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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르넬 문드럭초, <주피터스 문> - 유로파의 상자 | ARTLECTURE

코르넬 문드럭초, <주피터스 문> - 유로파의 상자


/Art & History/
by 박정수
코르넬 문드럭초, <주피터스 문> - 유로파의 상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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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IGHLIGHT


영화는 난민의 현실을, 그리고 헝가리의 현실을, 이를 토대로 '유로파'의 현실을 비춰낸다...

코르넬 문드럭초, <주피터스 문> - 유로파의 상자

 

·서론 및 감독 소개

난민에 대한 쟁점은 영화에서 다양한 각도로 고찰이 이루어지고 있다. 작년 개봉한 <120BPM>으로 유명한 로빈 캉필로 감독의 경우 <이스턴 보이즈>를 통해서, 난민에 대한 인도주의적 접근이 분명 필요하되, 그들이 사법체계를 뒤흔들거나 인간의 생명을 유린하는 비인간적인 행태를 보이게 되면 불가피하게 그들에 대한 엄중한 처벌이 필요함을 역설하였다. 캉필로 감독이 보다 온건한 입장에서 난민문제를 다뤄냈다면 이탈리아의 조나스 카피그나노 감독의 경우 <지중해>라는 작품을 통해, 남부 이탈리아의 대지주들이 그들의 값싼 노동력을 착취하기 위해 난민문제에 대해 방관하고, 결국에는 이러한 부르주아지가 방관한 채 두 프롤레타리아트의 집단의 충돌로 이어짐을 고발하였다. 그리고 이렇게 유럽으로 유입되어 오는 난민의 여정에 주목한 경우로 지안프란코 로시 감독의 <화염의 바다>를 꼽을 수 있는데, 생지옥에 다름 아닌 조국을 떠나 목숨을 걸고 유럽으로 향해오는 그 참상을 리얼하게 전달하였으며, 더욱이 만연하게 퍼져가는 난민혐오와 폭력에 대해 암시적으로 그 실태를 드러내기도 하였다.

 

이렇게 화두가 되고 있는 난민문제를 헝가리의 코르넬 문드럭초 감독 또한 다룬다. 우리나라에선 <성녀 요한나><화이트 갓>이 그의 작품들 중 유일하게 소개되었다. <성녀 요한나>에서는 뮤지컬 장르에 오페라의 양식을 빌려와 의료윤리를 저버린 채, 제도 및 이데올로기의 유지만을 위해 힘쓰는 관료체제를 비판하였다. 그리고 <화이트 갓>에서는 헝가리의 반려견의 순종만을 위한 근친을 장려하는 우둔한 정책을 비판하는 색채가 담겨있었으며, 타 생명체에 대한 존중이 없는 인간의 비인간화를 유기견이라는 테마로 고발해냈다. 즉 문드럭초 감독은 지속적으로 자국의 현실을 비춰내는 작품을 연출했다고 볼 수 있으며, 이는 장르적인 연출과의 결합을 통해 보다 다수의 감상자들이 대중적으로 접근하게끔 만든다. 이런 그가 난민 문제를 다룬다. 유럽 내에서 난민에 대해 가장 극렬한 반대 입장을 취하고 있는 헝가리이기 때문에, 헝가리의 감독이 난민에 대해 어떤 관점을 취할지 호기심이 이는 바이다.

 

