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루야, 전쟁 중 피난 내려온 것 같았던 베란다를 정리했단다. 마치 만물상 같더구나. 온갖 게 쏟아져 나왔어. 낡은 석유램프, 10년도 더 지난 바캉스용 그늘막, 솜 방석, 각종 전기 콘센트, 안마 매트, 구멍이 숭숭 난 모기장, 어릴 적 블록 세트, 빨래집게 다발까지 정말 없는 게 없더구나. 전투를 치른 병사처럼 팔뚝에, 다리에 몇 개의 생채기를 낸 연후에야 일이 끝났어. 작은 건 아파트 재활용 수거함에 넣고, 큰 건 딱지 붙여 내놓은 다음 손을 털고 집에 들어왔어. 거실엔 얌전히 상자 한 박스가 놓여 있겠지. 정리하다 무얼까 싶어 따로 분류해 놓았던 거야.
열어보고 놀랐단다. 네게 있는 참 좋은 습관이라고 생각은 했지만 이렇게 다시 읽어보니 기억이 새롭더라. 우리가 갔던 프랑스 오르쉐 미술관이나 몽마르트르 언덕, 피카소의 집, 프라하의 카프카 박물관, 500년 묵은 위엄 있는 고성(古城)들, 나라의 운명을 걱정하는 성자들의 카를 다리, 그 아래 슬픈 몰다우 강, 이탈리아의 석양에 잠긴 와이너리, 제단 앞에 서면 저절로 개종할 것 같은 베드로 성당과 그 조각품들이 엽서에 모두 담겨 있었어. 네가 그곳들을 다녀올 때마다 너 자신에게 엽서를 띄운다고 했지. 여행을 마치고 집에 돌아가면 네가 걸었던 길 위의 시간들이 다시 널 기다리고 있어 줄 거라고. 그건 또 다른 추억이라고 말이야.
느루가 기념품 가게에서 그곳의 엽서를 사, 때마다의 느낌과 감상을 너 자신에게 적어 보낼 때, 엄마는 도판에 나온 그림을 실제로 본다는 감격에만 젖어 있었던 것이 아쉽구나. 네가 보냈던 엽서엔 노을 속을 달리는 산 마르코 성당의 황금사자와 2017년 세모(歲暮)의 베네치아 바다가 출렁이고 있어. 베네치아는 인간의 이성이 감당하기에는 너무 위대하고, 인간의 감정이 표현하기에는 너무 거룩한 정신이 담겨있는 곳이지. 출렁거리던 바다의 맥박과 2018년을 맞아 새로운 일을 시작하려던 우리의 두근대는 심장소리가 파도에 밀려오는구나! 영국의 풍경화가 윌리엄 터너가 베네치아의 하늘과 바다와 햇빛을 차곡차곡 여행 가방에 담아온 것처럼 그때의 설레던 우리 모습이 고스란히 담겨있어.
2년이 지난 지금, 2017년 12월 마지막 날을 기억하니? 일주일 째 식염수로 버티고 있는 네 눈을 잠시 컴퓨터에서 돌려 이 하늘을 보렴. 너, 이 그림 본 적 있니? |

윌리엄 터너 <베네치아, 그랜드 카날, 1835>
이마를 살짝 찌푸려 눈을 가늘게 뜨고 그림의 중앙을 바라봐. 눈 맛이 시원하고 시야가 점점 뒤로 물러나 앞이 아득해지지. 싸리 빗자루에 구름을 찍어 한바탕 하늘을 쓴 듯, 푸른 하늘엔 얇게 빗금 친 구름이 가득해. 빗자루에 남은 흰 구름으로 바다 위에 건물을 올렸을까? 뭉게구름같이 크고 작은 건물들이 물 위에 둥실 떠 있어. 진흙과 모래 위에 오리나무 기둥을 박아 넣고 점토를 부어 단단히 굳힌 다음 석회암 판들을 깔아 건설한 물의 도시 베네치아야. 구름과 구름 사이의 바다엔 제 그림자를 안은 배가 떠 있고 배의 높은 돛대엔 도시를 건설한 강인한 로마 선원들의 노랫소리가 들리지. 하늘과 바다와 선원들의 강철로 만든 노래를 그린 조지프 말로드 윌리엄 터너(Joseph Mallord William Turner, 1775~1851)의 <베네치아, 그랜드 카날, 1835>이야.
