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을 향하는 삶
1998년 천경자가 기증한 93점의 작품으로 구성된 ‘천경자 컬렉션’을 바탕으로 여러 전시를 선보여온 서울시립미술관은 《영혼을 울리는 바람을 향하여》을 통해 이전에는 ‘여행풍물화’로 분류했던 천경자의 기행회화를 중점적으로 소개한다. 컬렉션의 상당수를 차지하는 기행회화는 천경자가 1969년부터 30여 년 동안 수차례 떠난 해외여행에서 보고 느낀 것을 담아낸 채색화로, 그의 작품세계에서 중요하게 다뤄지는 천경자 회화의 독립 장르이다.(1) 천경자는 콩고에서 원색의 매력을 깨닫게 되어 채색화풍을 개발하는데 도움을 얻었고, 고대 이집트 문명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알려진 자전적 여인상의 정면성과 금빛 눈동자에 대한 영감은 1974년 아프리카 여행 중 마주한 것이다.(2) 이외에도 여인과 꽃을 주제로 한 그림들은 1970년대 남태평양 여행에서 본 타히티 여인들이 머리와 목에 두르고 다니던 지파니 꽃과 연관이 있는 것을 알려졌다.(3) 전시는 천경자가 타히티, 파리, 이탈리아, 인도네시아, 인도와 중남미 등 세계 곳곳을 여행하며 그려낸 기행회화를 ‘꿈과 바람의 여로’ 섹션에서 “당시 시대적으로 쉽지 않았던 해외여행이라는 도전을 통해 작가는 단순히 작품의 소재를 얻은 것뿐 아니라, 자기 내면과 작품세계를 확장해 나간다.”라고 소개한다. ‘예술과 낭만’ 섹션에서는 문학 속 배경이 되는 장소나 문호의 생가, 관람한 공연에 대한 인상을 표현한 작품을 선보이며 한때 배우를 꿈꾸기도 했던 작가의 문화예술에 대한 깊은 관심을 드러낸다. 이러한 부분은 1990년대까지 이어졌던 작가의 개인사와 여행을 환상, 낭만, 원시성과 같은 주제와 연관 짓고, 작품의 모티브나 전개가 작가 자신에게서 비롯된 것으로 여기는 천경자 작품세계에 관한 연구를 떠올리게 만든다.(4) 전시는 작가가 1986년에 쓴 여행 수필의 제목이기도 한 전시명 “영혼을 울리는 바람을 향하여”를 두고 한곳에 머물지 않고 경계 없이 이동하는 ‘바람’을 자신만의 길을 걸었던 천경자의 인생과 작품세계를 은유한다고 언급하며 작가의 삶과 작품세계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음을 드러낸다.

격변의 시간들
천경자의 삶은 그와 동시대를 살았던 여성 작가 22명의 작품과 자료를 선보이는 전시 《격변의 시대, 여성 삶 예술》(이하 《격변의 시대》)의 시작점이 되는 중요한 요소이다. 전시는 천경자라는 개인의 삶을 되짚어보며 시작된다. 일제강점기에 태어나 1943년과 1944년 조선미술전람회(이하 조선미전)에서 입선한 후에 평탄치 않았던 결혼 생활과 가족의 죽음을 겪던 중에도 자신의 고통을 그림을 그리며 견디던 1950년대, 홍익대학교 미술대학에서 제자를 가르치며 대한미협전에서 대통령상을 수상하고, 대한민국미술전람회(이하 국전)에서 특선하며 입지를 다지던 시기 등과 같은 천경자의 시간을 언급하며, 이와 평행을 이루고 교차하는 다른 시간들을 소환한다. 1전시실에서는 ‘격변의 시대’라는 이름으로 부르는 일제강점기(1909–1945), 8·15광복(1945), 한국전쟁(1950–1953), 4·19혁명(1960), 5·16군사정변(1961), 군사독재(1961–1979), 12·12군사반란(1979), 5·18 광주민주화운동(1980), 신군부 정권(1980–1993) 등과 같은 대한민국 사회의 흐름이, 일제강점기 시대의 미술교육과 조선미전, 광복 이후의 미술교육과 국전은 ‘사회와 미술제도’라는 제목과 함께 2전시실과 3전시실에 펼쳐진다. 1950년대부터 1980년대까지 결성된 동양화 단체는 4전시실에서, 작가의 연보와 도록과 구술 채록 등의 자료는 복도에 놓인다. 개인의 삶보다는 거대하게 다가오는 사회와 미술계의 흐름 속에 전시는 천경자를 포함한 1950년대 이전 출생 작가 중 ‘격변의 시대’를 살아냈고, 조선미전과 국전에 입상하거나 괄목할 만한 작업을 지속해 온 작가, 국공립 미술관 소장 작가이거나 추가적인 연구가 필요한 작가 23명의 작품을 개별적인 연보와 함께 내어 보인다. 사회와 한국 근현대 미술의 흐름, 작가의 작품과 삶을 동시에 살피고자 하는 《격변의 시대》의 시도는 “사회, 개인의 삶, 예술은 결코 분리될 수 없기에”, 가사와 양육, 가부장적인 사회에 가려져 그동안 우리 앞에 모습을 드러내기 어려웠던 여성 작가를 가시화하기에 의의를 갖는다.

