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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영화 멜랑콜리아에 나타난 행성궤도
[그림](좌) 멜랑콜리아행성의 궤적 [사진](우) 멜랑콜리아행성 궤적 인터넷화면 (영화 스크린샷)
영화 멜랑콜리아의 프롤로그 장면은 슬로우모션과 알레고리를 통해 8분이라는 긴 시간동안 이 영화가 어떤 영화인지 구체적으로 보여준다. 가장 많은 컷이 할애된 장면은 거대한 멜랑콜리아 행성과 지구의 충돌이다. 이 장면은 실제로 두 행성의 충돌을 통해 영화의 운명적이고 재앙적인 분위기를 설정한다. 그리고 후기 낭만주의의 트리스탄과 이졸데에 의한 바그너 서곡이 배경음악으로 사용되면서 두 행성간의 운명적인 충돌에 대한 과정을 단계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두 행성의 충돌은 우연이 아닌 지구가 어떤 이유로 인해서 마치 누군가에게 심판을 받는 정서가 더 지배적으로 그려진다. 영화는 그 배경으로 시오랑(Cioran), 마리네티(Marinetti), 고트프리트 벤(Gottfried Benn)과 같은 작가들이 20세기에 제안한 염세주의 경향을 지닌 작가들의 사유를 차용한 것으로 보인다. 주인공 저스틴은 영화 말미에 우리(지구)의 타고난 결함 때문에 인간은 멸망해야 한다는 충격적인 대사를 함으로써 영화의 중심 인물인 저스틴의 철학적 사유와 맥을 같이 한다.
위의 그림처럼 지구를 향해 다가오는 멜랑콜리아 행성은 지구를 극적으로 비껴가고 충돌하지 않게 되면서 사람들을 안심시킨다. 서구과학의 상징으로 등장한 천문학자로 클레어의 남편으로 나오는 존 (키퍼 서덜랜드)은 행성의 모든 정보를 부인과 처제 저스틴에게 알려주면서 밤하늘의 대단한 쇼가 될 것처럼 자신감에 차 있다. 하지만 행성이 궤도를 하루 사이에 바꾸면서 전속력으로 지구를 향해 오는 것을 발견하자 약을 먹고 스스로 목숨을 끊어버리는 무책임한 모습을 보인다. 감독은 존의 어이없는 죽음을 통해 서구과학지식의 나약한 모습을 비유적인 표현하였다. 그의 값비싼 천체 망원경은 오히려 공포 앞에 나약한 인간으로 추락하게 만든 도구가 된 셈이다. Allen, R. H.(1963)와 그의 저서 "별 이름: 그들의 전설과 의미"에 따르면 안타레스는 "권력, 독립성 및 위험의식"을 상징한다고 한다. (1) 어찌보면 안타레스는 우울증을 유발하고 죽음에 이르게 하는 죽음의 춤과 연관될 수 있는 속성을 가진 것으로 보인다. 존은 멜랑콜리아 행성을 안타레스 별을 숨기고 있는 푸른 가스 거인으로 표현한다. 멜랑콜리아는 수백 광년 떨어진 것으로 나오는데 갑자기 몇 시간 만에 달보다 큰 크기로 등장하는게 과학적으로는 맞지 않는 내용이긴 하다. 더군다나 행성이 궤도에서 벗어나 태양계를 가로질러 곧장 지구로 돌진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이러한 점을 고려하면, 이 영화는 전통적인 지구 충돌이나 종말을 다룬 SF영화와는 다른 접근을 보여준다. 오히려 이 영화는 자연의 법칙이 위반될 정도로 인간의 심리에 대한 메타포가 중심이 된다. 영화가 과학적 정확성보다는 인간 심리와 자연 법칙의 위반에 초점을 맞춘다는 점에서, 영화의 기호적이고 메타포적인 접근 방식을 강조한다고 볼 수 있다. 또한, 영화는 죽음이 자본가나 지식인에게 공평하다는 사실을 말하고 있다. 죽음은 인류에게 불가피한 것이고 동시에 모두에게 평등하다. 그 죽음은 응당 비논리적이며, 늘 상식과 예상을 뛰어넘고, 인간이 쌓아온 지식과 문명의 한계 그 위에 존재한다는 것을 드러낸다. 그렇다면 영화에서 이러한 궤도를 일컬어 영화에서 굳이 ‘죽음의 댄스’라는 표현을 쓴 이유는 무엇일까?