터너는 구석구석 누빈 베네치아를 스케치 북에 싣고 영국에 돌아와서는 캔버스에 옮겼어. 그의 캔버스에는 신화와 전설을 품은 베네치아의 배가 먼 미래의 땅으로 항해했지. 중세 천년 동안, 수도사들은 돌로 만든 고딕 성당 안에서 검은 잉크와 굳건한 신앙으로 하늘과 땅의 일들을 꼼꼼히 필사했어. 바랜 양피지에는 피가 흐르지 않는, 신과 자연과 인간의 이야기들이 박제되었지. 그런 중세의 수도사들처럼 그동안의 화가들은 베네치아의 광활한 하늘과 바다를 딱딱하고 물리적인 사물로 캔버스에 복제했어.
하지만 터너는 달랐어. 두레박을 던져 바다를 뜨지 않고 그 안의 부드러움과 투명함과 맑음을 길어 올렸지. 그는 물을 잔뜩 먹인 캔버스 위에 수채 물감을 뚝뚝 떨어뜨려 캔버스에 자연의 말이 번지게 했어. 스피커를 두지 않아도 모든 사람의 가슴을 울리는 터너의 언어는 그를 일약 풍경화의 대가로 만들었어. 그리고 그 풍경화는 근대가 지향하는 '숭고함'을 담고 있었지. 그는 '숭고한 풍경'을 그릴 줄 아는 화가였어.
카날레토 <대운하에서 바라본 카니발>
이 그림도 소개할게. 이 작품은 베네치아 출신의 화가, 조반니 안토니오 카날(Giovanni Antonio Canal, 1697~1768)이 그린 <대운하에서 바라본 카니발>이란 작품이야. 터너보다 두 세대 앞 선 그는 베네치아를 그린 풍경화로 국제적 명성을 얻은 인물이지. 사람들은 그를' 카날레토'라고 불렀어. 그의 아버지는 연극 무대그림을 그렸던 분이야. 아버지의 영향 때문이었는지 카날레토는 무대그림과 같이 원근법을 기반으로 한 사실적인 풍경화를 그렸고 사람들은 다투어 그에게 그림을 주문했지. 그런 경향에는 당시의 문화가 한 몫했어.
원래 유럽은 수세기에 걸친 종교전쟁으로 나라 간 여행이 쉽지 않았단다. 귀족들은 외국에 나가 문물을 익히기보다 개인교사를 두어 정치, 사회, 경제, 예술 등을 공부했지. 그런데 17세기 후반에 이르러 종교 갈등이 누그러지고 경제적 안정이 더해졌어. 특히나 1688년 명예혁명으로 다른 나라보다 빠른 정치적 안정과 경제를 부흥시킬 수 있었던 영국이 중심이 되어 '그랑 투어'라는 것이 정착했구나. 그랑 투어는 유럽 문화의 뿌리인 그리스에서 철학과 문학을 공부하고, 프랑스에서 귀족의 예법을 익히고, 이탈리아 로마를 돌아보며 유적과 문물을 익히는 고급스러운 여행을 말해. 그들은 이탈리아의 곳곳을 탐색했지. 그리고 고국으로 돌아갈 때 이탈리아를 방문한 '인증샷'을 남기고 싶어 했어. 카날레토는 그 '인증샷'을 가장 훌륭하고 멋스럽게 그려내는 화가였어. 어딘가에 도착했을 때, 그곳을 상징하는 그림엽서처럼 카날레토의 그림은 베네치아의 풍광을 사실적이고 감미롭게 표현했단다.
