런던의 상징, 빨간 공중전화 박스
런던의 색은 무엇일까? 빨간 공중전화 박스와 빨간 버스, 회색빛의 런던 하늘에 생동감을 더하는 빨간색이 가장 먼저 떠오른다. 고딕 건축 양식의 웨스트민스터 사원의 빅벤을 배경으로 빨간 공중전화 박스 앞에서 사진을 찍는 사람들의 모습은 어쩐지 익숙해 보이는 런던의 풍경이다. 이 공중전화 박스는 성당 건축으로 유명한 자일스 길버트 스코트Sir. Giles Gilbert Scott가 디자인하며 영국 문화의 상징적 아이콘이 되었다. 그는 1847년에 런던 중심부의 전력을 공급하기 위한 화력 발전소도 설계했는데, 그중 템스강 남쪽의 뱅크사이드 발전소Bankside Power Station는 1981년 오일쇼크와 공해 문제로 문을 닫았고, 그 후 오랫동안 방치된다.

사진출처:https://www.earthtrekkers.com/5-days-ultimate-london-itinerary/
영국 정부의 밀레니엄 프로젝트Millennium Project
1992년, 테이트 갤러리는 근현대미술관 건립을 제안하기 시작했다. 이후 1994년에 미술관 건립이 공식적으로 결정되었고, 1998년 뱅크사이드 화력발전소 건물이 새로운 미술관 부지로 선정되었다. 이 결정 뒤에는 영국 정부의 밀레니엄 프로젝트가 자리하고 있었다.
1995년, 영국 정부는 새천년을 기념하기 위해 ‘밀레니엄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증가하는 이민자 수, 부족한 오피스 공간, 그리고 낙후된 도시 기반 시설과 같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새롭게 변화하자"는 구호를 내걸고 대대적인 프로젝트를 추진한 것이다. 이 밀레니엄 프로젝트의 핵심에는 그리니치의 ‘밀레니엄 돔’, ‘런던 아이’, ‘밀레니엄 브리지’, 그리고 ‘테이트 모던’이 있었다.
화력발전소에서 세계적인 미술관, 테이트 모던Tate Modern으로
테이트는 1897년, 제당업자인 헨리 테이트 경의 기증품을 토대로 런던 밀뱅크Millbank 교도소 자리에 'National Gallery of British Art'라는 이름으로 첫 문을 열었다. 이후 1932년, 현재 밀뱅크에 있는 테이트 브리튼Tate Britain을 당시 ‘테이트 갤러리Tate Gallery’라 불렀으며, 1988년에는 리버풀에 ‘테이트 리버풀Tate Liverpool’을 1993년에는 영국 남부의 세인트아이브스에 ‘테이트 세인트아이브스Tate St Ives’ 분관을 설립한다. 현재 ‘테이트 브리튼’, ‘테이트 리버풀’, ‘테이트 세인트아이브스’, ‘테이트 모던’에 ‘테이트 온라인’까지 구성하며 2000년 '테이트Tate'라는 이름으로 자리 잡는다.

