쓰레기와 예술, 이 두 가지를 나란히 두고 살폈을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인상은 무엇일까? 쓰레기는 일반적으로 악취가 나고, 형태가 더러우며 전혀 쓰임이 없는 것으로 이해된다. 쓰레기인지 아닌지를 구분하는 결정적인 기준은 ‘쓰임’에 있다. 처음부터 냄새나고 더러워서 쓰레기가 되는 것이 아니라, 쓰임을 찾지 못했기에 자연스레 맞이하게 된 상태의 변화가 굳어져 쓰레기의 전형적인 모습과 감각이 된 것이다. 그렇기에 아마도 쓰레기와 예술을 붙여 생각해본다면, 쓰레기 같은 상태의 물질을 재료로 활용한 예술이 가장 먼저 떠오를 것이다.
이미지 1 2017년 서울로 7017 개장 당시 설치된 황지혜 작가의 <슈즈 트리>
2017년 옛 서울역 광장에서부터 서울로 7017에 설치된 공공미술 <슈즈 트리>와 그에 대한 반응을 그 대표적인 사례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재료로서만 두고 보았을 때 이 작품은 쓰레기에 해당하는 헌 신발, 폐기 처분한 신발을 활용한 작품으로서의 사실을 갖고 있다. 그러나 이 신발들이 ‘쓰레기’로서 갖는 속성을 다른 각도로 접근하는 것이 작가의 의도였다. 작가는 해당 작업을 통해 소비문화를 되돌아보고자 했고, 이것이 재생되어 다시 태어난 서울 고가의 맥락과 비슷하여 해당 장소에 이러한 의미를 담은 작업하게 되었다 밝혔다.1) 그러나 <슈즈 트리>가 당시 일반 시민들에게 질타를 받았던 것은 예술적 의도와 의미 이전에 시민들을 위한 공간에 쾌적함에 반대되고, 악취가 풍기는 사물들이 무더기로 쌓여 있는 것이 공공미술의 ‘공공성’에 위배된다는 것이었다. 이 비판을 다시금 해석해보자면, 아름다운 것이 곧 공공성의 실현이기에, 즉 공적 장소로 ‘미’에 반하는 쓰레기가 작품의 형태로 출현한 것은 공공장소에 부합하지 않은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 작품에 대한 비판에 있어서 단순히 이 작품이 “예술인가, 흉물인가?”의 질문에서 벗어나 살펴보아야 하는 시점에 도달했다. 아름답지 않아도 의미가 있다면 흉물도 예술이 될 수 있느냐라는 미학적인 질문, 혹은 이것이 그에 따라 미적인 사물이냐 아니냐라는 이분법에서 나아가야 한다. 이 질문에서 조금만 벗어나, 이 거대한 신발 나무로 대변되는 현대 소비/경제 사회 속에서 쓰레기라는 존재는 무엇을 함의하며, 쓰레기의 예술화, 쓰레기와 예술의 관계를 통해 어떤 질문에 다다를 수 있을지 살펴보아야 한다. 지금의 시점에서 우리는 쓰레기와 예술을 어떻게 사유할 수 있을까?
알라이다 아스만의 문화적 기억와 기록물 보관소로서의 ‘쓰레기’

이미지 2 알라이다 아스만의 『기억의 공간: 문화적 기억의 형식과 변천』
“비록 역사적 시각이나 예술적 시각이 과거의 이야기를 회상의 시편으로 바꿀 수 있다 해도 우리가 다시 가져오고 싶은, 그리고 경우에 따라서는 다시 가져올 수 없는 많은 것들이 끝없이 남아있다. 잔재란 살아남은 것을 말한다. 이 말은 곧 기록이나 쓰레기 모두에 해당되는 말이다. 어쨌든 잔재란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 마치 망각이 기억에 매우 중요한 요소인 것처럼 쓰레기 또한 기록에 구조적으로 매우 중요하다. 미술가들의 조형작품이나 작가들의 환상적인 이야기들은 그것을 부정된 것으로부터 건져 내어 의식의 수면에 떠오르게 한다. 그리고 쓰레기를 총체적으로 보관할 실험적 기획을 실행하고 있는 것이다.”2) |
모든 것이 쉽게 비디오화, 문서화, 캡쳐 되어 데이터화 될 수 있는 세계에 우린 살고 있다. 의지만 있다면 쉽게 일어난 일과 생각들을 기록하고, 필요할 때 언제든 완벽히 불러와 열람할 수 있다는 기술적 신뢰 속에서 살고 있다. 이렇게 생산 이후의 무언가의 저장과 보존이 보장되어 있기에, 역으로 기억과 기록을 생산하는 방식과 태도 역시 영향을 받으며 분명 변화하고 있다. 무엇보다 이러한 변화를 이끈 것은 전자 저장 기술의 발전이며, 기억과 기록을 담보하는 매체의 발전이 시대마다 기억의 순환과 저장, 보존과 재구성을 좌우해왔다. 인류가 저장 매체로서 문자를 발명한 시점부터 문화적 기록, 지식과 전통과 같은 무형의 것들이 축적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 축적으로부터 기록이 한 시대의 기억이 되고, 그것이 역사가 됨으로써 전통의 형태로 문화와 과거를 다음 세대로 전승하기 시작했다.