이제 두 그림을 비교해 봐. 카날레토의 그림은 윌리엄 터너의 그림과 극명하게 다르지. '어느 것이 더 낫다'라는 의미를 넘어 풍경의 표현 기법이 완전히 상반된다는 의미야. 두 그림 모두 베네치아의 하늘과 바다와 건물과 바다 위의 배들을 그렸는데 카날레토의 그림은 기록화처럼 철저하고 치밀하게 재현해 내. 사람 하나하나의 옷차림까지 무심히 넘기지 않았어. 하지만 터너의 그림은 몽환적인 연무로 가득하지. 대기가 빛과 수증기에 의해 섞이고 스며 마치 살아 움직이는 듯해. 그는 사실을 그리지 않고 빛의 율동을 그렸거든. 그랑 투어의 인증샷에 불과했던 베네치아의 하늘과 바다는 터너에 의해 비로소 바다 자신의 웅혼하고 신비로운 모습으로 돌아왔단다.
“터너 이전에는 런던에 안개가 없었다.”는 오스카 와일드의 말처럼 이런 숭고하고 낭만적인 자연을 그릴 수 있었던 윌리엄 터너는 어떤 사람일까?
(왼) 윌리엄 터너 <북서쪽에서 본 래들리 홀, 1789 / (오) 윌리엄 터너 <돌바던 성, 1800>
윌리엄 터너는 1775년 4월 23일 영국 런던의 코벤트 가든에서 태어났어. 아버지는 이발사였고 정신이상 증세를 보이는 어머니가 계셨지. 그는 귀족도 부르주아도 아닌 사회의 노동계층이었어. 그를 그의 계급과 다르게 구별한 유일한 점은 그가 귀족들의 교양인 '회화'에 대해 천재적인 솜씨를 가졌다는 점뿐이야.
어린 시절, 지저분했던 빈자(貧者)의 도시에 역병이 돌았어. 터너의 어린 누이가 죽었지. 그는 역병을 피해 열 살 때 삼촌에게 맡겨졌고 템즈 강이 바라보이던 그곳, 브렌트퍼드에서 강물의 질감을 스케치하기 시작했어. 두드러진 재능에 대한 소문은 바람보다 빨리 도시를 건넜고, 그가 열네 살인 1789년, 왕립 아카데미에 입학할 수 있었어. 그리고 다음 해에 수채화 전시회를 열었지. 얼마 후 그는 여름엔 화구를 챙겨 유럽 각지로 여행을 떠나고 가을에 돌아와 긴 겨울 동안 그림을 그렸어. 느루의 엽서처럼 자신의 발자국을 그림으로 기록한 거지. 사실에 기초한 데생과 치밀한 관찰은 평생 동안 그가 관철했던 자신의 예술세계야. 또 그는 수채화에 대한 애정이 많아 유화 작업을 하면서도 수채화의 맑고 투명한 효과를 내려 노력했어.
왼쪽 그림을 보겠니? 그가 열네 살에 수채화로 작업한 <북서쪽에서 본 래들리 홀, 1789>이야. 이즈음 영국은 미국과의 독립전쟁에서 패했고, 바다 건너 프랑스의 시민혁명도 두통거리였지. 사람들은 불온하고 골치 아픈 그림보다 편안한 전원 풍경화를 선호했어. 게다가 전통적인 귀족이건 신흥 부르주아건 자신이 이룬 부(富)를 대변하는 저택을 품위 있고 고상하게 그려 벽에 걸고 싶어 했지. 그는 후원자들의 요구에 충실했고 그의 그림엔 고풍스러운 저택과 드넓은 정원을 뛰노는 사슴, 짙푸른 숲이 등장했어. 젊은 시절 터너는 돈이 되는 풍경화에 몰두했어. 그런데 여행을 통해 자연을 접한 탓일까? 얼마 지나지 않아 그의 그림에 변화가 생겨.