왼쪽 위부터 테이트 브리튼, 테이트 모던, 왼쪽 하단 테이트 리버풀, 테이트 세인트아이브스 (사진출처: ©Tate)
테이트 모던은 가장 나중에 완성되었는데, 테이트 브리튼의 전신인 기존 테이트 갤러리의 소장 공간에 새로운 작품 수용이 어려운 상황에서 앞서 언급했듯, 1992년 테이트 이사회는 별도로 근현대 미술관을 설립하기로 했다. 뱅크사이드 발전소는 건설 당시 위치와 환경오염 문제 등 여러 논란이 있었지만, 테이트 이사회는 부지의 규모와 기념비적, 그리고 뛰어난 위치에 주목했다. 기존 테이트 본관, 분관들과 규모가 비슷해 운영이 어렵지 않다고 판단했으며, 신축보다 비용과 행정면에서 유리했다. 이곳에 현대미술관을 설립하기로 결정이 된 후, 테이트 갤러리는 국제 건축 공모전을 진행한다. 이 공모전에는 안도 다다오, 라파엘 모네오, 렘 콜하스, 렌조 피아노, 그리고 헤어초크 & 드 뫼롱 등 세계적인 건축가들이 참여했다. 결국 기존 건물을 보존하면서 현대적인 새로움을 더하려 했던 스위스 건축 회사 헤어초크 & 드 뫼롱이 테이트 모던 프로젝트를 맡게 되었고, 이는 영국 현대미술의 새로운 장을 여는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다.
발전소 건물의 특징을 살린 스위스 건축팀
전 세계적으로 손꼽히는 건축가들이 참여한 국제 공모전에서, 스위스 건축 회사 헤어초크 & 드 뫼롱Herzog & de Meuron은 기존 발전소 건물을 최대한 보존하는 설계로 주목받았다. 발전소 상부에는 불투명한 박스 형태의 구조물을 간결하게 증축했으며, 건물의 상징적인 요소인 99m의 거대한 굴뚝과 세로로 길게 배치된 창문 등 기념비적인 원형을 그대로 유지했다. 기존 건축물의 정체성을 보존하면서 과거와 현재를 자연스럽게 연결하는 제안이었다.
뱅크사이드 발전소는 20세기 초 '산업의 대성당Industrial Cathedral'이라 불릴 정도로 정교하게 설계된 건물이었다. 특히 템스강 맞은편에 위치한 세인트 폴 성당St Paul's Cathedral과의 시각적, 의미적 조화를 염두에 두고 건축된 이 발전소는 산업화 시대를 대표하는 상징적 건축물이었다. 헤어초크 & 드 뫼롱은 이 발전소를 미술관으로 전환하면서 구조적인 강점과 넓은 내부 공간을 최대한 활용한다.

테이트 모던 사진출처: 필자 © Ayla J.
테이트 모던에서 바라본 세인트 폴 성당과 밀레니엄 브리지 사진출처: 필자 © Ayla J.
특히, 이 넓고 개방적인 내부 공간, 특히 터빈 홀은 전통적인 미술관이 제공하지 못했던 유연성과 가능성을 지니고 있었다. 예술 작품을 단지 ‘진열’하는 것을 넘어 끊임없이 실험하는 현대미술의 흐름에 따라 예술가들이 상상하고, 실험하고, 창작할 수 있는 작업실 같은 공간이 탄생했다.
이렇게 문을 연 테이트 모던은 개관 첫해에 525만 명의 방문객을 맞이했다. 이는 이전의 세 개 테이트 갤러리가 합산해 기록한 250만 명의 방문객 수의 두 배를 넘는 수치로, 오늘날까지도 파리의 루브르에 이어 세계에서 가장 많은 방문객이 찾는 미술관 중 하나로 손꼽힌다. 테이트 모던 개관 이듬해, 헤어초크 & 드 뫼롱은 건축계의 노벨상이라 불리는 프리츠커상을 받으며 그 업적을 인정받았고, 매년 런던에 1억 파운드의 경제적 이익을 창출하고 있다.
테이트 모던 건물의 중심은 터빈 홀
영국 정부의 밀레니엄 프로젝트에는 ‘밀레니엄 브리지’도 포함되어 있었다. ‘밀레니엄 브리지’는 템스강 남쪽의 테이트 모던과 맞은편인 북쪽의 세인트 폴 대성당을 잇는 다리다. ‘밀레니엄 브릿지’ 역시 1996년 현상설계를 공모했고, 200여 팀의 세계적 건축가 팀이 참여한 가운데 건축가 노먼 포스터, 조각가 앤서니 카로, 구조회사 오브 애럽으로 구성된 팀이 당선되어 건립된다. 북쪽의 세인트 폴 성당 앞쪽에서 밀레니엄 브리지를 건너 테이트 모던의 입구로 들어서면, 자연스럽게 미술관 각 방향으로 이어지는 동선의 중심지이자 중앙홀의 허브 역할을 하는 터빈 홀이 모습을 드러낸다.

