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리 카사트의 어린시절
1868년 메리 카사트
메리 카사트는 1844년 미국 펜실베이니아 피츠버그(Pittsburgh)의 부유한 가정 환경 속에서 태어나 자랐다. 메리의 가족은 1660년대 미국에 정착한 프랑스 위그노 이민자의 후손이었다. 처음 미국을 떠나 유럽에 갔을 때가 메리가 7살 때로 이 시기 이곳에 정착하게 되며 프랑스어와 독일어를 배웠고, 여러 미술관과 갤러리를 방문하며 유럽의 문화를 일찍 접하게 된다.
여성 화가를 꿈꾸다
<메리 카사트, 만돌린 연주자, 1868> <메리 카사트, 발코니, 1872>
1885년에는 다시 펜실베이니아로 돌아왔는데, 당시 여성으로 드물게 전문 화가를 꿈꾸었던 메리는 1860년에 펜실베이니아 예술 학교에 입학하며 그림을 배웠다. 하지만 그곳에서의 교육에 회의를 느끼며 2년 후에 그만두었고, 1865년에는 다시 파리로 떠난다. 19세기 중반의 파리는 유럽에서 가장 아름다운 도시이자 인상주의가 꽃피며 예술의 중심지가 되었다. 하지만 그런 프랑스도 여성이 공립 예술 학교에 다니는 것도 금지되어 있었으며 예술가라는 직업을 갖는 것도 매우 드문 일이었다. 학교에 다닐 수 없었던 메리는 여러 화가를 통해 그림을 배운다. 당대 유명했던 화가 장-레옹 제롬(Jean-Léon Gérôme, 1824-1904)에게 그림을 배웠는데, 그는 신고전주의 화가로 신화나 성서와 같은 역사화를 주로 그렸지만 메리는 이에 큰 흥미를 느끼지 못한다. 메리는 다른 화가들처럼 루브르 박물관에서 필사를 위한 자격을 얻어 거장들의 작품을 필사하며 회화 기본기를 연마했다. 1868년에는 메리의 <만돌린 연주자, 1868>가 살롱전에 받아들여졌다. 이 작품은 메리의 초기 작품으로 후기 작품들과 대조적으로 아카데미 전통을 따르는 특징을 보여주고 있다. 이 시기 메리는 귀스타브 쿠르베(Gustave Courbet, 1819-1877)와 에두아르 마네(Édouard Manet, 1832-1883) 같은 화가들의 현대적인 작품을 보게 되는데, 이들은 전통적인 방식을 거부하는 악명 높은 화가들로 메리는 그들에게서 새로운 미적 취향을 발견한다.
1870년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이 발발하면서 메리는 다시 펜실베이니아로 돌아가지만, 1871년 유럽으로 다시 돌아와 런던, 파리, 토리노를 여행하고, 파르마에 머물며 코레조(Correggio, 1489-1534)를 공부한다. 그 후 스페인에서 프라도 미술관을 방문하고, 앤트워프에서 루벤스(Peter Paul Rubens, 1577-1640)를 연구하며 빛에 대한 감각과 색채에 대한 취향을 발전시킨다.
<메라 카사트, 투우사와 소녀, 1873> / <메리 카사트, 이다의 초상, 1874>
1872년에 그린 <발코니, 1872>는 다시 살롱에 받아들여진다. 그 외 메리의 <투우사와 소녀, 1873>와 <이다의 초상, 1874> 같은 작품들이 살롱에 전시되었다. 처음으로 에드가 드가(Edgar Degas, 1834-1917)의 관심을 끈 메리의 작품이 바로 이 마지막 초상화였다.