오른쪽 그림을 보자. 1800년에 그린 <돌바던 성, 1800>이야. 화면 가득 신비스러운 분위기가 풍기지. 마치 반지의 제왕에 나오는 모르도르처럼 스산하지만 범접할 수 없는 아우라가 느껴지지 않니? 돌바던 성 뒤로는 금빛 광채가 휘황해. 그의 시선은 휘황한 빛의 그림자에 집중하지. 그 그림자는 쇠락하고 무너져가는 성(城)이 홀로 지나온 시간의 풍파야. 그는 사람의 자취가 없는 곳, 박쥐가 나오는 동굴이나 폭풍이 휘몰아치는 바다, 무지개가 상서롭게 건너는 호수를 그리기 시작했어. 그의 그림은 신비롭고 어둡고 비극적인 한 편의 연극이지.
윌리엄 터너 <희미하게 보이는 말 위의 죽음, 1825>
우린 밝고 선명하고 보드라운 그림을 좋아해. 이렇게 음울한 그림은 보고 싶어 하지 않아. 하지만 본질을 들여다보게 하는 그림은 정신을 고양시키고 마음을 정결하게 세탁해 준단다. 고통의 크기가 영혼의 크기를 성장시킨다는 말, 들어보았을 거야. 자세히 보자.
느루야, <희미하게 보이는 말 위의 죽음, 1825>이야. 검은 죽음에 결박당한 무기력한 붉은 뼈들이 보여. 등에 해골을 싣고 어디론가 달리는 말의 다리는 보이지 않는구나. 방향도 목적지도 안개에 싸여 있어. 환상 속 죽음을 향해 달리는 말발굽 소리만이 허공에 메아리치며 우리의 가슴을 두드리지. 마치 우리의 존재가 저 말 등에 타고 있는 것처럼 불안하고 음습하고 서늘한 기운이 우리의 목덜미를 스쳐 지나가.
이 그림은 터너가 오십 즈음, 친구와 후원자 그리고 아버지의 죽음이 차례로 터너를 찾아올 때 그린 그림이야. 터너는 평생 아버지를 사랑하고 의지했어. 그는 가난한 어린 시절 때문이었는지 돈과 정(情)에 인색했어. 하지만 아버지에 대한 사랑만큼은 조금도 부족함이 없었지. 일찍 그의 재능을 알아보고 한결같이 그를 격려했던 아버지는 아들이 화가로 대성하자, 아들의 갤러리를 돌보고 화상을 접대하는 일을 맡아보셨어. 터너가 먼 여행을 다녀오는 동안 살림을 맡아 주시기도 했지. 아마 터너가 응석을 부릴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사람이었을 거야. 그런 아버지가 날로 쇠약해져 1829년 사망했어. 이때 터너의 건강 또한 악화 일로였지. 터너는 이즈음부터 천식과 관절염이 급격히 심해졌고 죽음에 대해 깊이 생각하게 되었어.
아버지의 죽음 이후 말년으로 갈수록 터너의 대인기피는 심해졌어. 하지만 붓은 쉬지 않았지. 그는 개인의 삶과 죽음뿐만 아니라 사회의 삶과 죽음에 대한 서사(敍事)를 그리고 싶어 했어.
윌리엄 터너 <불타는 국회 의사당, 1835>
1834년 10월 16일 영국 국회 의사당에 화재가 났어. 시커먼 연기가 화산재처럼 날리고 밤이 낮처럼 환해졌어. 하늘엔 불기둥이 치솟고 템즈 강은 석양이 엎어진 듯 주홍빛으로 물들었지. 터너는 템즈강에 배를 띄우고 불의 너울을 관찰했어. 날름거리는 불의 혀 사이로 몇 개의 건물이 보였고, 강기슭에 몰려든 수백수천의 군중들과 매어놓은 배와 뗏목들이 불빛을 받아 어른거렸지. 터너는 직관적으로 누가 주인공인지 깨달았어. 수없이 모인 군중, 바싹 타고 있는 국회의사당, 용광로와 같은 뜨거움에 무너져 내린 다리는 '한 줄의 역사적 사실'이었지. 하지만 타오르는 불꽃은 과거를 태우고 새로운 시대를 기록할 '예언서'였어.