멈춰 서는 자료
처음으로 공개되는 천경자의 <꽃과 병사와 포성>과 <옷감 집 나들이>, 정찬영, 박래현, 원문자, 금동원, 이숙자 등 참여 작가의 조선미전 및 국전 수상작만큼 전시에서 존재감을 보이는 것은 작품 옆에 부착된 자료이다. 작가 연보, 미술제도의 흐름과 수상작을 정리한 연대기, 동양화의 시기별 인식과 정의에 대한 변화를 살펴볼 수 있는 기사 등으로 이루어진 자료는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천경자와 동시대를 살았던 여성 작가의 작품세계를 사회의 흐름과 미술사적 의의, 개인의 삶의 관점에서 바라보게 한다. 하지만 이러한 조명은 종종 자료의 방대한 양 앞에 멈춰 서게 된다. 이때 《격변의 시대》가 제시하는 자료는 역사의 본질은 서사라는 역사서술의 형식에 있다고 여기는 헤이든 화이트(Hayden White)가 언급한 연보와 연대기와 같은 인상을 준다. 그에게 연대순으로 정리한 사건을 목록인 연보와 사건을 순서대로 기술하는 연대기에는 서사성이 결여되어 있다. 연대기의 시작은 기록의 시점일 뿐이고, 연대기의 끝은 시간상의 종료를 의미하기에, 아무런 이야기 형태도 보여주지 못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생각은 역사서술은 단순히 과거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를 서술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의 의미를 무엇인지 밝히는 데 있다는 사고방식에서 출발한 것이다.(5) 물론 전시의 자료는 “한국 현대미술의 선구자인 천경자 작가를 기리는 동시에 '격변의 시대'를 살아내고 다양한 작품으로 한국 현대미술의 발전에 이바지한 정찬영, 이현옥, 정용희, 배정례, 박래현, 천경자, 박인경, 금동원, 문은희, 이인실, 이경자, 장상의, 류민자, 이숙자, 오낭자, 윤애근, 이화자, 심경자, 원문자, 송수련, 주민숙, 김춘옥, 차명희 작가의 작품세계를 어떤 경계도 제한도 없는 동시대 흐름 속에서 재조명하고자 합니다.”라는 이야기를 구축하고자 선택적으로 재구성되고 배치된 것이기에, 완전히 서사성이 결여된 것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그렇다면 자료가 전시의 서사를 완성하고자 하는 동시에 이를 지연시키는 이유는 무엇일까? 자료의 시각화가 부족했기 때문일까? 미술관에서 동시에 진행 중인 수장품 주제 기획전 《끝없이 갈라지는 세계의 끝에서》(2024.08.22~2024.11.17)이 ‘SeMA 소장품의 동시대성’과 ‘소장품의 여성 작가 비율’을 표와 그래프를 통해 시각화한 것처럼 자료를 한눈에 들어오게 구성하지 못해서일까? 《격변의 시대》의 자료에서 보다 시각화가 이루어져야 하는 부분은 내용 자체가 아닌, 결코 분리될 수 없다고 말한 사회, 개인의 삶, 예술 사이의 연결고리다. 이 세 부분은 역사적 사건이 일어나고 종료된 시기, 작가가 학교를 입학하거나 작품이 입선한 연도, 국전 동양화부가 구상, 비구상 부문으로 분리되던 때처럼 연월일로 구분될 수 있는 경우가 많아 자료에 기입되었을 때, 이들의 시간이 현재까지 영향을 주고 있음을 드러내기보다는 과거에서 발생해, 과거에서 끝나는 듯한 느낌을 자아낸다. 1950년부터 1990년까지 경향신문, 동아일보, 조선일보 등에 실린 동양화와 한국화 관련 기사를 통해 동양화의 흐름을 정리한 자료는 4개의 시기별로 재구성하는 시도를 거쳤음에도 다루는 내용의 범위가 지나치게 넓어 내용을 파악하는데 어려움이 있다. 자료를 읽어내리는 것은 관람자의 몫이지만, 작품과 ‘자료’를 전시한다고 자신을 정의하는 전시는 이에 대한 접근을 수월하게 할 의무가 있다.

