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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직’으로 기록될 수밖에 없었던 한 여성 화가 이야기, 베르트 모리조(Berthe Morisot, 1841-1895) | ARTLECTURE

‘무직’으로 기록될 수밖에 없었던 한 여성 화가 이야기, 베르트 모리조(Berthe Morisot, 1841-1895)

-인상주의 시대 가려진 여성 화가들 1-

/People & Artist/
by 김가희
‘무직’으로 기록될 수밖에 없었던 한 여성 화가 이야기, 베르트 모리조(Berthe Morisot, 1841-1895)
-인상주의 시대 가려진 여성 화가들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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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IGHLIGHT


지극히 남성 중심이었던 19세기 프랑스 예술계에서 부단히 ‘화가’로서 자신을 입증해야 했던 베르트 모리조
그림 속은 고요하고 평화롭지만, 그녀의 삶은 끊임없는 투쟁이었다.

베르트의 어린시절

 


베르트 모리조 사진



1841년 프랑스 중부 도시 부르주(Bourges)에서 지방 행정관인 아버지 밑에서 태어나, 1850년대 파리 근교 도시인 파시(Passy)에 정착했다. 베르트 부모님은 예술에 관심이 많았다. 그녀의 어머니는 로코코 미술의 거장이었던 장 오노레 프라고나르(Jean Honoré Fragonard, 1732-1806)의 증손녀였고, 아버지도 아마추어 화가로 활동 했다. 그랬기에 베르트와 그 언니들도 어린 시절부터 문화적인 환경 속에서 자라났고, 특히 언니 에드마와는 미술교육을 받으며 함께 화가를 꿈꾼다. 하지만 이런 교육은 직업적인 화가가 되기 위한 교육은 아니었다. 당시는 여성이 직업을 갖는 시대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여성 화가를 꿈꾸다

   


<장-바티스트 카미유 코로, 빌 다브레, 1865> / <베르트 모리조, 우와즈 강의 기억과 오베르의 옛길, 1863>



당시 프랑스는 여성이 보자르와 같은 공립 예술 학교에 다니는 것도 예술가라는 직업을 갖는 것도 허락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두 자매는 주로 가정 교습으로 그림을 배웠는데, 스승으로는 전통적인 신고전주의 화풍을 추구했던 화가들보다 보다 자유로운 화풍의 장-바티스트 카미유 코로(Jean-Baptiste Camille Corot, 1796-1875)를 좋아했다. 베르트는 그때부터 풍경화에 몰두하며 코로처럼 더 선명한 색채와 눈에 보이는 붓 터치를 사용하기 시작했다.


1864년 두 자매의 작품은 처음 살롱전에 전시된다. 특히 베르트의 <우와즈 강의 기억과 오베르의 옛길, 1863>은 코로의 영향이 두드러진다. 하지만 그녀들의 그림은 크게 주목받지는 못한다. 1868년에도 언니와 함께 또 살롱전에 출품하지만, 에밀 졸라를 제외한 비평가들에게 무시당한다. 그만큼 이 시대는 여성 화가에 대한 불신이 높았다.


설상가상 1869년 언니 에드마는 결혼으로 더 이상 함께 그림을 그릴 수 없게 되었고, 베르트는 좌절한다. 그렇게 결국 화가의 꿈을 이루지 못하고 결혼해 버린 언니 때문에 베르트는 큰 슬픔에 잠겼지만, 베르트는 포기하지 않고 자신의 길을 걸었다.



마네와의 만남

   


<에두아르 마네, 제비꽃 장식을 한 베르트 모리조, 1872> / <에두아르 마네, 발코니, 1868>



두 자매는 우연히 루브르 박물관에서 에두아르 마네(Édouard Manet, 1832-1883)와 마주쳤고 이후 사교모임에서도 친분을 쌓게 된다. 에두아르 마네는 당시 19세기 프랑스 화단에 큰 논란을 일으키며 비난받았다. 하지만 그런 마네의 진가를 알아보았던 베르트와 에드마는 그를 존경했다. 이때부터 베르트의 그림들은 마네에게 영향을 받으며 전통적인 관습에 얽매이지 않은 자유로운 양식으로 변해갔다.


그러던 어느 날 베르트는 마네 그림 속 모델을 서게 되는데 이후에도 그녀는 마네를 위해 여러 번 모델이 되어주었다. 그런 이유로 사람들은 베르트를 화가 보다는 ‘에두아르 마네의 모델’로 기억하게 되었다.


 

<베르트 모리조, 모리조 부인과 그녀의 딸, 퐁티옹 부인, 1869-70> / <베르트 모리조, 트로카데로에서 바라본 파리의 전경, 1872> / <에두아르 마네, 1867년 만국박람회 전경>



1870년 살롱전에 전시되었던 <모리조 부인과 그녀의 딸, 퐁티옹 부인, 1869-70>은 베르트가 어머니와 언니 에드마를 모델로 그린 그림이다. 특히 마네는 이 그림에 많이 개입했는데 이런 간섭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베르트는 그림을 살롱에 보내기 전에 여러 번 다시 손질했다. <트로카데로에서 바라본 파리의 전경, 1872>은 베르트가 특히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아 했다. 이유는 언니 에드마가 이 그림이 마치 마네의 그림처럼 보인다고 했기 때문이었다. 베르트는 마네처럼 보이고 싶지 않았다.