인상주의를 만나다
<메리 카사트, 파란 안락의자의 어린 소녀, 1878> / <메리 카사트, 진주 목걸이를 한 관람석의 여인, 1879> / <메리 카사트, 찻잔, 1880>
1877년 그녀의 마지막 작품이 살롱전에서 거부되자 드가는 메리에게 1879년 네 번째 인상주의 전시회에 참여하길 제안한다. 메리는 <파란 안락의자의 어린 소녀, 1878>, <진주 목걸이를 한 관람석의 여인, 1879>와 <찻잔, 1880> 등을 전시한다. <파란 안락의자의 어린 소녀> 속 아이는 안락의자에 기댄 채 목뒤로 손을 베고 피곤한지 지루한 표정을 짓고 있다. 그래서인지 아이의 모습은 자연스럽고, 옆에 있는 강아지도 안락한 실내에서 함께 낮잠을 자고 있어 편안함이 느껴진다. 초기 작품에 비해서 색감도 밝아졌으며 터치도 자유로운 것이 인상주의스럽다. 메리는 인상주의 그룹에서 편안함을 느꼈다. 특히 전시를 계기로 드가와 자주 교류하였고, 카미유 피사로를 존경했다. 그리고 인상주의 그룹에서 유일한 여성이었던 베르트 모리조와도 친구가 되었다.
<에드가 드가, 루브르에 있는 메리 카사트, 1880> / <에드가 드가, 카드를 쥐고 있는 메리 카사트, 1880-4>
메리는 드가와 가까이 지내며 정기적으로 같이 작업을 했고, 진정한 친구로 서로를 지지했다. 메리는 드가를 위해 여러 차례 모델이 되어주기도 했는데, 드가의 <루브르에 있는 메리 카사트, 1880> 작품 속 모습처럼 메리는 루브르 박물관에서 자주 시간을 보냈다. 그곳에서 메리는 작품을 필사하고 루브르를 찾은 예술가들과 교류했다. 이후 메리는 인상주의 전시에 정기적으로 참여하며 전통과 맞서는 예술가 동료들과 함께하게 된다. 메리는 1880년과 1881년 인상주의 전시회에 참여했으나, 드가를 따라 1882년 전시는 참여하지 않았다. 그러다 1886년 8회 전시에 다시 참여했다. 1886년에는 뉴욕의 폴 듀랑-루엘(Paul Durand-Ruel) 갤러리에서 미국 최초의 인상주의 전시회에도 참여하며 인상주의를 알리는 등 중요한 역할을 한다.
여성의 삶을 담다
메리 카사트의 판화작품들
메리는 다른 인상주의 화가들과는 다르게 초상화를 많이 그린 화가였다. 베르트 모리조처럼 여성들의 모습이나 어린아이들을 담았다. 기법적으로는 1890년 방문했던 일본 판화 전시는 메리의 예술에 큰 변화를 주었는데, 그러면서 판화를 이용한 작품을 제작하기 시작했다.
<메리 카사트, 물통과 대야가 놓인 테이블 앞의 여자와 아기, 1889> / <메리 카사트, 녹색 배경 앞의 엄마와 아기, 1897> / <메리 카사트, 목욕하는 아이, 1893>
메리는 베르트 모리조와 다르게 평생 독신으로 자식 없이 지냈지만, 실내에서 여성들과 아이들의 모습을 담았다. 특히 1800년대 후반부터 1900년대 초반까지 시기 동안 메리의 가장 아름다운 초상화들이 그려졌다. 메리는 그녀의 절친한 동료였던 에드가 드가가 자주 사용했던 재료인 파스텔을 자주 사용했는데, 특히 <물통과 대야가 놓인 테이블 앞의 여자와 아기, 1889>에서 드가의 영향이 보인다. 의자에 앉아 아이를 안고 있는 엄마 표정이 무척 피곤해 보이며, 손을 물고 있는 아이도 곧 잠에 들것처럼 보인다. 사랑스러운 내 아이를 돌보는 일이 항상 즐거울 수는 없을 것이다, 당대 19세기를 살아갔던 여성들은 가정이라는 제한적인 공간 안에서 육아를 오로지 혼자 전담해야만 했다. 19세기 이전에도 어머니와 아이라는 주제는 전통적으로도 자주 다뤄졌던 주제였다. 라파엘로 같은 르네상스 화가들의 종교 성화에서 자주 보였던 성모자상 속 마리라와 예수의 모습은 한없이 아름답고, 마리아 또한 한없이 자비로운 어머니의 모습이다. 하지만 메리 그림 속 그림들은 위대한 모성을 비추기보다는 여성의 일에 집중하고 있는 모습이다. <목욕하는 아이, 1893> 그림 속에서 여성은 아이를 무릎에 올려놓은 채 아이의 발을 씻겨주고 있다. 아이를 꼭 잡고 있는 어머니의 모습에서 모성이 느껴지지만, 아이의 목욕은 매일 일상적으로 이루어지는 일로 특별함은 없어 보인다.
