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주요는 2019년 <Love Your Depot>를 통해 국립현대미술관 ‘올해의 작가상’을 수상했다. 이 작업은 미술 시장에서 소외된 작품을 보관하고 전시할 수 있는 대안적인 수장고로 고안되었다. 제작, 운송, 보관, 폐기까지 작품 활동의 모든 과정을 환기하며, Depot(창고)는 일정 기간 작품을 보관하여 폐기를 결정하는 가치판단을 보류했다. 프로젝트에 참여하는 팀디포(TeamDepot)는 작품들을 자료화하고 다양한 홍보 콘텐츠를 제작했으며, 작가가 작품의 폐기를 결정하는 경우 그 해체와 분해 과정 또한 대행했다. 이는 얼핏 미술 제도가 가진 구조적 문제를 지적하는 사회적인 작업으로 보이지만, 사실 작가의 개인적인 사연에서 시작되었다.
이주요는 2004년 네덜란드 라익스 아카데미(Rijksakademie) 레지던시에 참여했다. 2005년 레지던시에서의 마지막 전시가 끝난 후, 작품들은 갈 길을 잃었다. 작품들은 미술 시장에서 소위 말하는 미술적 ‘가치’를 가지고 있지 않았고, 무엇보다 보관할 장소가 없었다. 결국 폐기 직전의 상황에서 이주요는 이를 다섯 개의 카트에 실어 임시 거처를 오가며 수명을 연장하고자 했다. 그에게 ‘카트’는 다음 거처까지의 불안한 상황들을 드러내면서, 동시에 폐기를 유예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었다. 카트가 확장된 것이 바로 2019년의 ‘Depot’라고 할 수 있다.
다시 2005년의 이야기로 돌아가, 다행히 작품들은 한국에서의 《이주요전》(2006)을 비롯해 여러 전시를 거치며 생명을 이어갈 수 있었다. 그러다 이주요는 기발한 생각을 떠올린다. 보관할 장소가 없는 작품들을 하나하나 포장해 관람객들에게 위탁하자는 것이다. 작품 위탁 프로젝트는 2007년 계원디자인예술학교 갤러리 27에서 열린 전시 《십 년만 부탁합니다 Ten Years, Please》(2007)에서 실현됐다. 카트에 실려 네덜란드로부터의 긴 여정을 거친 작품들은 이 전시를 마지막으로 관람객들에게 10년간 위탁되었다. 관람객은 맡고 싶은 작품을 지원서로 작성해 전시장에 마련된 노란 상자에 넣고, 작가는 지원자와의 친분, 보관 환경 등을 고려해 위탁 보관자를 선정했다. 보관자는 작품, 위탁 보관증과 함께 하나의 파일을 받았다. 이는 작가가 직접 작성한 글과 사진기록으로 구성되었으며, 작품을 제작할 당시의 상황과 감정을 그대로 남기고 있어 일종의 일기나 편지처럼 보이기도 한다. 보관자와 작가, 둘만이 공유하는 무척 내밀하고도 친밀한 이야기인 것이다.

‘편지’라는 소재를 작품에 사용한 다른 작가가 있다. 얼마 전 갤러리조선에서 개인전 《휘슬러스 Whistlers》를 개최한 박보나이다. 그는 예술과 삶, 노동을 주제로 작업을 이어오고 있으며, 본 전시에서는 특히 탈성매매여성과 폭력 피해 여성들을 지원하는 단체 ‘WING 윙’과 관련해 여성들의 우정을 다루었다. 전시 작품 중 〈휘휘파파 Phwee Phwee Fweet Fweet〉(2024)는 여성들이 친구에게 쓴 손 편지 여섯 통을 두 명의 배우가 읽는 영상 작업이다. 한 배우가 다른 배우의 귀에 편지를 속삭이면, 그 배우는 들은 대로 내용을 발화한다. 관람객은 발신인과 수신인이 공유하고 있는 사적인 편지의 정확한 내용과 맥락을 알 수 없다. 다만 미안함, 고마움, 애틋함의 감정이 입에서 귀로, 귀에서 입으로 전해지며, 미처 부치지 못한 편지를 듣는 것 같아 안타까운 마음, 타인의 편지를 엿보는 것 같은 비밀스러운 기분이 교차한다.

이주요의 <십 년만 부탁합니다>(2017)는 예정대로 10년 후 작가에게 돌아왔다. 위탁되었던 작품들은 연극의 형태로 남산예술센터에서 공연되었다. 무대 중앙에 위치한 작품들 뒤로, 지난 10년간의 세월을 소개하는 영상이 상영되었다. 작품들은 형태가 변하고 낡아 오랜 세월의 흔적이 가득 묻어 있었다. 이주요의 작품들은 미술 제도에서 가치를 인정받는 예술 작품의 의미를 넘어, 애정이 가득 담긴 애틋하고 내밀한 편지가 되어 보관자에게 전해졌다. “잘 부탁합니다.”라는 무언의 메시지와 함께. 보관자들은 처음에는 작품의 물질적이고 실용적 가치를 찾았지만, 작가로부터 전해진 작품에 대한 애틋함, 그리고 잘 보관하겠다는 약속을 떠올리며 긴 세월을 작품과 함께 보냈다. 이렇듯 오갈 곳 없이 폐기를 앞두고 있던 작품들은 작가의 편지를 통해 새로운 의미를 얻었다. 작가와 관람객 사이를 연결하는 마음의 기록이자, 한 개인의 비밀스러운 경험을 타인에게 공유하는 매개로서, 친밀한 기억으로 간직된 것이다.
참고자료
이주요. 『Of Five Carts and On: Journey, Suspension, Hesitation』. SAMUSO: Space for Contemporary Art, 2009.
국립현대미술관. 『올해의 작가상 2019』. 국립현대미술관문화재단, 20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