2. 죽음의 댄스(Dance of Death)
중세 유럽사회는 지속되는 기근, 흑사병과 백년전쟁, 십자군전쟁을 빼고 이야기 할 수 없다. 죽음의 공포는 참회와 종교적 열망을 증가시켰지만 동시에 죽음이라는 것과 상반되는 춤을 가져옴으로써 차갑게 위로를 하는 것을 택하였다. 오히려 죽음을 필연적으로 받아들이고 준비하게 하기 위해서 죽음의 댄스를 만든 것이 아닌가 생각이 든다. 많은 중세의 문학과 그림에서 흑사병이 그저 평범한 일상의 일부가 될 정도였다. 죽음이 일상이 되는 날들이 계속되면 죽음과 친근해지는 것일까? 죽음의 댄스(2)는 이러한 유럽사회에서 나온 관용적 표현이 되어 중세말기에 유행하는 죽음의 보편성을 알레고리로 묘사되어 회화, 조각, 목판화 등에서 이러한 모티프가 자주 등장하는 것을 볼 수 있다. 대표적으로 이러한 테마의 작품들은 베른의 죽음의 댄스 (Bern Charnel House)(스위스), 클루지의 죽음의 댄스 (St. Mary's Church in Clusium)(루마니아), 할레의 죽음의 댄스 (The Dance of Death in Lübeck)(독일), 파리 샤를레의 죽음의 댄스 (Danse Macabre of the Charnel House of the Holy Innocents)(프랑스) 등이 있다.
[그림] 베른트 노트케: 세인트루이스의 서머타넌트(토텐탄즈) 15세기 말 탈린 니콜라스 교회(오늘날 에스토니아 미술관에 있음)
이 영화에서 '죽음의 댄스'는 종말과 인간의 무력함을 상징한다. 이 장면에서 댄스는 인간의 삶과 죽음, 그리고 운명에 대한 깊은 성찰 그 자체가 된다. 저스틴은 1장에서 극도의 불안증세를 보이지만 행성이 다가오기 시작하는 2장에서는 매우 침착하고 날카로운 예지력을 보이면서 안정되고 관조하는 캐릭터로 변화한다. 이는 인간 존재의 유희적이고 운명적인 측면을 직시하는 것으로, 감정의 동요 없이 평정상태로 변화하는 것을 나타낸다. 죽음의 댄스를 같이 추고 있는 존재로 볼 수 있다. 영화에서 죽음의 댄스는 종말과 인간의 무력함, 운명에 대한 상징으로 해석된다. 저스틴의 변화하는 캐릭터는 인간 존재의 유희적이고 운명적인 측면을 탐구한다.
멜랑콜리아 행성은 지구와 비교했을 때 비교자체가 안 될만큼 큰 크기를 가졌다. 영화에서 이 행성의 이름이 멜랑콜리아라고 불리는 것은 저스틴의 심리적인 우울에 대한 압박감을 형상화 하기 위한 것이다. 우리가 그 행성을 피할 수는 없다는 것은 마치 신체를 짖누르는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우울증의 무게와 강도, 세기를 행성의 크기와 피할 수 없는 죽음의 공포로 나타내기에 적합했을 것이다. 그리고 영화에서 유일하게 죽음의 댄스를 춘 인물은 저스틴 한 사람 밖에 없다.
3. 행성접근측정 개인 인터페이스 (feat. 레오)
[사진] 다가오는 행성의 거리를 측정하는 도구 (스크린샷)
영화 멜랑콜리아에서 행성이 근접할 시기에 클레어의 아들은 작고 원시적인 측정 디바이스를 고안한다. 나무에 철사를 고정시킨 단순한 장치이지만 철사로 원을 구부려서 크기를 조절할 수 있어 행성이 얼만큼 다가오는지를 알 수 있다. 와이어 안에 들어오면 지구와 멀어지는 것이고, 반대로 와이어 바깥으로 행성이 보인다면 지구에 근접하는 원리이다.