기억 연구의 권위자인 알라이다 아스만은 자신의 저서 『기억의 공간』에서 기억에 반하는 기억, 반(反)기억, 기억되어야 하는 것이 아닌 잊히고 폐기처분 되어야 하는 쓰레기의 존재에 대해 설명한다. 아스만은 쓰레기가 반문화적이며 반가치적인 특성을 지닌 동시에, 이러한 특성으로부터 문화적 잠재력과 창조적 재활용의 가능성을 내포한다고 말한다. 여기서 쓰레기는 실질적으로 버려진 사물이라기보단, 넓은 의미에서 주요하게 활용되지 못하고 밀려난 주변부의 것들로서의 쓰레기에 가깝다. 존재하지만 활용되지 못하고, 특정한 쓰임의 반열에 오르지 못한 채 그저 쌓여 있기만 한 기록물들을 의미한다. 아스만은 이러한 문화적 잔여물들이 일종의 ‘보존적 망각’의 영역에 속하며, 재발견되거나 재해석되어 문화적 영역으로 편입되는 방식을 설명한다. 또한 해당 저서에서 아스만은 ‘쓰레기 기록물보관소’에 대해 언급하며, 쓰레기가 예술가들에 의해 문화적인 기억으로 변환되는 방식에 대해서도 집중한다. 해당 책의 제3부 ‘저장소’의 3장에서는 현대 예술가들이 설치 예술을 통해 ‘망각의 휴한지’에서 기억을 재생하고, 이를 장소와 사물을 매개로 시뮬레이션하는 방식을 설명한다.
보존된 망각의 사적 역사: 지그리트 지구르드손의 <기억의 건축>

이미지 3 지그리트 지구르드손의 <기억의 건축(Architektur der Erinnerung)>, 하겐의 오스트하우즈 미술관
지그리트 지구르드손(Sigrid Sigurdsson)은 1988년부터 독일 말 하겐의 오스트하우즈 미술관에서 <기억의 건축(Architektur der Erinnerung)>이라는 작업을 선보였다. 아카이브와 도서관을 연상시키는 위 이미지처럼 해당 작업은 다층적이고 복합적인 설치물들로 미술관에 설치되었고, 1988년 첫 설치 이후부터 미술관의 현대 컬렉션의 중심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기억의 건축> 작업에서 중요한 것은 시간과 함께 누적되고, 지속적으로 쌓아가는 고요한 확장의 시간성이 담겨져 있다는 것이다. 1988년 이후 해당 작업은 2006년까지 미술관 구관의 상층에서 《정적 앞에서(Vor der Stille)》라는 제목으로 전시되었고, 2009년 8월 미술관이 재개관한 이후에는 현재까지 《기억의 건축: 미술관 안의 미술관(Die Architektur der Erinnerung: Das Museum im Museum)》이라는 제목으로 구관 1층에서 공개되고 있다.3)

이미지 4&5 지그리트 지구르드손의 <기억의 건축(Architektur der Erinnerung)>의 설치 모습 및 진열장 속 자료들
공간은 마호가니로 만들어진 거대한 책 진열장과 사각의 작업대, 유리 진열장들로 구성되어 있다. 진열된 것들은 수천 개의 문서, 개인 서신, 공식 문헌, 책, 당대의 신문, 사적인 사진, 그리고 다양한 발견물로 구성된 공적·사적 역사적 유물들이다. 대부분의 자료는 나치 독재 시기(1933-1945)와 관련 있거나, 당대의 삶을 살았던 사람들이 남긴 일상적인 흔적들이며, 일부 자료들은 수십 년에 걸친 흔적들을 추적하기도 한다. 이 중에서 가장 오래된 자료로는 16세기 키케로(Cicero) 작품의 한 판본이며, 이를 포함해 모든 자료들은 시구르드손이 1955년부터 40년에 걸쳐 고서점 혹은 개인 컬렉션을 통해 수집한 자료들이다. 여기서 흥미로운 것은 단순히 한 작업의 형태로 고정되어 제시된 것이 아니라, 1988년 설치 이후로부터 현재 진행 중이라는 것이다. 책, 폴더, 유리 진열장으로 시작한 주요 설치인 <기억의 건축>에는 텍스트와 드로잉 아카이브 <기적의 실타래(Das Wunderknäuel)>, 관람객이 참여할 수 있는 놀이 테이블 등이 추가되었다. 