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이트 모던 2: 미술관을 재정의한 테이트 모던의 큐레이션 전략
테이트 모던의 전시실은 터빈 홀을 중심으로 나탈리 벨 빌딩과 블라바트닉 빌딩 두 건물에 걸쳐 있다. 테이트 모던의 전시 구성은 혁신적이라고 알려져 있는데, 기존의 미술관이 대체로 전통적인 미술사 내에서 연대기적으로 작품을 배열하는 데 반해, 테이트 모던은 주제를 중심으로 큐레이션을 하기 때문이다.
전통적인 미술사를 해체하는 데 큰 역할을 한 테이트 모던의 방식은 개관 준비 단계에서부터 계획되었다. 당시 개관 멤버이자 명예 관장인 프랜시스 모리스는 21세기 동시대 미술을 보여주기 위해 전통적인 미술사의 틀을 벗어나야 한다고 판단했고, 개관 준비 기간 동안 약 3년간의 리서치와 토론을 거쳤다고 한다.
그 이유 중 하나는 전통적인 미술사적 흐름을 따를 경우 서구 백인 남성 예술가들의 작품만을 중심으로 다룰 수밖에 없다는 점이었다. 실제로 테이트가 역사적으로 중요한 작품 100점을 선정했을 때, 그 안에 여성 예술가나 백인이 아닌 예술가는 단 3명뿐이었다. 이에 따라 테이트 모던은 기존의 사조별 전시 방식에서 벗어나, 풍경화, 초상화, 추상화, 누드 등 주제를 중심으로 작품을 분류하는 방식을 택했다. 이러한 전시 방식은 당시 미술사가들 사이에서 논란을 불러일으켰지만, 여성 예술가들과 비서구권 작가들의 작품을 동등한 위치에서 조명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이러한 변화는 관객들에게 미술관을 더욱 능동적으로 탐험할 기회를 제공했다. 기존의 연대기적 전시는 미술사를 공부하듯 감상하는 경험을 요구했지만, 테이트 모던의 방식은 관객이 스스로 관계성을 찾아가며 작품을 감상할 수 있도록 유도한다. 이 방식은 뉴욕현대미술관 모마(MoMA), 노르웨이 국립미술관, 스페인의 엘 프라도 미술관 등으로 점차 확장되고 있다.
동아일보 기사(2024.5.2) 참고
출처: https://www.donga.com/news/Culture/article/all/20240502/124766385/1

테이트 모던 안내도 PDF파일 캡쳐본
1) 상설전: 테마 중심으로 다시 보는 작품들
테이트 모던의 컬렉션은 테이트 갤러리에 있던 20세기 이후의 작품들이다. 개관 당시 앞서 언급했던 주제, 풍경(사건, 환경), 정물(오브제, 실제의 삶), 누드(행위, 몸), 역사(기억, 사회)로 나누어 전시했고, 이후 테마 중심 전시 방식이 발전하면서, 2024년 당시 상설전은 총 6가지 테마로 구성되어 있었다.
● Start Display
● Artist and Society
● In the Studio
● Materials and Objects
● Performer and Participant
● Media Networks
● Artist rooms
앞서 언급했듯 테이트 모던의 전시는 나탈리 벨 빌딩과 블라바트닉 빌딩에 걸쳐 있으며, 두 건물은 1층과 4층에서 연결된다. 층별 전시 구성은 다음과 같다.
▶ 나탈리 벨 빌딩
2층 (상설전) - Start Display, Artist and Society, In the Studio
3층 (기획전)
4층 (상설전) - Materials and Objects, Media Networks, Artist rooms
▶ 블라바트닉 빌딩
2층 (기획전)
3층 (상설전) - Performer and Participant
4층 (기획전/Artist rooms)
나탈리 벨 빌딩 층별 안내도
상설전에는 테마별로 다시 작은 방들로 나뉘어 있으며, 총 약 60개로 구성되어 있다. 주제별 대표작을 모두 다루고 싶지만, 그중 몇 점만 소개하려 한다.