·주목할 만 한 연출

감독은 본 작품에서도 장르영화의 연출을 빌려온다. 본 극에서 가장 눈에 띠는 연출은 아무래도 아리안이 공중을 나는 기적을 행하는 과정을 비추는 현란한 러닝 숏들이다. 구도는 거꾸로 뒤집히거나, 아리안이 비행하는 장면을 카메라도 같이 360도로 회전하며 촬영한다. 이러한 숏들은 <매트릭스>와 같은 고전이 된 저명한 Sf장르의 문법을 빌려온 것이라 할 수 있다. 더욱이 중력을 거스르며 경이롭게 비행하는 아리안의 모습이나, 그의 주변부 또한 중력을 잃고 그를 중심으로 행성을 연상케 하는 물방울과 같은 구체들이 빙글빙글 돌며 하나의 작은 우주를 이루는 신묘한 현상들을 포착하는 것 자체로도 흥미롭다. 허나 더욱이 흥미로운 건 빙글빙글 자유롭게 회전하는 카메라로, 이는 본 극의 제목인 '목성의 위성'이 공전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본 극에서 아리안을 빗대는 것이 목성의 갈릴레오의 위성들 중 생명체의 가능성이 엿보이는 유로파다. 이런 유로파 자체에 상응하듯 중력을 거스르고 공간을 제어하는 힘을 가진 아리안에 카메라와 극의 주변들이 공전하는 듯한, 이러한 힘을 긍정하고 경이롭게 포착하는 카메라가 눈에 띤다. 허나 아리안을 둘러싼 상황은 결코 아리안을 유로파로 두지 않는다. 아리안은 생명체의 가능성이 없는 가니메데나 이오가 될지도 모른다.



이렇게 아리안이 유로파가 아닌, 생명의 가능성이 전무한 죽음에 상응하는 위성이 될 수 도 있다는 것은 대단히 현실적인 차가운 연출로 표명된다. 본 극은 위와 같은 Sf장르의 현란한 연출에만 경도되지 않는다. 이러한 Sf의 감수성은 척박하고도 황량한 현실과 결합한다. 이러한 현실성은 아리안이 중력을 거스르고 비행하며 그의 주변에만 공간에 영향을 주는데 그칠 뿐, 그 이상의 현실을 개혁할만한 실제적인 무력이 부재했다는 것과도 연관될 것이다. 위와 같은 연출과 비행하는 아리안의 형상은 블록포스터 장르의 영웅들을 연상케도 하지만, 아리안은 지속적으로 실제적인 문제들에 가로막히는 일상의 인물이자, 그 지위는 결국 난민에 다름 아니기 때문이다. 또한 이러한 리얼리즘과의 결합은 비단 아리안의 현실뿐만 아니라 '유로파'의 현실에도 결합되는데, 극 중에서도 '탈출할 수 없다'라는 발언이 직접적으로 표현된다. 이는 난민에게도, 그리고 자국의 현실과 미래를 암담하다 느끼는 헝가리인들에게도 마찬가지이다. 그 어느 곳으로도 향할 길 없는 이들의 암담함을 익스트림 클로즈업을 필두로 하여 구축해낸 갑갑한 프레임을 통해서 드러낸다. 인물들을 포착하는 프레임은 비좁지만, 인물들은 그 프레임 바깥으로 뛰쳐나가기 대단히 힘들다. 인물들을 시점 숏을 필두로 하여 롱 테이크를 주축으로 치열하게 쫓기 때문이다. 더욱이 거친 핸드 헬드가 사용되어, 현실성을 더욱 강화하거나, 난민들의 탈출 및 아리안이 처하는 과정의 긴박함에 상응시키기도 한다. 한편 이러한 좁은 프레임은 기적을 일삼는 아리안을 롱숏으로 포착하여 극적인 대비를 이루며 해방감 및 희망을 부여하기도 한다.

 

