt)를 사용했으며 아주 드물게 인디고를 사용하기도 했다. 이렇듯
청색 원료를 세심하게 사용했던 그는 그 당시 ‘청색의 화가’라고
불릴 만큼 그 원료를 아주 잘 다루는 예술가로도 알려져 있다. 그뿐만 아니라 페르메이르는 이런 원료를
구매하기 위해 어마어마한 돈을 써 힘들어하기도 했다고 한다.
물주전자를
든 젊은 여인(Young woman with a water pitcher, 1662~1665),
Johannes
Vermeer
피카소(Pablo
Ruiz Picasso, 1881~1973) 또한 원체
색으로부터 자유로운 예술가였지만, 평론가들은 그가 세상을 떠난 후 그가 활동했던 시기를 색으로 구분해놓았다. 특히 1901년에서 1904년을
‘피카소 청색의 시대’라고 말하는데, 그 시기에 주로 검푸른 색이나 청색을 띤 색을 많이 사용했기 때문이다. 청색의
시대 중 제일 유명한 그의 그림은 ‘압생트를 마시는 사람(Portrait
of Angel Fernández de Soto, 1903)’이다.
출처:
Christie’s
그 시기에
피카소가 겪었던 우울감이 청색을 통해 잘 드러났다. 당시 그는 슬픔을 표현하기 위해서 청색을 사용했을지
몰라도, 훗날 평론가나 감상자들에 의해 우울한 청색이 아닌 ‘새로운
시작의 블루’로 재평가되기도 했다. 피카소뿐만 아니라 마르크
샤갈(Marc Zakharovich Chagall), 1900년대 초반에 등장한 파란색의 대표 예술가 이브 클라인(Yves
Klein)’도 파란색을 사랑한 예술가로 유명하다. 작가마다 파란색을 예술에 쓰는 이유는
각기 다르겠지만, 그림에 담기는 파란색은 유독 그만이 가지는 특별함이 있다.
2020년이 거의 마무리 되어 가지만, 다사다난했던 올해를 다시 돌이켜보면 팬톤이 클래식 블루를 선정한 이유를 우리는 여러모로 가슴에 되새길 필요가
있다.
‘해 질 무렵의 어둑한 하늘을 암시하는 색. 새로운 시대로 접어들면서 안정적인 기반을 만들고자 하는 우리의 염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