▶ Start Display | 앙리 마티스(Henri Matisse) & 이브 클라인(Yves Klein)
나탈리 벨 빌딩 2층의 Start Display에는 테이트 컬렉션에서 가장 사랑받는 작품들이 전시되어 있다. 그 중 앙리 마티스(Henri Matisse)의 <The Snail, 1953>과 이브 클라인(Yves Klein)의 <IKB 79, 1959>을 살펴보려 한다.

Henri Matisse, The Snail, 1953 사진출처: 필자 © 2024 Ayla J. | 장소: Tate Modern
말년에 건강이 악화되어 붓을 들기 어려워진 마티스는 가위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그는 종이에 색을 칠한 후 오려 붙이는 ‘컷아웃’ 기법을 활용했는데, 스튜디오에는 그를 도와주는 조수들이 있었다. 《The Snail》은 구아슈로 채색한 후 잘라낸 색면 조각을 벽에 배치하며 완성한 작품으로, 자세히 보면 핀으로 고정한 흔적도 남아 있다.
마티스는 “마음을 가라앉히고 달래주는” 미술작품을 그리고 싶다고 하며, 유쾌하고 행복한 작품들을 그려왔는데, 작은 달팽이를 큰 작품의 모티프로 삼아 추상성을 보여준 것은 그런 유쾌함의 한 표현이었다. 그는 색이 서로에게 영향을 미쳐야 한다고 강조하며, 청록-빨강, 주황-파랑, 연보라-초록 등 보색 대비를 활용했다. 색들은 서로 조응하며 밝고 에너지가 넘치는 주황이 작품 전체를 감싸면서 화면 전체에 생동하는 분위기를 형성하고 있다.
같은 공간에는 이브 클라인(Yves Klein)의 <IKB 79, 1959>도 전시되어 있었다.

Yves Klein, IKB 79, 1959 사진출처: 필자 © 2024 Ayla J. | 장소: Tate Modern
이브 클라인은 획기적인 방식으로 작품 세계를 펼쳤다. 그의 대표작인 청색 모노크롬은 페인트 롤러를 사용해 제작되었으며, ‘인터내셔널 클라인 블루(International Klein Blue: IKB)’라는 이름으로 특허까지 냈다. 클라인은 약 200점의 IKB 회화를 완성했으며, 이 짙은 울트라마린 색은 화학자들과 협력해 개발한 것이다.
그의 초기 모노크롬 작품은 주황, 노랑, 분홍, 빨강, 초록 등 다양한 색으로 제작되었으며, 금박을 사용한 ‘모노골드’ 시리즈도 있다. 독특한 점은 1952~1953년 일본에서 생활하며 유도 전문가가 되어 직접 유도를 가르치기도 했다는 점이다.
또한 그는 퍼포먼스 아트에도 도전했다. 그중 가장 논란이 된 작업은 ‘앙트로포메트리’ 시리즈로, 나체의 여성들에게 푸른색 페인트를 칠한 후 캔버스에 몸을 눕혀 신체의 흔적을 남기도록 한 것이다.
클라인의 모노크롬 회화는 색채에서 주관적인 감정을 배제하고, 이를 형이상학적 오브제로 전환함으로써 색을 객관화하려는 시도였다. 특히 IKB는 순수한 빛과 공간, 그리고 사물의 ‘무(無)’에 가까운 색채로 해석된다.
푸른색을 좋아해서인지, 사각의 캔버스에 가득 채워진 정제된 울트라마린은, 깊은 바닷속처럼 고요하게, 아무 말도 없다.
▶ Materials and Objects | 엔리코 바이(Enrico Baj) & 안나 보기기안(Anna Boghiguian)
4층의 Materials and Objects 전시는 작품에 사용된 재료와 독특한 물성에 집중한다. 이곳에서 엔리코 바이(Enrico Baj)의 작업과 안나 보기기안(Anna Boghiguian)의 작품을 살펴본다.