·영화를 통해 바라보는 현실

이러한 현실적인 형식들로 영화는 난민의 현실을, 그리고 헝가리의 현실을, 이를 토대로 '유로파'의 현실을 비춰낸다. 우선 난민의 현실이다. 영화의 오프닝은 아리안을 필두로 한 시리아 난민들이 위험천만한 시리아를 벗어나 목숨을 걸고 유럽으로 이주하는 장면들이 포착된다. 이러한 과정 속에서 철창 속의 닭과, 난민들의 위상은 동일시해져 그들을 비인간적으로 바라보는 서구의 태도가 드러난다. 이러한 그들은 줄곧 어둠 속에서 비춰지며, 일말의 빛 또한 국경방위군의 총성으로서 그들에게 일말의 희망도 포착하지 않는다. 더욱이 철창에 갇혀있던 닭처럼 난민들의 수용소 및 움막촌은, 철창으로 그들이 격리되어 있거나, 최소한의 거주요건도 마련되어있지 않는 등 그들의 비참함이 적나라하게 표현된다. 이러한 난민들의 탈출 과정은 2016년도에 공개된 난민과 관련한 다큐멘터리 영화인 <화염의 바다>의 리얼리즘에 필적한다. 그리고 시리아 내전이 일어나기 이전 그들의 단란한 삶은 오직 아리안의 발화를 통해서만 전해들을 수 있으며, 전쟁이 앗아간 선진국의 일반 시민들 못지않았던 일상에 대한 그리움과 쓸쓸함이 묻어난다.

 

그리고 영화는 아리안이 다다른 헝가리의 현실을 비춘다. 아리안이 유럽의 경계에서 마주하게 되는 것은 과격한 경찰인 라슬로가 자신에게 발사한 총격이다. 감독은 이러한 총격 이후 스탄의 일상을 비추며, 고양이가 새를 그저 재미삼아 학살한 장면을 비춰낸다. 난민들을 향한 서구의 과격한 태도가, 새의 유약함을 발견하여 이를 잔인하게 학살하며 유희하는 잔혹한 폭력 그 자체에 다름 아니라는 듯 말이다. 그리고 스탄은 자신은 종교를 믿지 않고 '헝가리의 부활'을 믿는다고 말한다. 이는 헝가리에 불어 닥친 극우적인 정치현실을 느끼게 하며, 이러한 파시즘적 태도가 라슬로와 같은 이들의 폭력성을 부추기고 있다고 볼 수 있다. 한편 헝가리의 일반 시민들은 정치에 무관심한데 테러리스트로 오인된 아리안의 얼굴이 매스컴에 대서특필되고, 그러한 아리안이 자신들 옆에 지나다녀도 전혀 알아채지 못한다. 이러한 정치, 사회에 대한 무관심에서 비롯되어, 파시즘에 선동되어 물들어가는 광기를 지적하는 것이리라.

 

이러한 정치에 대한 냉담함은 그들의 지금 당장의 현실을 살아가는 것조차, 대단히 녹록치 않기 때문이랴. 감독은 화폐 물신주의를 지적하는데, 돈만 있으면 자신의 비인간적 행태도 용서받을 수 있을 것처럼 자본에 집착하는 스탄을 통해 강조되며, 아리안도 결국 헝가리에 이르러 그러한 원리를 체화하고 만다. 이러한 화폐 물신주의가 그들의 정신을 지배하나, 이러한 욕망을 충족할 만 한 헝가리의 경제적 기반이 탄탄한 것도 아니다. 그래서 스탄과 같은 고위관료라 볼 수 있을 이들도 타락해있는 상태이다. 몇 푼만 주어진다면 자신의 정체성과, 직업적인 신념을 저버린다. 이렇게 당장의 수평선에 놓여있는 자본만을 쫓는 헝가리인들은 하늘을 보지 않는다. 결말에서 부다페스트의 많은 시민들이 아리안의 기적을 마주하기 이전, 아리안의 기적을 마주한 여인은 이러한 자본의 원리 속에서 자유로운, 더 이상 잃을 것 없는 유색인종이었다.