[그림] 클레오의 아들 레오가 철사와 나무를 가지고 만든 행성 거리 도구 고안
원근법은 시각적 공간을 구조화하고 질서화하는 방법으로, 관찰자의 시점에서 사물을 배열한다. 이는 우리가 세계를 인식하고 해석하는 방식에 영향을 미친다. 원근법은 현실을 정확하게 표현하려는 시도이지만, 동시에 관찰자의 주관적 시점에 의존한다는 한계를 가진다. 이러한 맥락에서 클레어의 아들이 만든 도구는 원근법의 원리를 반영한다. 이 도구를 통해 행성의 접근을 관찰하는 것은 현실을 이해하려는 시도를 상징하며, 이는 동시에 행복과 불안, 재앙의 예고를 모두 내포하고 있다. 원근법은 객관적이고 표준화된 측정 도구로 발전했다. 하지만 이 영화에서는 주관적인 시점이 되면서 객관성을 상실한다. 객관적 지표와 믿음이 붕괴되면서 어떤 사람은 자살을 하고 어떤 이는 극도의 공포의 늪에 빠지게 된다. 표준화의 붕괴가 우울증의 심리를 드러내는 역할을 수행하는 순간이다.
원근법은 객관적이고 표준화된 현실 표현의 도구로 발전했지만, 이는 항상 관찰자의 위치와 관점에 의존한다. 영화에서 이 도구가 주관적인 시점에 따라 다르게 해석되며 불안이나 공포를 유발한다는 것은, 객관적인 도구조차도 개인의 심리적 상태에 따라 그 의미가 변할 수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영화에서의 이 도구는 단순히 현실을 측정하는 객관적인 도구를 넘어서, 개인의 심리적 상태와 주관적 경험이 현실 인식에 미치는 영향을 탐구하는 상징적인 요소로 볼 수 있다.
의지해야만 하는 객관화된 가치의 붕괴, 즉 표준가치의 붕괴가 이 영화에서 표현된 진정한 공포중에 하나라는 사실이 드러났다. 측정장치의 시작은 우리의 눈이 아니라 가슴이라고 말하는 대사가 무척 인상적이다. 철사장치를 제대로 보려면 나무손잡이를 가슴에 가져가야 한다고 말한다. 가슴은 마음이 있고 나의 주관과 심리, 기분이 있는 곳으로 가슴에서부터 시작하고 눈으로 철사 안을 바라보아야 제대로된 진실을 마주할 수 있다는 점이 고가의 천체 망원경과 상반되는 측정 방식인 셈이다. 이 도구는 객관적 현실 인식과 주관적 감정 사이의 경계를 탐구하는 것이다. 전통적인 철학에서는 객관적인 인식이 진리에 접근하는 유일한 방법으로 여겨졌지만, 이 대사는 우리의 감정과 내면세계 역시 현실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것을 시사하고 있다.
영화에서의 '가슴에서 시작한 인식'은 현상학적 관점에서 볼 때, 외부 세계를 객관적으로 관찰하는 것이 아니라, 주관적 경험과 의식을 통해 그 세계를 해석하고 이해하는 과정을 나타낸다. 물론 클레어는 이것을 주체하지 못하고 공포의 늪으로 빠져들었고 저스틴은 도구를 통해서 아닌 온 몸의 신경을 통해서 직감하고 죽음을 받아들이는 존재로 구분되어졌다.