Enrico Baj, Fire, Fire, 1963-4 사진출처: 필자 © 2024 Ayla J. | 장소: Tate Modern
엔리코 바이(1924~2003)는 이탈리아의 작가였다. 판화와 조각 작업을 했지만, 주로 콜라주 작업으로 알려져 있다. 그의 엉뚱함과 비전통적 기법은 초현실주의와 다다이즘의 영향을 받았으며, 어린아이들의 예술에서 영감을 받은 유럽 예술가 그룹인 CoBrA와도 관련이 있었다. CoBrA 그룹에서는 표현주의적인 기법에 영향을 받았다.
그는 천 위에 캐리커쳐 화 된 인물들을 그리고, 그 위에 교육용 과학 장난감인 메카노 조립 세트 부품들을 콜라주 했다.
그의 작품 Fire, Fire는 뒷면에 1964년 베니스 비엔날레의 라벨과 함께 ‘마니 인 알토(손 들어)‘라는 제목이 적혀 있다. 바이는 주로 핵전쟁에 대한 작품들을 다루었고, 권력과 권위를 조롱하는 작품들이 많았다. 실제로 고위 군 장교들의 제스추어를 풍자하는 그림을 그렸는데, 이 작품은 이탈리아와 군에 대한 불경스러움으로 검열되었다가 마지막 순간에 비엔날레에 추가 되며, 제목이 변경되었다.
결국, ‘불이야~’ 로 제목이 바뀐 경위도 재미있고, 진지하고 심각한 군대의 권위와 권력에 대한 풍자도 영리하게 담아냈다고 생각한다. 무엇보다 묘하게 매력적인 귀여움이 눈길을 자꾸 사로잡는다.
Anna Boghiguian, Institution vs. The Mass 2019 사진출처: 필자 © 2024 Ayla J. | 장소: Tate Modern
안나 보기기안(1946~)은 이집트 카이로 출신의 현대미술가로 역사와 정치, 문화를 결합한 작품으로 사회 변화를 조명한다. 그녀의 작업은 혁명과 권력 구조의 역동을 탐구하며, 시대의 흐름 속에서 인간이 겪는 갈등과 그로 인한 변화의 순간을 대규모로 인물들을 설치하는 작업을 한다.
그녀의 작품 <기관 대 대중 Institution vs. Mass, 2019>는, 체스판을 모티브로 권력과 대중의 관계를 상징적으로 나타낸다. 작품 속에서 ‘기관 Institution’의 인물들은 고대 및 현대의 지배 계층과 권력 구조를 상징하며, 대중 Mass는 자유와 기본권을 요구하는 혁명가, 사상가, 활동가들로 구성된다.
연극이나 이야기 속 캐릭터를 연상시키는 그녀의 종이 인물들은 작품이 설치될 때마다 체스판 위에서 새로운 위치로 재배치 될 수 있다. 이를 통해 관람객들은 사회적 권력관계가 끊임없이 변화하고 재구성되는 과정을 볼 수 있다.
바람만 잘못 불어도 찢어질 듯한 얇은 종이 사람들이 체스판 위에서 위치를 바꿀 수 있다니, 흥미롭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보기기안은 고대 예술에서 사용되던 방식으로 봉합 기법과 밀랍을 활용하여 인물들을 제작했다고 한다. 어쨌건, 인간의 역동은 계속해서 움직인다. 사실 대중은 또 다른 기관이 되기도 하고, 기관은 해체되기도 한다. 부처님 손바닥 같은 체스판 위에서 움직이는 것과 다를 것이 무엇일까.
In the Studio : 게르하르트 리히터(Gerhard Richter) & Artist room 아그네스 마틴(Agnes Martin)
2층 In the Studio 섹션에서는 예술가의 작업실을 다루는 작품과 함께, 개인과 작품 사이, 본질적인 관계를 탐구하는 추상 작품들이 전시되어 있다. 그 중 게르하르트 리히터의 작품과 2층의 8번 Room에서 일정기간(1 February 2022 – 22 September 2024) 전시를 하는 아그네스 마틴의 작품을 살펴보려 한다.

Gerhard Richter, Cage 2, 2006 사진출처: 필자 © 2024 Ayla J. | 장소: Tate Modern
일련의 작품 6개로 구성된 게르하르트 리히터(Gerhard Richter, 1932~)의 방이 따로 마련되어 있었다. 리히터는 구상과 추상, 사진과 회화를 자유롭게 오가며 독자적인 표현 방식을 확립한 독일의 대표적인 작가이다.