그 날의 화염은 '국가'와 '발전'이라는 이름 아래, 피와 고름의 제국주의를 태운 불꽃이었지. 19세기를 흔든 제국주의는 어리고 약한 이들을 착취하는 사회적 불평등을 방기(放棄)하고, 인종차별에 근거한 노예를 묵인하고, 타국에 대한 침략을 정당화했어. 진보주의자들은 국회의사당의 화재가 부패한 제단 위에 떨어진 불의 심판이라고 떠들었어. 배 위에서 스케치를 마친 터너는 일 년 뒤, 생생했던 그날 밤의 불꽃을 캔버스 위에 되살렸단다. 그 불꽃은 활활 타올라 추상회화의 배아(胚芽)가 되었고, 기존의 역사화에서는 볼 수 없었던 군중들은 근대회화의 시작을 알리는 봉화주자가 되었지.
하지만 스스로의 예술세계가 확립되는 것과는 반대로 세간의 혹평은 갈수록 심해졌어. 날 선 비평가들과 부정적인 세평을 벗어나 그는 다시 유럽의 대지로, 베네치아의 바다로 떠났어. 공기처럼 훨훨 날아 하늘과 바닷속을 인어처럼 자맥질하고 싶었던가 봐. 젊은 시절 돈이 되는 전원 풍경화에 몰두했던 그는, 어느 순간 자유롭고 형태가 무궁한 자신의 세계를 추구했지. <바다에서의 재난, 1835>이나 <스파타 섬의 핑걸 동굴, 1832>, <전함 테메레르호, 1839>등이 이때 만들어진 걸작들이야.
(왼) 에드윈 랜시어 <배심원 재판, 1840> / (오) 윌리엄 터너 <노예선, 1840>
1840년, 터너는 당대 영국의 미술계에서는 찬란한 재능이 사그라든, 한물 간 화가로 치부되었어. 왼쪽 그림은 그 해 5월 제72회 영국 왕립 아카데미 전시가 열렸을 때, 에드윈 랜시어가 출품한 <배심원 재판, 1840>이라는 작품이야. 이 아카데미 전시에 윌리엄 터너는 <노예선, 1840>을 출품했지. <노예선>은 지난번 설명해 주어 기억할 거야. 전시회를 방문한 빅토리아 여왕은 터너의 작품엔 발걸음도 하지 않았다고 해. 왕립 아카데미의 원근법 교수였던 터너가 결국은 망령이 났다거나 솜씨가 어린아이 같아졌다거나, 미쳤다거나 하는 평이 그의 작품보다 더 높이 걸렸거든. 개를 좋아하는 여왕의 전폭적인 지원과 총애는 에드윈 랜시어에게 돌아갔어. 영국의 회화는 케이지 속에서 완벽했어.
이제 모두들 그는 끝난 화가라고 했지. 그의 노예선은 바다에 침몰했구나. 몸뚱이가 파도와 상어에 찢겨 팔과 다리가 둥둥 떠 있는 물결 높은 바다에 그의 노예선이 가라앉기 직전, 존 러스킨이라는 청년이 밧줄을 던졌어. 존 러스킨(John Ruskin, 1819~1900)은 빅토리아 시대의 화가이자 사회운동가이며 예술 비평가였지. 그는 터너의 작품을 옹호하는 <근대 화가론>이라는 책으로 침몰하는 노예선을 간신히 끌어올렸어. 그리고 밧줄을 쥔 손바닥에 흥건한 땀을 닦으며 이렇게 말했지. "그의 그림은 마치 맹인이 새로운 시력을 얻고 나서 처음 보는 세상과 같다."
