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상 너머에서 세상으로 첫발을 내딛는 순정한 것들에 대해 생각한다. 흉내 낼 수는 있을지 몰라도 결코 먼저 만들어 내지는 못할 어떤 것에 대한 무한한 동경, 모난 질투심. 창조는 기원이 없는 것들의 탄생이고 세상은 그 처음의 첫 숨으로 시작된다. 하지만 시원始原의 창조는 불가능의 영역이고, 그저 살짝 비트는 잔재주만 있는 지루한 이들에게 창조의 시간은 멀고 먼 태고의 낯선 이야기일 뿐이다. 그. 러. 나.
<Chirping of Little Waver>, Acrylic guache on wood panel, 91×122, 2022
모양새가 날개를 닮았는데, 그렇다고 꼭 날기 위해 필요한 것이라고 말할 수는 없겠다. 그저 눈부신 자개를 이어 하얗게 빛나는, 늘어진 피부일지도 모른다. 섬세한 눈이 보이지만, 저것 또한 하나의 무늬일지 모른다. 눈에 보이는 대로, 의심한 적 없는 지금까지의 방식대로 판단한다면 결코 알 수 없는 다른 방식의 생명. 이름은 있을까. 감각이 가능한, 진화의 과정 중에 생겨난 경우의 수 중 하나일까. 아니, 세상 어떤 기운이 하나의 형체로 모인 유일한 생명의 모습은 아닐까. 벌레의 또 다른 벌레, 새의 또 다른 새가 아닌 순전한 생명 기운으로의 첫 번째 생명체. 아직 이름 지어지지 않은, 오롯한 기운만으로 형체를 만든 생명 기운의 속살. 작가는 형체를 갖추지 못한 감정의 말캉한 것들을 모아 단단하고 반짝이는 형태를 만들어 낸다. 섬이라는 공간이 가진, 닫혀있지만 그래서 더욱 왕성한 생명력을 함축한 장소에서 마주하는 생의 다양한 기운들을 체험하며 모양을 만들어 낸다. 섬으로 옮겨간 작가는 명명자名銘者로서, 명료하게 살아 움직이는 기운들을 맞아 생명의 이름을 지어 환대한다. 자연의 감정과 기운과 눈에는 보이지 않았지만 늘 존재하고 있었던 것들이 생물로서 이름을 얻어 살아 움직인다. 모든 것은 무엇이든 될 수 있고, 무엇이든 아무 것도 아닌 것이 될 수 있디.
<가여운 것들>, 요르고스 란티모스 감독, 엠마 스톤 주연, 2024
영화 속 벡스터 박사(웰렘 데포)는 뛰어난 외과 의사이자 뛰어난(!) 외과술로 망가진 육체를 가진 괴팍한 노인이다. 그의 주변엔 오롯한 창조가 아닌 실패한 창조의 찌꺼기들이 함께하고 있다. 서로 다른 생물들의 기이한 조합, 망가지고 뒤틀린 외형의 생명체들. 우리는 우리가 모르는 것들, 우리와 다른 것들을 일컬어 ‘괴물’이라 불렀다. 프랑켄슈타인이 괴물이 된 이유는, 알고 있던 것들의 낯선 조합 탓은 아니었을까? 조각의 짜깁기가 아닌, 순수하게 새로이 창조된 어떤 것이었다면, 그 창조물에도 혐오스러움이 존재했을까? 창작된 생명(벨라/엠마 스톤)은 하나의 육체 속에 공존하는 모녀이자 육체와 정신의 성장 속도가 뒤틀린 상태로 세상을 겪는다. 완벽하게 어긋난 상황과 속도로 세상에 대한 호기심을 광포하게(!) 드러내는 창조물은 자발적으로 세계를 경험하며 진정한 창조물로 거듭나기까지 어떤 상황도 피하지 않고 멈추지 않는다. 육체적 쾌락과 스스로 받아들인 고통 사이에 우열도 서열도 없다. 창조물에서 스스로 창조자가 되기까지 끊임없는 도전의 연속이다. 창조된 어느 것도 삶은 공짜로 얻어지는 천부적 지분이 아니라 곤충의 탈피처럼 제 살을 찢고 나와 거머쥐는 피투성이 웃음이었다. 창조자도, 창조물도 생을 거저 얻은 것들만이 가여운 것들이다.