테이트 모던으로 들어가는 길 사진출처: 필자 © Ayla J.
테이트 모던에서 나오는 길, 버스킹과 밀레니엄 브릿지 사진출처: 필자 © Ayla J.
터빈 홀은 테이트 모던의 심장 역할을 하는 핵심 공간이다. 이 거대한 공간의 압도적인 볼륨은 예술가들에게 웅장한 스케일로 작품을 창조할 수 있는 가능성을 제공한다. 2000년부터 2012년까지는 글로벌 기업 유니레버가 터빈 홀 전시를 후원했으며, 이후 2015년부터 2025년까지는 한국의 현대자동차가 ‘현대 커미션’이라는 이름으로 후원을 이어가고 있다.

테이트 모던 터빈홀에서 바라본 입구 사진출처: 테이트 © tate
터빈 홀의 유니레버 시리즈
터빈 홀의 유니레버 시리즈는 2000년부터 2012년까지 진행됐다. 이 시리즈는 테이트 모던 개관 후 첫 5년 동안 진행될 예정이었지만, 예상외의 큰 호응을 얻으며 2012년까지 연장된다. 이 기간에 유니레버는 총 66억 원(440만 파운드)의 후원금을 제공했는데, 2008년, 이후 5년 동안 33억 원(220만 파운드)을 추가 지원하는 갱신 계약을 체결한다.
터빈 홀의 유니레버 시리즈는 2000년 루이스 부르주아의 거대한 거미 엄마 ‘마망’을 시작으로 2012년 10월까지 총 13번의 전시 2000년 루이스 부르주아Louise Bourgeois, 2001년 후안 뮤뇨스Juan Muñoz, 2002년 아니쉬 카푸어Anish Kapoor, 2003년 올라퍼 엘리아슨Olafur Eliasson, 2004년 브루스 나우먼Bruce Nauman, 2005년 레이첼 화이트리드Rachel Whiteread, 2006년 카스텐 휠러Carsten Höller, 2007년 도리스 살세도Doris Salcedo, 2008년 도미니크 곤잘레스 포에스터Dominique Gonzalez-Foerster, 2009년 미로슬라프 발카Miroslaw Balka, 2010년 아이 웨이웨이Ai Weiwei, 2011년 타시타 딘Tacita Dean, 2012년 티노 세흐갈Tino Sehgal 가 있었다. 이 중 필자는 거대한 홀 안에 인공 태양을 만들어 두었던, 올라퍼 엘리아슨Olafur Eliasson의 전시The Weather Project를 리서치하면서 테이트 모던의 유니레버 시리즈를 알게 되었는데, 당시 그 작품은 굉장히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왔었다. 사진 속의 사람들은 홀의 이곳저곳에 눕거나 앉아 인공 태양 빛을 만끽하고 있었다.
올라퍼 엘리아슨은 덴마크 태생의 예술가로 주로 자연현상을 미술관 안팎으로 불러들이는 작업을 한다. 그는 수백 개의 전등으로 태양 빛을 구현했고, 거대한 홀을 빛으로 가득 채우기 위해 수증기, 물, 설탕으로 만든 인공 안개를 깔았다. 빛과 어둠은 늘 공존하지만, 태초에 빛이 있었다 는 말로 시작하는 성경의 구절에서처럼 빛은 생명을 의미하며 또 생명을 키워내는 가장 강력한 힘으로 작용한다. 미술관 안에서 꺼지지 않는 태양을 온전히 체험하는 그 느낌은 과연 어땠을까.