1980년대 초부터 그는 대표적인 스퀴지(squeegee) 작품들을 만들어 왔다. 캔버스에 색을 겹겹이 올린 뒤, 커다란 스퀴지로 표면을 쓸어낸다. 그 과정에서 안쪽에 있던 색들이 드러나며 예상치 못한 질감과 선이 만들어진다.
스퀴지가 멈출 때마다 표면에는 선과 긁힌 자국이 생기고, 오일 물감이 자연스럽게 마르거나 접히면서 새로운 색과 질감이 만들어진다. 리히터는 이 작업을 하면서 미국의 실험적 작곡가 존 케이지(John Cage)의 음악을 들었다고 한다. 작품과 음악이 직접적인 연관성은 없지만, 그는 케이지의 작곡 방식—우연성, 주변 소리, 그리고 침묵의 활용—에 깊은 관심을 가졌다.
그래서, 이 시리즈의 이름은 Cage.
리히터의 스퀴지 작품들은 마치 수면을 떠올리게 한다. 여러 색이 나투며 우연한 풍경을 만들어내지만, 그 위를 덮은 잔잔한 물결이 이를 슬그머니 감춘다. 수면 아래가 분명하게 보이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맑아 보이는 건 왜일까. 케이지의 음악과 직접적인 연관이 없다고는 하지만, 우연히 만들어지는 색들의 소리 그리고 이어지는 수면의 침묵은 어쩐지 맞닿아 있는 것 같다.
ARTIST ROOMS는 현대 및 동시대 예술 작품 1,600점 이상을 소장한 순회 컬렉션으로, 영국 전역에서 주요 국제 예술가 42명의 작품을 개인전 형식으로 전시하고 있다. 그중 1 February 2022 – 22 September 2024까지 2증 East ROOM 8에서 아그네스 마틴의 전시가 있었다.
아그네스 마틴의 그림들 사진출처: 필자 © 2024 Ayla J. | 장소: Tate Modern
아그네스 마틴(Agnes Martin, 1912~2004). 세상을 등지고 그림을 그렸던 마틴의 그림은 은은한 파스텔톤의 스트라이프나 격자무늬를 그렸다. 그녀는 미국의 추상표현주의와 미니멀리즘 모두에 영향을 받은 것으로 평가된다. 하지만 마틴은 자, 연필, 마스킹테이프로 세심하게 정돈된 그림을 그리는 동시에 편한 마음으로 작업하며 불완전한 우연성을 받아들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스트라이프는 정직하게 보이지만, 자세히 보면 희미한 연필 자국, 붓 자국 등이 보인다.
마틴의 예술세계는 선불교와 도교의 철학에서 영감을 받았으며, 그녀의 작품은 시각적 균형과 내면적 평온을 탐구하는 명상적 성격을 띤다. 마틴은 그림을 그리는 행위를 초월적인 경험, 즉 수행의 과정으로 여겼다.
그녀는 이렇게 말한다. '아름다움은 인생의 미스터리입니다. 그것은 눈에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마음속에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긍정적인 삶에 대한 반응입니다.'
마틴의 작품을 런던 페이스 갤러리에서 처음 만났을 때가 기억난다. 은은한 분홍과 하늘색, 그리고 흰색이 보일 듯 말 듯 단정하게 그려진 스트라이프 속에 섬세하게 스며들어 있었다. 그 고요한 색조는 공간의 공기를 차분하고 맑게 정돈하는 듯했고, 동시에 여성스러운 우아함도 느껴졌다. 그때부터 그녀의 작품을 좋아하기 시작했는데, 더군다나 은둔하며, 그림을 수행의 도구로 삼았다는 점에서 더욱 매료될 수밖에 없었다. 숭고하다는 표현이 괜히 나오는 것은 아닌 것 같다.
이렇게 테이트 모던의 상설전에서 만나볼 수 있는 몇 점의 작품을 살펴보았다. 이제, 기획전으로 시선을 돌려보자.(다음 글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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