또한 ‘방문자 책’이 마련되어 새로운 기록이 실시간으로 작성되며 아카이브가 지속적으로 확장되었다. 이외에도 방문자가 참여 가능한 ‘미래의 아카이브(Das Archive der Zukunft)’, ’전기 박물관(Das Museum der Biografien)’, ’데이터베이스 독일-기념비-연구과제‘, ’기억과 기억술 도서관(Präsenzbibliothek zum Thema Erinnerung und Gedächtnis)이 2002년, 2009년 등 새롭게 아카이브 및 전시의 형태로 작업이 업데이트되는 동시에 추가되어 이 “기억의 건축”의 시간, 공간은 점차 확대되었다.4)

이미지 6&7 지그리트 지구르드손의 <기억의 건축(Architektur der Erinnerung)>의 설치 모습 및 진열장 속 자료들
흥미로운 것은 작가 혹은 컬렉터로서 지구르드손이 이 자료들을 수집한 시간과 미술관의 역사가 맞물리고, 또 하나의 다른 축으로 방문객이 그에 개입하며 이 공간과 아카이브의 물리적인 규모(volume/mass)가 진화한 것이다. 또한 자료들을 살펴보면 사진, 서신, 엽서, 설계도, 입장권 등등 사람이 자신의 삶을 살아가는 동안 쌓아가는 일상 차원의 유물과 일상에 의해 파생된 잔여물들이 창의적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에 대하여 아스만은 이 “회상의 미궁”을 헤집고 나갈 수 있도록 인도하는 텍스트나 키워드가 없으며, 이 지극히 개별적인 개인사로 이루어져 있는 보존된 유물들의 파편성으로부터 개인적 기억과 역사가 어떻게 얽히는지 보여준다고 설명한다.5) 그러나 미궁 안을 헤집듯 접촉해야 이 방대한 양의 컬렉션 앞에서 방문객들은 이 흩어진 기록물로부터 어떠한 공적 역사의 불가능함을 배우기도 한다. 이름 모를 누군가가 나치 시대 어느 공원에 입장했던 티켓 한 장. 집에 쌓여있다면 큰 고민 없이 버릴 만큼 너무나 일상적인 삶의 부산물들을 수집해 온 지구르드손의 낡고 오래된, 쓰임을 다한 듯 보이는 자료들의 무더기 컬렉션은 앞서 본 헌 신발들의 무더기와 흡사한 물질적 혹은 미학적 상태를 지닌다. 그러나 단일한 서사 없이 이것들이 모여 어느 일상들을 지시할 때, 그를 대면한 방문객들로 하여금 새로운 문화적인 기억이 끌어올려진다.
우리가 학습하고 계승하는 전통과 역사는 당대의 가치와 평가에 따라 선별된 것들, 그리고 기어코 미래에 전달하고자 당대의 첨단 기술이 달라붙어 미래로 전송된 것들이다. 역사적 상황에 따라 무가치와 가치의 기준이 변모하고, 그에 따라 폐기처분 되었던 기록물들, 쓰레기들은 그 무엇보다 생생히 미발견된 기억의 문화적 가치를 보존하고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 기록물보관소와 쓰레기는 순환하는 문화적 기억의 최종 종착지를 넘어서, 재생 가능한 기록물로서의 쓰레기들의 창고이자 그 사적 유물들에 대한 시대적 평가의 변화를 가시적으로 드러내는 공간으로서 의미를 가지는 것이다.6) “불필요하고 시대착오적이며 낯설어진 것, 중립적이고 추상적으로 정체성을 규정하는 지식뿐만 아니라 선택되지 않은 가능성, 아직 쓰이지 않은 기회와 같은 다양한 목록들”6)로서 쓰레기들. 분류되지 못한 채 우선 축적되어 온 방대한 양의 창고와도 같은 쓰레기 기록물보관소에서 예술가들은 기능이 상실된 상태의 물질들에 변주를 주고, 그를 작업 혹은 전시의 형태로 재구성함으로써 통해 저장되어 있던 오래되었으나 새로운 문화와 기억들을 찾아온다. 이미 있었으나 실종되어 있던 것들, 기억할 수 있었으나 더 이상 기억하지 못하게 된 것들을 기억하게 한다.
