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세의 미술과 몸; 중세인의 죽음과 부활
이번 칼럼에서는 중세인의 몸을 둘러싼 가장 중요한 이슈였던 죽음과 부활에 관하여 이야기하고자 한다.

Last Judgement, Nicolaus and Johannes, Tempera on wood, 288 x 243 cm
Second half 12th century
출처: https://www.museivaticani.va/content/museivaticani/en/collezioni/musei/la-pinacoteca/sala-i---secolo-xii-xv/nicolo-e-giovanni—giudizio-finale.html
중세시대 기독교가 사회의 중추적 이데올로기로서 자리 잡게 되면서 세계의 최후의 날에 그리스도가 재림하여 인류를 심판한다는 ‘최후의 심판(Last Judgment)’에 대한 믿음이 깊어졌다(사진 1). 이와 더불어 ‘천국’과 ‘지옥’의 기독교적 개념이 중세인들 사이에 확고해지면서 최후의 심판을 통해 사후의 인간은 천국 또는 지옥으로 가게 된다는 통념도 널리 퍼졌다. 중세 후기로 갈수록 최후의 심판을 주제로 한 시각예술작품들에서 이러한 중세인들의 관념과 믿음이 여실히 드러나는데, 대부분 작품의 중앙에 재림한 그리스도가 있고 그를 중심으로 천국과 지옥으로 가는 사람들의 상황이 묘사되어 있다(사진 2). 이러한 상황과 작품들은 중세인들에게 육체는 썩어 없어져도 영혼은 불멸하게 존재한다는 생각을 더욱 확고히 가지게 만들었고, 궁극적으로 인간의 몸은 육체와 영혼으로 분리된다는 심신이원론(心身二元論, Dualism)적 사고가 널리 퍼지게 만들었다.

Last Judgment mosaic, south facade of Saint Vitus Cathedral, Prague, Czech Republic
14th century
출처: https://en.wikipedia.org/wiki/Last_Judgment#/media/File:Cathedrale_Saint-Guy_Prague_facade_sud_mosaique_Jugement_dernier.jpg
중세인들은 최후의 심판과 심신이원론적 사고에 의거하여 죽은 자들의 부활을 믿었다. 세계 최후의 날, 죽은 자들을 포함한 모든 인간들은 그리스도 앞에서 심판을 받게 된다. 즉, 최후의 심판을 위해 모든 죽은 자들은 부활하게 된다. 인간의 육체는 죽음과 함께 영혼과 분리되어 부패하지만, 영혼은 최후의 심판의 날에 다시 소생한 육체에 깃들면서 몸은 완전히 부활하게 된다. 이와 관련한 내용은 성경에 다음과 같이 등장한다.
주 여호와께서 이 뼈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생기로 너희에게 들어가게 하리니 너희가 살리라. 너희 위에 힘줄을 두고 살을 입히고 가죽으로 덮고 너희 속에 생기를 두리니 너희가 살리라 ... 생기가 그들에게 들어가매 그들이 곧 살아 일어나서 서는데 극히 큰 군대더라.
(에스겔서 37장 중에서)
Resurrection of the Flesh, Fresco Chapel of San Brizio, Duomo, Orvieto, 1499–1502
출처: https://en.wikipedia.org/wiki/Luca_Signorelli#/media/File:Signorelli_Resurrection.jpg
이러한 성경의 내용은 중세 후기 이탈리아 화가인 루카 시뇨렐리(Luca Signorelli, 1441∼1523)의 <육(肉)의 부활>에 완벽히 재현되었다(사진 3). <육(肉)의 부활>을 보면, 나팔을 부는 대천사들이 땅속의 죽은 자들이 깨우고 죽었던 자들은 땅 밖으로 나오고 있다. 화면 상단의 나팔을 부는 두 천사 밑으로 부활한 자들과 부활하는 과정에 있는 사람들이 뒤섞여 표현되어 있으며, 그들의 육체는 적나라하게 벌거벗은 모습이지만 관능미가 느껴지지 않고 신성함이 느껴지는 몸으로 구현되어 있다. 이미 썩은 육체를 가진 이들은 해골의 상태로 땅속으로부터 나오고 있는데, 머지않아 그들의 뼈에 살이 붙어 살아생전의 상태로 부활하게 될 것으로 보인다. 완벽한 부활을 마친 자들의 환희에 찬 모습과 해골의 상태로 완전한 부활을 기다리고 있는 자들의 모습이 극명하게 대조되는데 이는 작품을 보는 이에게 ‘부활’의 의미를 더욱 강하게 각인되도록 만든다.
이러한 ‘몸의 부활’과 함께 중세 후기의 사람들에게 무엇보다 중요했던 이슈는 ‘죽음’이었다. 죽음이 인간의 삶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이슈라는 사실은 어느 시대라도 변함없겠지만, 죽음과 관련하여 예술의 한 유형인 ‘죽음의 무도’가 생겨난 것은 중세 예술 및 문화의 특별한 면모 중 하나였다. 죽음의 무도(Danse Macabre, Dance of Death)는 중세 후기에 유행했던 죽음의 보편성을 은유적으로 표현한 예술 유형이다(사진 4, 5).
