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딜롱 르동 <퀴클롭스, 연대가 각기 다름, 1898~1910 사이>
"어? 안 행복한데? 왠지 슬퍼 보이는 그림이다."
그런가요? 이 그림은 가끔은 아주 행복해 보이고 가끔은 조금 슬퍼 보이는 그림입니다. 프랑스 상징주의 화가였던 오딜롱 르동(1840~1910)의 <키클롭스, 1898~1910>입니다. 키클롭스는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눈이 하나인 괴물입니다. 퀴클롭스는 '원형의 눈을 한', '둥근 눈 circle-eyed'의 의미여서 이마 한가운데 눈이 있습니다.
신화는 사람과 사람 사이의 이야기라 여러 버전이 있지요. 오딜롱 르동의 '키클롭스'가 오디세우스에서 한쪽 눈이 찔린 그 '폴리페무스'인지는 분명치 않습니다. 어쨌든 오비디우스의 <변신이야기>에 나오는 이 키클롭스는 바다의 신 네레우스의 딸이자 시칠리아 바다의 님프인 '갈라테이아'를 사랑했습니다. 갈라테이아는 가수였다면 노래로 부르고 싶을, 화가였다면 그림으로 그리고 싶을 만큼 아름다웠습니다. 거칠고 우락부락한 키클롭스도 그녀 앞에 서면 한없이 부드럽고 작아졌습니다. 키클롭스는 외모에 신경을 썼고 파도와 싸우지도 않았습니다. 바람에 머리를 빗기며 그녀의 귀에 닿도록 피리도 불었습니다.
하지만 갈라테이아는 미남 청년 아키스를 연모했습니다. 마르지 않는 샘물처럼 '사랑'은 쉴 새 없이 솟아났고 인근 꽃과 초목들 사이에 둘의 발자국을 남겼습니다. 갈라테이아와 아키스는 손을 꼭 잡고 다니며 사랑의 시를 읊었습니다.
어느 날, 키클롭스는 꽃밭에서 사랑을 나누고 있는 둘을 발견합니다. 그의 발아래엔 질투심만이 들을 수 있는 육중한 바위가 있었고 그는 연적을 향해 그 바위를 던졌습니다. 아키스는 바위를 피하지 못했습니다. 갈라테이아는 아키스를 강으로 변신시켰습니다. 시칠리아를 흐르는 아키스강은 강과 바다가 만나 물살이 세다고 합니다. 못다 한 사랑이라 더 애닯고 더 센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무엇이 행복해 보이냐구요? 그리고 무엇이 슬퍼 보이냐고요?
'사랑'을 하고 있는 키클롭스의 표정은 행복하고 슬픕니다. 그녀를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행복하고 그 바라보는 방향이 같지 않음이 더러 슬픕니다.
나잇살이나 먹은 제게 '사랑'이라는 단어는 '후우~'하고 입김을 불면 드러나는 차창의 낙서 같은 것이 되었습니다. 대부분은 잊고 지내다 과거 어느 날의 흔적처럼 문득 되살아나는 것입니다. 그런데 놀이터를 가면 그 오래전 사랑이 살아납니다. 그때의 사랑은 풍선처럼 가볍고 명랑하고 부푸는 것이었습니다. 높이 높이 날아오르는 것이었습니다. 물론 작은 바늘 하나에도 터질 수 있다는 건 생각지 못했지요.
비 오는 날, 놀이터에서 키클롭스를 떠올립니다. 키클롭스는 바위를 던져 자신이 하고픈 말을 대신했습니다. 과거의 어느 날로부터 날아온 바위의 무게를 감당하지 못하는 전, 침묵합니다. 이제 놀이터가 말을 할 차례입니다.
빛멍
돌이켜보아도 무례한 빛이었다. 최선을 다해 빛에 얻어맞고 비틀거리며 돌아오는 길이었다. 응고되지 않는 말들, 왜 찬란한 자리마다 구석들이 생겨나는가. 너무 깊은 고백은 테두리가 불안한 웅덩이를 남기고. 넘치는 빛들이 누르고 가는 진한 발자국들을 따라. 황홀하게 굴절하는 눈길의 영토를 따라. 지나치게 아름다운 일들을 공들여 겪으니 홀로 돋은 흑점의 시간이 길구나. 환한 것에도 상처 입는다. 빛날수록 깊숙이 찔릴 수 있다. 작은 반짝임에도 멍들어 무수한 윤곽과 반점을 얻을 때, 무심코 들이닥친 휘황한 자리였다. 눈을 감아도 푸르게 떠오르는 잔영 속이었다. -이혜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