 

·아리안의 능력

이러한 헝가리, 더 넓혀서는 유럽의 암담한 현실을 과연 아리안이 행하는 기적을 통해 구원해낼 수 있을까. 영화는 스탄이 아리안을 두고 천사라 명명하는 것처럼, 종교성이 강조된다. 허나 그러한 절대자를 상정하는 일신론적 종교들은 대단히 부정적으로 묘사된다. 무신론을 지향하는 스탄의 태도를 통해서 드러나는데, 특히 스탄이 신이 있다면 이 세계를 대단히 무심하게 바라보고 잔인한 것이라 말하는 발언을 통해 공고화된다. 더욱이 이슬람이 주를 이루는 시리아에서 넘어온 아리안의 종교성은 거의 없다. 즉 일신론적 종교를 따르지 않는 이들을 통해서 화합이 이루어지며, 분열을 야기하는 일신론적 종교에 대해서 비판을 표하지만, 한편 그들은 자본을 숭배하게 된다. 그리고 오직 하나의 절대자를 상정하여 포용 대신에, 분열과 갈등을 야기하는 종교의 형태는 비판하지만, 종교가 이 공동체에 이바지하는 연민어린 태도와 인간성으로의 인도는 긍정한다. 이는 부정부패를 일삼던 스탄의 태도가 점차적으로 개화되어가는 과정을 통해 드러나며, 이는 스탄이 아리안을 종교적으로 생각하며 그를 긍정하면서 일궈낸 변화이다. 그래서 천사로서 강림한 아리안은 어떤 절대자가 아니라, 동시대가 잃지 말아야할 시대정신으로서 인간성의 현현이요, 이 같은 인간성은 희망에 대한 최후의 보루일 것이다.

 

한편 이렇게 스탄이 아리안을 종교적으로 여기긴하지만, 아리안이 행하는 기적을 통해 일어나는 사건들은 죄다 죽음이다. 이는 스탄의 사리사욕을 채우기 위해 종교가 도구화되어 악용되는 과정을 비추는 것이라 볼 수 있다. 더욱이 그 죽음 중 일부는 백인우월주의에 대한 유색인종의 정념적인 복수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아리안은 자신의 능력에 죄책감을 느끼는 태도를 보이기도 하니 말이다. 허나 그 죽음들은 한편으로 필요악이기도 하며, 공동체의 진보에 이바지한다. 아리안의 기적을 보고 죽은 대상들은 여성착취적인 태도가 암시적으로 드러나는 늙은 부르주아지와 백인우월주의자, 그리고 자신의 죽음을 열망하는 늙은 노파였다. 이들의 죽음을 통해 늙은 부르주아지가 착취하고 있던 자본의 해방 및 그에게서 해방된 여성의 해방을 통해 성 평등을 엿볼 수 있을 것이다. 스탄이 들르는 술집의 바텐더가 게이인 것처럼, 문드럭초 감독은 본 극이 일깨우는 희망에 성 평등 및 해방에 대한 담론도 섞어 놓는다. 그리고 백인우월주의는 타파되어야 마땅한 것으로, 이 또한 공동체의 종양을 제거하는 작업이다. 그리고 인간다운 삶을 영위할 수 없자 죽음을 갈구하는 노파의 경우 존엄사에 대한 논쟁이 섞여 들어간다. 그저 목숨만이 붙어있는 삶이 과연 그 사람의 인생을 존중하는 태도인지에 대한 담론이, 그리고 이러한 세태의 변화에 맞춰서 변화해나가야 할 종교의 역할에 대해서 재고하게 만든다.

 

·테러리즘

이러한 죽음들은 필요한 죽음이요, 특히나 노파에게선 구원과도 같았으리라. 허나 극 중에선 불필요한 죽음 또한 포착되는데 바로 이슬람 원리주의자들의 테러리즘이다. 그 테러리스트들은 둘은 난민들에게 신분증을 위조하여 거기서 부를 착취하는 난민으로 섞여 들어간 원리주의자들과, 그들에게 동화된 헝가리의 국민으로 추정되는 공무원이다. 이러한 테러리스트들은 신분증을 제어할 수 있는 본인들의 위치를 악용하여, 아리안과 그의 아버지에게 테러혐의를 뒤집어씌운다. 정작 아리안의 아버지는 그 테러로 인해 희생된다. 이를 통해 극단으로 치닫은 일신론적 종교에 대해 비판적인 태도를 취하고, 난민에 섞여 들어가 구분하기 어려운 테러분자이긴 하지만 모든 난민을 테러리스트로 규정하는 태도에 대해 우려를 표한다. 그러한 난민들 틈에 아리안이라는 기적이 숨어있던 것과 극적으로 대비된다. 무엇보다 그 테러리스트들은 자신들의 자결을 순교라 여길 테지만, 본 극에서 진정한 순교의 형태로 느껴지는 것은 아리안을 위해 희생하는 스탄의 모습이다.