마네를 넘어서 인상주의의 주역이 되다


 

<베르트 모리조, 나비 사냥, 1874> / <베르트 모리조, 요람, 1872>



점점 베르트는 마네의 어두운색에서 벗어나게 되며 동료 예술가들에게도 인정받게 된다. 특히 에드가 드가가 베르트의 그림을 좋아했다. 초록빛이 지배적으로 사용된 <나비 사냥, 1874>은 마네로부터 완벽하게 벗어났다는 걸 보여주었다. 베르트의 대표 작품이기도 한 <요람, 1872>과 함께 두 작품은 언니 에드마와 딸들의 모습을 그린 것이다. 명확한 선 대신 매우 속도감 있고 자유로운 터치를 사용했고 밝은색 사용이 두드러진다. 베르트는 이때부터 자신만의 섬세한 아름다운 표현이 가능해졌다.



<베르트 모리조, 로리앙 항구, 1869>



시대의 흐름에 역했던 1873년의 살롱은 결국 모네, 피사로, 시슬리, 드가 같은 진보적인 예술가들의 마음을 돌아서게 했다. 이들은 독립 예술가 단체인 무명의 화가, 조각가 및 판화가 연합(Société anonyme des artistes peintres, sculpteurs et graveurs)을 결성했고, 베르트는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합류했다. 이때부터 베르트는 인상주의 전시회(1874년과 1886년 사이에 8회에 걸쳐 개최된다)에 참여한다. 전시 카탈로그에 따르면 베르트는 유화 14점을 포함한 20개 작품을 전시했다.


결정적으로 베르트는 살롱에 출품하는 것을 포기하고 인상주의 전시회에 참여했지만, 마네는 참여하지 않았다. 그렇게 베르트는 인상주의 전시에 처음으로 참여한 유일한 여성 화가가 되었다.


첫 번째 인상주의 전시회는 큰 스캔들을 일으켰다. 전시를 본 사람들의 비난이 쏟아졌고 사람들은 이 예술가들을 미친 사람 취급했다. 언론에서는 이 여성 화가를 비난했으며 매춘부라는 소리까지 들어야 했다. 


  

<에두아르 마네, 부채를 든 베르트 모리조의 초상, 1874>



1874년 12월 베르트는 에두아르의 동생, 외젠의 구애 끝에 결혼하게 된다. 마네는 같은 해 가족이 된 베르트를 부채를 들고 있는 초상화로 담았다. <에두아르 마네, 부채를 든 베르트 모리조의 초상, 1874> 그림을 보면 왼손에 끼워진 약혼반지가 보인다.


외젠은 좋은 남편이었다. 외젠은 베르트의 작업 활동을 열심히 지지했고, 그렇게 남편의 외조를 받아 베르트는 딸 육아를 위해 쉬어갔던 해만 빼고 인상주의 전시에 전부 참여했다.


 

<베르트 모리조, 부지발 정원에 있는 외젠 마네와 딸, 1881>



딸 줄리와 외젠은 베르트 그림 속에 자주 등장하게 되었다. 이렇게 베르트는 가족, 인물, 풍경 등 자신의 위치에서 담을 수 있는 소재를 화폭 안에 담아내며 동시대 어떤 화가보다도 따뜻하고 아름다운 그림을 그려냈다. 남성 중심의 프랑스 예술계에서 여성이 보는 시각으로 여성의 일상적 소재를 담은 것이다.



베르트의 말년

 


파리 Passy에 위치한 베르트 모리조의 무덤 ‘외젠 마네의 미망인’이라 적혀있다. (출처-위키페디아)



1895년 베르트는 54세라는 나이에, 병에 걸려 숨을 거두게되었다. 베르트는 화가로 많은 작업 활동을 이어왔지만, 그녀의 사망진단서는 그녀의 직업을 ‘무직(sans profession)’이라 기록했고, 파리의 공동묘지에는 그녀를 ‘외젠 마네의 미망인 베르트 모리조’라고 적어 놓았다.


지극히 남성 중심이었던 프랑스 예술계에서 부단히 ‘화가’로서 자신을 입증해야 했던 베르트, 그림 속은 한없이 아름답고 평화롭지만, 그녀의 삶은 끊임없는 투쟁이었다.

마네는 살롱에서 벗어나지 못했지만, 베르트는 아니었다. 여성 예술가에 대한 제약이 많았던 사회 속에서 결혼 후에도 포기하지 않고 화가로 삶을 살아냈던 그녀를 이젠 19세기 가장 급진적이었던 인상주의 운동의 주역으로 기억해야 하지 않을까.


베르트 모리조 연대기

- 1841년 프랑스 중부 부르주(Bourges) 출생

- 1850년대 파리 근교 파시(Passy) 정착

- 1857년 조프루아-알폰스 쇼카르네(Geoffroy-Alphonse Chocarne)와 앵그르의 제자인 조제프-브누아 기샤르(Joseph-Benoît Guichard)로부터 미술 교습

- 1860년 장-바티스트 카미유 코로( Jean-Baptiste Camille Corot)로부터 미술 교습

- 1864년 언니 에드마와 함께 처음으로 살롱에 참가. 베르트는 1869년과 1871년을 제외하고 10년 동안 매년 살롱에 출품

- 1868년 에두아르 마네와의 만남

- 1869년 언니 에드마의 결혼

- 1874년 인상주의 전시회에서는 유일하게 여성으로 참가. 1879년을 제외하고 1886년까지 그룹의 모든 전시에 참여. 같은 해 12월 마네의 동생인 외젠 마네와 결혼

- 1876년 화상 폴 뒤랑-루엘(Paul Durand-Ruel)이 개최한 런던에서 첫 번째 전시 참여

- 1878년 딸 줄리 출생

- 1892년 남편 외젠 사망

- 1895년 사망. 파시 공동묘지에 안장

- 1896년 뒤랑-뤼엘 갤러리에서 줄리가 모네, 르누아르, 드가, 말라르메의 도움을 받아 베르트의 회고전 개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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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김가희_프랑스에서 공부 후 현재는 한국에서 강사와 문화 기획자로 활동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