메리는 당대 예술가들과의 교류를 지속했지만, 공적인 활동이 불가능했던 여자의 신분이었기에 카페와 같은 야외에서 활동이 어려웠다. 메리의 그림을 통해 당시 한정적이었던 여성의 공간적 영역이 드러나고 있는데, 이런 점은 당시 같이 활동했던 여성화가 베르트 모리조 그림에서도 드러나는 특징이다. 또 여성들의 모습이 남성의 시선이 아닌 여성의 시선으로 담겼다는 점도 비슷하다. 메리와 베르트는 주변에서 볼 수 있는 일상 속 현실 여성의 모습을 자연스럽게 녹여냈기에 남성 화가들처럼 여성을 바라보는 욕망의 시선도 담지 않았다. 여성이라는 이유로 공간과 주제 선택의 제약은 있었지만, 이들은 새로운 시선으로 남성 화가들과는 다른 시각을 담으며 새로운 장르를 만들었다.
메리의 말년
메스닐-테리부스 / 프랑스 Mesnil-Théribus에 있는 가족 전용의 납골소(출처-위키페디아)
1915년 메리는 여성 참정권 문제에 적극적이었던 미국 수집가 로이신 헤이브마이어(Lousine Havemeyer, 1855-1929)가 참정권 운동을 지지하기 위해 뉴욕의 갤러리에서 개최한 전시에 참여하는 등 행보를 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19세기 후반 메리 카사트와 같은 여성 화가들은 여성 문제를 적극적으로 들춰내지는 못했다.
메리의 그림에도 자주 등장했던 여동생 리디아는 1882년 사망했으며, 아버지는 1891년에 사망했고, 어머니는 1895년에 그리고 남동생 가드너는 1911년에 사망했다. 이러한 죽음으로 인한 깊은 외로움은 그녀에게 영향을 미치며 우울증에 시달렸다. 또 당뇨병과 백내장으로 인해 시력을 잃어갔던 메리는 1914년에 그림 그리기를 멈췄고, 1921년에 영구적으로 시력을 잃게 되었다. 미국인 화가 메리 카사트는 1926년 6월 14일에 프랑스에서 사망하며, 그녀가 30년간 살았던 메스닐-테리부스(Mesnil-Théribus) 샤토에 있는 가족무덤에 묻힌다.
남성 중심의 미술계에서 당당히 화가로서 입지를 쌓으며 남성들이 보지 못한 여성들의 세계를 담아냈던 메리 카사트. 전통적으로 다뤄졌던 주제인 ‘모성애’는 성스러운 성모자상을 넘어서 메리의 그림을 통해 19세기 현실 여성들의 일상 속으로 파고들어 왔다.
메리 카사트 연대기
- 1844년 미국 펜실베이니아 피츠버그(Pittsburgh) 출생 - 1851년 유럽에 정착하지만, 1855년 다시 펜실베니아로 돌아감 - 1860년 펜실베이니아 미술 아카데미에 입학했지만, 2년 만에 그만두게 되며 1865년 다시 파리로 돌아옴 - 1868년 <그의 만돌린 연주자>가 살롱에 받아들여짐 - 1870년 전쟁으로 펜실베이니아로 가지만, 1871년에 다시 유럽으로 돌아옴 - 1877년 살롱에서 마지막 작품이 거절됨 - 1879년 제4회 인상주의 전시회 참여. 이후 1886년까지 정기적으로 전시에 참여함 - 1904년 프랑스의 레지옹 도뇌르(Légion d'honneur) 훈장 - 1926년 사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