여성 삶 예술
‘여성 삶 예술’은 5전시실에서 만나볼 수 있는 천경자의 작품 9점과 그의 홍익대학교 제자 오낭자, 류민자, 이숙자, 이화자를 비롯한 참여 작가들의 대표 작품으로 구성된 섹션이다. 천경자와 관련된 참여 작가들의 자료가 전시된 복도를 제외하면 작품을 볼 수 있는 마지막 섹션으로, 자료보다는 작품을 집중적으로 선보인다. 가사와 양육이라는 이름의 여성의 의무를 다해야 하는 현실과 그림을 그리는 작가라는 자신이 선택하고 갈망하는 삶 사이에 놓였던 여성 작가들을 전시는 “이들은 어떻게 해서든지 그림을 그렸고, 단체활동으로 전시를 이어갔고, 보수적이고 정형화된 《국전》 양식에서 벗어나 결국 가기 다른 조형언어로 자기 삶과 긴밀하게 연결된 독자적인 작품 세계를 구축”했다고 바라본다. ‘여성 삶 예술’ 섹션은 천경자의 작품으로 시작된다. 천경자가 어릴 때 자주 방문한 포목점에서 본 비단 옷감이 그려진 <옷감 집 나들이>, 이탈리아와 아프리카를 여행한 뒤 그린 <이탈리아 기행>과 <초원>, 1950년대 초 이후 뱀을 그린 후 다시 뱀을 소재로 한 작품 <향미사>, 대표작으로 손꼽히는 <내 슬픈 전설의 22페이지> 등을 시작으로 보리밭과 여성 누드를 소재로 한국적 자연을 표현하는 이숙자의 <이브>와 한지, 모필, 먹, 채색 안료 등이 물과 만났을 때 파생되는 기법을 연구했던 원문자의 <사유 공간> 등을 지나 천경자의 제자인 이화자의 신작 <좁은 문 가는 길>을 끝으로 마무리된다.(6) 이처럼 우리는 사회가 요구하는 여성과 아내로서의 삶이 아닌 화가로서의 활동을 이어나간 작가들을 마주하며 여성, 삶, 예술을 다양한 방식으로 연결 지어 생각해 보게 된다.
<좁은 문 가는 길>을 마지막으로 보고 나오며, 사생에 근거한 채색화조화로 많은 주목을 받았던 정찬영을, 1939년 절필을 결심했던 이 작가를 2전시실에 이어 5전시실에서도 만날 수 있었다면 여성 작가로서의 삶을 보다 다채롭게 보여줄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부유한 가문에서 신식 교육을 받고 자란 ‘참한’ 여성 화가를 칭하는 말인 규수화가로 불렸던 정찬영의 갈등은 작가 연보에서 기재되어 있다.(7) 제10회 조선미전에서 여성 작가 최초로 수묵채색화 부문 특선을 수상한 <여광>이 ‘신혼 기념 제작품’으로 언론에 소개된 것처럼 정찬영은 창작 활동은 결혼 혹은 개인사와 함께 다뤄졌다. 기자의 질문에 “막상 결혼하고 나니까 그림 그리는 것을 등한시한다는 것보다도 아이까지 있어 그런지 정신을 집중하기에 퍽 어렵고 그림 그릴 기분조차 얻기가 퍽 어려워요. 그림 그리는 데는 첫째 기분에 관계가 제일 크니까요.”, “공연한 것을 시작했다고 혼자 후회도 해봅니다. 참말이지 밤이면은 밤잠도 못 자고 애쓰는 것을 누가 알겠어요? 살림 외국같이 좀 간편했으면! 참말이야요. 외국에서야 가정 부인 아니라 년로해진 이들이라도 다 화가로 출세하지 않아요? 처음 처녀 때 출품하시든 것과 지금 그림과 비교하시면 어떠십니까?”라고 대답한 정찬영의 말은 현재까지도 유효하게 다가온다. 천경자라는 하나의 삶으로부터 여성 작가 22명의 삶과 작품을, 격변의 시대를 가시화하는 전시의 마지막에 정찬영의 말을 떠올려보면 어떨까. “사생할 동안 한 달 나마는 창경원 속 공작새 앞에서 사람은 모여서고 땀도 많이 흘리었습니다.”라는 여성-삶-예술을 이야기하는 말을.
참고자료 1) 김기리, 「천경자 기행회화 연구」, 명지대학교 일반대학원 미술사학과 박사논문 (2019), 21쪽. 2) 김미영, 「천경자의 세계여행이 여성인물화에 미친 영향 - 수필 분석을 중심으로」, 『한국문화』 제75호(2016), 78쪽 3) 위의 논문, 74쪽. 4) 조수진, 「한국 여성미술 연구사: 근대에서 1970년대까지」, 『인물미술사학』 제16호(2020), 279쪽. 5) 안병직, 「픽션으로서의 역사: 헤이든 화이트(Hayden White)의 역사론」, 『인문논총』 51권(2004), 39-40쪽. 6) 조수진, 앞의 논문, 281-282쪽.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