 

·악한의 회개

스탄은 아리안의 부친의 사망과 마주하고 아리안을 평생 보듬을 꺼라 약속한다. 그리고 자신의 의료사고로 인해 피해를 입은 유가족들에게 진심어린 사과를 건네며, 회개하가고 인간적인 행태로 변모해간다. 이러한 그는 아리안을 체포하러 온 라슬로를 저지하고 아리안 대신 자신이 총격을 맞으며, 아리안이라는 이 시대의 기적과 희망을 위해 자신이 희생한다. 그 고결하고 숭고한 대의를 위해 자신의 희생을 여의치 않은 그 순교는 아리안의 기적을 부다페스트의 시민들 모두가 마주하는 기적으로 이어져 그의 희생은 활짝 만개한다. 그리고 이는 헝가리를 넘어서 유로파, 즉 전유럽적으로 그리고 전세계적으로 퍼져나가야 할 희망의 정신이자, 잃지 말아야 할 인간성에 대한 표명이다. 앞서 언급했다시피 아리안에게서 세계를 극적으로 구원할 만 한 무력은 보이지 않는다. 단지 이 세계에 어떤 희망을 가져다 줄 거란 천사의 형상이 비행하는 그를 통해서 간접적으로 엿보인 것뿐이며, 오히려 아리안의 진정한 능력은 그러한 천사의 형태로 스탄을 회개시키고, 백인과 유색인종의 화합을 보여준데 있다. 그래서 아리안이라는 영웅의 능력은 극적인 무력이 아니라, 관념적인 인간성과 선함 그 자체이다. 결국 그러한 인간성의 현현에 라슬로는 비로소 총을 내려놓으며 폭력을 포기하고, 비로소 헝가리인들은 하늘을 바라보며 현재 뿐만 아니라 희망의 미래를 바라보고, 차가운 잿빛으로 변해있던 인간성을 회복한다.

 

·한계 및 정리

문드럭초 감독은 자국의 반려견 정책에 반대하는 이전 작품에 이어서, 자국 및 유럽, 그리고 전세계적으로 확대되어가는 파시즘의 물결에 강력히 반대하는 현실반영적인 목소리를 본 작품에서도 높이고 있다. 분명 유의미한 메시지지만 한계가 없는 것은 아니다. 테러리즘에 대해서는 보다 조심스러운 접근이 필요했을 것이며, 특히나 테러리스트들의 신분에 대한 상세한 설명이 부족했다. 이러한 불충분한 설명은 늙은 부르주아지를 묘사하는 과정에서도 마찬가지다. 부르주아지에 대한 설명이 부족하다보니, 그의 죽음은 단지 아리안의 위험성을 묘사하는데 그칠 위험을 내포한다. 그리고 영화의 이미지 자체만으로도 충분히 강렬하고 와닿는데, 지속적으로 직설적으로 스탄의 입을 빌려 표명하려는 감독의 메시지가 과하게만 느껴진다. 허나 이러한 한계들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본 극의 정신을 잃어서는 안 된다. 술래잡기를 하는 듯 무언가를 찾아나서는 중동계 꼬마아이, 미래를 짊어질 그 아이가 찾아나서는 바는 과연 무엇일까. 그것은 아마 희망이리라. 아리안이라는 천사가 지닌 인간성, 그렇게 우리의 최후까지 잃지 말아야 할 인간성 속에서 엿볼 수 있는, 판도라의 상자에 다름 아닌 바로 그 희망을 포기해선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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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수_영화, 미술, 전시와 같은 시각문화 분야를 향유하고 비평합니다.