레오가 즉흥적으로 만든 도구와 마찬가지로 저스틴과 레오가 같이 만든 마법의 동굴도 이와 유사한 성격을 띈다. 지구종말로부터 지켜줄 동굴은 나무 몇 개로 새워놓은 빈약한 공간이다. 마법의 동굴이라 명명된 것은 단단한 지하벙커의 외피가 아닌 뼈대만 몇 개 남은 투명한 스크린과 같은 존재에 불과하다. 이 둘이 만든 마법의 동굴은 전통적으로 보호와 안전의 보호 기능이 상실된 취약성과 무력감을 나타낸다. 그리고 영화의 주제인 인간의 불안과 우울증, 그리고 임박한 재난 앞에서의 인간이 할 수 있는 무력감을 반영한 것이면서 동시에 종말을 앞둔 인간이 할 수 있는 최선의 방책이라고 볼 수 있다. 플라톤은 동굴 안의 사람들이 그림자를 실체로 오해한다고 했지만, "멜랑콜리아"에서의 동굴은 현실의 위협을 숨기거나 왜곡하지 않는다.
4. 시선주체와 타자와의 대결구도
라캉의 스크린와 응시이론을 멜랑콜리아 영화에 대입시키자면 지구로 향하는 멜랑콜리아 행성은 시선주체인 저스틴과 클레어를 향해서 오는 응시(gaze)이다. 중요한점은 그것이 서로 대응관계가 아닌 위로부터 내려오는 응시이면서 거부하거나 개인이 감당하기 힘든 규모라는 점이다. 이렇게 된다면 타자로부터 오는 응시로 인해 나를 감싸는 스크린이 파열되어 시선 주체안으로 그 응시가 들어와 주체에게 상처를 입히는 구조가 성립된다. 이는 지구 대기권 바깥에서 오는 응시가 지구를 감싸는 보호막을 손상시키는 것으로 사건이 벌어지는 영화 Mist(2007)에서도 사용되었던 것으로 이러한 응시는 타자로 존재하지만 개인이 감당하기 불가능한 거대타자가 된다. 거대타자에 대한 자세한 부분에 대해서는 다음 기회에 시선의 주체와 타자, 권력의 관계와 함께 다루기로 하겠다.
[그림] 뒤러, Sighting Grid, 1525, 판화
[그림] 뒤러, 〈원근법 시범〉 「측량법 상론(詳論)」의 삽화, 1952년, 동판화
뒤러가 제작한 위의 판화들을 보면 선원근법에서 모든 선들이 대상의 한 점에 모이는 것을 볼 수 있다. 하지만 이것을 라캉의 응시 관점을 더해 보자면 시선의 주체에서 시선이 나감과 동시에 사물에서 시선 주체에게 출발하는 구조이기도 하다. 여기서 시선은 단순히 보는 행위가 아닌, 대상과 주체 사이의 상호작용을 의미한다. 라캉에 따르면, '응시'는 관찰되는 대상이 주체에게 향하는 비가시적인 시선을 의미한다. 뒤러의 작품에서, 대상의 중심점에서 나오는 선들은 시선주체로 향한 응시가 된다. 이는 관찰자가 아닌, 대상이 주체성을 가진 것처럼 행동하는 순간을 나타내며, 이로써 관찰자와 대상 사이에 상호 역동적인 관계가 형성된다. 영화 멜랑콜리아 2부에서 클레어는 측정도구를 통해 행성을 응시했고 행성도 반대편에서 클레어를 응시한 셈이다. 다만 그 상호적인 관계가 대등하지 못했을 따름이다.
라캉의 '스크린' 개념은 현실을 재구성하는 매체로서의 역할을 한다. 그리고 뒤러의 선원근법은 이러한 응시 사이의 스크린 역할을 수행한다. 선원근법을 통해 현실은 재구성되고, 이 과정에서 주체와 대상 사이의 관계는 새롭게 해석된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뒤러의 선원근법은 단순한 표현 기법을 넘어서, 현실과 인식 사이의 관계를 재해석하는 도구로 작용하는 것이되고 영화에서 사용된 행성 측정 도구 역시 이와 마찬가지라고 볼 수 있다. 여기에서 시선의 주체가 타자(사물)와 대면할 때 발생하는 힘의 작용과 에너지의 불균형은 심리적 불안, 스트레스, 심지어 트라우마를 유발한다. 이는 시선의 주체가 단순히 보는 것에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보임과 동시에 보여지는 복잡한 상호작용을 경험한다는 점에서 비롯된다.
