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요의 바다>, 홍시야, mixed media on canvas, 40X26, 2020
초록이 어느 곳은 더 진하게. 어느 곳은 더 묽게 뭉쳐있다. 하얀 선들 뒤에서 투명하지만, 꽉 들어찬 밀도의 초록은 배경으로 물러선다. 자잘하게 두 공간 사이를 부유하는 하얀 선들은 살아 있는 무언가의 흔적, 혹은 뿌연 기억처럼 잡히지 않는 안타까움으로 가늘어진다. 낙서 같은 끄적거림, 땅속을 날고, 허공을 걸어가며, 물속을 헤엄치는 펜 자국이 소곤거리고 있다. 정신의 자동기술 같은 유려한 흐름이 아이의 순진함에 기대 원형原形의 그림을 이룬다. 색의 겹침 속에 초록이 짙어지면 생각도 깊어진다. 빈 곳이 많아서 스스로 바람을 일으키는 초록의 세상은 눈부시다. 투명하다. 아무리 옷을 겹쳐 입어도 속을 들킬 것만 같은, 그대로 내어 보여주는 투명이다. 펜은 자유롭고 붓질은 우연과 필연에 얽혀 있다. 작가는 수줍게 웃었고, 그 수줍음이 일상을 비일상으로 만든다. 쌓아두었다 폭발하는 에너지가 아니라 비우고 거르고 흘려보내 다시 시작되게 하는 처음의 힘이 작가 속에서 하나의 작은 세상으로 만난다. 나는 그릴 수 없는, 바라볼 수만 있는 세상이다.
<고요의 바다> 부분, 홍시야, mixed media on canvas, 40X26, 2020
하루하루를 routine과 ritual 사이에서 줄을 타고 있었기에 애당초 nomad의 삶은 꿈조차 꾸기 민망하다. 일상에서의 탈출조차도 규칙이 되고만, 정착이 체질인 붙박이장 같은 매일이었다. 여행은 ‘불안’을 키우고, ‘불안’은 ‘위험신호’를 번쩍거리면서 기세등등하게 ‘두려움’과 어깨동무를 했다. 시작은 인간이 하고 마무리는 신이 한다고 했던가. 일단 일은 저지르고 봐야 한다. 결과를 위한답시고 주판알만 튕기다간 답도 나오지 않을 미궁에 갇혀 길을 잃을 것이 뻔했다. 어쩔 셈이었을까? 아니 어떤 셈을 하고는 있었나? 눈에 밟히는 그림 한 점. 나는 그 그림이 무한정 갖고 싶었다. 그래서 작품 하나를 만나기 위해 제주로 갔다.
작품의 완전한 효과를 느끼려면 그 존재와 함께 있어 봐야 한다.
-<예술과 풍경>, 마틴 게이퍼드, 을유문화사
누군가에겐 자를 대지 않고서는 그을 수 없는 선線 같은 것이 있다. 분명 알고 있고, 할 수도 있다고 생각하지만 실상 단 한 번도 실행해 보지 못한 어떤 것. 너무 손쉬워서, 그래야 할 이유조차 못 느껴서, 미처 한 번도 생각해 보지 않아서 도전 목록에서 자연스럽게 사라져 버린 어떤 것 말이다. 모방은 가능하지만 스스로는 해낼 수 없는 다른 영역 말이다. 타인의 눈에 그 경계는 보이지 않는다. 미묘하게 달라지는 조류의 흐름처럼 경계는 몸을 담근 사람만이 온전하게 느낄 수 있다. 모두가 가능하다고 말해도 정작 자기 자신은 그렇지 못하다는 것을 지나치게 잘 알고 있는, 불가능한, 불가항력의 범주. 그때의 나는 그 경계 위에서 바들거리고 있었다. 해결할 수 없는 영역을 굳이 부여잡고 자신의 무능력을 비관하며 일부러 못난 짓을 하고 있었다. 나의 탈출구는 그 초록 속에 있었다. 내가 할 수 없다는 것을 명확하게 짚어주는 따끔함.