쓰레기의 존재와 삶의 소외
이렇게 복귀하는 과정에서 각 시대의 예술품들은 당대의 문화적 기억을 저장하고 있는 저장 매체이자 그 자체로 하나의 문화적 사건으로서 기억을 생산한 주역이다. 그러나 우리가 손에 꼽고 기억하는 예술 작품들에 비교가 되지 못할 만큼 얼마나 많은 예술 작품들의 수가 생생히 존재했으나 망각되었을까? 한 시대에 힘차게 출발했던 작품은 잊혀진 채 어느 창고에 쌓여져 가고 있으며, 작가라는 한 개인의 작업물은 시간이 흘러도 완전히 사라지지 못한 채 이 물질의 세계 어딘가를 떠돌고 있다. 강력한 제도에 포섭되지 못한 누군가의 컬렉션, 사물, 물질들은 깨끗하고 매끄러운 상태를 실시간으로 잃어가며 “쓰레기”로서의 존재로 천천히 진입하게 된다. 하지만 아스만과 그가 소개한 지구르드손의 작업처럼, 이러한 ‘쓰레기화’된 것들은 단순한 폐기물이 아니라 새로운 의미를 부여받을 수 있는 잠재적 기록물이며, 예술은 아직 발견되지 못한 문화적 기억을 소환하는 유용한 기억술이 될 수 있다. 이를테면 재활용술으로 부를 수 있다. 이제는 낡고 더러운 것, 그것의 생애적 순환과 포섭, 보존과 축적에 대한 미학을 이야기해보아야 할 때가 되었다.
쓰레기는 단순한 폐기물이 아니라, 시간이 축적된 흔적이자 우리가 기억하지 못한 것들이 머무는 장소이다. 이러한 잔재들을 어떻게 기억과 창작에 재활용할 것인지 고민하는 것은, 그 장소를 대안적 상상 속에서 구체적인 현실로 소환하는 계기가 될 수 있다. 돌이켜보면 우리는 한순간의 새로움, 매끄럽고 새하얀 물질들에 둘러싸이기 위해 열렬히 돈을 소비하며 물건을 구매한다. 물건을 소비한다는 것은 곧 그 물건이 속한 특정한 미학을 선호하는 것이며, 이러한 미학을 소비하는 행위는 공유된 기억에 접속하는 적극적인 문화적 실천이 된다. 그러나 ‘미학’이라는 이름 아래 우리는 가능한 경험들로부터 스스로를 차단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렇기에 익숙한 세계에서 자연스럽게 배제되었던 것들, 즉 쓰레기와 마주하는 일은 그동안 소외되었던 삶의 한 영역을 발견하고, 이를 재활용하는 유용한 기억술이 될 수 있다. 기억의 쓰레기장과 새로움의 최전선에서, 우리는 무엇을 배울 수 있을까?
각주 1) 서울문화재단, “예술인가, 흉물인가?” https://brunch.co.kr/@sfac/301 2) 알라이다 아스만, 채연숙 옮김, 『기억의 공간: 문화적 기억의 형식과 변천』(그린비, 2011), pp. 26-27. 3) 지그리트 지구르드손 홈페이지, https://sigrid-sigurdsson.de/ade/ 4) 위의 글. 5) 알라이다 아스만, 위의 글, p. 523. 6) 최은아, 「쓰레기 이론의 유형학」, 『독일어문화권연구』 23, p. 216. 7) 알라이다 아스만, 위의 글, p. 524. |
이미지 및 웹사이트 출처 이미지 1번: https://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2326412 이미지 2번: 교보문고 책 상세 페이지 이미지 3-5번: 지그리트 지구르드손 홈페이지, https://sigrid-sigurdsson.de/ade/ 이미지 6-7번: https://miriskum.de/sigrid-sigurdsson-die-architektur-der-erinnerungosthaus-museum-hagen/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