멜랑콜리아행성의 접근이 피할 수 없는 거대타자가 되는 가능성 중 하나는 바로 응시의 출발점이 하늘에서 내려온다는 점이다. 중력으로부터 묶인 시선의 주체는 위로부터 내려오는 응시들 비해 수동적일 수 밖에 없다. 내려오는 응시의 방향성은 시선 주체에게 힘의 균형을 깨지게 하여 커다란 심리적인 압박감을 동반한다. 시선의 방향성, 특히 위로부터 내려오는 시선은 기독교적 관점에서 권력과 경외의 상징으로 해석되기도 한다.
위로부터의 응시는 현대 전자정부에 들어서는 바로 인간이 만들어놓은 권력구조와 맞닿아 있기도 하다. 때로는 권력의 상징으로써 종종 권력 구조의 고착화를 수반하기도 한다. 이러한 시선은 상위 계층이나 권위 있는 존재가 하위 계층을 감시하고 지배하는 구조로 상징할 수 있다. 이탈리아의 철학자 조르조 아감벤은 이러한 분류를 통해 생물적 삶이 전부인 조에(Zoe)와 사회적 장치적 삶으로 지배당하는 비오스(Bios) 그룹으로 나누었다. 이러한 시선 구조는 불평등과 억압을 자연스럽고 정당한 것으로 여기게 하는 경향이 있다. 비판적 사고와 사회적 변화에 대한 저항을 야기하기도 한다. 동시에 경외의 대상으로써 받아들이는 주체도 가능하다. 어떻게 보자면 성당에 그려진 천정벽화가 앞에서 언급한 모든 족건에 최적화된 사례가 아닌가 한다. 하늘에서 내려오는 특정한 응시가 타자를 만들고, 시선 주체는 응시를 바로 보지 못하고 올려보거나 정수리로 받아야 한다. 만약 고개를 숙이면 응시가 뒤통수로 떨어지기도 한다.
[사진] 로마 성당의 한 벽화
여기에서 한가지, 개인자격으로서의 시선의 주체가 위로부터 내려오는 거부하기 힘든 타자로부터 보호받을 것인지, 아니면 몸이 부셔지고 파괴되고 공격받아 포획될 것인가에 대한 선택의 질문은 현대 사회의 기술적, 사회적, 그리고 문화적 맥락에서 중요한 의미를 가질 수 있다. 우리 머리 위에 늘 돌아다니는 인공위성을 생각해보면, 개인의 사생활과 자율성을 침해할 수 있는 위험을 내포한 개인정보와 감시체제, 광고, 미디어 심지어는 일상적 상호작용을 통해 개인의 생각과 행동에 영향을 주는 사회적 압력과 시선의 제약 환경들이 그 예가 되겠다. 인공지능의 발달은 인간의 시선을 모방하거나 대체할 수 있는 새로운 형태의 ‘인공시선’을 만들어 낼 것이다. 이러한 기술은 개인의 시선을 확장하거나 보완할 수 있는 잠재력을 가지고 있지만, 동시에 인간의 자유로은 시선과 인식을 왜곡하거나 대체할 위험을 내포한다.
멜랑콜리아 행성이 그린 궤도는 분명 실존한다기 보다 우리가 도구를 통해 설정한 인위적인 타자일 수 도 있고, 위에서 언급한 개인을 둘러싼 거대한 사회나 통치의 존재일 수 있다. 결국 죽음의 댄스는 이러한 의미에서 타자의 영향으로부터 완전히 보호받기 어려운 환경이나, 각종 외부 요인에 의해 파괴되거나 제한되는 위험을 가진 존재다. 개인의 시선과 자율성을 유지하고 보호하는 숙제는 인간문화가 존재하는 내내 다양한 멜랑콜리아 행성의 예상치 못한 궤적을 만나야 하는 숙명을 안고 살아갈 수 밖에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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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https://www.amazon.com/Star-Names-Their-Lore-Meaning/dp/04862107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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