<깜깜한 어둠 속에서>, 고향옥 옮김, 트리앤북,2022
깜깜한 어둠 속에서 눈을 뜬 존재는 자신이 무엇인지 모른다. 내면에 꿈틀거리는 어떤 하나의 기운 혹은 어떤 하나의 형태가 인식되는 잠깐, 자신이 무엇일지를 재빠르게 결정한다. 무한한 가능성 속에서 오직 하나의 가능성에 몰입하는 순간, 목적은 없고 방향만 존재하는 생명의 기운이 눈을 뜬다. 생명의 기운은 경계 없이 자신을 정의定意하고, 죄책감 없이 앞선 정의를 번복한다. 진화의 계통과 연결은 의미가 없어지고, 오로지 상상만으로 타자와의 거리는 좁혀지고, 생략된다. 생명계의 넓은 그물 속에서 폭발하듯 사방으로 흩어지는 생의 기운은 모든 것을 끌어안고 다시 어둠 속으로 잦아든다. 생명은 반복되어 돌고 돈다. 우리가 어떤 목적을 가지고 죽기 살기로 달려가는 하나의 길은, 틀림없이 어리석고 오만한 길이라고. 어떤 생명도 하나의 형태만으로 규정할 수 없는, 상상은 고정되어서는 안 되는 것이라고 말한다. 생은 무한의 바다에서 끊김 없이 순환하고 반복되는 무궁한 가능성이며, 결정의 순간은 바삐 서두를 필요가 없는 지연 가능한 유희의 시간이라고 속삭인다.
입이 없다는 팅커벨(동양하루살이)은 살아있는 짧은 시간 동안 오직 다음 세대를 세상에 남기고 죽는다. 입이 없으니 위가 없고 항문도 존재하지 않는다. 이 생물은 아무 영양가도 없어 천적이 없다. 오로지 짝짓기만을 위해 세상에 나온 생명체다. 이것은 그저 진화의 숱한 방법적 경우의 수 중 버리는 수에 불과할까? 이 오류는 어떤 의미가 있을까? 아니, 이 당당한(!) 존재 이유는 과연 오류일까? 어쩌면 세상은, 정당한 모든 생명체 위에 가장 심각한 오류로서의 인간이 창조자의 흉내를 내는 거대한 무대에 불과한 것은 아닐까? 상상이 파도를 타고 넘나든다. 우리는 무엇이었을까, 우리는 무엇이 되고자 했었을까.
<Green and Cat>, Acrylic on wood panel, 130×162, 2016
모든 경우의 수가 열려있는 무한의 공간에서 어디에도 기대지 않은 상상을 끌어내는 것이 예술이라면, 그 방향은 고개를 돌리는 것만으로도 격한 바람과 싸워야 할 전쟁터일지 모르겠다. 생김새만 다른 게 아니라 존재 이유마저 다른 다양한 생명의 집합, 불현듯 이 세상이 바늘 하나 더 꽂을 틈조차 없이 꽉 들어찬 빽빽한 밀도의 생명 세상이라는 생각에 숨조차 조심스러워진다. 모든 것을 상상할 권리, 무엇이든 될 수 있는 자유. 그러나 결과에 대한 욕망으로 스스로 가둔 가능성. 나는 나의 고양이도 초록으로 색칠하지 못한다. 눈에 보이는 사실, 그 경계를 뛰어넘지 못하고 주저하는 소심함이 팔꿈치를 잡아챈다. 그러나 이제 내게도 초록의 고양이가 생길 것이다. 마침표로 끝나는 어떤 결말이 아니라 물음표로 끝나는 열린 틈새가 그 초록 고양이를 내 곁으로 불러들일 테니 말이다.
<Live Painting 2024.4.4.>, arcylic vinyl paper on canvas, 200X460, 2024
all images/words ⓒ the artist(s) and organization(s)
Enquiry for Registration / Advertisement / Article Registration: support@artlecture.com Purchase or Sales Enquiry: support@artistnote.com
*Art&Project can be registered directly after signing up anyone. *It will be all registered on Google and other web portals after posting. **Please click the link(add an event) on the top or contact us email If you want to advertise your project on the main pag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