터너는 1838년 교수직을 그만두고 이듬해, 첼시에 작은 별장을 구입하고는 '부스'라는 이름으로 칩거해. 그는 평생 내성적이면서 외향적인 양쪽의 성격을 오락가락했어. 자신과 아버지 외의 여타 사람을 믿지 않았으면서도 세 명의 여인과 두 딸을 두었지. 조수나 제자는 물론 없었어. 봄과 여름엔 여행하고 가을과 겨울엔 관찰과 경험의 조각들을 모아 퍼즐처럼 작품을 완성했어. 그는 폭발적인 빛 다발로 색에게 자유를 선사했고 시작과 끝의 경계를 허물어 형태를 증발시켰지. 호기심 많은 화가들은 그의 그림에서 인상주의와 추상주의의 모티브를 얻었어. 그는 새로운 근대 회화의 마중물이었지. 하층민이었음에도 자신의 재능만으로 서른두 살, 왕립 아카데미 정회원이 되었고 영국 미술사에 근대적 회화를 도입했던 터너는 1851년,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게 조용히 눈을 감았어. 나중 영국은 '터너상'을 제정해 그의 놀라운 업적을 기리고 국민작가로서 추앙하게 돼.
윌리엄 터너 <난파 뒤의 새벽, 1841>
느루야, 며칠 째 잠 못 이루고 있지? 수정사항이 표시된 논문을 매일 밤 고쳐 쓰며 너 자신의 능력에 대해 의심하고 있지? 긴장하면 안구건조증이 심해지는 네가 벌써 점안액을 다 썼다는 말을 듣고 '마음속이 전쟁이겠구나' 짐작하고 있단다. 아침에 일어났을 때 새벽에 걸려 온 너의 부재 중 전화를 보면 너무 걱정이 돼. "난 여기까진가 봐." 했던 말이 늘 엄마의 마음을 아프게 하고. 그래, 한계에 부딪쳤을 때 자신을 바라보는 일은 고통스럽지. 위로랍시고 "잘할 수 있어."라든가 "누구나 그래."라는 뻔한 말을 하고 싶지 않아. 엄만 그저 네 옆에 있을거라는 말을 하고 싶다. 네가 자신의 초라함을 견딜 때도, 그런 스스로를 독려해 앞으로 걸어나갈 때도 언제나 곁에 있을거야. 터너의 아버지가 마지막까지 터너의 힘이 되었듯이.
느루야, 베네치아 외곽 숙소의 석탄 난로 기억나니? 넉넉치 않은 여행 경비로 인해 에어비앤비를 통해 구한 허름한 방이었지. 복도 끝에 석탄 난로가 있고 기다란 연통이 천정을 가로질러 공기를 덥혔지. 우린 방이 너무 추워 난로 앞 의자에 앉아 양말을 말리며 싸구려 와인을 마셨어. 불꽃이 탁탁 튀기는 유리창 너머로 새벽이 왔지. 오늘이 드디어 2017년 12월 31일이라고, 마지막 남은 하루, 새해의 기원을 담아보자고 했어. 엄만 막 항암(斻癌)이 끝났고 직장에 사직서를 냈던 때였어. 넌 혼자 낯선 네덜란드에서 영어가 상징하는 모든 이질적인 문화와 분투 중이었지. 우린 생(生)의 거대한 파도 앞에 짧은 팔로 힘껏 노를 젓는 무모한 선원들이었어. 그래서 서로에게 그 파도를 무사히 넘자는 격려의 엽서를 썼지. 그리고 2년이 지난 지금, 이 그림을 담은 그날의 엽서가 오늘 엄마의 손에 있구나.
우린 모두 '난파 뒤의 새벽'을 맞게 될 거야. 지독한 두려움과 외로움 속에서도 컹컹 소리를 질러 바닷속 뜨거운 해를 끌어낼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