The Dance of Death
by Michael Wolgemut, from the Nuremberg Chronicle of Hartmann Schedel, 1493
출처: https://en.wikipedia.org/wiki/Danse_Macabre
죽음의 무도는 회화나 시각예술 외에도 연극, 음악 등의 장르에도 광범위하게 나타났는데, 14세기 이후 유럽 사회는 프랑스의 백년 전쟁, 반복되었던 기근, 흑사병 등으로 인하여 그 어느 시기보다도 죽음의 공포에 휩쓸리게 되었으며, 이에 대한 반작용으로 죽음의 무도가 탄생하게 된 것으로 보인다. 죽음의 무도에서 해골은 ‘죽음’을 은유적으로 표현한 것인데, 중세 말기 넘쳐나는 시체들을 보며 중세인들은 자연스럽게 죽음을 떠올리지 않았을까 한다. 그러나 중세인들은 죽음의 무도를 통해서 죽음에 의기소침하게 매몰된 것이 아니라 죽음을 초월하고자 하는 욕망을 드러냈다고 할 수 있다.
Surmatants(The Dance of Death) by Bernt Notke from St. Nicholas' Church, Tallinn
End of 15th century
출처: https://en.wikipedia.org/wiki/Danse_Macabre
죽음의 무도의 이미지를 보면, 죽은 자 또는 죽음을 상정하는 해골들이 춤을 추고 있거나(사진 4), 해골들과 살아 있는 자들이 섞여서 춤을 추고 있다(사진 5). 춤을 추는 무리의 일원은 교황, 황제, 귀족, 노동자, 젊은이와 아가씨, 어린이 등 다양한 신분과 연령의 사람들이 섞여 있다. 이는 죽음은 누구에게나 필연적이고 살면서 추구하는 모든 것들이 허무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죽음은 누구에게나 찾아오고, 그것은 신분과 나이를 가려서 찾아오지 않는다. 그렇기에 항상 죽음에 대비하고 있어야 한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죽음의 무도 회화작품에서는 인물마다 의인화된 죽음이 건네는 메시지가 텍스트 형식으로 배치되어 있다. 황제의 예를 들자면;
황제여, 교만하고 고상하고 위엄 있는 자여.
그대는 지상에서 벌써 하늘나라를 가졌었노라.
착하고 예쁜 여자, 멋진 말들
이제 왕관을 속히 내려놓고
죽음의 춤을 준비하라.
농부의 예를 들면;
돌아서라, 농부여, 너도 함께 가야 하노라.
너희들의 그 오랜 풍습대로 춤을 추어라.
네 밭에 뿌린 너의 수고는 이제 헛것이 되었으니...
쟁기와 낫을 내려 놓으라...
산 자와 해골들이 섞여서 춤을 추고 있는 장면을 보면(사진 5), 해골(죽음)의 동작은 활기차고 능동적이며, 산 자들의 동작은 경직되어 있으며 수동적이다. 산 자들의 표정은 어딘가 모르게 어둡고 경직이 되어 있으며, 해골들의 주도적 움직임에 편승하여 억지로 춤을 추는 척하는 것 같은 느낌이다. 산 자의 신분과 권력이 높을수록 그들의 표정이 더욱 어두워 보이는 것은 착각은 아닐 것이다. 죽음의 세계로 건너갈 때 우리는 우리의 살아 있던 몸이 지녔던 그 어느 것도 가지고 갈 수 없다. 현세에서 가진 것이 많은 사람일수록 모든 것을 허무하게 만드는 죽음이 더욱 두려운 것일까. 두렵기에 죽음을 준비하는 모든 살아 있는 자들은 죽음의 무도를 추며 그 원초적 두려움을 극복해야 하는 것이다.
죽음의 무도는 16세기를 정점으로 예술 장르에서 점차 사라져 갔지만 18세기에 남겨진 작품들도 있으며, 현대에도 이러한 모티브를 활용한 작품들이 여전히 존재한다. 어차피 죽음이 누구에게나 도래한다면, 그것을 받아들여 초월할 것을 중세의 ‘죽음의 무도’가 기폭제가 되어 지금까지 이끈 것은 아닐까.
*이번 칼럼의 일부 정보는 ‘홍덕선, 박규현의 <<몸과 문화>>, 2016’과 진중권의 <<춤추는 죽음>>, 2010‘을 참고하였다.
이어지는 칼럼에서는 중세의 미술과 몸에 관한 이야기를 마무리하고자 한다. 이후 르네상스와 근대를 거쳐 현대까지 미술과 몸에 관한 이야기가 이어질 예정이다.
몸과 미술 이야기는 계속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