Olafur Eliasson, The Weather Project, 2003~2004
사진출처: Wikipedia
터빈 홀의 현대커미션즈
터빈 홀의 유니레버 시리즈가 종료된 후, 2013년 테이트 모던은 현대자동차와 약 85억 원(500만 파운드) 규모의 장기 파트너십을 체결했다. 현대커미션즈(Hyundai Commissions)는 2015년 이후 현재까지 총 9개2015년 아브라함 크루즈비예가스(Abraham Cruzvillegas), 2016년 필립 파레노 (Philippe Parreno), 2017년 수퍼플렉스(SUPERFLEX), 2018년 타니아 브루게라(Tania Bruguera), 2019년 카라 워커(Kara Walker), 2021년 아니카 이(Anicka Yi), 2022년 세실리아 비쿠냐(Cecilia Vicuña), 2023년 엘 아나추이(El Anatsui) 전시들이 진행되었으며, 특히, 아홉 번째 전시로 한국 작가인 이미래(Mire Lee)의 전시 Open Wound가 2024년 10월 9일부터 2025년 3월 16일까지 터빈 홀에서 열리고 있다.

테이트 모던 터빈홀 Open Wound전 사진출처: 테이트 © tate
서울과 암스테르담을 기반으로 활동하는 이미래 작가는 철재, 시멘트, 실리콘 등 산업 재료를 활용해 재료의 가능성을 실험하며 관람자와 공간에 영향을 미치는 조각 작업으로 예술의 경계를 확장해 왔다.
이번 전시는 작가가 영국에서 선보이는 첫 대규모 전시로, 과거 화력 발전소였던 테이트 모던의 역사적 맥락을 반영해 터빈 홀을 아름다움과 기괴함이 공존하는 생산 현장으로 변모시켰다. 주요 설치물로는 49개의 금속 체인에 걸린 직물 조각 ‘피부(Skin)’, 재가동된 옛 크레인에 매달린 7미터 길이의 터빈, 그리고 분홍빛 액체를 뿜어내는 실리콘 튜브가 있다. 이 작품들은 공간의 과거와 현재를 잇는 동시에 인간과 기계, 연약함과 강인함 사이의 상호작용을 탐구한다.
관람객은 튜브에서 흘러나온 액체가 새로운 조각으로 변형되는 과정을 지켜보며, 이 생산 과정에서 공장의 생산 라인과 장인의 작업 현장을 동시에 떠올릴 수 있다. 또한, 직물 조각이 걸린 풍경은 석탄 광부들의 탈의실을 연상시키며, 과거와 현재, 그리고 인간의 흔적을 연결한다.
관람객은 신체 내부를 떠올리게 하는 이 공간에서 기이한 감정과 정서를 직면하게 되고, 이를 통해 인간성과 과거, 미래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얻게 된다.

테이트 모던 터빈홀 Open Wound전 사진출처: 테이트 © tate

테이트 모던 터빈홀 Open Wound전 사진출처: 테이트 © tate

테이트 모던 터빈홀 Open Wound전 사진출처: 테이트 © tate
2024년 만 36세로 최연소 작가로서 터빈 홀 전시에 나선 이미래 작가의 작품이 많은 관람객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기길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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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자료:
[사이트] https://www.tate.org.uk/visit/tate-modern 테이트 모던 홈페이지
[사이트] https://en.wikipedia.org/wiki/Tate_Modern wikipedia
[사이트] https://www.hyundai.co.kr/news/CONT0000000000162157 현대자동차그룹 뉴스룸 2024
[논문]테이트 모던 터빈홀의 ‘발견된 장대함’과 장소특정성의 확장 -시설 전용 과정, 공간적 특성과 예술 작품에의 영향 분석, 서울대학교 대학원 건축학과, 신윤정, 2018
[논문] BI(Brand Identity)를 통한 현대미술관 브랜딩 전략 연구 -모마(MoMA)와 테이트모던(Tate Modern)의 사례분석을 중심으로- 홍익대학교 미술대학원 예술기획전공, 최고은, 20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