<무제>, 고지영, 캔버스에 유채, 20X20, 2022
한쪽 뒤꿈치를 살짝 들어 올린 여인의 버선발처럼 날렵한 매무시가 뾰족하다. 다른 한쪽은 그 날렵함을 지지하려는 듯 두껍게 바닥을 디디고 있다. 반반으로 나뉜 세상처럼, 오히려 맑게 떠오르고 있는 흰 접시가 조명처럼 반짝인다. 춤을 추기 위한 첫 스텝을 닮았고, 출발선에 선 주자의 준비 자세를 닮았다. 처음의 결기. 마음이 동여맨 어떤 매듭 같은 것,
... 나는 칼과 맞닿았을 사과의 단면을 상상한다. 자신을 해칠 수도 있는 것과 빈틈없이 살을 맞대고 버텨낸 결기가 나를 깨운다. 서늘한 조우라고나 할까. 내가 살을 부비며 이겨낼 수 있는 것이란 무엇일까. 저리 싹둑- 잘리고도 태연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공기 방울 하나 없이 밀착된 서늘함, 완전하게 이겨낸 시간, 그리하여 단아해진 삶, 좋구나, 좋다.
두 번째 그림을 들이고 부른 축가의 한 구절이다. 잠시 마음에 품었던 그림과는 전혀 다른, 단박에 나를 멈춰 세운 그림이었다. 하나 반. 버선코처럼 날렵하게 들린 사과 조각은 ‘하나’이고 반쪽으로 잘린 사과 조각은 ‘반’이다. 더 작게 잘린 사과 조각 ‘하나’가 절반으로 잘린 ‘반’보다 더 온전한 ‘하나’다. 내겐 작가의 사과가 가슴에서 빠지지 않는 매운 얼음알갱이처럼 와 박혔다. -절대, 그레고르 잠자의 등에 박힌 그 사과는 아니다-

<무제>, 고지영, 캔버스에 유채, 20X20, 2022
고지영 작가의 그림은 SNS에서 처음 만났다. ‘단아’하고 ‘따뜻’했다. 두터운 식빵을 닮은 둔중한 집들과 어슴푸레한 몇몇 형상들이 기억 속의 낯익은 냄새를 풍겼다. 더욱이 사과 그림이란, 아직 갈변되지 않은 사과는-절대 갈변되지 않겠지만- 뽀얀 속살을 드러내며 접시 위에 가지런하게 놓여 나를 부르고 있었다. 의미를 부연하는 형용사도, 감각을 희롱하는 조사도 필요 없는 간결함이 보였다. 어떤 수사도 필요 없는 상태의 고요함이 돋보였다. 투박하고 검은 무쇠 칼날과 침묵의 싸움을 겪고 얻은 속 고갱이. 꼭 저렇게, 변명 없이 맞이하고 싶은 시간을 꿈꿨다. 두려움도 불안도 속으로 삭이고, 말끔하게 다듬어져 푸르스름해진 결기를 보이고 싶었다. 꼭 그래 보고 싶은 한순간이 여기 있다.
소장자의 집
마음먹고 한 부분을 덜어내서 하나의 세계 앞에 이름을 붙여 세웠다. 내 소비의 한쪽 벽이 그림으로 채워진다. 몇 번의 고민 속에 내 행위를 돌아봤지만, 부끄러운 호기로움과 숨길 수 없는 민망함에도 불구하고 두 점의 작품을 끌어안았다. 가끔은 벽지 보듯 스쳐 지나가고, 때로는 일부러 사로잡혀 생각을 빼앗긴다. 한 사람의 단 두 점뿐인 작품이 너무 다른 성향이라 두서없다 비웃을지 모른다. 매 순간 달랐던 나였지만 시간을 길게 늘여봐도 여전한 나다. 그 순간에 가장 필요했던 말, 내 결핍을 보여주는 증거가 바로 내가 소유한 그림이다. 아니, 나를 소유한 그림이다. 나의 결핍을 직시하게 하고, 내 고통의 이유를 가감 없이 받아쓰게 만들어 거짓으로 빠져들지 못하게 만들었던 나의 그림이다. 나를 소유한 그림 두 점은 내게 경계를 감각하게 만들고, 꼭 어느 시간, 그렇게 서 있고 싶은 시간의 모습을 보여준다. 돌아서야 보이는 내 뒤에서 그림은 나를 헤아리며 나를 알아간다. 소유가, 내가 누구인지를 말한다.
“ 이것이 너의 맘을 울리드냐. 진정 부자 느낌 난다. 컬렉터라니. ”
친구의 카톡이 웃는다. 나, 부자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